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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9

LNCK 2022. 11. 17. 12:32

[Ep 9.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 좋습네다 | - YouTube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9                                   <지난 글 보기

   

최광 선교사, 중국에서의 북한선교 간증기

 
◑제4장 두만강은 홍해 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에 있나니 

♣첫 3기 사역장 시작

모세선생이 체포된 후       (*2기 졸업생으로 파송받아 연변에서 학생 모집 중 북송)   
다른 선생들은 서둘러 학생모집을 끝내고, 서안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권능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교사님, 최순교 선생이 제일 먼저 학생들을 모집하고 어제 서안으로 떠났습니다. 

 

연변에서 서안까지 2천 킬로가 넘는 거리를, 기차 타고 오느라 꼬박 이틀이 걸렸다.

순교 선생이 서안에 도착하여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 전화번호는, 학생모집을 끝내고 연변을 떠날 때 권능 선생이 알려주었다. 

그는 기쁨에 들떠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선교사님 저 순교입니다. 학생들을 데리고 막 도착했습니다. 
이젠 어떻게 합니까?'      *현재 한국에서 목회 중, 최원 목사

이른 아침 역전에 나 그를 만나니, 오랜만에 아빠를 다시 만나는 아들처럼 
그는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다. 

'아휴 선교사님, 다른 때는 맘 대로 돌아다녀도 무서운 거 하나도 모르겠던데,
이번에는 얼마나 무서운지 몸이 다 쫄아 듭디다. (*이동 중 학생들 체포될까봐)
그래도 학생모집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선교사님! 하하하' 

나는 귀한 학생들을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고 먼저 기도드리고 
그를 얼싸 안으면서 물었다. 

'기차 안에서는 그래도 다 무사히 왔어요?' 

'아휴~ 말도 마십시오. 오다가 신분증 검사를 한 다섯 번은 했습니다. 
그때마다 내 정말 죽어라고 얼굴을 쳐박고 기도하지 않고 뭡니까? 
하나님 제발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학생 때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덜렁거리면서 왔는데 
야 이거 선생이란 거, 이거 진짜 보통 부담되는 거 아님다. 
선교사님, 아 글쎄 여기까지 오는데 한 10년은 감수 한 것 같습니다. 
(*신분증 검사를 전체 다 하는 게 아니라, 덤성덤성 함)

야 참, 선교사님, 이거 학생 때 권능선생(사역장 책임자) 하는 거 보고는 
그냥 편안하게 앉아서 틀만 차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이제 며칠 해 봤더니, 이거 이거 영 힘들고.. 헐한 거 아님다.'  *쉬운 일 아님다

그의 수다는 그칠 줄 몰랐다. 
학생 모집 후,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곧장 학생들을 데리고 내려오는 참이라 
몹시도 지쳤지만, 얼굴에는 기쁨과 보람과 긍지로 가득 차 있었다. 

계속 수다를 늘어놓는 순교선생과, 그와 함께 온 학생들을 데리고 
역전 포장마차로 갔다. 배가 많이 고플 형제들에게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으라고 하니, 형제들은 나를 낯설어 하면서도 
이것저것 많이 먹었다. 

그리고 순교선생에게 돈을 주어, 조선족 형제(통역)와 함께 집을 구하게 했다. 
순교선생이 집을 구할 동안, 학생들은 나와 함께 
서안시의 중심 공원인 흥경 공원에 있었다. 

순교선생과 함께 형제들은 모두 8명 이었다. 
-철도 기관에서 사로청 간부로 일하다 온 신소광 형제,
-어디 체육관의 축구 선수였던 최효선 형제,   *보안상
-권투선수 였다는 키 작은 조봉희 형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원에 해당하는 북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굶어 죽어 중국으로 도망쳐 온 김기철 형제, 
-장철남 형제, 
-노주석 형제, 
-조선족 신재록 형제 
-조선족 이호열 형제 

이들은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우리는 잔디밭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먼저 각자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신소광 임다... 나는 조봉희 이라고 함다.' 

 

그런데 자기 소개를 하는 곳이 전부 이런 식이었다. 
절대로 자기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던 사람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자기 이름이라고 소개하는 이름도, 진짜 이름이 아니었다. 

한 번은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임광호 라고 하기에 
그 이름을 기억했다가, 후에 그 형제를 보고 내가 그렇게 부르자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이름이 임광호 가 아닌가?' 하고 묻자 
그 형제가 도리야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참 선교사님도.. 사람이 그렇게 순진해 가지고 어캐 삽니까?
그래, 정말 내 말을 믿었슴까? 
그럼 선교사님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함까?' 

'내가 처음 선교사님 만나서 뭘 믿고, 내 이름을 알려 줍니까?' 

나는 가짜 임광호 형제의 말을 듣고, 놀라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그저 웃고 말았지만 
그때부터는 북한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말할 때, 그저 임시 호명으로 만들어 말함을

알게 되었다. 

 

그런 북한사람들을 볼 때면, 언제나 그랬지만,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제 막 사역장에 온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 낡아빠진 걸레짝 같은 옷을 걸치고 
30~ 40대의 청장년이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너무도 왜소했다. 

세상의 온갖 시련과 고초를 다 겪어서인지 
얼굴에는 벌써 주름살이 깊게 패이고, 얼굴색도 검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더욱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마치 어느 쪽에서 사나운 맹수가 달려 나올지 몰라 
늘 긴장하며 주위를 살피는, 고양이눈 같은 이들의 눈동자였다. 

나는 맛있는 과자며, 사탕을 잔뜩 사다가 잔디밭에 풀어놓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어서 
나도 과자를 우적우적 같이 씹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간식을 먹는 동안에도, 나와 이야기 하는 동안에도 
계속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아저씨는 누기요?' 
장철남 형제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면서, 나에게도 한 대 내밀었다. 

간식을 실컷 먹고 이젠 배가 좀 부른지, 나에게도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 소개를 하기 전에, 나는 먼저 그의 손에 있던 담배갑과 
그의 입에 물려 있는 담배를 빼내면서 말했다. '담배 또 있어요?' 

그러자 그의 눈이 갑자기 매섭게 치켜 떠졌다. 
'그거 밖에 없습니다. 이런 염치도 다 있어? 
한 대만 피우지, 왜 남의 것까지 다 가져갑니까?' 

그의 말에는 개의치 않고, 나는 다른 형제들에게도 물었다. 
'다른 분들에게는 담배 더 없어요?' 

김기철 형제와 몇 명의 형제가 의아해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나에게 주었다. 
모두들 놀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담배는 피우지 못합니다. 여기는 담배 피우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자 철남형제가 벌컥 화를 냈다. 
'아저씨 누굽니까? 왜 남의 담배까지 다 뺏어 가고 그럽니까? 
아이 씨, 내 담배 돌려주소!' 여차하면 공격할 기세였다.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어,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모두 들으세요. 나는 한국에서 온 최광 선교사 라고 해요. 
이 사역장을 책임지고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러자 철남 형제와 다른 형제들 모두,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옷차림이 후줄근한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지 
철남형제가 못마땅한 어조로 물었다. '한국 사람 정말 맞습니까?' 

그래서 다시 나에 대해 소개했다. 
'예, 나는 한국 사람이 맞고, 여러분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최순교 선생의 선생입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나는 여러분 같은 탈북자를 섬기는 사람인데, 북한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중국 사람보다, 한국 사람보다, 여러분들을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함께 하는 동안에 서로가 잘 생활해 보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직 사역장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몇 가지 얘기했다. 
보통 북한 학생들이, 같은 탈북자인 자기 선생보다 
한국 사람인 나한테 더 잘 보이려고 넘겨 짚는 게 있기 때문에 
같은 탈북자라도, 자기 선생에게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성경통독에 대해, 처음에는 안 들리고 무슨 말인지 몰라도 
처음 몇 달만 잘 참으면, 나중엔 편안하게 듣고 볼 수 있다고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종이 한 장씩 나눠주면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베껴 쓰고 외우게 했다.

영문도 모르고 못 마땅해 하면서, 몇몇 형제들은 간신히 배껴 썼다. 
언제 숨겨뒀었는지 담배를 꺼내 물고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하는 
철남형제를 보니 가관이었다. 

순교선생은 우리가 있던 흥경공원 주변에 사역장을 구해 놓고 
저녁시간이 한참 늦어서야 돌아왔다. 

'아이고 숨차라, 아이고 힘들어.. 선교사님, 이거 나 힘들어 죽겠습니다. 
내 이제 알겠습니다... (책임자가 힘들다는 것을)' 

순교 선생은 뭔가 중대한 발견을 한 사람처럼 말했다. 
'뭘요?'
그가 뭘 말하려는지 훤히 알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그때 선교사님이 왜 우리를 파송 시키면서, <행복 끝 고생 시작!> 을 
외치게 했는지..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목이 터지게 꽥꽥 소리치게 했는지.. 
인제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순교 선생, 아직 멀었어요. 
그 말의 의미를 알려면 말이에요. 
아마 사역이 끝날 때쯤 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 아직 긴장 풀지 마세요!' 

나의 말을 듣던 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활짝 펴졌다. 
'에이 그래도 일 없습니다. 힘들면 힘들라지요 뭐.. 그래도 좋슴다. 해낼 수 있슴다. 
할렐루야!' 

나는 순교선생과 함께 학생들을 데리고 사역장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에게 행장을 풀게 하고, 순교선생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그는 학생을 모집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학생모집을 위해 파송된 선생들이 겪는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우선은 연변에 흩어져 있는 북한사람을 찾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사람들은 가능한 한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서 지내기 때문이다. 
선생들은 그들을 찾아, 깊은 산속 벌목장이나, 탄광, 농장 등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깊은 산골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북한사람들을 찾았다고 해도 
'학생'을 찾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선생들도 일하러 간 것처럼 행동하고, 그들 주위에서 함께 살면서 
그 사람에 대해 탐색해야만 했다. 

탈북자로 행세하는 북한 보위부 특무들이 많기 때문에 
보위부 특무 인지 아닌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씩 함께 생활해 봐야만 
알 수 있었다.

특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성경 공부를 할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한 달을 실컷 일하고도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어렵게 학생모집을 다 끝내고 
권능선생에게 보고하면, 
권능 선생은 중국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차비와 사역지점을 선정해 준다. 
이때야 선생들은 사역할 도시를 알고, 학생들을 거기로 데리고 온다. 

중국에서는 철도 공안들이 기차 안에서 수시로 신분증 검사를 하기 때문에 
이것도 북한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큰 난관이었다. 

만약 거기서 적발되면, 좁은 기차 안이라 어디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체포되었다가, 결국 북한으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생고생하며 모집한 학생들과 자신이 
단속에 걸려 체포되지 않기를 바라며 
선생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렇게 간신히 목적지까지 오면, 위험한 구간은 다 통과한 셈이다. 
그러면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선생은 
긴장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쓰러질 정도로 맥이 풀려버린다. 

하지만 곧바로, 사역장으로 사용할 집을 구하러 다녀야 한다. 
집을 구할 때, 중계소를 통해 소개비를 주고 구하면,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선생들은 소개비를 아끼려고, 자기 발로 직접 뛰어다니며 셋집들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일주일 내내 돌아다녀도, 적당한 집을 못 구하기도 했다. 
집을 구하면, 이번에는 조선족 형제에게 부탁하여 계약서를 쓰고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계약한 집을 사역장으로 꾸미려면, 책상 걸상 침대 등 여러 가재도구를 구입하는
일부터, 방음 장치를 설치하여 통독실을 꾸미는 일 등등 
선생이 해야 할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우리의 제 3기 사역은 이렇게 순교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6월 경

순교선생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학생들이 나에 대해 하던 말에 
나는 웃음이 절로 났다. 

학생들은 순교 선생이 집을 구하고 흥경공원으로 오자, 그에게 물었다. 
'순교선생, 저 사람 정말 한국 사람 맞어? 
어디 농촌에서 온 촌뜨기 같아서 영~ 못 알아보겠다. 
그래도 핸드폰 가지고 다니는 걸 봐서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저 사람, 왜 우리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새삼스레 나의 옷차림을 살펴 보았다. 
2년 전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입었던 무릎 나온 청바지에 
사역장에 나뒹굴던 허름한 점퍼 하나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왔다. 
신발도 다 떨어져 너덜거렸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이제 3기 사역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계속 세워지는 3기 사역장 

학생 한 사람 한 사람 모집하는 일이 힘들어지자 
권능선생의 제자 선생(2기생)들이, 권능선생에게 제안했다. 

'권능선생, 편하게 조선족 교회에서 모집해 놓은 사람들 데리고 옵시다.' 

권능선생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안 됨다.' 

'아니 왜 안됩니까? 솔직히 교회에 있는 사람들 데리고 오면 
이미 성경 공부하던 사람들이라, 초벌 힘도 안 들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거 없지 않습니까?'

선생들은 자기들이 모집해 온 학생들 중에 
교회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은 권능선생이 무조건 (입학을) 거절하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연변에는 갈 데 없는 북한사람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면서 
성경공부를 시키는 조선족교회 들이 많았다. 

그러나 가능하면, 이들 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 사역장에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북한 보위부에서 우리와 같은 사역장을 알아내기 위해 스파이를 파견할 때 
주로 교회에 먼저 파견하기 때문에 
혹시 이들이 보위부 스파이는 아닌지.. 우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대부분은 
한국 선교사들과 여러 교회들에서 주는 돈의 맛을 들인 사람들이었다. 

어려운 훈련을 요구하는 우리 사역장 같은 곳에는, 절대로 있으려고 하지 않았고 
설령 데려왔다 해도, 며칠 못 가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곤 했다. 

결국 선생들은, 한 사람 한 사람 힘들게 찾아다니며, 학생을 새로 모집해야만 했다. 
감사한 것은, 연길 산골에 권능선생 아버지 김아바이 댁에
공부할만한 북한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또 김아바이는 북한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꼭 연락처를 남기게 해서 
우리 선생들에게 연결해 주셨다. 


장만식 아바이가 학생모집을 끝내고, (*58세 늦깎이라 아바이로 호칭)
서안으로 출발했다고, 권능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장만식 아바이가 모집한 학생들은 대부분 김아바이 댁에서 기거하던 사람들이었다. 
(*김아바이는, 권능선생의 아버지로, 국경 근처 중국 지역 깊은 산속에 
움막을 치며 살고 있었는데, 탈북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어서, 조선족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을 많이 도와주고, 또 임시 거처도 제공하며 살고 있었음)

내가 새벽에 기차역에 마중 나갔을 때, 장아바이는 학생들과 함께 
역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나를 본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나를 껴안으며 반갑게 인사 했다. 
'우리 선교사님, 마중 나오셨소? 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내 소개를 했다. 
'자 자 모두 주목, 이 분은 말이다. 한국에서 오신 최광 선교사님이요. 겉보기에는 
우리처럼 거지같아도, 우리 사역을 총 책임지고 일하시는 큰 사람이니까니 
인사들 하오!' 

'잘들 오셨어요.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학생들은 이런 나의 인사는 처음인지,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침식사를 시키려고, 장아바이와 학생들을 데리고 역주변 식당으로 갔다. 
장아바이는 오랜만에 나와 마주앉아 식사하면서 
흥분해서 순교선생처럼 말을 많이 하셨다. 

'선교사님, 아이고 이거 사역이라는 게 이거 만만한 게 아니군요.
아 글쎄 그거 학생 하나하나 모집한다는 게 얼마나 무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던지 
글쎄 참 그리고 또 기차에서도 거 중국 공안들 때문에 얼마나 긴장하고 무섭던지.. 

글쎄 기차타고 오는 3일 동안 꼬박 긴장해서, 한 잠도 못 자고 말았구먼요'

'예, 장선생이 오신다고 연락 받고, 저와 가족들이, 그리고 전체 사역장에서 
무사히 오시라고 많이들 기도했어요. 다들 무사히 와서 감사한 일이죠.' 

'근데 그 하나님이 정말 묘합니다. 

글쎄 그 공안들이 차근차근 신분증을 검열을 하면서 오다가도 
우리 학생들 앞에 와서는, 눈이 딱 얼어버린 것처럼 딱 지나가는 거 아닙까? 
야 그거 진짜 신기합디다! 할렐루야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나 정말 감사하오. 
글쎄 내가 나이가 몇이요? 60이 다 된 놈이, 벌써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어야 했는데 
그 글쎄 하나님이 날 살려주겠다고.. 공부도 시켰지, 구원도 해주셨지,
거기에다 이렇게 나를 북한선교사로 까지 만들어주셨다 아닙니까? 
나 정말 하나님 생각하면, 감사해서 울기만 함다오! 

선교사님, 나 이제 쟤들을 데리고 열심히 해 보겠소. 
난 이제 사역하다 힘들어 죽어도 상관없다오. 죽으면 순교 아닙니까? 할렐루야! 
내가 이제 뭐가 더 맺힌 게 있어서 몸사리겠소? 아니요!'

장만식 아바이는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손으로는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나중에 순교함)

연세 많은 장아바이는 멀리까지 걸어가기가 힘들었는지,
역 부근에 집을 임대해 놓고 사역장을 꾸렸다. 

그가 데려온 형제들은 
최노아 
유에녹
정칼빈 형제 등 모두 7명이었다. 

이 중에 유에녹 형제는, 1년 전에 권능선생 팀 학생으로 모집되어 
제남으로 오다가, 기차 안에서 다른 3명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 북송된 형제였다. 

북한으로 끌려간 후, 중국에서 교회를 다녔느냐는 보위부원들의 물음에 
'교회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가, 몽둥이로 머리와 온 몸을 구타당해 
정신까지 잃는 등 모진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곧게 자리 잡아
철창 속에서도 매일 수십 번씩 속으로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그러다가 다른 감옥으로 호송되던 중, 기차에서 탈출하여 중국으로 재탈북 하였고 
다시 권능선생 아버지를 찾아갔다. 
이번에 학생으로 오기까지 꽤 고생을 많이 한 형제였다. 


▲장아바이가 서안으로 온 다음에는 성근 선생이 학생 모집을 끝내고 
중국의 남방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를 제남으로 보냈다. 

내가 서안으로 오는 선생들을 수습하는 동안
산동성 제남 쪽은 박주환 선교사가 수습해 주기로 했었다. 
(*연길에서 제남까지는 1,700킬로)

성근선생은 친형제인 이광수, 이윤수 형제 
유난히 키가 큰 박에녹 형제, 조복화 형제, 조선족 최빌립 선생 까지 
다섯 명의 형제를 모집해 왔다. 

이 중에서 빌립선생은 권능선생 사역장에서 1년간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권능선생은 그를 선생으로 세우지 않고, 성근선생의 보조역할을 맡게 한 것 같았다. 
그가 조선족이고, 나이도 어리고, 또 사역장에서 함께할 조선족(통역자)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내려온 선생은 정용철 선생이었다. 
그는 13세 된 딸 은혜와, 11세 된 아들 봉구도 함께 데려왔다. 

그가 사역장에 있는 동안, 부인이 두 아이와 함께 연변에서 살다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그만 중국사람에게 시집을 가 버렸다.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아이들이 있을 곳이 없어 데리고 온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정선생의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정용철선생은 서안시 북쪽 지역에 집을 임대하고 사역장을 잡았다. 
그가 데려온 형제들은, 인민군 상사 출신인 김예진 형제, 
중국인 아내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김주명 형제 등 6 명이었다. 

김주명 형제도 우리 사역장에 들어오기 위해 애를 많이 쓴 사람이다. 
그가 김아바이 댁에 있을 때, 사역장에 들어오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자,
김아바이가 출타한 사이에 몰래 방에 들어가
전화번호부에서 권능선생 호출기 번호를 찾아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몇 개월을 기다려, 이번에 정용철선생 팀 학생으로 같이 오게 된 것이다.

권능선생 사역장 선생들이 학생모집을 마치고 새로 사역을 시작하자 
사역장이 많이 늘어났다. 

(*2000년 4월, 권능선생 팀에서 파송된 선생들은 
장만식 아바이, 정모세, 정용철최순교(한국에 와서 최원 목사됨), 
조선족 최빌립, 조선족 최원초, 김성근(한국에 와서 목사됨), 강석환 선생까지 
모두 8명 이었다.)  *밑줄은, 위에서 사역장 꾸려서 3기 사역 출범
 

당시 서안에는, 
-파송을 기다리는 익두선생 사역장의 선생들 
-권능선생 사역장에서 남은 김권희, 김누가, 강기홍 선생들의 기거하던 사역장, 
-바울선생이 떠난 후 남은 이용섭, 박다윗, 이빌립, 김명윤 선생들이 있던 사역장,

(*바울선생은 2기 사역 후, 술을 못 끊어 스스로 떠남)  *밑줄은 책임자

-그리고 새로 세워진 최순교 선생 사역장, 
-장만식 선생 사역장, 
-정용철 선생 사역장까지 모두 여섯 개나 되었다. 

제남에는 이제 막 세워진 성근선생 사역장이 있었다. 

 

이제 곧 익두선생, 권희선생, 욥섭선생의 사역장에서 선생들이 파송되면 
사역장은 적어도 15개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1차로 파송한 권능선생 사역장 선생들이 다 돌아왔기에 
2차로 익두선생과, 용섭선생 사역장 선생들을 파송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강석환 선생은 
심양쪽에서 학생들을 모집하기에 
연변에는 그 즈음에 우리 선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먼저 익두선생 사역장으로 갔다. 
'파송 준비들 하세요. 내일 파송할 겁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우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현수선생이 비장한 각오로 씩씩하게 말했다. 
'선교사님 잘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흥분되어 떠드는 선생들을 진정시키고 
권능선생 사역장 파송 때처럼 
파송지에 나가서의 활동 원칙들과 주의사항들을 반복해서 알려 주었다. 

익두선생 사역장에는 
유칼빈선생, 김예진선생, 이현수선생, 홍만식 선생, 홍춘신 형제, 김사무엘 형제 
조선족 안선생이 있었다. 

이들 중 15세 밖에 안 된 김사무엘 형제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의논 끝에 집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충신형제도 18세라, 사역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는 이번 기회에 심양으로 가서, 자기를 돌봐 주시던 분들을 만난 후에 
다시 와서 공부를 계속 하겠다고 하였다. 

다음은 홍만식 선생이었다. 
그는 나이도 많고 준비도 되었지만,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만식 선생, 아직 담배를 못 끊고 사역할 수 있겠어요?'
그는 부끄러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자코 앉아 있기만 했다. 

'만식 선생, 이제부터 당장 담배를 끊을 자신이 있어요?' 
'선교사님,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저는 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김권희, 김누가, 강기용 선생들이 모여있는 사역장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사무엘, 충신, 만식 선생을 제외하니 
학생모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유칼빈선생, 예진선생, 현수선생 세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1기생 진칼빈은 순교)

익두선생에게, 세 선생의 활동자금을 지급하고 
회의를 마치고, 함께 파송예배를 드렸다. 

파송예배를 마친 후 짐을 챙기도록, 세 선생을 방으로 돌려보냈는데 
유칼빈선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민망한듯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말했다. 
'저~ 선교사님, 할 말이 있는데요..' 

나는 편히 앉으라고 손짓 하면서 말했다. 
'뭐예요? 괜찮아요. 얘기하세요.' 

'선교사님 저 솔직히 중국 들어올 때, 저의 어머니가 많이 앓고 있었습니다. 
집에 식량도 없고 약도 없어서, 제가 중국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1년 동안 공부하다 보니, 집에 계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이제 파송되면 학생모집 보다는, 먼저 집에 갔다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몹시 미안해했다. 
모두가 생명 바쳐서 북한선교를 한다고 결심하고 있는데 
자기만 집안 문제로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교사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어머니 생각이 나서 못 견디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갔다가 곧장 되돌아 오겠습니다. 되돌아와서 학생들을 모집해서 
다른 선생들 못지 않게 잘 해 보겠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해서인지,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 했다. 
'그렇게 하세요. 괜찮아요. 우리 잠깐 기도합시다!' 

나는, 그가 국경을 넘어 안에 집에 무사히 갔다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익두선생 사역장에서 세 명의 선생들을 연변으로 떠나보낸 후 
용섭선생 사역장으로 가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용섭선생, 빌립선생, 다윗선생, 명륜선생 등 4명을 파송시켜 떠나보냈다. 

이렇게 해서 익두선생과 용섭선생 사역장에서 
다시 7명의 선생들이, 학생을 모집하러 연변으로 향했다. 

저들도 권능선생 사역장 선생들 처럼 
학생 모집을 잘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길 간절히 주님께 기도했다. 

특히 북한까지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칼빈선생이 걱정스러워 
그를 위해 많이 기도했다. 


♣술 담배 그리고 난동 

 

서안에서 순교선생이 사역을 시작한 지 이제 2주 가까이 되었다. 
☞순교선생 간증보기 https://rfcdrfcd.tistory.com/15980370

그동안 오늘까지 벌써 신약성경 10독을 하였다. (*하루에 거의 1독함)
사역 초기라 순교 선생은, 학생들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될 수 있는 한 빈틈 없이 일과를 진행해 갔다. 
이렇게 3개월 정도 지나야만, 학생들이 사역장 일과에 잘 적응하게 될 것이다. 

오전 통독시간이 끝나고, 순교 선생과 학생들은 부엌으로 가서 
식사 당번이 차려놓은 밥상 앞에 둘러앉았다. 

식사기도 당번이 식사기도를 끝냈다.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밥숟가락을 뜨던 학생들이 
오늘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순교선생은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밥을 먹다가.. 이상해서 물었다. 
'어째서 밥들 안 먹소? 밥이 맛 없습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효선 형제가 소리를 꽥 질렀다. *축구선수
'아 이거 망할~ 순교선생, 술 좀 마십시다. 사람이 이거 살겠습니까?' 

비로소 그는 분위기를 파악했다. 
곧 이어 효선형제가 그의 멱살을 옮겼더니 악을 쓰기 시작했다. 
'임마, 야 술 내놔 술! 우린 술이 마시고 싶단 말이야, 이 개새끼야!'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순교선생은 자기 멱살을 잡고 있는 효선형제를 
어안이 벙벙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나이가 10살 어렸다)

그 순간 순교선생은 와락 화가 치밀었다. 
그도 싸움이라 져본 적이 없던, 군인 (리수복 부대) 출신 인지라 
효선형제의 멱살을 맞잡고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술 마시면서 공부할 거면 다 걷어 치워, 걷어 치우란 말이야! 
그래 인마, 나를 죽여라, 그리고 나서 술 마셔라 마셔!'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이마에는 지렁이같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효선형제의 눈이 사납게 돌아가는가 싶더니 
후다닥 침실로 뛰어들어가서 짐을 싸들고 나오면서 그에게 소리쳤다. 

'그래 인마, 나 간다!
그리고 뭐 귀신 딱지 같은 소리만 맨날 외우라 그러지.. 
하나님은 무슨 개뼉다귀 같은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있으면 어디 내 눈 앞에 내놔 봐! 

나 간다 가! 야 너들도 가자! 
새끼들아, 뭐 말라빠진 형제고 나발이야?' 

어떤 형제들은 사정하듯 잘했다. 
'순교선생, 최광 선교사 몰래 한 번만 마시면 되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원칙을 지키고 그러오?
순교선생 한 번만 술 사 줘! 그러면 우리도 말 잘 듣고 공부할 거요!' 

'안 돼요, 지금 내가 가진 돈은, 술이나 사 먹으라는 돈이 아니란 말이요!' 

그러자 소광형제가 못마땅한 듯 한마디했다. 
'돈이면 다 같은 돈이지.. 술 사 먹는 돈은 따로 있슴까?' 

다른 형제들도 짐을 싸 들고 나오면서, 순교선생에게 고함을 질렀다. 
'우리도 간다 가! 더는 못 살겠다 말이야. 
사람이 이렇게 어떻게 살아? 참아도 유분수지...' 

'마, 너는 죽은 사람 살리는 구라 같은 이야기만 맨날 읽어대라, 우린 간다!'

순교선생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원칙과 현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순교선생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좋다. 다들 짐들 놔라, 술 사 줄 테니 마셔라!' 

이 말 한마디에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됐다. 
'우와~ 순교 선생 만세~ 드디어 술을 먹게 됐다. 만세~ 우리가 이겼다!'

이들은 다시 방안을 우르르 몰려들어 갔다. 
그는 직접 술과 안주를 사 가지고 와서 학생들 앞에 펴 놓았다. 

'순교선생도 한 잔 하시죠? 순교선생이 안 마신다고, 달라질 거 뭐가 있겠소?' 
거나해진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권했지만 
순교선생은 아무 대꾸도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쓰러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참고 참았던 울분이 눈물이 되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님께 죄송한 마음과, 어린 학생들에게 당한 억울함 때문에

하염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앉은 자리에서 기도하다가 울고.. 울다가 기도하며 
넋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바위처럼 굳어져 앉아 있었다. 

학생들은 술을 다 마신 후, 12시부터 3시까지 오후 취침시간에 한숨 잘 자고 일어나, 

아직도 가시지 않은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통독실로 나왔다. 

 

그런데 오후 통독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순교선생이 자기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1분 1초도 어김없던 그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학생들은 차라리 잘 됐다며, 책상에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오후 내내 순교선생이 통독실에 나오지 안자,
소광형제가, 순교선생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다가 흠칫 물러섰다. 

굳어져 계속 울면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한눈에 봐도 하루종일 저렇게 기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소광형제는, 말할 수 없는 위압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살며시 방문을 닫고, 통독실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성경책을 펼쳐들었다. 

 

그런 소광형제를 본 효선형제가 무슨 일인가 싶어, 
순교선생 방으로 들어가다가, 그 역시 조용히 물러나와 시무룩해져 앉았다. 

다른 형제들도 역시 한 명 두 명 그 방으로 갔다가 돌아와서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후 뒤늦게 나는, 순교선생 사역장에서 음주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급히 찾아갔다. 
'순교선생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사역하는 거예요, 장난하는 거예요?'

나는 화가 나서 마구 몰아세웠지만, 그는 잠자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전부 다 통독실로 모이라고 하세요. 
전원 통독실에 모이자, 나는 학생들에게 선포하듯 말했다. 

'이 시간부터 순교선생은 사역팀장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들 모두 연변으로 돌아가세요!'

효선 형제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선교사님, 왜 그럽니까?
우리가 술 좀 마셨기로서니, 이렇게까지 할 거야 없지 않습니까? 
술 마신 것이 그렇게까지 큰 죄입니까?'
 
'나는 술 마시는 사람들하고 함께 일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사역비는, 하나님 공부를 하는데 쓰라는 돈이지 
술 마시고 노는데 쓰라는 돈이 아니에요. 다들 짐 싸서 돌아가세요!'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학생들은 당황해했다. 
'선교사님, 우리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서 그랬지만 
이렇게 큰 잘못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처벌하려면 우리만 해 주십시오. 순교선생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우리가 하도 마시자고 해서 그랬지, 순교선생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갈 데도 없는 사람들인데,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안 마시겠습니다!' 모두 웅성웅성 하면서 나에게 잘못을 빌었다. 

나는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다시 술을 마시면 
정말로 연변으로 돌려 보낸다고 오금을 박았다. 


새롭게 시작한 다른 사역장들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술담배를 끊지 못해 선생들 속을 엄청 썩였고 
사역장에 꽉 짜인 일과에 적응하는 것 때문에 몹시 힘들어 했다. 

이 무렵이면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사역장마다 다니며 형제들의 이름을 바꿔 주는 일이다. 

물론 형제들이 지금 쓰고 있는 이름도 본명은 아닐테지만 
나는 성경인물이나, 신앙위인의 이름을 따거나 
사역장의 필독서였던 <한국 순교자 전기 시리즈>에 나오는 순교자의 이름을 빌려 
이들의 이름을 바꿔 주었다. 

주로 <순교자 전기>에서 많이 따 왔는데 
이 책에 나오는 순교자들처럼, 북한 복음화를 위해 순교의 피를 뿌리라는 뜻에서였다. 

지금 이 책에 나오는 형제들의 이름은, 대부분 내가 바꾼 것이다. 
사역이 계속 확장되어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내가 일일이 이름을 다 붙여주지 못하고 
각 사역장 선생들이 자기 제자들에게 직접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형제들의 이름을 바꿔주는 이유는 
이들이 혹시 북한으로 잡혀가도, 본명을 가지고 활동하지 않으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적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훗날 북한 보위부에 끌려갔던 형제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생각이 적중해서, 보위부 수사팀에서는 
선생들의 이름 때문에 수사에 많은 혼선을 빚었다고 했다. 

나 역시, 이름이 같은 선생들 때문에 헷갈릴 때가 많았으니 
그들의 혼선을 짐작할 만도 하다. 

내 이름도 거의 서더 달을 기준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북한 보위부에서 '북한선교사 제거대상 리스트' 제 1순위로 
나를 계속 미행 추적했지만, 때로는 나의 존재를 여러 명으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형제들 이름중 바울, 요한, 모세, 다윗, 누가, 사무엘, 빌립, 에녹, 노아,
시몬, 게바, 스데반, 야고보 등은 성경에서 따 왔다. 

무디, 칼빈, 기풍, 선주, 익두, 권능, 기철, 양원, 만식, 예진, 원초, 용철, 성근, 
영윤, 용섭, 병조, 형윤 등은 신앙 위인들과 순교자들의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그리고 봉희, 효선, 석환, 재록 같은 이름은 
소록도 북성교회 장로님과 집사님의 이름인데 
이분들은 살아있는 순교자나 다름없다고 생각되어, 그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는 아직도 이들을 본명을 잘 모른다. 
때때로 이들이 본명을 가지고 있기나 한지 의문스럽다. 

김일성의 위대성과 주체사상 밖에 가르치지 않는 낙원에서 
자기를 하늘 같은 존재로 숭배배야 한다고 가르쳐 갔던 그 위대한 김일성이 
자신을 하늘같이 믿고 따르는 자기 백성들을 굶겨 죽였다. 

이들이 그 낙원을 버리고 두만강을 건널 때 
이미 자기들이 살던 고향이며, 단란했던 가정과, 내일에 대한 꿈도, 희망도 
심지어 그나마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름까지 깡그리 다 잃어버렸다. 

이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 역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같은 한국 선교사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유일하게 한 가지,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주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는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저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주님을, 그 영원한 생명을.. 보게 할 수 있을까?' 

소경이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불가능했던 기적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그 기적을 보여 주셨다. 

내가 주님에 의해, 눈이 떠 졌듯이 
주님께서 친히 저들의 눈을 열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서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는 그 시간까지 
이들을 붙들어 두며, 최선을 다해 기다려 주는 것 뿐이다. 

그것마저도 주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반드시 이들의 눈을 여셔서 
이들을 당신의 영원한 아들로 만드실 것에 대해서는,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차피 잃어버린 옛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며 
그런 주님의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며, 처음에는 강압적으로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점차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또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지 깨달아 갔다. 

며칠 전에는, 온 지 몇 주 밖에 되지 않은 김예진 형제가 
시시각각 몰려오는 담배의 유혹을 주님께 맡겨 버리기 위해 
놀랍게도 1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어려운 사역 속에서 이러한 새싹들을 발견할 때면 
나는 언제나 새로운 힘과 용기가 났다. 
이렇게 또다시 3기 사역에 열매가 들이 맺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