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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6:1~2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LNCK 2022. 11. 19. 09:17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시116:1~2      10.09.12.설교스크랩 

 
오늘의 본문엔 전체를 뭉뚱그리는 핵심 단어가 하나가 나오는데  
바로 ‘기도’입니다. 

성경엔 기도하라는 명령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 강도(强度)가 결코 평범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쏟아놔라, 마음을 토해라 등등 
느슨한 표현은 하나도 없이 강한 어조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기도를 강조하신다는 건데, 
그래서 포사이드라는 사람은 “우리가 범죄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는 650편에 달하는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성경은 기도의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다 그 기도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기도를 하긴 해야 되겠는데 기도를 항상 무거운 짐처럼 생각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려다가 안 되니까 그냥 포기하고 
주일에 교회만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서 일종의 죄책감에 빠져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기도에 대해 갖는 우리 모두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먼저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기도는 결코 짐이나 부담이 아닙니다. 
이 시간 나누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 시편 116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나와 있질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쓴 시편과 비교해 볼 때, 이름만 없지 
모든 형식이나 내용이 다윗의 다른 시편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견해도 그렇고, 이것은 다윗의 시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 이 시편을 보면 우리가 도전 받지 않을 수 없는 명확한 사안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그것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1. 사랑한다면 그 증거는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은 1절에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의 목소리와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다윗은 기도를 굉장히 즐겨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 자체가 행복해서 하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정말 기도를 어려워하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도전이 되는 겁니다. 

90평생을 살면서 찬송시를 썼던 크로스비의 찬송가에서도 그런 면을 보게 되는데, 
찬송가 540장 3절에 보면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 그런 고백을 합니다. 

기도하러 나가는 자리라 기쁘고, 바로 그 자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이니 참 친근하다는 겁니다. 
기도 때문에 삶 가운데 행복과 기쁨이 충만해 보이지요?  

▶한 번 이 내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보세요. 
엄청난 얘기라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다윗의 기도나 이 크로스비 여사의 기도가 지금 서로 일치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즉 우리 또한 기도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환희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렇지 못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도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한 마디로 집중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차 있는 겁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기도가 행복하고 기쁜 기도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처음부터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기도의 연륜이 쌓여 가면서 깨닫게 됐을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생각할 수 있는 힘인데, 
문제는 인간이 이것을 잘 활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해답이 나오는데도, 
생각이 짧아서 또는 얕아서 일을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환경 자체가,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지요? 
어릴 때는 목동으로 양을 치면서, 
장성해서는 쫓겨 다니면서 무수한 생각의 호수에 잠겼던 겁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이 자기 간구를 들어 주시고 
부를 때마다 귀 기울여 주신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가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신다?’ 이와 같은 기적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다윗이 잠겼던 생각의 궤적을 우리도 한 번 따라가 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레미야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께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렘32:17)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우주에 나가서 보는 지구는 작지만 그렇게 황홀하고 아름답답니다. 
그런 천지를 존재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대요. 

내가 누굽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욥의 말을 빌어봅시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9:1~2)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상을 하나 하나 벗기기 시작하면 
우리 인생은 그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파렴치한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죄악의 덩어리요 놔두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과 흙 속에 사는 인간은 
그 격차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두 사이의 간격을 메울 길이 없는 겁니다.                   
무엇으로 둘 사이를 연결할 수 있겠어요? 
이게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감정입니다. 

이런 격차를 느끼기 때문에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지요.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시144:3) 

‘하나님! 내가 뭔데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한 마디 한 마디 귀를 기울이신단 말입니까?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런 하나님을 하나 하나 느끼면서, 
다윗은 자기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역시 기도를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존재, 내 진짜 모습을 아는 게 우선입니다. 

보통의 인간은 진실하지도 않고 이기적인 기도만 드리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거기에 감동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50년을 믿어도 그런 감정 없이 기도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 증거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깨달음의 모습을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또 하나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너무 일찍 어린 나이에 국민적 영웅이 되지요. 
그래서 왕의 질투를 받으면서 15년 이상 쫓겨 다니게 됩니다. 

그러면서 온갖 궂은 일을 다 당하지요.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바로 뒤 3절에 그의 고백이 나오지요.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3~4

정말 죽음 밖에는 자기 앞에 올 일이 없어서 절망 가운데 기도했더니 
어떻게 됐다고요? 

6절,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응답하셨대요.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겁니다. 
이런 기막힌 체험을 자주 자주 하게 된 겁니다. 

기도 그 자체만 들어 주셔도 좋은데, 
위급할 때 직접 나타나서 도와주셨다는 거예요.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자기 편에 서지 않을 때 
하나님은 자기를 도와주시고, 힘주시고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크신 팔을 내밀어서 원수를 무찔러 주시고 
또한 그 크신 팔로 자기를 감싸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내 평생 기도하리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오늘 이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고백에 이르렀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한 번 다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다윗과 우리를 비교할 때 누가 더 나은 처지입니까? 
누구 입장이 더 낫습니까? 

다윗은 평생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단지 두려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바 아버지’, 즉 “아빠!” 하는 호칭은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됐습니다. 

그 분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라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 자녀의 신음에 귀 기울이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조그만 호흡이 이상해져도 다 제쳐놓고, 자식에게 몰두하는 게 부모입니다. 
요즘은 그런 사랑이 좀 지나쳐서, 아예 자식의 종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부모는 그런 겁니다. 
자식의 소리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식이 하는 생각 하나 하나에 마음을 쏟는 겁니다. 

그게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필요할 때는 응답하십니다. 

기도하는 데도 응답이 없다고요? 
지금은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세요.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주의 크신 은혜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게 없고 응답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고 사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우리는 그의 10배, 20배, 100배라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기도요, 복된 기도요,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증거는 이런 기도여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요즘도 하루에 몇 번씩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표현은 바로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 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는 사랑의 행위라 그랬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윗에게 있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마음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사랑하면 만나고 싶어합니다. 
연애할 때 서로를 만나고 싶어했던 그 마음을 한 번 회상해 보시지요. 

또, 만나면 금방 헤어집니까? 
온갖 얘기를,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거짓말을 섞어 가면서 끝없이 하지요. 
그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러고 싶어집니다. 
만나서 기도하면 행복해 지는 거예요. 
여러분의 기도가 이렇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즉 기도가 사랑의 행위가 될 때 우리에겐 어떤 유익이 있느냐? 
오늘 두 번째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2. 기도가 사랑의 행위가 되면, 기도는 더 이상 거래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거래라고 하니까 이상합니까? 
사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이 거래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기도 들어 주시면 십의 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 기도 들어 주시면 담배 끊겠습니다. 이 기도 들어주시면 평생 봉사하겠습니다.” 

한나도 “아들을 주시면 평생 나실인으로, 제사장으로 드리겠습니다” 서원하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거래입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을 살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거래와 같은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기도를 꼭 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기도를 들어 주세요. 
그런 기도까지 응답해 주십니다. 
한나도 결국 응답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런 거래가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를 끝없이 품어 주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 생각에, 
내 음성과 간구를 들어주시는 그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그분 앞에 그저 나가는 것입니다. 

그냥 함께 있는 게 좋아서 아무 계산 없이 
아버지 앞에 나가는 게 기도의 본질이라는 거예요. 

바로 그렇게 기도가 사랑의 행위임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170번이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기도란 사랑하는 아버지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다 털어놓고 그 분의 품에 안기는 게 기도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거래가 있을 수 없고, 다른 마음 품을 일이 있을 리 만무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단 둘이 있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을 내셔서 한적한 곳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는 순간에도 이게 과연 응답될까 안될까를 계산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께 기도란 오히려 휴식이고 안식이었던 겁니다. 

기도가 거래가 되는 일과, 휴식이 되는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큽니다. 
기도란 두 인격 간의 대화여야지, 
그 이하가 되면 그것은 일이요 거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달라고 하는, 떼쓰는, 
그런 거래에 지나지 않는 기도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해서 마음 열고 기도하는 사랑의 행위로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기도하는 최종의 목표는, 그 기도가 일이나 거래가 아니라 
오히려 휴식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를 한 차원 높이면 정말 좋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말을 가지고 어떻게 기도할까 별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물론 공중기도를 할 때는 어떤 격식이 있지요.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고 간구하는 등등의 격식과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그저 사랑의 행위로 삼는다면 
거기엔 어떤 격식도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대화하는데,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이렇게 순서를 정하고 말합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린 어떤 얘기라도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하는 사람은요,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신경 안 씁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여러분이 기도를 못 하는 이유는 할 말이 없어서입니다. 
한 5분만 하면 드릴 말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를 오래 하려고 하면, 
먼저 기도를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면 해결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가면 내놓지 못할 말이 없고, 못할 얘기가 없습니다. 
좋지 못한 마음, 짜증스러운 마음, 낙담거리 등등 못할 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은, 이런 사랑의 기도를 핸들로 표현하더군요. 
    우리들의 기도 대부분은 예비 타이어가 될 때가 많은데 
    이런 사랑의 기도는 핸들이라는 겁니다. 

    예비 타이어야 펑크가 났을 때 비로소 필요한 것이지만, 
    핸들은 처음 운전을 시작하면서 마칠 때까지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도란 그렇게 항상 손 안에 있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가 예비 타이어가 되느냐 핸들이 되느냐 
    그 차이와 효과는 어떨 지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특별히 시편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일이니까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자들의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칼빈은 “시편은 영혼을 구석 구석 다 꺼내 보여주는 해부도와  같다”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시편은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시편은 다들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읽어 보셨으리라 생각하는데요. 
한 마디로 인간의 온갖 감정이 다 녹아 있습니다. 

잘 읽어보면 거기엔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온통 섞여져서 
그 모든 게 아무 순서 없이 여기저기서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찬양과 감사, 기쁨, 평안이 나오는 것 같으면 두려움과 불안, 통곡이 이어지고, 
때로는 부들 부들 떠는 분노와 비난과 억울함이 나오고, 
심지어는 사탄과 같은 저주와 복수의 마음까지도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게 뭡니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가면 내 놓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제가 시편을 읽으면서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고 심한 갈등에 빠진 문제가 있습니다. 
시편 109편 같은 건데, (집에 가서 한번 다시 읽어 보세요) 다윗의 시입니다. 

한 마디로 그 훌륭한 다윗의 입에서 온갖 악한 얘기가 다 나옵니다. 
한 마디로 시 전체가 원수에게 퍼 붓는 저주의 기도입니다. 
어떻게 저주하느냐? 

그가 기도할 때 마다 사탄이 그의 오른 편에 있게 해 달라 그럽니다.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가 죄가 되게 해 달라 그러고, 
심지어는 그 원수가 얼마 살지 못하고 요절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죽으면 그 아내는 과부가 되는데, 거기서 그치지 말고 
그 자식들이 빌어 먹을 때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게 해 달라 그럽니다. 

남은 재산도 고리대금업자에게 다 빼앗기게 해 달라 그러고 
결국에는 아예 그 자식들이 다 죽어서 그 가문의 씨를 말려 달라고 까지 기도합니다. 

아마 여러분이 다시 이런 시편을 읽으면 저처럼 갈등할 겁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를 성경에 수록하도록 하셨을까? 

하나님 맞아? 사랑과 거룩으로 가득한 창조주 하나님이 맞아?  
갈등이 생길 겁니다. 
누구라도 이런 국면에서는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깨닫는 게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그 마음에 악마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복수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심하면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생깁니다. 

뭐 누구라도 예외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독한 마음이 생길 때 대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짜 복수하는 거예요. 저주하고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법으로 금하고 있고, 죄가 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모든 분한 마음을 꾹 참고 누르는 겁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이 방법을 택하지요. 
그래서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 가고 거기서 발전하면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정신병으로 발전하기도 하지요. 

셋째는 그 모두를 하나님께 그대로 들고 가는 겁니다. 
그 억울하고 분한 마음, 그래서 저주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다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겁니다. 
이 마지막 방법을 택한 사람들이 바로 다윗을 비롯한 시편기자들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악한 감정을 원수에게 직접 쏟아 놓으면 그건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가져와서 부르짖으면, 그건 탄원(歎願)이 됩니다. 
기도는 바로 그런 겁니다. 
저주를 탄원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 사람이 저주를 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하나님께 아룀으로서 탄원이 되게 하는 것, 
그게 뭐가 나쁜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다 들으실 뿐 아니라 
때를 따라 그 마음을 눌러 주시기도 하고 위로해 주시기도 합니다.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때로는 직접 하나님이 나서서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결국엔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아름답게 문제가 풀어지는 거예요. 
무엇보다 그렇게 하나님께 쏟아 놓을 때 저주의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못할 얘기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자식이고 배우자고 친구라 하더라도 
우리 얘기를 다 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큼은 우리의 어떤 얘기라도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62:8을 보면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말씀하셨고 

또 눅18:7~8에서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러셨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좋은 쉼과 영혼이 부활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분의 일상은 이런 문제가 드물지 않게 닥칠 겁니다.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나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기도함으로 매 순간 믿음으로 사는 삶의 유익이 뭔지를 
매일 매일 깨달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기도의 기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고, 
   그 마음으로 기도하면 삶에 실제적인 유익이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복된 생활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건데, 
   결론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3. 기도를 잘 드리는 비결은.. 그냥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행복한 얼굴로 
오래 기도 하는 모습을 보자.. 그 옆에 있었던 방문객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어떻게 그렇게 기쁘고 행복하게 기도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오래 기도할 수 있는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처럼 기도하시고 싶다구요. 그 비결을 알려 드릴께요. 
그냥 기도 하세요. 더 오래 기도하고 싶으면 더 많이 기도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사랑의 행위라 그랬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될 리는 없겠지요?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치고 
연습 안하고 훈련 안 하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도 연습이고 훈련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를 하고 싶으세요? 
다윗이 했던 기도를 하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기도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 되는 그런 경지에 오르고 싶으세요? 

기도하세요. 그냥 기도하세요. 
오래하고 싶으시면 많이 하면 됩니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우리를 방해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우리 입을 틀어막습니다. 
우리를 바쁘게 해서 우리 시간을 다 도둑질 해 갑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세상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얼마나 기도하기 어려운 세상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증거로 기도하기 원하신다면,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와 통하는 말이 묵상인데, 묵상의 영어명은 메디테이션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메니테이션은 라틴어의 리허설에서 왔습니다. 
결국 기도가 리허설이라는 얘긴데, 무슨 뜻입니까? 

리허설 없는 연주가 있을 수 있습니까? 
즉 훈련 없는 무대, 연습 없는 무대가 가능한 얘기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이 연습할 때 방해되는 것들이 있지요? 
핸드폰이 자꾸 울리면 그것을 꺼 버리고, 또 컴퓨터가 방해가 되면 그것도 꺼 버리지요? 

똑 같은 원리를 우리 기도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려고 하는데 모임이 있으면 거기 불참하는 연습을 해야 하고, 
기도회가 있는데 나가기 싫으면 억지로라도 나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런 연습, 이런 훈련을 안 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번번이 드리는 말씀이지만, 연습이 연습을 부르고, 노는 게 노는 것을 부릅니다. 
연습하면 계속 연습할 거리가 생기고, 놀면 놀수록 놀 일은 더 많아집니다. 

기도 역시,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거리는 많아지고, 
안 하고 쉬면 또 그런대로 살 만 합니다. 

기도를 하든 안 하든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됐든 습관이 될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운명으로 판 박힐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우리가 어떤 길을 결정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마치는 말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기도 때문에 행복해 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이제는 그 사랑을 표현하고, 
그 표현되는 대로 그것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는 기도입니다. 
거래하는 기도가 아니라 계산 없는 대화로까지 발전시키시기를 바랍니다. 

힘들지만 첫 걸음이 어려울 뿐, 한 발만 내 딛는다면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봉독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아멘!   116:1~2

이 고백이 여러분의 평생의 고백이 되어서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믿음생활을 해 나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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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할 때 기도응답이 잘 됩니다.
케네스 배 선교사가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때의 간증입니다.

"제가 아마 북한에서 평생읽은 성경보다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잘 안 읽혀지십니까? 
예. 성경 잘 읽혀지는 곳을 알려드립니다. 북한입니다.

평생했던 기도보다 더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예배하고, 그런 과정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돌보고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루는 수감시설에 제가 앉아있는데,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평양냉면이 먹고 싶었습니다. 평양에 왔는데 냉면을 안 주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손들어서 냉면달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서 앉아있으면서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고, 반드시 앉아 있어야 함) 
속으로 생각하면서 웃기도 했지만 
냉면 주십사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평양냉면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 청류관이라고 유명한 식당에서 냉면을 받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 다음날에 앉아있는데 김치볶음밥이 생각나는 것이예요.
근데 뭐 그냥 웃고 말았죠. 근데 그날 저녁에 김치볶음밥이 나오더라고요.

근데 이게 한 두번이면 우연의 일치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4개월 반동안 그런 일이 40번도 넘게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호텔의 룸서비스 시킨 것 같았습니다.
생각하면 주시고.. 생각하면 주시고..

이러면서 주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어요.
‘얘야 내가 너와 함께하는 것을 네가 아는냐?
너의 세밀한 마음 속의 소원도 내가 듣고 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서 그 때는 아주 단순해요.
좀 더 쉬고 싶고, 좀 더 자고 싶고, 좀 더 먹고 싶고.
왜? 배고프니까.

제가 뭐 그런 상황에 있으면서 또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나게 되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와이 초컬렛이 먹고 싶었습니다. 너트가 들어있는,  
두 번체는 KicKet(쵸컬릿)
세 번째는 Beef Jerky 육포,
네 번째는 Mixed Nut. 견과류,
다섯 번째는 프로틴바, 에너지바가 먹고 싶었어요.

너무 힘드니까 다니면서 일하면서 먹고 싶었으니까요.
근데 북한 교화소에서 하와이 초콜렛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생각만 하고 넘어갔죠.

그러고 나서 3달동안 더 일하다가 제가 60파운드 정도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영양실조가 되어서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었고요.

거기서 회복하는 치료받다가 두어달이 지나자
저의 어머니가 평양으로 저를 면회오셨습니다.
너무나도 감격적인 상봉이었고 참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지요.

이튿날 저의 어머니가 오실 때
뭘 좀 갖고 왔다고 하시면서 꺼내시는 것이

첫 번째 꺼내신 것이 하와이 초콜렛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킷켓이었고요. 세 번째는 비프철크였고
네 번째는 믹스넡이었고 다섯 번 째는 프로틴바 였어요.
먹는 것은 다른 것은 안 가져오셨습니다.

내가 전화도 안했고 편지도 안했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여러분 지금 여기도 함께 하십니다."
*이 일화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6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