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학개서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네 개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 번째(2:10~19)와 네 번째 메시지(2:20~23)입니다.
학개 2:10절에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이라고 나와 있고 2장 20절에 ‘그 달 24일’이라고 했으니 두 메시지는 같은 날에 시간 간격을 두고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학개서의 첫 번째 메시지(1장)는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성전 지대 foundation를 놓고 왜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건축하지 않았느냐 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판벽한 집(벽과 지붕 있는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는 것입니다. 1:4
학개가 받은 두 번째 메시지(2:1~9)는, 새로 짓는 성전이 너무나 초라하다고 낙망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초라해 보여도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라’ 고 격려하십니다. 2:9
그리고 우리가 읽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메시지는 *이 설교 본문 ‘성전건축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주신다’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4개의 메시지는 책망과 격려와 축복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을 격려하여 본격적으로 성전건축을 시작한지 3달이 지난 후 축복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6월 24일(1:15절)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는데 9월 24일(학개 2장 10절)에 세 번째와 네 번째 메시지가 선포된 것입니다.
◑1. 유다 백성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진단
먼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에게 명하시기를 제사장들에게 율법의 성결과 부정의 문제를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네 성중에서 송사로 다투는 일이 있으되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을 네게 가르치리니” (신17:8~9).
▲그리하여 학개 선지자가, 제사장에게 두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첫째, 어떤 제물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려지면 그 제물은 거룩한 것입니다. 고기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거룩한 고기, 그릇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거룩한 그릇, 사람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거룩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고기가 하나님께 드려져서 거룩한 고기가 되었는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옷자락으로 싸면 그 옷자락도 거룩해집니다.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레 6:27).
그런데 지금 학개가 질문하는 것은 고기로 인해서 거룩해진 옷자락이 다른 물건이나 음식에 닿으면 그것도 거룩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제사장들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거룩한 물건이 1차적으로 접촉한 것은 거룩하게 하지만 2, 3차적으로 접촉한 것은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둘째, 어떤 사람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율법에 동물의 시체를 만지면 하루 동안 부정하고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시체가 부정한 것이니까 만진 사람도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개가 질문하는 것은,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사람이 다른 물건이나 음식을 만지게 되면, 그것도 부정해지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제사장들의 대답은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1차적으로만 거룩을 전달하지만 부정한 것은 2차, 3차, 4차 계속해서 부정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이 전염력이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차서 내쫓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학개 선지자는 이런 율법의 원리를 유다 백성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2:14)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다 백성과 거리를 두고 야단치려는 것입니다. :14
남편이 자기 아내가 사랑스러울 때는 ‘내 아내’라고 부르고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났을 때는 ‘이 여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이 여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벌써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 부정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좋은 제물을 드려도 그것 또한 부정하여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성전건축을 하지 않았지만 제사는 부지런히 드렸습니다.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스 3:3~4).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새벽기도도 했지만 유다 백성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의 마음이 부정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리니 그 제물도 부정하여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삼상15:22절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일주일 뒤에 올 것이니 제사를 드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을 알고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기뻐하시겠냐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불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축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지으라고 분명히 유다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아무리 날마다 드렸어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 전체가 부정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전염력이 강해서 결국 온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구약을 살펴보면 부정한 것의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부정이 결국 전체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승승장구하며 나아가다 아이 성이라는 조그만 곳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부정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실 수 없었던 거죠.
결국 아간과 가족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아골 골짜기에서 죽이고 불사르자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해주셨습니다. 고전5장에서 밀가루에 누룩을 조금만 넣어도 결국 다 퍼져서 밀가루가 부풀어 오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밀가루를 순수하게 유지하려면 누룩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5:6).
우리가 새벽기도, 저녁기도,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기도회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를 많이 해도 복을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20번씩 예배해도 복을 받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지 않고 부패하면 예배를 아무리 드려도 복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응답받고 축복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지식이 많거나 권력이 많다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지식이 없고 가난하고 권력이 없어도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문제를 그대로 지니고 있을 때의 결과
유다 백성이 아무리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려도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5~19).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20석의 곡식을 뿌렸지만 10석의 곡식 밖에 거둘 수 없었고 그나마 10석의 곡식도 폭풍우와 우박으로 젖어서 곰팡이가 생겨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복을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학 2:17).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고 겉으로만 제사를 지내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날 대한민국은 예배당을 많이 지었습니다. 50년 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지금 경제 대국이 된 것은 모두 예배당을 많이 지어서, 거기서 주님을 사모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또 동남아 국가들도 다 계발시기에는, 경제가 큰 폭 성장했죠)
그런데 오늘날 유럽에 가보면 예배당을 어마어마하게 지어놓고 성도가 없어 외국에서 관광하러 오는 이들의 수입으로 유지해나갑니다. 그리고 시골 교회들은 망하여 술집이나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부흥하지 못합니다. 영국과 미국은 18, 19세기에 대각성 운동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쾌락을 좇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금요일만 되면 놀러가서 예배당이 텅 비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부흥하지도 못하고 축복도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거룩이라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으로는 우리가 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100% 완벽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십시오. 윤리적으로는 흠이 있어도 내 마음이 주께 향하였으니 내 마음은 주님 것이라는 고백이 있으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영적인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결과
유다 백성이 불순종하는 마음을 순종으로 바꾸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복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려도 복을 받지 못했던 유다 백성이 학개가 선포하는 말씀대로 순종하여 16년 만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변하여 순종하게 되었고, 변명이 변하여 사명을 수행하게 되었고, 부정함을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된 거룩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첫째, 성전건축을 방해하던 장애물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성전에 돌을 놓기 시작하자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무슨 권리로 여기서 성전을 짓느냐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고레스 왕이 우리에게 성전을 짓도록 칙령을 주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고레스 왕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고레스 칙령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 페르시아 왕이었던 다리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유다 백성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거해서 성전을 짓는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다리오 왕이 조사하여 메대 지방의 악메다 궁에서 고레스 칙령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조서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역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로 하나님의 이 전을 본처에 건축하게 하라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 (스 6:7~8).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리자 성전건축의 장애물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둘째, 순종하는 백성은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9).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데 누가 막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정말 어렵고 우환이 많았더라도 앞으로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9월 24일은 이스라엘에 이른 비가 오는 계절입니다. 비와 햇빛을 주셔서 수확을 풍성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싶으신 분들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 사람들이 예배당을 지으면서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복을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주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 마음을 다해 헌신해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지도자인 스룹바벨도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의미는 ‘바벨에서 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 12절을 보면 바벨론에 끌려갈 때에 여호야긴 왕의 아들이 스알디엘이고 스알디엘의 아들이 스룹바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여호야긴 왕의 손자였던 것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자인 스룹바벨은 자신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고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악해도 자식은 훌륭할 수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유다 총독이 되어 백성의 귀환을 주도하는 지도자가 되었고 성전건축을 지휘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 스룹바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학 2:21~22).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시는 분이고 열국의 보좌를 엎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시고 스룹바벨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23).
첫째, 너는 내 종이다. 둘째, 너는 내가 택한 자다. 셋째, 너는 나의 인장반지다.
인장반지에는 도장이 달려 있습니다. 이 반지는 보통 왕이 사용하였는데 명령을 할 때 이 반지로 도장을 찍으면 그것은 변경할 수 없는 왕의 명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반지로 만들어 늘 끼고 다녔던 것입니다.
인장반지는 주인이 24시간 끼고 다니면서 절대 다른 곳에 따로 두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스룹바벨과 가까이하고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거죠.
결론
유다 백성은 외형적인 것에만 신경을 썼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면 그 사람은 복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장애물도 다 없애주시고 물질의 복도 내려주시며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인장반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성전건축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그 이유는 스룹바벨이 짓는 성전이 구약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본부 기지였고 *사2:2~3 그 성전은, 장차 신약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몸인 신약성전을 예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스룹바벨의 11번째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국의 보배가 되어 말씀을 가르치셨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고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성전건축이라는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복 받으려면 헌신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헌신된 마음을 가지면 이생에서 복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내세에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존재가 되고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반항과 불순종과 부정함과 불신앙을 다 버리시고 헌신된 마음으로 바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