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9장, 스가랴가 내다본 메시아 나라 여러 설교 정리
※성경 통독 할 때는, 슥9장을 그냥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는데,
한 구절 한 구절 공부해보기는 처음입니다/주.
본문 슥9장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동안 괴롭혔던
유다의 주변국들을 여호와께서 꺾으신다는 것과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
참고로, 9장에서는 미래에 올 메시야가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지만
10~11장에서는 핍박과 수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예언됩니다.
<분해>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심판 (1-8절)
시온에 입성하는 평화의 왕 (9-10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 (11-17절)
◑해석
☞ 슥9장 하드락 땅에 임한 경고, 물 없는 구덩이에서.. 에 잘 나와 있습니다.
7장과 8장에서 성전을 건축 중인 그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신앙의 본질에 충실할 것을 말씀하셨죠.
그러면서 8장에서 약속하십니다.
-이방을 누르게 하시고, 그들 중 일부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청년 남녀가 많게 하시고
-언어가 다른 이방인 10명이, 하나님 백성 1명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온다..
이런 메시아의 나라(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죠.
이어지는 본문 9장에서는,
비록 너희를 누를 나라가 제국들(헬라 같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장인 10~12장에 보면,
유다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또 그들 위에 내리게 되죠.
▲헬라 나라가 일어나 주변국들을 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예루살렘은 피하게 해 주십니다.
지금 스가랴가 예언하던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 시절입니다.
그러니 바벨론 제국은 지나갔으므로, 예언하지 않습니다.
본문 슥9장에서는 헬라 나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 주변국인 시리아, 페니키아(두로), 블레셋을 심판할 것을
1~7절까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정복국이 ‘헬라’라는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13절에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구절을 통해
본문의 정복국이 ‘헬라’ 임을 유추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시리아 → 두로(역사책에 페니키아) → 블레셋의 순서는,
북방에서 정벌하러 올 때, 지리적 순서대로입니다. 그 다음은 애굽이죠.
그렇지만 애굽은, 본문에 안 나옵니다. (헬라는 애굽도 정복했습니다.)
에스겔이 두로의 멸망에 대해 예언한 적이 있고, 그대로 되었죠.
그러나 그 때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한 멸망이었죠. 겔26:7
그 때는 육지의 두로만 멸망시켰습니다.
그러자 두로는 ‘육지 두로’ 앞의 섬을 요새로 꾸미고, 거기로 이주했죠.
본문의 두로 멸망 예언은 ‘섬나라 두로’의 멸망 예언입니다. :2
헬라의 알렉산더가 ‘섬나라 두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육지에서 그 섬까지 흙으로 방파제 같은 다리를 먼저 놓았습니다.
그다음에 ‘섬나라 두로’를 불태웠죠. :4
그 다음에 8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지켜) 봄이니라’
실제로 시리아, 두로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역사가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고 합니다. 8절이 이루어진 거죠.
그 이유는, 예루살렘 대제사장이 꿈의 지시를 받고서, 흰 옷을 입고
백성들도 모두 흰옷을 입고, 알렉산더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대신, 도리어 대제사장 앞에
엎드려 절하고 그냥 지나쳤다고 합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8절을, 역사적 그 사건과 매치시킵니다.
▲7절에 ‘그들(블레셋)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즉 미래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편입되리라.. 는 예언인데요,
지금 현재 블레셋의 가자 등 (현 지명도 뉴스에 나오는 가자 지구)
여러 도시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처럼요.
그렇지만 본문 7절은, 그런 ‘정치적 편입’이라기 보다는
더 우선적으로 그들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에 편입될 것을 예언하죠.
◑적용
▲1. 하나님 나라는 보편성의 성격을 뜁니다.
보편주의 신학 Universalism 은 잘못된 자유주의 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 Universality 은 올바른 기독교의 추구방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 Universality 이란,
하나님의 나라에는 결국 모든 나라, 모든 열방이 속해 들어온다는 거죠.
본문 7절이, 블레셋(중의 일부)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다른 번역엔 한 부락, 한 부족)
같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있죠. 마치 여부스가 편입되었던 것처럼요.
구약성경에는 이렇게 블레셋 뿐만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까지도
그 중 일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서 등에 예언하고 있죠.
△요즘 월드컵 축구가 한창입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상황
그런데 유럽국가들은, 각 나라마다 흑인 선수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아마 이민 2세, 3세들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굉장한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저 흑인 선수들이 없으면.. 백인들만으론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어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 Universality 의 단적인 예입니다.
단일 민족, 단일 인종.. 이런 것이 모양새가 좋아 보이긴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정신은 ‘장차 메시아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는
블레셋도, 애굽도, 앗수르도 뒤섞인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이방인이었던 기브온 지파도, 이스라엘에 잘 동화되어 갔습니다.
처음엔 그들에게 성전에서 물 긷는 일, 장작 패는 일 등 성막봉사를 시켰죠.
그런데 나중에 그 일이, 붙박이가 된 것입니다. 아주 요긴한 자들이 됐죠.
그런 성막 봉사를 하면서, 기브온 족속은 점점 여호와 신앙에 눈이 열려갔죠.
이렇게 동화된 기브온 족속은
후에 다윗 왕에게 측근 30장군(용사)이 있었는데
이스마야 는 기브온 사람으로 30장군의 머리가 되었죠. 대상12:4
또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쌓던 곳도 기브온 산당이었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살던 자리에, 성전이 들어선 것이죠.
(기브온 족속뿐만 아니라, 성경에 자세히 찾아보면 이런 예가 아주 많죠)
△본문 10절에도 ‘보편성의 정신’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새번역
일찍이 이 사실을 깨닫고, 이민의 문을 활짝 열고, 외국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발전한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이민을 받아들인 것은, 아마 이런 기독교 정신,
즉 ‘보편성의 정신 Universality’ 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나라’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기독교, 하나님 나라’ 얘기입니다.
그 나라는 ‘보편성의 정신 Universality’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죠.
사실 기독교만큼, 세게 모든 민족, 인종, 나라에 개방적인 곳은 없습니다.
미국 사람들중에도 일부 인종차별이 있고, 백인우월주의가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미국 내 남미인, 동양인, 아프리카 인들에게
아주 개방적으로 열려 있고, 아주 우호적입니다.
심지어 자기 집에서 재워주는 호스피탈리티 기독교 정신을 실천합니다.
한국도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에 속할 것입니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독교 신앙이 ‘보편성의 정신 Universality’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오늘날 ‘다문화 교회라야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체와 침체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들이
‘다문화 교회 방향’으로 돌파구를 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아직 ‘다문화 교회로 나가서 부흥했다’는 증거는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기독교는 그 본 바탕에 ‘보편성의 정신 Universality’을 깔고 있고,
‘다문화 교회’로 만약 나가지 않는다면, 참된 기독교가 아닌 거죠.
▲2. 스가랴는 5백년 후 초림과, 2천5백년 이상 후 재림까지 내다봤죠.
물론 그가 5백년 후, 또는 2천5백년 후의 어느 시점까지
정확히 내다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놀랍게도
9절에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초림과
10절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Palm Sunday 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예수님은 우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19:41
눅19:44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번역
우리는 위 구절을, 주후70년 경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때로 해석하는데
주석에 보니까, 꼭 그 날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같은 예언은
주님의 길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도시와 민족의 최후를 말해주는 것이며
종말적 심판의 때에 이와같은 파멸을 당하게 되리라는
궁극적이고 우주적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이 단락의 요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때를 알지 못하나,
스가랴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때를 알고, 내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향해 올라가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눅19:44
그래서 그들이 당할 멸망과 패망을 내다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개역에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라고 번역했죠.
이와 같은 완전 파멸을 맞게 되는 이유를 '권고의 날'을 몰랐기 때문이라..
그런데 권고의 날은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신 때',
혹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 라는 뜻입니다. (AV, RSV, 공동번역).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와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했지만
그들이 믿지도, 듣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파멸이 오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주님이 방문하시는 때를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때를 잘 알아차린 사람에게는.. 은혜의 때, 축복의 때가 되겠지만
그 때를 전혀 못 알아차린 자에게는 .. 심판의 때, ‘여호와의 날’이 되겠죠.
요즘 ‘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모두가 안간힘을 씁니다.
요즘 말로 ‘타이밍’이라고 합니다.
부동산, 주식, 외환 .. 이런 모든 것이 ‘타이밍 싸움’입니다.
언제 빼야하며, 언제 집어넣어야 하는지... 그거 알려고 다들 눈이 충혈됐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16:3
오늘날은 일부 중직자들, 주의 종들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는 못하면서’
‘주님이 방문하시는 때에는 관심 없으면서’
주식 동향, 부동산 동향에 매우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노아 홍수 때처럼’ 방주 바깥에서 헤맬 것입니다.
스가랴는 예수님의 초림(9절), 재림(10절)까지 내다봤죠.
그게 초림인지, 재림인지.. 그가 확실히 몰랐다 하더라도
적어도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이 방문하시는 날’은 확실히 내다보고 예언했죠.
△오늘날 내게도 ‘주님이 찾아오시는 날, 방문하시는 날’이 있습니다.
주님이 무소부재 하신 점과 더불어, 특별히 찾아오시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문은 2방향 입니다.
-임재하셔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방문과
-‘여호와의 날’로 찾아오셔서,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전자는 부흥으로 열매맺을 것이며
후자는 중병에 걸림, 큰 사고를 당함, 큰 재난이 닥침 등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방문하시는 날을 대비하며, 준비하는 자는 ‘은혜의 방문’을 받을 거고,
주님이 방문하시는 날을 전혀 대비하지 않으면 ‘심판의 방문’을 받을 것입니다.
마24:45~51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참고로, 스가랴는 어떻게 주님의 초림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요? :9
혹자는 ‘그가 다니엘서를 참고했을 것이다’ 라고 예측합니다.
물론 주님이 스가랴에게 직접 주신 계시도 있었겠지만,
그는 다니엘서에 나타난 ‘70이레’ 예언의 해석을 통해,
앞으로 메시아가 오시는 날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다니엘도 자기 보다 앞선 예레미야의 예언을
참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선지자’들은, 위로부터 받는 계시 말고도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읽는 사람입니다.
벧전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예언이 임한다, 보태진다, 더해진다 ...는 뜻입니다.
▲3. 주님이 임하시는 때에, 주의 백성들은 심판에서 보호됩니다.
11절 너에게는 특별히, 너와 나 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으니,
사로잡힌 네 백성을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 낼 것이다.
12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
오늘도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두 배로 갚아 주겠다. (새번역)
................................................
◑슥9장 절별 해석
슥9:1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여기 "경고"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맛사니, 짐(burden)이란 뜻이다.
이것은 이 예언의 상대자가 아주 망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무거운 말씀임을 보여준다.
"하드락"은 수리아의 지명 혹은 수리아 나라를 가리킨다.
"다메섹"도 역시 수리아에 속한다. 이 경고가 거기에 머무른다 함은,
수리아 나라가 아주 망하기까지 그 경고의 내용이 실시될 것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본다" 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함을 의미한다. 이 해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 수리아와 기타 나라들을 멸망시키게 된다는 뜻이다.
일설에, 여기 "세상 사람"이란 것은 모든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수리아와 같은 이스라엘의 적국들이 멸망하는 동시에
장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을 여기서 예언한다.
본절에 예언된 수리아의 멸망은, 이 아래(2-5절)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과 함께
주전332년 경에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다.
슥9:2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슥9: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슥9:4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 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이 귀절들은 하맛에 대한 멸망 경고를 주었으니, "하맛"도 멸망에 속한 지방으로서
칼빈은 이것을 안디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귀절들이 두로와 시돈에 대한
멸망 경고를 주었으니 이 두 도시는 베니게에 속한다.
"두로"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150척이나 높은 성으로 방위되어 있어서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이 5년 동안 아무 성공도 없이 포위하였던 일이 있고,
느부갓네살은 13년동안 그것을 포위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 예언대로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였다.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으며 권세를 잡았으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므로 필경은 멸망하고 말았다.
두로가 멸망할 때에(알렉산더로 말미암아) 6~7천명이 학살당했고,
2천명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3만명이 노예로 팔려 갔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재물과 지형(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서 성까지 소유하였던 요새)을
믿는 자는 필경 저렇게 비참하게 망하였다.
슥9: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여기 이른바 "아스글론"은 블레셋 나라의 도시이다. 이 도시들이 두로가 망하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는 이유는, 이제부터는 전화가 자기들에게 미칠 차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상 순망치한의 위험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공포심을 가졌던것과 같이 사실상 멸망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어질 정도였다.
과연 후일에 알렉산더 대왕이 블레셋을 칠 때에 가사에 있었던 임금을 사로잡아 갔고
백성들을 많이 치워버리고 다른 나라사람들을 그곳으로 이민하였다.
슥9: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여기 이른바 "잡족"이라는 말은, 타국인을 의미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예언과 같이 타국인들을 블레셋에 많이 거주시켰다.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는다" 함은, 그 족속이 일찌기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게 하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의 죄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이제 그 민족이 자랑하던 나라가
무너짐에 따라 그들은 수그러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복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교만을 꺾으신다.
슥9:7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이 귀절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교만이 꺾이운 블레셋 사람들도 필경 복음을 받아
하나님 백성에 참여할 것을 예언한다. "그 입에서 그 피를...제"한다 함은,
다른 민족을 착취하는 죄를 다시 범치 않도록 함이고,
"그 잇사이에서 그 가중한 것을 제" 함은, 가중스러운 우상의 제물 같은 것을 먹는 악습을
버리도록 함이다. 그들이 복음을받을 때에 이와 같이 된다.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된다" 함은, 그들이 복음을 믿어
유다의 어떤 높은 지도자처럼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부스사람 같이 된다" 함은 그들이 복음을 믿어 하나님 백성 가운데 참여하기를
옛날에 다윗의 정복을 당한 여부스 사람들이 이스라엘 나라에 귀화한 것 같이 될 것을
예언한다(삼하 24:16; 대상 21:15).
슥9: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이 귀절은, 이스라엘의 적국들은 멸망을 당해도 이스라엘 나라만은 그 때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안전할 것을 예언한다. 여기 이른바 "내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 백성 곧, 이스라엘 나라를 의미한다.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께서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억울함
(열국으로 말미암아 받은 억울함)을 친히 보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이 귀절은,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하던 때에 유대 나라만은 그 침략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성취를 본 것이다. 요세보 사기에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 부근에
침입할 때에, 대제사장은 예복을 입고 많은 제사장 앞에서 알렉산더를 표시하는 예언을
왕에게 들려주므로 왕은 감동되어 예루살렘을 침해하지 않고 유대인에게 특전을 주었다"고
하니, 이 귀절은 예언은 알렉산더 대왕의 한 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 분명하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여기 와서는 선지자가 신약 시대를 성립시키는 메시야의 내림을 예언한다.
여기 이른바 "시온의 딸"은 딸 같은 시온 곧, 약소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말도 역시 같은 것이다.
"네 왕"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공의로우며". 이것은 메시야께서 그 백성을
원수들의 무리한 침략 하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필경 공의를 발동해서 구원하여 주심을 의미 한다.
이 공의는 실제에 있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우는 데까지 낮추사
그 백성의 죄 값을 담당하시므로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라는 말씀이 따른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겸손한데 떨어지므로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겸손의 왕이시다.
"나귀 새끼" 를 타신 것은그의 겸비의 극치를 의미하는 참된 왕의 덕을 상징한다.
마 12:17-21 참조.
슥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말씀은, 메시야께서 초림하신 때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그것이 완성되기는
대종말 때 곧, 그리스도 재림시에 이르러서야 될 일이다. 사 2:4, 9:4-6; 시 115:9 참조.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왕국은 폭력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고 다만 고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갈 것을 보여주며, 또한 그 나라는 어떤 한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이고, 또 무궁할 것을 보여준다.
슥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너"라는 말은 유대 백성을 가리킨다. 위 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에 전파될 것을
결론 하였는데 여기서부터는 유대 나라가 앞으로 당할 일에 대하여 특별히 말하고 있다.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백성을 상대로 계약하신
사실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이 언약은 장차 올 신약시대의새 언약의 예표라고도 할 수
있으나 유대 민족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유대 민족을 돌아보시며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말하기를, 내가 너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때에도 아직 바벧론에 남아 있는 유대인 포로들을 해방시키실 것을
예언한다. 물 없는 구덩이는 유대인에게 대하여 소망 없는 바벧론을 비유한다.
이 말씀은, 아직소수로 돌아와 있는 유대인들에게 위로와 힘을 준다.
슥9: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소망을 품은 이라는 말은 바벧론에서 유대로 돌아올 소망을 품었다는 뜻이다.
‘요새’는 실상은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다.
그 때에 유대는 말할 수없이 빈약한 사정하에 있었으나. 그곳을 ‘요새’라고 하는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이겠다.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는 것은,
앞으로 유대인들에게 주실 축복이 풍부할 것을 의미한 것 뿐이다.
슥9:13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많은 주석가들은 이 귀절부터 유대 나라가 유다 마카비의 지도하에서
헬라의 셀류쿠스 왕조를 승리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한다.
여기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이것은 전혀 그 전쟁의 힘이 여호와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힘을 주시어 골리앗을 이기게 한 것과 같이
그가 미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승전케 하시는 일은 역사상에 종종 나타났다.
한가지 실례를 들면, 그가 기드온의 삼백명을 통하여 미디아의 큰 군대를 이긴 것과 같은 것이다.
슥9:14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 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호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위하여 친히 그 권능으로써 전재하여주실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다.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하기 위하여 여기서 그의 동작이 번개, 회리바람 같은 현상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나팔을 분다'고 한 것은 그 원수들을 두렵게 한 것이다.
어쨌든 이 표현은 대종말에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원수를 남김 없이 정복 하실 위세를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행동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이든지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든지
그 성질과 방식은 동일하다.
슥9: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계속하여 원수들에게 대한 유대인의 승리를 진술함. '원수를 삼킨'다 함은 이긴다는 뜻,
'물맷돌을 밟'는 것은 원수들의 사격앞에서 두려움 없이 전격하여 용이하게 승리를 거둘 것을 가리킨다.
'피를 마심'은 승리를 비유, '즐거이 부른다'는 모든 승리 표시의 행동이 방종스러운 것이
아니고 조심스러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백성들이이 땅 위에서 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승리를
거두는 일이 많지는 않다. 그 이유는 영적 승리가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표본으로서 어떤 때에 세상 일에 있어서도 승리를 걷우는 일이 있다.
그건, 무척 경건 하게 싸워 나가는 중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어지는 일인고로
그 승리에 대한 그의 희열도 경건되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행하여진다.
슥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떼같이 구원하심은 자력으로 자기를 방위할 수 없는 양과 같은
자들을 오직 그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다.
그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무능을 깨닫고하나님을 목자와 같이 볼 때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그들을 돌보신다. 그들은 왕의 면류관에 보석이 빛남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을 빛낸다. 곧, 하나님은 다스리고 저들은다스림을 받는 관계가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세계에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슥9: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이는 윗절에 대한 결론이다. 은혜를 받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저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결과로 곡시과 새 포도주로 풍성하였다.
구약에서는 신령한 은혜를 이런 물질적 부요로 비유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