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김권능 목사 간증 P2

LNCK 2022. 12. 5. 15:45


◑서론 / 탈북자들을 한국에 망명시킨 김하중 대사 간증

☞출처 '나의 중보기도의 삶' 나눔  (tistory.com)


과거에 제가 주중대사관에서 공사로 3년간 재임할 때,
탈북자들이 한국대사관에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대사관은 탈북자들을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정부와 마찰 때문이었습니다.

제 회심은 1994년 주중대사관 공사 시절 북경 21세기교회에 다닐 때였고,
그리고 제가 2001년에 중국을 떠난지 6년 후에,  중국대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탈북자를 이렇게 계속 내버려두어서 되겠습니까?
탈북자를 우리 대사관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탈북자를 받으면,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몇 달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탈북자를 (대사관에서) 받아주어라’
그래서 제가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진입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2년 5월부터, 탈북자가 대사관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중국정부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고,
중국 측과 엄청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해서
탈북자 문제에 있어서, 절대로 북한 정부 편을 들었습니다. 
잡히면 무조건 북송시켰습니다.

주중대사관의 간부들이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대사님, 탈북자들을 대사관에서 받으시면 안 됩니다.
그들을 받으시면, 앞으로 한중관계에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래도 저는 주중대사의 직권으로 탈북자들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받으면서, 저는 계속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중대사로 있는 동안에, 탈북자 1천명만 받게 해 주십시오.”
(여기서 받는다는 뜻은, 한국으로 보낸다는 뜻을 포함함)

그래서 제가 대사관 전체 회의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탈북자들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명예로운 사람이, 탈북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이 순간에, 탈북자들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사람은
나(주중대사)밖에 없습니다. 또 주중대사관 직원 우리들 밖에 없습니다.

나는, 대사직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이 탈북자들을 구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천명의 탈북자를 한국에 보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요.”

▲제가 2008년 3월 2일에, 통일부 장관에 임명되어, 
주중대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대사관 직원들에게 ‘내가 주중대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2001~2008
한국으로 보낸 탈북자 수가 모두 몇 명이냐’고, 담당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때 대사관 직원들은,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 횟수가 435회에
한국으로 보내진 사람의 숫자는 1,065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회중 일제히 박수)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운 교섭을 하고, 중국 측과 줄다리기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한 번은,
탈북자가 우리 대사관에서 170명이나 머물렀었습니다.

170명이나 머무르니까, 대사관 직원들이 근무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장소도 비좁죠. 또 그들의 뒷바라지 하랴, 중국 측과 협상하랴.. 
거의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지금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안 보내줍니다.
하나님 정말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교섭을 해도, 교섭이 안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사부 문을 닫아라’

그래서 제가 한국 외무부에 건의를 했습니다.
‘탈북자 포화 상태로, 영사 업무 마비사태로, 영사부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본부가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사부 문을 닫으면, 한국으로 가는 비자를 발급하지 못하니까,
한국행을 바라는 중국인들이 발이 묶이는 것입니다.

본부에서는 아무런 공식적인 회신이 없었습니다. 사적 라인으로 알아보니,
‘대사가 현지 사정을 고려해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부에서 그것을 허락했다가는,
나중에 한중관계에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대사 직권으로 주중 대사관 영사부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지 않는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조치의 일환이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못 간다면, 
중국인들도 비자 발급 중지로 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영사부에 탈북자들이 너무 많아서, 
영사업무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중국에 있는 한국 교포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외교문제로 크게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사부 문을 닫은 날은, 총 15일입니다.
15일 만에, 중국 정부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 중국인들의 항의도 접수되었겠죠?)

‘탈북자 몇 명을 한국에 보내주면, 영사부 문을 다시 열겠습니까?’
‘60명만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먼저 탈북자 60명을 한국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물꼬를 튼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계속 매 회 60~80명의 대사관에 진입하여 
망명을 요청한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이런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제가 영사부 문을 닫아라고 명령하자,
우리 대사관 직원들이 깜짝 놀라했습니다.

‘어떻게 대사가 저렇게 담대하게 모험을 하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를 밝히자면.., 
이것은 성령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이었습니다.

...............................................................................

[북한선교] 김권능 목사님 2편 [김북한목사] (연락처02 934 5105) - YouTube

◈김권능 목사 간증 P2      마25:43          <북한 탈북민 선교 글 모음>   


*진행 : 김북한 목사 (괄호, 검은색 글자)
*출연 : 김권능 목사 (괄호 없음, 파란색 글자, 현재 인천 한나라은혜교회 담임)
....................................

 

    P1  click     에서 계속 

 

그러더니 "야, 그럼 너희들 여기서 원래 처녀 총각으로 중국 들어가서 만난거야?
아니면 여기서 가정이 있었던 사람인거야?" 그래서

"우리는 처녀, 총각으로 나가서, 중국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제가 '아, (임신8개월) 우리 아이도 살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요.
왜냐면 우린 둘 다 북한 사람이고
*북한에서도 6개월 이상 된 태아를, 낙태하면 살인죄로 걸리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그렇죠. 중국의 감옥에서는 낙태시키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감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르는 척 해 줘야 돼요.
성경공부 인도했다고 말을 안 해야 돼요. 입 다물어 줘야 돼요.

그런데 우리 방에 세 사람은 나를 아니까,
이 3명만 입 다물어주면 안 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 얼굴이 감옥 전체에 다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신의주 보위부 감옥

7월 27일은 북한의 전승절이잖아요. 공휴일이죠.                 *2001년 상황 
그래서 배구도 하면서 쉬었죠.

그러니까 우리 남자 수감자들을, 오후에 운동장에 다 불러내는 거예요.
7월이니까 팬티 바람으로, 다 손에 2인 1조로 수갑을 차고 나갔죠.
그래서 우리 수인들은, 마당에 세 줄로 모두 앉아 있었고, 배구를 관람했죠.


그런데 제가 찬 수갑이 고장 났는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제대로 안 걸렸어요.
그래서 보위부원이 '너희 나와!' 하더니, 우리 조를 뒤로 돌아서게 하고는 
제 뒤에서 수갑을 틱틱틱 소리내면서 수리를 하는 거예요.

제가 뒤돌아서서 보니까, 제 앞에 거기에 수인들이 가득 앉아 있는데,
제가 그들 앞에 졸지에 얼굴이 다 알려지게 된 거죠.

평소에 거기 감옥은, 자기 방 사람들 외에는 누가 누군지 서로 몰랐어요.
이제 모든 남자 수감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제 얼굴이 알려지게 된 거예요.

순간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제는 안되겠다. 내 신분을 속일 수가 없구나'
거기서 포기했어요. 

보니까 거기 앉은 사람들 중에, 성경공부 사역장에서 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또 제가 당시 서안 사역장 총책임자라서, 여러 사역장을 책임지고 있었거든요)

제가 서서 그들을 쳐다보니까,
이 친구들이 앉아서 저를 쳐다보면서
자기 턱수염을 손톱으로 뽑는 척하면서, 고개를 가로 젓는 거예요.
'모르는 척 해 주자!' 라는 싸인을 수인들끼리 서로 주고 받는 거죠.
 
그리고 그들의 소원은 '누가 여기를 나가서, 국제 사회에 우리 이야기를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이놈들이 제발 우리를 죽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였죠.
(*제가 그래도 외부로 연결된 선이 있다고.. 그들이 제게 기대를 걸었던 거죠)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상대의 수염을 뽑아주기도 했는데,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저보고 들으라고 하는 얘기였죠.

(*아~ 권능선생, 당신 만큼은 살아나가서, 우리 이야기를 좀 알려달라는 거죠. 
단순 생계형 탈북자는 곧 내보니까요.)


그래서 감방으로 다시 들어왔는데, 감방 동기 세 사람도 이제 두려워하는 거예요.
운동장에서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신고를 했으면, 
이제 자기들 세 사람도 처벌을 받게 되어 있는 거죠. '넌 왜 모르는 척 했어?' 하면서.

그래서 감방에 앉아 있는데, 수감자들이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나
물을 마시고 싶을 때, 소리 질러 간수를 부르죠. 
'선생님, 물 먹도록 배려해 주시겠습니까?'

그때마다 제 가슴이 철렁했었죠. '혹시 내 이야기를 고발하려고 부르는 게 아닌가?'


그런데 29일인가, 나를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나갔더니
제 앞에 종이 한 장을 꺼내 놓더니
취조원이 담배를 피우면서 '야, 말해라!' 그래서 
'네?'

'너 왜 탈북했어?'
'식량 사정이 어려워서요..'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안 했죠.

그러니까 '이 새끼, 너 전문학교 나온 새끼가 말할 줄 몰라?
어떻게 탈북했고, 어디에 가 있었고, 어느 쪽으로 국경을 넘었고, 다 말해!'

그래서 줄줄줄 말했고, 
그 취조원은 종이에 조금밖에 안 썼어요.

그때 사실은 제일 갈등 되었던 게 뭐냐면
'너, 중국에서 교회다녔어?'
이렇게 물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 그게 제일 문제 였어요.

'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해야하나?
'안 믿습니다!' 이러면 나는 주님 앞에 배교의 죄를 짓는 거고...

그런데 다행히 그런 질문 하나도 없이, 심문을 마쳤어요.
내가 누구인지 그들은 여전히 몰랐던 거죠.


그들은 한국 가려고 했던 사람들한테만 집중적으로 심문하고, 
일반 생계형 탈북민들은 그냥 빨리빨리 내보내더라고요.

그러더니 7월 31일 오후쯤 되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아무개 나와!' 

저는 또 조사받는 줄 알고 나갔는데 '짐 가지고 나와!' 그러는 거예요.

와~ 그때 내가 그 사람들 앞에 얼마나 그 양심이 무겁던지요.

(나 혼자 살아나간다는 그런 어떤 무거운 마음, 또는 죄책감이지요!)

북한의 죄 기준으로 따지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고
그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죄가 가벼운 사람들이에요.

그래서인지 나오면서, 그분들께 미안해서 인사를 못 하겠더라고요.

(저도 저만 나왔거든요.
그때 나를 보라보는 그 눈빛들.. 아~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앞으로 우리는, 천국가기 전까지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돼요..

(맞아요..)

그래서 나오면서 '나 먼저 갈께!' 하면서
얼굴도 못 보고 이렇게 나왔죠.


보니까 수인 자매들을 바깥에 데려다 놓고, 햇볕 쬐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몇몇 자매들도 나를 알잖아요.

저는 땅을 바라보면서, 제 옆에는 배가 부른 아내가 같이 나왔고요.

'이젠 됐다!' 하는 마음이었어요.
우리는 거기서 나오면 진짜 집에 가는 줄 알았거든요. 그건 착각이었어요!
그래서 가보니까, 진짜 감옥은 바로 보위부 앞에 있는 집결소 였어요.

이제까지는 보위부 조사하는데 있었던 거고, 
이제는 진짜 수감생활이 시작된 거죠.

정치적 안건만 없으면 밖으로 내보내는데,
집결소로 보내면, 거기는 형사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거죠.
저희 부부는 집결소로 보내진 거예요. 


거기 들어가 보니까, 집이 완전 새까만 창고였어요.
건물이 다 깨져 있었고, 양쪽으로 산이 있는 음지였고, 그래서인지 습기도 많고,
바깥으로 공기창만 조그맣게 있었고, 화장실은 들어가면 새까매요. 창문이 없어요.

거기 수감된 분들은 다 사람 모습이 아니었어요. 늘 이 잡고 있고...
그래서 얼마나 있었냐고 물었더니 '3개월, 6개월, 7개월, 8개월..'

그 말을 듣는 순간 '야, 큰일 났다!'

거기서 지내는데 벼룩 때문에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
양말을 벗어서 바짓단을 동여매고 했는데도, 벼룩이 못 들어가는 데가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고난이 시작됐어요.

며칠 있다가 병원에 데려가더라고요.
임신한 사람이 두 사람 있었거든요.

북한에서도 6개월 이상 된 태아를, 그 후에 낙태하면 법에 살인죄로 걸리거든요.
근데 우리 아이는 임신 8개월이니까, 나는 북한 법이 적용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병원에 데려가서 결국 낙태를 시키더라고요.

근데 8개월이니까, 나는 북한 법이 적용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병원에 데려가서 강제로 수술을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우리는 부부인데 왜 그러느냐?' 했더니
'야! 너희들 중국가서 만나서 임신했는데, 너희들 붙여주면 또 갈거잖아?'
(*그러니 부부의 연도 다 끊어라는 거죠. 각각 탈북 이전 남녀로 돌아가라는 거죠)
결국 자기네가 허락하지 않은 부부라는 거죠.
그래서 병원에서 결국은... 아들인데 태어나서 울다가 죽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마음이 어땠어요?)

힘들었죠... 그리고 나중에 풀려나서 탈북해서 중국에 있으면서 한동안
TV나 또 어디 길에서나 영아들 울음소리를 듣잖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내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어요.

(충격이 컸을 것 같아요...)

그런 시간들이 진짜 힘들었고, 하나님 원망도 많이 했고..
그런데 훗날에 보니까 '그래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통해,
모든 북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운 일들을, 나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입니다.

'네가 (북한선교 하려면) 너희 동족들이 어떻게 고난 당하는지 한 번 겪어 봐라!'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거기 보위부 소용소에서 기도를 했던 게
'만약에 하나님이 이 자리를 지나가게 하시면,
그때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했었어요.

그 기도가 올무가 된 건지, 또 감옥에 가게 된 거죠!

(그때가 주광호 전도사님이랑 같이 잡혔을 때죠?)

네, 그런데 그 분이 잠시 후에 거기를 떠나 이송되셨기 때문에,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누가 저 보고 '형, 권능이 형' 하더라고요.
제가 깜짝 놀랐죠!  

'얘가 어떻게 나를 알지?'

그런데 거기서 화부(수인들 밥도 짓고, 불도 때는 수인)를 보던 친구가
서안의 성경통독 사역장에 있던 친구 였어요. (나는 여러 명 대하다 보니 몰랐죠)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본 거예요.  *당시 나는 27세
자꾸 나한테 와서 '형, 중국 어디에 있었소?' 

 

(*권능선생은 2000년에 사역장을 나와서, 다른 다른 선교사를 도와

탈북민들을 한국에 보내기 사역을 했었음)

그래서 제가 '심양에 있었는데요'
그가 '심양 말고 또 어디에 있었어요?'
'서안에 있었어요!'

'아, 맞구나! 반갑소' 하길래 어떻게 나를 아느냐고 하니까
'제가 서안의 어느 선생 사역장에 학생으로 있었어요!' 그러는 거예요.

내가 또 쫄았던 거죠.
'이 화부가 나를 고발하면 어쩌지?'

왜냐면 화부는 우리 잠자리에도 안 와요.
화부 칸에서 자요.
그리고 우리 밥을 다 해주고.. 보위부원, 안전부원들하고 말도 다 통하고..
수감자 치고는 좋은 자리죠. 

 

그러니까 이 친구가 나를 신고할 수도 있잖아요.
이 친구도 잡혀온지 7개월, 8개월인가..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이 형제를 저보다 먼저 보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오히려 나를 많이 도와 줬어요. 할렐루야!

내가 금식을 못하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체포되어서부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계속 지낸 거죠.

부위부 수용소에서부터 계속 배식을 절반씩 깎아서 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집결소에 오니까
(*집결소는 여행지 이탈자, 여행기일 경과자, 부랑아, 사건 계류자, 강제송환 탈북자 
등을 조사하며 해당 거주지로 이송되기 전에 집결하는 곳)

완두콩을 삶아 주는데, 그건 영양가도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허기가 지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화부가 나를 부르는 거예요.
부엌으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들어갔더니, 삶은 옥수수를 한 가득 이렇게 주는 거예요.
야~ 옥수수의 그런 단 맛은 처음 느껴봤어요!

그런데 이 형제가, 그 훗날부터 계속 나를 불러내고, 
화장실에 둘만 같이 있을 때는 '나도 하나님을 믿소!
나도 몰래 기도하는 사람이요!' 라고 하면서
그때 제게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몰라요. 
   

 

거기서 배영호 라는 형제가 하루는 열이 나서 몸이 막 아팠었는데,
그가 하루는 제게 말을 걸어왔어요. '형, 형이 권능이 형이에요?'

제가 깜짝 놀랐죠.
'나를 어떻게 아니?' 하니까

'나도 권능이 형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도했소!' 라는 거예요.
(*배영호는 화부를 통해서 김권능 선생을 알게 된 듯, 성도는 서로 통하니까.

  배영호는 현재 한국에서 전도사로 사역 중)

'나는 가는 곳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구나!'
  
후에 거기 집결소 생활은, 강제 노동을 나가서
남자들은 팬티 바람으로 신발도 못 신게 하고,  *뛰어서 도망 못 하게 하려는 듯
그 밭 고랑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풀을 손으로 다 뜯어야 했고

그래서 8월 땡볕에 등짝이 다 데인 거죠.
다 물집이 생기고, 피부가 벗겨지고... 그러니 밤에 등이 따가워서 잠을 못 자요. 

그런데 보름 지났나? 20일쯤 지났나?
그때부터는 제 피부가 적응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도 붓는 게 아니라, 빨간 점만 표시되더라고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거기 집결소에서 풀려 나와서, 다시 나온게 10월이었죠. 
그때 다시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7월~10월 약 4개월 1차 수감, 2001)


(▲그렇게 북한까지 붙잡혀 가서, 정말 죽을 고생을 하다가 중국으로 넘어 왔잖아요.
그때 빨리 한국에 오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어요?)
 
제가 보위부에 잡혀 있을 때, (서원)기도를 했잖아요.
'하나님, 이 번에 저를 살려주시면, 저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겠습니다!'

근데 그 즈음에, 탈북자들을 한국에 보내시던 선교사님이 체포되신 거예요.

다음 번에 (한국)여권을 가지고 와서, 나를 한국에 데려간다고 하셨는데...
 
그다음부터 한국행 대기자 탈북민들이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선교사님의 조력자였던 나에게 연락이 오는 거예요.

'아, 하나님이 나보고 순교하라고 하시는가 보구나!
이제 다시 내가 (탈북자들을 인솔해서) 몽골로 가다가 체포되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살 기회를 안 주실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한국행을 포기하고, 중국에 계속 남아서 (순교의 각오로)
탈북자들을 한국에 보내는 일을 계속 하기로 했죠.  

(그래서 남아서 또 탈북민들을 한국에 보내는 일을 하다가, 또 붙잡힌 거잖아요?)


네, 또 붙잡혔지요. 그렇지만 제 마음은 힘들지 않았어요.
'양심의 가책보다는, 차라리 육신적 고통을 선택한다'는 것이 제 원칙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남들보다 먼저, 남들 밀어내고 한국행을 택하지는 않았죠)


그때 '2002년 3월 16일 사건'이라고 있었어요.  *김하중 대사 시절
25명의 탈북민들이 베이징 대사관에 막 뛰어들어간 사건이었어요!

그 사건이 생긴 이후, 중국 당국에서는
이런 자들을 엄격히 처벌하라는 지시가 내려 왔어요.

그래서 나를 첫 타겟으로 본 거에요.   *사전에 다 동향 파악하고 있었음
제가 하남성 정저우 에서 체포됐는데, 난리도 아니었어요.

'야, 중국 공안이 대단하더라고요. 그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내 위치를 알고 왔거든요.
내가 언제 거기 정저우에 들어왔는지도 다 이미 알고 있었고,

그리고 체포되어 호송을 하는데, 저를 비행기에 태워서 호송을 하고,
도착하니까 공항에 기자들이 막 나와 있었고,
왜냐하면 중앙에서 지시해서, 제가 그때 첫 번째 체포자였으니까요.

그래서 아직도 중국 사이트에 들어가면
내가 재판을 받는 사진이 거기 남아 있어요. 유명한 사건이 되었지요! 허허허


(그래서 중국에서 또 잡혀서, 이번에는 중국 인민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거죠?)

그랬죠. 처음 재판을 받을 때, '너는 그냥 북송될 거다!
북한 사람이 (제가) 이미 탈북을 한 북한 사람을
(몽골) 국경으로 넘겨 준 것이, 과연 중국 법에 어느 정도 어긋나느냐?
아직까지 이런 사례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너는 그냥 북한으로 내보낼 것 같다!'

그런데 혹시 중앙에서 이렇게 특별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인민 법원에서 몇 년 나올 수도 있겠다...' 라고 그들이 제게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2002년 12월에 재판을 받고서,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기다리는데, 아직 판결문이 안 내려 왔어요.

2003년은 '사스'가 대유행 하던 시기였어요.
중국에 사스(SARS)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고 감옥에만 계속 있었는데
1년 만에 판결문을 받으러 가니까, 12년이 나온 거예요.

12년 판결문을 받아서 방에 들어가니까
거기 사람들이 '어떻게 됐어?'
'12년 받았어요!'

그랬더니 '우와 잘됐다! 하면서 다들 제게 박수를 쳐주더라고요'

(왜요?)

북송되면 죽는 거잖아요.
북송보다는, 중국 감옥에서 12년이 낫다는 거죠.

중국 감옥은 사형이 많잖아요.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이 상소했을 때, 가끔 운 좋게 감형을 받아서
'무기징역' 이나 '사형 집행유예' 처분을 받을 때가 있죠.

그러면 그 수인이 아주 기뻐 소리를 지르죠. '우와~'
주위에서도 수인들이 다 박수 쳐 주죠. 그래서 그 분은 맛있는 거 사서 돌리고 하죠.

말하자면 제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없이 맛있는 거 사서 돌렸죠.

그렇게 사서 같이 먹으면서도, 속으로는 '제가 지금 잘 하는 건가?' 생각했죠.
나는 사실 그때 

'내가 (북한에) 호송되어 가도 좋다. 
과거에 내가 진짜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려고 한국에 가다가, 국경 근처에서 체포되어서 보위부에 앉아 있을 때,
그 괴로운 마음을 알기 때문에
이젠 북한에 가도, 나는 떳떳하다!' 

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부터 살려고 한국으로 가는 길에 잡힌 게 아니라, 
남들 도우는 선한 일 하다가 잡혔으니까, 심정으로는 떳떳했죠.

그런데도 재판을 받아서 12년을 살아야 한다니까
좀 캄캄한 마음은 있더라고요. 


(▲제가 알기에는, 탈북민이 중국에서 판결을 받으면
중국에서 형량을 다 채우고, 다시 북한으로 가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북한으로 북송이 안 되고
다시 석방되게 됐어요?)

그게 기막힌 일들이 많았는데, 사실은 내가 감옥에 들아가서
제일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그거 였어요.

'이제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 
들어가면 보통 사람들이 '얼마 살았니?' 하고 묻지 않고
'얼마 남았니?' 하고 묻거든요.

그리고 문이 쫙 열리고, 머리를 길러서, 집에서 보내준 옷을 입고 걸어 나가는게
교도소에서는 그게 제일 부러운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는 '너 얼마 남았냐?' 라고 묻는 게 문화였어요.
그런데 '나는 얼마 남았느냐?' 하는 게 의미가 없었어요. 다 채우면 북송이니까요.
그래서 미래가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까?'
그런 갈등.. 소망이 없다는 그게 아주 힘들었고,

두 번째로 힘들었던 것은, 
이용섭 선생과 같이 있었잖아요. 그 분이 4년을 받았고..

*김의환 총장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용섭 선생 (위 동영상 15분경)

♣순교자 이용섭 선생은, 1999~2002년까지 중국 '탈북민 성경통독반'에서
훈련을 받고, 탈북민들에게 사역장 책임자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했다.

이후 김권능 선생처럼, 탈북민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사역을 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김권능 선생과 함께 중국 감옥안에서 2년 생활한 후
북송되어 정치법 수용소로 끌려가 순교의 길을 가셨다.

(*이제까지 최광 선교사 성경통독반 출신 중에 순교한 분은 5분.
진칼빈, 박요한, 민선주, 장만식, 이용섭)
 
내가 12년 받은 거나, 이용섭 선생이 4년 받은 것은
판결하신 분들이 도와준 부분이 있어요. '넌 살아라' 하고!

북한에 내보내면 죽으니까.. 중국 감옥에 붙잡아 두면서 살게 하는 거죠. 


이용섭 선생은 원래 중국 형법상 죄목이 없어요.
왜냐면 그저 여권이나 비자가 없다는 이유 뿐이었죠.

그래서 내몽골 법원에서 판결을 하려다가 증거가 없으니까
북송을 시킨 거예요. *한국 가는 길에 붙잡힌 것임

그런데 도문(투먼)에 오니까, 이 사람은 북한에 가면 죽으니까
조선족 법원에서 기소를 한 거예요. 그래서 4년을 받았죠. (북한에 안 보내려고)

이 분이 4년을 받고 왔는데, 구치소에서 2년을 살고
그리고 감옥에 오니까, 이제 2년 밖에 안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분의 마음속에는 늘 불안이 있었어요.
항상 '나는 북송될 것 같아!' 날 보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자다가 자꾸 일어나서, '아 총살 받는 꿈을 꿨어요.
온 몸에 땀이 막 흐르고...'

사실 중국 감옥에 가면, 우리는 좀 대접을 받았어요. 
일반 형사범이 아니잖아요. 그저 여권과 비자가 없다는 죄 뿐이었죠.

그 사람들의 이해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을 살리려 했던 (쉰들러 같은) 사람들처럼
(북한 사람들을 한국에 보내려했던) 너희는 의로운 사람들이다' 라고 대우해 줬죠.

연변에 있을 때는, 거기는 사법기관들도 거의 조선족들이 다 관장하잖아요.
거기서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어요.
나를 잡은 공안도 나에게 와서 '미안하다' 그러고요.
심지어 나랑 친해지자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용섭 선생이 제게 '네가 발이 넓으니까, 약 좀 얻어다 달라'는 거예요.
'무슨 약이요?'

북송되어 갈 때, 두만강을 넘기 전에, 자기는 약 먹고 죽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건 우리 상식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자살하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가 북한에 나가더라도, 뭔가 마지막까지 전도의 말을 하고 죽어야지요.
왜 우리가 스스로 죽겠습니까?' 했더니

이용섭 선생은 '우리 딸하고 아들 때문에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에서 심문 받다가, 기독교 활동한 게 드러나면 가족들도 수용소에 가니까)
거기서 나는 말을 더 이상 못했어요.

북한 정권이 가장 싫어하는 죄(기독교 신앙, 김부자 우상화에 방해되니까)를
지은 사람들로 드러날 때, 그 자녀들은 생매장 되는 것이죠. 북한에서는.

그래서 이용섭 선생은, 연변 감옥에서 아직 형기가 9개월 남았는데,
어느 날 공안들이 와서 손 발 다 묶어서, 우리가 보는데서 질질질 끌고 나갔어요.

그 이유가 뭐냐면, 중국에서 '국제 난민 신청'을 한 거예요.
*이용섭 선생의 '난민신청서' *위 동영상 17:40초

그걸 한국대사관에도 보냈고, 중국 정부에도 올린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때가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주최하면서, 세계 눈치를 많이 볼 때였어요.

(그렇죠. 인권 문제 때문에!)

뉴스를 보니까, 국제 난민 조약에 의하면,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본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을 우려가 있으면 '난민 자격'이 되는 거죠.
그리고 중국은 '국제 난민 조약'에 가입된 나라고요.

'야! 이거 중국 정부에 난민 신청 하면 되겠다!' 생각한 거죠.

(너무 순진했었네요. 중국 정부에다 난민 신청을 했더니 오히려...)

그렇죠. 중국 측에서는 생각하기를
'이 사람을 데리고 있으면, 우리(중국) 측에 불리하겠다!' 판단하고,
아직 형기가 9개월이 남았는데도, 바로 석방시켜서 북송을 시킨 거예요.

저는 그걸 보면서 '이 세상에 과연 공의 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내가 지금 무언가를 착각하고 살았구나...' 뭐 이런 생각을 했죠. 
'(죄악) 세상은 왜 이렇지?' 하고 고민도 하고요.

그리고 내가 감옥에서 한국의 2002년 월드컵을 조금씩 TV로 봤는데,
골이 들어갈 때마다, 내가 지금 감방 안인지, 밖인지 몰랐어요.
연변 감옥이 다 조선족이잖아요? 

감옥이 떠나갈 것 같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다가 주위를 둘러 보면 
다들 반짝반짝 머리를 깎은 사람들 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재소자 삭발

그때 내가 거기서 느낀 게 뭐냐면
'사람들은 저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월드컵 축구)을 위해서도 저렇게 하나가 되고,
저렇게 울부짖는데, 

진짜 동족들이 죽어가는데 관해서는 
누구 하나 알아봐 주고 관심가져 주는 사람이 없네?'

이런 생각이 드니까 막 혼란스러운 거죠.
'도대체 이 세상에는 공의가 존재하는가?'
그때 그게 제일 힘들었고...

차라리 그렇다면 '내가 악인이 되어서, 악인들을 심판하는 일에 좀 사용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막 거기서 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편지 한 장이 들어왔더라고요.
'나는 네 고모다!' 이렇게 발신인이 표시되어 온 거예요.  

물론 우리 친고모는 아니죠.
그런데 또 친척이 아니면 편지 전달이 안 되니까, 

친척이라고 가장해서 편지를 써서 보내주는 거죠.

그래서 나도 답장을 썼죠. 그 보낸 주소로.
'고모님~' 뭐 이렇게 편지를 시작했죠.

그때 당시 내가 체포된 것이 짧은 뉴스로 나와서
어느 장로님께 그 뉴스가 전해진 것이에요.

장로님은 그 뉴스를 보고 '아, 이런 청년이 중국에 있구나!' 하고 
저를 위해서 기도를 했대요. 기도 중에 마25장에 
'너희는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마25:43
막 이런 구절들이 떠오르더래요.

그때부터 그 분과 편지 교제를 계속했는데,
'하나님이 게시구나!' 하는 것을, 제가 그때 계속 깨닫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분의 편지로 계속 김권능 선생을 어루만져 주셨네요...)

그때 제가 일기장에 썼던 게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할 때, 천사를 보내시고, 까마귀를 보내시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여기서도 나를 위해서 이렇게 일하시는구나!' 

 

그 은혜 때문에
제가 거기서 하루 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나는, 미래에 대해 소망을 두지 않고 (소망을 둘 미래가 없었지요)
지금 현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거기에 초점을 두고 살았고, 

그리고 가끔 교도소 3층에서 창문 밖을 멀리 바라보면
저쪽 건너편 아파트에 사람들이 작게 보였어요.

사람들은 그 자유스런 시민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출소하면 저렇게 자유롭게 살 거야!' 하는 희망을 품었지만, 

나는 12년 만기출소하면, 북한으로 북송되어야 될 처지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어떤 출소의 소망을 품지는 않았더랬어요.

그런데 거기 연변 근처 도문 감옥에서,  
재소자들이 매일, 매달 사고 없이 잘 지내면, 달마다 감형 점수를 줘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의 이름으로 거기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모범을 보여야 했죠. 그래서 감형 점수가 계속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2년을 교도소에서 감형을 받았어요.

그러니 다른 재소자들이 도리어 저를 걱정해 주는 거예요.
'너는 감형 받아서 빨리 출소되면, 북한으로 북송될 터인데 그래도 괜찮냐?'는 거죠.

그리고 저랑 친한 공안이, 그러면 열심히 수형 생활하지 말고,
자기 보는 앞에서 누구 뒤통수를 때리래요. 그리고 유리창도 깨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감형 점수를 다 깎아서, 원래대로 12년을 살게 해 준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는 '일단은 살아야 해!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 일단은 살아라!..'

그러면 제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죠.
'살까? 그래, 살아야 되겠다!' 그렇게 일기장에 적었죠.

그러다가 아침에 깨어나면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께 다 맡겨야지!'
뭐 이렇게도 하고... 결국 사고 치지 않고 2년 감형을 받았어요. 


(저도 그런 갈등을 많이 해봤거든요. 근데 그 갈등 속에서, 권능 선생은
'내가 그래도 크리스천 답게 행동을 해야지!' 하고 버티게 해 준 힘이 뭐였어요?)

그게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었죠.
일단은 처음부터 시작해서 '나는 주님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하고
내가 출소 후에도 탈북자 한국에 보내는 일을 다시 시작했던 것이고,

그래서 정저우에서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간 것이고..
그런데 감옥 생활이 길어지니까 살고 싶은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어언 (10년이 거의 다 차고) 7개월이 남았을 때, 
그때 최광 목사님이, 어떻게 알고 제 면회를 오신 거예요.

그때 당시에는 제가 스스로
'목사님, 저는 괜찮습니다. 이걸로 족한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은 못하고, 무슨 부탁도 못 드리겠고,
그리고 또 간수들이 다 듣고 있으니까.. 말을 맘대로도 못하죠.

목사님은 '그래, 알았어!' 하시고
막 손을 흔들고 가시는데, 쭉 나가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한쪽으로 기대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이 바깥에서 일 (구명운동) 하고 계시는구나!
나를 살리려고 하시는구나.. (북송 안 되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제 형기 만기일이 2011년 12월 20일이 거의 다 찬 거예요.
(*2002년 월드컵 때부터만 계산해도 거의 10년이 다 된 거죠)

정상적으로 나가면, 12월 19일 저녁에 나를 데리고 장춘역에 가서 기차를 타면
다음날 아침에 도문에 도착, 그러면 바로 변방대에 넘겨져서
바로 그 날 중으로 북송되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12월 18일에, 갑자기 공안들이 나를 부르더라고요.
1층으로 내려가면, 거기 '처벌방'이 있었어요.

거기 데리고 가서, 온 몸의 신체검사를 하더니 (건강에 이상 없음을 확인하더니)
수갑하고 족쇄를 채우더라고요.
'아 드디어 북송되는구나' 했죠.

나는 19일날 저녁에 나갈 사람인데,
18일날 점심부터 나를 지금 묶어 놓은 거예요.

'아, 이렇게 이틀 정도 묶여 있다가 북한으로 보내겠구나' 했는데,
19일날 새벽에, 비몽사몽 하면서 잠을 거의 못 잤는데,
나를 막 깨워요. 그러더니 차에 태우더라고요.

12월 19일이니, 장춘이 얼마나 추워요.
차가 히터를 켜도, 성에가 창문에 뿌옇게 꼈더라고요.
그러니까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는 거예요. 시야가 뿌옇게 자꾸 성에가 끼니까요.

새벽 4시에 출발한 호송차가 고속도로에서 빙판 길을 기어가고 있는데,
정상적으로 가면 오전 9~10시에는 도착해야 돼요.
그러면 바로 국경에 북송될 차가 준비되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1시 반인 거예요. 늦게 도착했죠.
그래서 북한에서 마중 나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중국측 호송대원이, 전화기를 쳐다보더니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야! 너네 김정일이 죽었대!'
그날이 바로 2011년 12월 19일이었어요.
이틀 전에 17일에 죽었는데, 발표를 19일날 한 거예요.

핸드폰으로 '중앙뉴스'를 보여주는데, 사실이었어요.
진짜 김정일이 죽은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제가 북송되기 직전에 그래서 제가 살아난 거예요.
왜냐면 김정일이 죽자, 북한에서 일제히 국경을 폐쇄해 버렸어요.
그리고 북한과 연락이 전혀 안 돼요. 북한에 비상사태가 발생한 거예요.

 

그러니 호송원들이, 저를 북한에 넘겨줄래야, 넘겨줄 수가 없게 된 거예요.
(*주님이 김권능 선생을 살리기 위해서, 하필 그 타이밍에 급변사태를 초래하셨네요) 

그리고 중국측에서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혹시나 급변 사태가 일어날까봐, 중국도 막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고 그랬죠.

그러니까 제가 중간에 붕 떠버린 상태가 된 거예요.

그래서 저를 어떻게 처리할 줄을 몰라서, 자기들도 쩔쩔 매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일단 호텔로 저를 데려갔어요. 
그날 낮에 하루 종일 호텔방에 감금되어 있었죠.

결국 그 날 밤에, 다시 넘겨진 곳이 연변 경찰서였어요.
감옥에서는, 만기가 되었으니까, 출소는 시켰고, 
북한에는 국경이 닫혀서 못 보내고, 제일 만만한 곳이 연변 경찰서였죠.

그때 당시에, 우리 부모님들은 다 한국에 나와 계셨어요.
그리고 다시 10년 전에 제가 재판받을 때 지냈던 구치소로 다시 나를 보내더라고요.
거기서 또 석달을 조사 받았어요.

(또 석달 조사라고요? 정말 진을 빼게 하네요..)

공안들이 제 조서를 보더니 '당신 죄목을 보니까 북한에 가서는 안 되겠네!'
이러면서 적극 협조도 해 주고..

그래서 결국 '국적 불명'으로 그 중국에서 풀려난 게
2012년 3월 16일 이었어요.

(결국 '국적불명'으로 합법적으로 풀려날 구실을 그들이 만들어 준 거군요!)

그렇게 해서 제가 나왔다고 하니까
한국 영사관에서 사진을 보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 한국 여권이 나왔어요. 심양의 한국 영사가 도와줬어요.

그래서 아시아나 항공 제일 뒷좌석에 앉아서 한국으로 나온 거죠.
그때가 2012년 4월 17일 이었어요.

(아! 그렇게 해서 드디어 한국에 나오셨군요!)


▲인천공항에 딱 도착을 해서, 바로 국정원 심문에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또 수난이었죠!
자꾸 저보고 북조선 간첩이라는 거예요.

왜 자꾸 죽을 데서 어떻게 살아 나왔느냐는 거죠.
(*죽을 사형수를 빼내서, 위험한 임무를 맡겨서 보내는 경우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북송 직전에, 김정일 사망으로 국경이 봉쇄되어 결국 풀려났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니까
그걸 로는 안 된데요. 그거 가지고는 안 되고, 자기를 더 설득시켜 달래요.

그래서 국정원 독방에 제가 이십 며칠 있었어요.
나중에 화가 나더라고요.

'당신네들, 중국에서도 나를 이렇게는 대우하지 않았다!'라고 했죠.

그래서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받고..
'당신은 북한 보위 사령부로부터 파견되었습니까?' 라고 질문할 때
가슴이 뛰면 안 되는데, 막 제 가슴이 뛰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제일 미워하는 놈들인데,
그들한테 내가 파견을 당했다니.. 너무 어이가 없었죠.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서.. 결국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오셔서 총신대원을 졸업하고
김권능 목사님이 되셔서 '인천한나라 은혜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냥 제가 감옥에서 배운 게 딱 한 가지가 있어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실 때 순종하자! 얻어맞고 하지 말고!'
(*거기 성경통독 사역장을 떠나서, 많이 시련을 당하고 얻어맞은 것 같아요) 

나는 원래 한국에서 신학원을 마치면, 중국에 다시 들어가리라!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선교지에서 일하던 사람이, 
현장을 놔두고 이런 (편한) 데 와서, 또 적응이 안 되는 면이 있더라고요.

거기는 막 긴장감이 팽팽하고.. 스릴도 있는 그런 곳에서 사역하다가요..

그래도 주님이 인도하셔서, 여기 인천에서 개척을 시작했는데.. 잘 한 것 같아요. 
우리는 빚을 진 사람들이라서, 우리 뜻대로 살면 안 돼요.
(*같은 통독반 동료 형제들이 순교했는데, 우리는 살았으니까, 
그들의 생명 빚을 진 사람들인 거죠)


(오늘은 인천한나라 은혜교회 김권능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인천한나라교회는 장로교 합동측이고, *총신대
노원한나라교회(김성근 목사)는 장로교 통합측인데  *장신대
그래서 사실은 같은 교단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중국에서 성경통독반에서 같이 공부했고,
그래서 교회이름도 같이 공유하는(한나라) 그런 교회입니다.
교회가 자매교회처럼 된 것이죠.
오늘 김권능 목사님 모시고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