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합3:1~6, 주님이 임재하시기 전에 먼저 심판 온다

LNCK 2022. 12. 9. 21:19

 ◈합3:1~6, 주님이 임재하시기 전에 먼저 심판 온다           여러 설교 정리

 

제4논쟁 2:17~3:6

제5논쟁 3:7~12

제6논쟁 3:13~4:3

 

 

◐제4논쟁 : 주의 사자를 보내신 후 주가 임하심  (2:17~3:6)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재건되고 *학개, 스가랴서,

약 70년 만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하여 성벽도 재건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과 신앙은 전혀 재건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지 100년도 넘게 지났지만

전혀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나타난 선지자가 말라기였습니다.

 

말라기는 당시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제물로 드리는 짐승은 온전한 것이어야 함에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성전에서 파는 온전하지 못한 짐승도 받아주며,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또 당시 백성들의 삶과 신앙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관이 아니라

우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렸느냐며 발뺌만 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끝까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보여줍니다.

 

본문 3:1-6절은 주의 사자가 와서 주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공의롭게 행하실 것에 대해 증거합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본절에 ‘두 사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사자’ 와 ‘언약의 사자’입니다.

‘내 사자’는 세례요한을, ‘언약의 사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내 사자가 하는 일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든사람들의 심령에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로서 회개케 함이죠.

 

이 표현에서 ‘내 사자’로 성취된 인물이 ‘세례자 요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역할이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대통령께서 일반식당이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신다고 할 때,

그냥 가서 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국가원수급의 인물이

레스토랑에서 식사가 있을 때, 그 레스토랑에 2주 전부터

매일 경호원들이 찾아와서 모든 것을 샅샅이 점검하고 준비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도 그렇게 준비를 철저하게 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행차를 앞두고는 수개월 전부터,

어떤 때는 수년 전부터 왕이 가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면 ‘언약의 사자’가 임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너희가 구하는 바’가 되시고,

‘너희가 사모하는바’가 되신다고 합니다.

 

이 언약의 사자가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풀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언약의 사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가 ‘갑자기 임하심(개역에 홀연히)’은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때에

곧, 메시야를 대망할줄 모르고 있던 때에

그의 오심은 뜻 밖의 일과 같이 되어짐을 의미합니다.

 

‘그 성전에 임하신다’ 함은, 그의 사역이 영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사역과 같을 것을 뜻합니다.

 

"언약의 사자"- 라는 뜻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구원 언약을 성취하시는 중보자를 가리킵니다.

 

2~3절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언약의 사자로 오시는 메시아께서 무슨 일을 하실지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금을 연단하는 사람의 불과, 표백하는 사람의 잿물에 비유합니다.

 

광산에서 금, 은을 캐내었다 해도 100% 금과 은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온갖 불순물이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녹이면,

거기에서 금과 은만을 추출해 낼 수 있습니다.

 

또 옷에 얼룩이 묻으면, 물로 빨았다고 해서 얼룩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양잿물에 푹 삶아서 방망이로 두드리면, 얼룩이 빠집니다.

 

언약의 사자는 금과 은을 제련하듯, 자기 백성에게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잿물로 얼룩을 제거하듯, 오염된 자기 백성을 정화하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심판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5절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이 모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모든 것이 합리화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적용 “주님의 임하심을 너무 좋아만 하지 마세요”

 

우리는 ♬불길 같은 성령이여, 이곳에 임하시고,

간구하는 우리에게 지금 충만하소서♪ 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주님이 나에게 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참 훌륭한 신앙이죠.

 

그런데 주님이 임하시는 게, 내 생각만큼 좋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판 후에 부흥 온다’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 임하실 때, 부흥이 반드시 옵니다. - 이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임하시려면, 정결하지 못한 곳에는 임하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 이것은 괴로운 일이죠.

 

그래서 우리는 ♬불길 같은 성령이여, 이곳에 임하시고♪ 이 찬송은

‘주여, 오셔서 나를 심판해 주소서!’ 라는 초청과도 같습니다.

 

물론 심판을 받고서라도,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이 내게 복이죠.

다만 주님의 임재라는 것이 그저 ‘솜사탕’같은 것만은 아니라는 거죠.

 

△이 말이 맞는 게, 주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세례요한이 보내집니다. :1

그가 하는 임무는 ‘주의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회개의 세례’ 였습니다. 회개 안 하면 심판받는 자는 거였죠.

 

눅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2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주님이 임하시면,

용광로의 불과, 표백제의 잿물 같다.. 역시 심판을 의미합니다.

심판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신다는 거죠.

 

여러분, 주부들이 손에 고무장갑을 끼는 이유가 뭡니까?

남자들은 튼튼하다고 그거 안 끼고, 표백제에 맨손으로 걸레 빨면

손의 피부가 다 벗겨집니다. 유한락스 같은 것은 아주 강하죠.

 

그래서 성도가 어영부영 신앙생활 하다가,

교회학교 부감도 되고, 성가대장도 되어서 이제 좀 열심히 섬기려 하다가

그 가정, 직장,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고, 파탄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있죠.

 

선교에 참여 안 했으면, 차라리 그런 파경은 없었을 것인데,

뭔가 자기가 해외선교도 참여하고, 교회 일도 헌신하려고 하는데,

축복은커녕, 오히려 파탄이 찾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부흥 전에 심판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쓰시기 위해서, 대장장이의 불과, 표백제 양잿물로

그를 심판해서 정결케 하시고, 회개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서라도 쓰셔야 하니까요.

그러나 정결하지 못한 상태로는.. 그를 쓰시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용광로 불로 정화되고,

양잿물로 씻어지는 고통을 내가 겪게 된다면

나에게 ‘주님이 임하시는’ 증거입니다.

당장 현실은 괴롭지만, 그것을 우리는 두 손 들고 환영해야 하는 거죠!

 

3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앞서 말라기는, 제사장(레위인임)들이 성전 제사를 올바르게 드리리 않고,

눈 먼 것과 다리 저는 제물을 바치는 것을 싫어하시며

‘누가 성전 문을 좀 닫아줬으면 좋겠다’ 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1:8~10

 

그렇지만 본문 3절은, 예수님이 오시면.. 다 정화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도 공의로운 제사를 드린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평양대부흥 때도 보았듯이, 다른 여러 부흥도 마찬가지죠.

주님이 임재하실 때는, 먼저 ‘회개하는’ 일들이 반드시 선행되었습니다.

 

5절에는 ‘내가 심판하러 임하겠다’고 주님은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임하시는 목적이 은혜도 있지만, 먼저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으면, 본문을 통해서

그런 오해를 교정해야 합니다.

 

‘주님이 임하시면 큰 축복이다’ 네 그건 맞는 말입니다만, 오해일 수 있죠.

‘주님이 임하시면 크게 작살난다!’ 이것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두들겨 맞고서라도 회개하고, 돌이켜서,

주님의 임재가 강하게 역사하시는 권능있는 사람들이 되면 (행1:8)

그게 결국은 내게 복이죠.

‘주님이 임하시면 큰 축복이다’ 맞는 말입니다.

 

다행히 평양대부흥 때는.. 크게 얻어맞기 전에 다들 회개하고,

임재해 오시는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회개하지 않고 살다가는

주님이 오셔서, 마치 도끼로 찍어내시듯이 찍으셔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불로 태우셔서...

그 다음에 부흥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로 가나, 모로 가나.. 결국은 부흥이지만

도끼로 그 뿌리를 자르기 전에.. 자신해서 회개하는 것이 복입니다.

대장장이의 불에, 세탁자의 양잿물(표백제)을 통과하기 전에

자진해서 회개하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3:2~3

 

그래도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받아서, 얻어터지고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불길 같은 성령이여, 간구하는 우리게’ .. 찬송을 힘써 불러야 하겠습니다. 173장

 

여기 이 세상에서 만약 불심판을 받지 않으면,

나중에 죽어서 저 세상에서 만약 불심판을 받는다면.. 그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제5논쟁 : 십일조를 도둑질 함 (3:7~12절)

 

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과 유다 백성들의 반응이 첨예하게 대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시고,

유다 백성들은 “우리가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갑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예배를 그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규례, 말씀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남은 ‘급성 떠남’이 아니라

‘만성 떠남’이었습니다. 그래서 떠나 있어도 떠나 있었던 것을 모르는 거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8~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유다를 지탱하는 두 영적인 기둥은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선지자 직이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이라면,

제사장직은 일상적인 간섭하심이었습니다.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교감을 했습니다.

그 중간에 매개체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로 제사 제도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와 헌물, 헌금을 드림은 내가 살아가는 힘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살겠다는 고집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재물이 탐나시고, 짐승과 곡식이 탐나셔서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바침이 그들에게 더 큰 복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의 청지기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용 : 십일조에 대한 소고

십일조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함부로 말했다가는 호되게 욕을 먹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각 교단이나 담임목사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일반적인 개념을 논하고자 합니다.

 

△십일조를 반대하는 (미국 사람들의) 주장

-십일조는 구약의 규례라서, 신약에서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10을 드린 것은, 일회성의 드림이었지

매달 정기적으로 드리는 십일조로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아브라함 때는 아직 율법(십일조)이 제정되기 전이라서,

이 사건을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야곱의 십일조 약속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시며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눅11:42

그러나 이때는 ‘골고다 십자가 사건 이전’이며

예수님의 공생애도 아직 ‘구약율법 시대’ 아래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일조를 반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십일조 같은 헌금을

아예 드리지 않는 것 또한 (똑같은 반대) 극단일 수 있죠.

 

신약에 주일예배를 지키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의 정신을 계승한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서 정한 안식일은 토요일이고, 신약교회는 율법은 폐해졌지만,

율법의 정신은 계속 계승해서 지키되, 부활하신 주일로 대체해서 지키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가르치실 때

‘구약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율법을 버리지 않으셨죠.

그래서 ‘미워해도 살인’이고, ‘음심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신약에 폐하여 졌지만, 십자가로 율법을 영단번에 이루사

그래서 우리가 짐승을 잡아 드리는 번제를 드리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율법의 정신까지 모두 다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 12지파가, 십일조를 드려서, 한 지파인 레위인들을 먹여 살렸던

십일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꼭 계승되어져야 한다는 거죠.

 

오늘날 레위인 제도도 폐지되었지만,   *제도는 폐해졌지만, 정신은 남아 있음

레위인처럼, 주님으로부터 풀타임 사역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꼭 있습니다.

 

만약 신약성도들이 그런 ‘신약의 레위인(풀타임사역자)들을 돌보기를 꺼리면

기독교의 쇠퇴는 불보듯 뻔한 거죠.

구약 때도 12지파가 십일조를 내지 않았을 때, 신앙의 쇠퇴기가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율법으로서의 십일조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율법의 십일조 정신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아예 필요 없는 것은, 하나님이 구약 때부터 아예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게 필요하니까, 구약 때부터 그 규례를 주신 것이고,

신약 때는 그 “정신 meaning”을 계승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십일조를 내면, 물질적 복을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십일조를 내는데, 왜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안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내는 분들은, 그것을 다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헌금 정신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입니다.

물론 십의 십조(10/10)를 드린다는 표시로, 십일조를 드리는 거죠.

 

예수님이 고귀한 피 흘려서 나를 억만 죄악 가운데 구원해 주셨는데,

내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게 하등 아까울 게 없죠.

 

그렇지만 신약의 십일조는 “강요, 강제”될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모든 헌금은 “자발성”이 그 근본정신입니다.

 

십일조를 의무화 한다든지, 안 내면 불이익을 준다든지 하는 것은

'헌금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모든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고,

자원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아직 믿음이 어려서 그런 거죠.

그러니 은혜 받고, 자원해서 헌금 드릴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가톨릭은 십일조가 없고 대신에 ‘교무금’이 있습니다. *교인의무헌금

십일조란 말은 안 쓰지만, 비슷한 형식의 헌금입니다.

어떻게 걷는지 모르지만, 아마 해마다 자원해서 작정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가톨릭도 교무금을 걷는 이유는,

그게 없으면 교회 유지가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개신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이유는, 교회유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보니까, 가톨릭교회가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 때 많은 헌금을 걷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교인들이 원하면, 교회에서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을 교회식으로 치러 주되

대신에 많은 헌금을 내야 교회식으로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결혼, 장례식 하기가 어렵죠.

부자들만 하게 되죠.

그러나 교회는, 또 교회 유지를 해야 되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헌금을 걷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집니다. 그때는 자발적으로 내니까요.

 

△이제 다 지나간 과거 얘기지만, 과거에 40년 전에,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를 대단히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잠시 한 번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강조하신 말씀, 계명을

그 중요도 순서로 순위를 매겨서 나열하면, 십일조는 몇 번째 정도일까요?

 

1위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이 될 것이고

거룩하라는 명령,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명령

선교하라는 명령,

구제하라는 명령,

기도하라는 명령,

말씀을 읽고 지켜라,

찬양하라는 계명,

모이기를 힘쓰라는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뭐 이런 것들이 상위권에 랭크될 것입니다.

 

십일조 드리라는 명령은 (그것이 신약에 성경적이라 가정하더라도)

아마 20위권 밖으로 밀려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 40년 전에 교회는

그게 마치 예수님의 최상위 명령에 해당되는 것처럼,

반복해서 강조하던 시절도 한 때 있었죠. 다 지나간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그럼 정말 십일조가 안 들어와, 교회유지에 차질이 빚어지면 어떻하죠?

하나님은 우리 개인/공동체에 꼭 필요한 물질은, 분명히 채워주십니다.

 

개인/공동체에 물질이 모자란다... “그 범위 안에서 사역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마 90% 이상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10% 다른 예외가 있겠죠)

 

우리 개인/공동체/선교지에

꼭 필요한 물질은, 주님이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까마귀를 동원해서라도 물어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단기간/장기간 물질의 부족 현상이 나타나면

‘그 주어진 범위 안에서 사역을 꾸려나가라’는 것입니다.

지나고보면, 주님이 항상 옳으셨습니다!

그게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신 것은..

지나고 보면, 다 주님 뜻이고, 도리어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면, 물질이 부족해서.. 사역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지만

똑같이 물질이 넘쳐나서.. 사역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공급해 주십니다!

모두 아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쁘게 자원해서 수입의 10%를 드립니다.

왜냐면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는 것이 즐겁고,

또 그걸 드림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물질적 축복을 넘치도록 받고,

힘든 사역지에서 고생하는 사역자들을, 조금이나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6논쟁 : 주를 대적함과 경외함 (3:13~18)

 

https://rfcdrfcd.tistory.com/15980526 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