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강의가 끝나고 이어서 고창환 목사께서 두 달간 각 사역장을 다니며 교회사와 조직신학 강의를 해 주셨다.
고목사는 작년과 올 해 8월에 이어 12월 중순에 *2000년 경 세 번째로 우리 사역장을 방문하였는데 지난 번에는 더위로, 이번에는 추위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중국은 우리 같은 온돌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각 사역장 마다 바닥에 골판지나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 겨울을 나곤 했다.
추운 날씨에 집안에 온기라고는 전혀 없으니 옷을 있는대로 껴입어도, 체온이 다 빠져나가 몸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며칠간 계속 강의를 하니 나중에는 혈액 순환이 안 되어 고목사는 다리에 마비가 오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신학교 한 학기 분량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의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가르쳐주었다.
8개 사역장을 일일이 다 다니며, 한 사역장에서 일주일씩 강의하였다.
사역장마다 선생들도 이런 좋은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잘 없으니 어찌나 열중하여 듣는지 목사님이 피곤한 것이나, 본인들 힘든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도 주무시지 못할 정도로 계속 강의를 요청하며 별의별 질문들을 다 쏟아 놓았다.
고목사는 작년에 처음 와서 북한 형제들을 난생 처음 만나며 사람에게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그 지식이 사람을 망친다는 것을 절감했다. 형제들이 북한에서 받은 제한된 교육 때문에 바른 마인드로 세상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한 번은 세계교회사를 마치고, 한국교회사를 가르칠 때 였다. 아무 생각 없이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선생들이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목사님 목사님, 아무리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조국해방전쟁이 우리 북조선에서 일으킨 전쟁입니까? 남조선 괴뢰도당이 미국놈들의 사주를 받고서 일으킨 전쟁이 아닙니까? 우리가 못 배운 사람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그렇게 거짓말 하면 됩니까?'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 하는 문제에서 목사님과 북한 선생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생기며 어떤 선생들은 냉랭한 경계심까지 나타냈다.
목사님은 무슨 말로 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설명해 줘야 할지 난감했다. 반세기 동안의 세뇌는 무서웠다. 김일성에게 무섭게 속아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려서부터 주입된 생각을 바꾸기는 정말 어려운 모양이었다.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선생들에게, 목사님은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형제들이 알다시피 전쟁이 일어날 무렵 북한 군에서는 수백대의 탱크가 있었어요. 잘 훈련된 기계화 부대가 있었고 잘 훈련된 정규군이 50만명이나 있었고, 소련제 비행기까지 있었어요. 완벽한 전쟁수행 능력이 준비 되어있었던 거죠.
반면 남한군은, 그때 군대를 창설한 지 2년밖에 안 됐고 탱크는 고사하고, 전 군이 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남한 군에서 무엇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단 말이에요?
그리고 남한 군이 치밀하게 준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면 어떻게 전쟁 시작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북한의 전쟁도발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객관적 근거들을 거론하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근거가 명백한 설명임에도 선생들은 끝끝내 전쟁은 남한이 일으켰다고 고집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절대로 지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심리학적으로 뭐든지 처음 배운 지식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북한 선생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렇게도 잘 믿었지만 625 전쟁을 북한이 일으켰다는 것은 절대로 믿지 못했다.
그때까지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은, 70독까지 읽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적으로는 새로웠지만 지식적인 면에서는 이렇듯 아직 옛 모습 그대로였다.
이들은 주입식 세뇌 교육만 받아왔기에, 모든 사고체계가 피동적이며 자발적으로 자기 생각을 열어갈 능력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제한된 사고체계를 넓혀 주며 이들에게 뿌리박힌 유물론적 세계관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바꿔주는데 강의 초점이 맞춰졌다.
고목사의 열강에 부응하듯, 선생들은 성경통독을 통해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에서 지식적으로 헝클어져 있는 것들이 차츰 풀리는 경험을 하며 정말 기뻐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 가득하던 눈빛이었는데 강의를 듣고 난 후에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기쁨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고목사는 그 모습들에서, 그 동안 제대로 쉬지도, 잠자지도 못한 고생들이 일순간 사라지고, 정말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또 고목사는,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며, 역사적인 종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생들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발견하고,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때가 각 사역장마다 3기생 학생들이 선생으로 세워지는 때였다. *2001초 나는 화산에 올라가 새로 세워진 순교선생팀 선생들을 북한 선교사로 임명하는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서안에서 북쪽으로 13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화산은 *華山, 华阴市 중국에서도 5대 명산에 들 정도로, 그 경치가 아름답고 봉우리가 높은 산이다.
고목사와 함께 산에 몰랐을 때는,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었다.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산벼랑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파놓은 돌계단을 밟고
산 정상까지 올랐다. 장장 5시간에 걸친 산행이었다.
고도 2160 M인 낙안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구름이 바다처럼 아득히 펼쳐진 사이로 산봉우리들이 섬처럼 듬성듬성 솟아 있었다.
마침 저녁 해가 떨어지는 때라, 발아래 구름 바다는 장미빛 저녁 노을로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다.
발밑 먼 곳에서 저녁 노을에 물든 눈꽃송이가 우리를 향해 날아올랐다. 눈꽃송이 들은 우리 봉우리를 에워싸며 빨려가듯 하늘로 오르다가 높은 허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꿔 땅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모두 넋을 잃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산으로 떨어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고 또 부르며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목청껏 기도했다.
떨어져가는 태양이 아쉬운 듯, 먼 곳을 향해 연신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지르던 선생들이 흥분해서 말했다. '선생님, 멋있슴다. 멋있슴다.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멋쟁인 줄 몰랐습니다. 아이고 선생님, 이제 우린 죽어도 진짜로 진짜로 여한이 없슴다!'
해가 떨어진 후, 산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 산장에 숙소를 잡고 순교선생 팀 8명 형제들을 선생으로 임명하는 예배를 드렸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워 지던 그 순간 어떤 선생은 감격하여 울었다.
'하나님은 정말 고마우신 분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린 정말 찌꺼기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북한선교에 첫 장막을 여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다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저기 쓸데없는 김정일을 위해서도 총폭탄이 되겠다고 날뛰고 다녔는데 이제 하나님을 위해 못 할 것이 뭡니까? 아까울 게 뭐 있습니까? 우리 다 함께 한번 해 봅시다. 북한선교 해 봅시다!'
이날 밤 선생들은 잠을 자지 않았다. 계속해서 찬송가를 부르다가 기도했고, 기도하다가 다시 찬송 했다.
한 겨울 산꼭대기에 위치한 산장이라,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마당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고, 방은 몹시 추웠다.
하지만 찬송과 기도의 뜨거운 열기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이제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밤새 숙연한 마음으로 부르고 또 불렀던 이 찬송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바로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그렇게 산장에서의 겨울 밤은 깊어만 갔다.
♣북송 되는 두 선생
'선교사님, 저희들을 파송 지켜주십시오. 저희들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겠습니다!'
화산에서 선생 임명 예배를드린 후, 이제나 저제나 파송을 기다려오던 순교선생 사역장 선생들이 나를 볼 때마다 하던 말이었다.
이들은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통독 훈련, 기도훈련, 설교 훈련, 리더십 훈련 뿐 아니라 파송을 대비해 각자 장기 금식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을 파송 한다면, 또다시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체포될 것만 같아서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후 파송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 강하게 파송을 요구했다. '선교사님, 우린 이미 하나님 거지, 우리 거가 아닙니다. 그렇게 목숨이 아까워서 갈 데도 못 가고 이러고 있다면 어떻게 북한선교 합니까? 이제껏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지 이렇게 계속 공부만 하자고 훈련받은 거 아닙니다. 선교사님 빨리 보내 주시오! 한 명도 안 잡히고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나는 단호한 이들의 태도를 보며,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송 예배를 드린 후 간곡히 부탁했다.
'지금 북한 보위부와 중국 공안은, 우리 사역장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고 우리 사역장을 찾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부디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고 또 유의하세요.
학생들을 모집할 때, 특히 조심하세요. 절대로 완전히 신원 파악이 안 된 학생의 요구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1기 때 칼빈선생과 요한선생도 그러다가 납치되어 갔어요. 그러니 부디 조심, 또 조심 하세요.
한 걸음 걸어도 주님, 두 걸음 걸어도 주님! 모든 것을 주님을 의지하고, 꼭 주님께 기도하고 일을 진행하세요!'
'선교사님, 일 없습니다. *아무 문제 없다는 뜻 너무 걱정 마십시오. 주님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무서워하는 건 믿음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다. 무릎을 꿇고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하는 모두의 눈에, 눈물이 그득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의 피로 맺어져 한솥밥 먹으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던 정이 듬뿍 든 형제들이었다.
울며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잘 하자'고 결의를 다지는 모습에 파송예배 때면 늘 그랬듯이, 나는 또 한 번 울컥 격정이 일었다.
서안역에서 그들을 배웅하고, 한 선생, 한 선생 안아주며 무사히 잘 다녀오라 했지만,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2001년 3월 13일.. 이렇게 이들은 연변으로 떠났다. *3개생들 이들이 떠난 후, 학생모집 진행 상황을 지휘하고 선생들이 체포되지 않을 안전한 학생 모집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나도 곧 (연변으로) 뒤따라갔다.
그러나 순교 선생팀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다급한 전화가 왔다. '선교사님 이걸 어떻게 합니까, 효선선생과 봉이선생이 체포되었습니다. 빨리 손 좀 써 주십시오. 예? 그 선생들 북한에 잡혀 나가면 죽습니다. 죽어요. 어떻게 키운 선생 들인데...'
팀장 순교선생은 전화하며 내내 울었다. 연변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차 안에서 두 선생이 체포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황망히 북한접경지역인 도문에 계신 모 장로님(조선족)께 전화를 드렸다. 만약 두 선생이 북송된다면, 반드시 이곳 변방 구류소를 거쳐 가기 때문에 이곳에 유력인사들을 알고 계신 장로님께 두 선생이 북송되지 않게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하지만 장로님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선생은 곧장 북송되고 말았다.
순교선생 팀은 기차에서 효선선생과 봉이 선생을 잃어버리고 나머지 신소광, 김기철, 김예진, 박에녹, 신재록, 이호열 선생들은 무사히 연변까지 도착했다.
예진선생은 눈 치료 때문에, 당분간 학생모집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연길에 도착한 순교선생은, 조선족 이우열 선생의 누나 집을 근거지로 삼아 제자 선생들을 지휘했다.
하지만 며칠로 공안들이 밤에 갑자기 들이닥쳐 순교선생과 소강선생, 우열 선생 (그리고 매형을 도와 함께 학생모집을 하던) 소강선생의 처남을 체포해갔다.
우열선생의 매형이 한국 선교사인 나를 신고해서 돈을 받아 내려고 공안인 친구와 사전에 합의한 것 같았다.
공안들이 우열선생의 매형을 앞장세워 급습했을 때 나는 이미 그곳을 떠나 후 였다.
그날 저녁 (체포 조금 앞서) 내가 그 곳에 이르자 순교선생과 소강선생이 서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는 절대로 체포되면 안 된다며 다시는 연변으로 오지 말라고 등떠밀어 보냈기 때문이다.
공안들은 내가 있는 곳을 캐내기 위해 순교선생, 우열선생, 소강선생과 그의 처남을 수갑을 채워 파출소로 끌고 갔다.
순교선생이 소강선생에게 말했다.
'소강선생, 이제 우리는 건져 줄 사람도 없고 공안에 잡혔다고 돈 내고 빼 줄 사람도 없어. 우리 이대로 모든 것을 안고 북한까지 가게 될 거 같아!'
안색이 어두운 소강선생을 위로하는 순교선생의 말이 없다. 그러나 소강선생도, 순교선생 못지 않게 의외로 담담했다.
'그런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보게 되면 하나님의 무슨 계획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순교선생님!'
'그래 소강선생, 무슨 하나님의 계획이 있겠지! 우리 한번 푹 믿고, 가는 데까지 가 봅시다. 뭐!' 순교선생은 오히려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느 때 같으면 멀리서 공안 차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상하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으로부터 알 수 없는 평안이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이런 위기의 때에, 곁에 서로가 있다는 것이 새삼 더 귀하게 여겨졌다. 이것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려니.. 생각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다.
파출소에 도착하자, 조선족 우열선생은 곧장 풀려났고 *신분증이 있으니까 공안들은 내가 있는 곳을 대라고 순교선생과 소광선생을 계속 심하게 때리며 추궁했다.
이들은 내가 있는 숙소에 위치도, 내 핸드폰 번호도 다 알았지만 가혹한 매질에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하룻밤을 파출소에 있다가, 곧바로 흥안 간수소로 넘겨졌다. 간수소로 넘겨진 다음날부터 공안국에서 파견된 공안들이 계속 취소했지만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한 것은 사실이고, 선교사님도 연길에 나왔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선교사님은 전도 하시느라 한 곳에 있지 않고 항상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닙니다. 우리로서는 어디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설사 안다 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삽니다! P2
'이 새끼들아, 말하면 말하지.. 무슨 말들이 많아?' 공안들은 아무리 때려도, 이들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자 마지막에는 전기 곤봉을 동원했다.
몇 차례 전기 충격에 몸이 비틀어진 순교선생이 고함을 질렀다. '야, 너네들도 사람 아니냐? 그러면 너네도 스승이 있지 않았나? 한번 바꿔 놓고 생각해 봐라. 너네라면, 이렇게 막 때린다고 스승 팔아 먹겠니? 우린 어차피 북한에 나가면 죽는다. 우리는 이래도 저래도 어차피 죽는다. 아무래도 죽는 거 우리 선생만은 살린다!'
그러자 공안이 이들의 뺨을 휘갈긴 후 취조를 포기했다. 그런 간수소에 한 번 들어가면, 무조건 40일을 채워야 한다는 중국법 규정상, 취조가 끝났음에도 이들은 그곳에 계속 갇혀있어야 했다.
40일 후, 두 선생은 곧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소광선생은 간수소에서 나오면서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순교선생과 처남을 처음으로 보았다.
머리를 빡빡 깎이고 죄수복을 입은 순교선생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순교선생을 불렀다.
'순교선생님!' '소광선생!' 순교선생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우리 (북한에)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 가는 것 같아!' (*순교선생은 북한에서 생계형 탈북자로 분류되어 곧 석방,
재탈북해서 한국으로 건너와 목사 됨)
간수들이 두 선생을 용정 변방대로 이송하며 말했다. '너희들 크게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갔다가 또 오라. 잡히지 말라!'
두 선생은 이틀을 변방대 감방에 있다가 북한 회령의 보위부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학생모집을 위해 선생들을 연변으로 직접 보내는 이런 방법은 순교선생과 소광선생 뿐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선생이 체포될 것 같았다.
그래서 위험한 연변지방에 선생들을 파송시키지 않고 용섭선생 한 사람만 조용히 보내 연길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연중 모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용섭선생이 조선족 교회전도사 들과 협력하여, 학생들을 모집해서 보내주면 서안 쪽에서 내가 그들을 맞아 선생들에게 인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사역장을 세워 가기로 했다. (*연변에서 서안까지 2천 킬로+)
순교선생과 소광선생이 체포된 후, 나는 새로운 학생모집 시스템 마련을 위해, 오랫동안 연길에 머물러야 했다. 그동안 서안에 있는 5개 사역장의 여러 일들은 성근선생과 규홍선생이 맡아서 잘 처리하였다.
♣영성 강의와 화산 기도회
연길에 한달여를 머물며 새로운 학생모집 시스템을 마련해 놓고 4월 중순 다시 서안으로 돌아왔다.
새로 세워진 3기생 선생들은, 학생들을 인계받아 사역을 시작하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2001년
이들은 이미 성막강의 와 교회사 강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사명감에 충만한 북한선교사로 준비되었다.
하지만 말씀과 함께, 이들을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무장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나는 간절했다.
그래서 신학교와 신학대학원 선배인 표정은 목사가 나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와서 영성 강의를 해 주었다.
이번 강의대상 사역장은 모두 5개로 누가선생과, 교웅선생, 예진선생과, 정선생, 성근선생 사역장을 각각 한 그룹으로 묶어, 각 그룹별로 1주일씩 강의가 진행되었다.
장소는 다른 사역장에 비해 넓은 편인 교웅선생 사역장 아파트 였고 어머니께서 직접 가셔서, 강사 목사님과 15~20여명의 선생들 식사 뒷바라지를 도맡아서 섬겨 주셨다.
강의 첫날부터 우리 선생들은, 고넬료가 자기 식구들과 친구들을 불러 놓고 사도 베드로를 모시는 사모함으로 강의를 들었다.
아침부터 밤12를 넘어서까지 하루종일 강의가 계속되어도 선생들은 지치지도 않고,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했다.
참여한 선생 대부분이 신약 70독~ 100독 이상, 구약 30독 이상의 통독과 400~500절 가량의 말씀암송으로, 이미 말씀이 충만 했고 매일의 기도 훈련을 통해 마음밭이 충분히 기경된 상태였다.
목사님의 강의를, '추수 날에 시원한 냉수를 마시듯' 단 마음으로 들으며 쌓여있던 이들의 성경 지식은, 아름다운 건축물로 세워져 갔다.
영혼의 영성, 육체의 영성, 물질의 영성, 대인 관계의 영성, 성령의 이중적 사역 등의 강의를 통해 선생들의 편파적 성경지식이, 유기적 통합적 지식으로 취합되었다.
한 그룹 강의가 끝나면, 일주일 강의가 영적 실제가 될 수 있게 화산으로 기도훈련을 떠났다.
5개 사역장 선생들을 두 조로 나누어 두 번에 걸쳐 화산에 올라 산상기도회 뿐 아니라 순교선생팀 3기 선생들처럼, 그곳에서 공식적인 선생 임명 예배를 드릴 예정이었다.
이때 하준복 목사가 성경책과 여러 신앙서적을 가지고 사역장이 들어와 함께 등반을 하였다. 봄이라 올라가는 돌계단이 미끄럽지 않아 지난번 보다는 훨씬 덜 고생스러웠다.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지난 번처럼 산장 지하에 있는 큰 방에 모여 표 목사의 인도로 저녁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기도회가 시작되자, 성령님께서 먼저 표 목사에게 산에 오를 때, 안내를 맡은 중국 자매에게 잠시 음란한 생각을 가졌던 죄에 대한 부담을 주어, 형제들 앞에서 그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하셨다.
목사님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깨끗해야 한다고.. 전부 회개기도를 시켰고, 통성으로 기도하게 하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해 주셨다.
그러자 주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강림하심 같았다.
모든 선생들에게 방언이 터지고, 예언, 방언통역 등 각양 은사가 임했다. 알코올중독자인 최대중 선생은 방언을 받고 너무 좋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으니, 이제부터는 술 끊고 신앙생활 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웠고, 사모하는 심령을 만족해하시는 성령께 감사드렸다.
기도회를 마무리하며 새로 세워진 3기생들을 선생으로 임명하는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새로 세워진 선생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하였다. 이들이 기염을 토하며 부르짖는 설교내용은, 단순했지만 힘이 넘쳤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북조선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런 단순한 논리들을 나누며 열광했고 자신들도 이제는 북한 선교사로 세워졌다는 것에 매우 감격해 했다.
나도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이들 식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나님 만세 만만세! 기다려라 북한아, 우리가 간다!'
그리고 모두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되어 '이 시간도 북한으로'를 뜨겁게 불렀다. *익명의 탈북선교사 곡
눈물을 흘리며 손에 손을 잡고 밤새 이 찬양을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렀다.
♪오늘도 멀리 타향길에서 복음을 안고서 예수님 십자가 그 사랑 전하러 가노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인도하시네 흰 눈길 밟아가면서 이 시간도 북한으로
오늘도 또 가야 하는 길, 복음을 안고서 새벽 미명을 깨뜨리며 진창 길 밟아가네
예수님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을 안고 평화의 기쁨 전하려, 이 시간도 북한으로 하나님 부르심 받들고 발걸음 가볍게 고난을 이겨가면서 즐겁게 찬송부르네
예수님 재림 기다리며 환난을 이겨가면서 모든 것 주께 맡기고 이 시간도 북한으로 이 시간도 북한으로, 이 시간도 북한으로♪
이 노래는 1998년 주광호 선생이 나를 만나기 직전 길림에서 같이 살던 김철수라는 형제가 북한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가기 위해 40일을 금식한 후 작사 작곡한 찬양이었다.
철수형제는 주광호선생에게 이 곡을 가르쳐주고 곧장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 찬양을 주광호선생에게 배운 후, 우리는 사역장에서는 계속 이 노래를 불렀다. 새벽기도 때, 저녁기도회 때 불렀고, 기쁠 때도 슬플 때에도 불렀다.
양식이 떨어져 막막한 가운데 금식하며 불렀고 공안의 호구조사로 위험할 때도, 이 노래후에 서로 손잡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후에 서안에서 76명이 일제히 체포되었을 때 감옥에 갇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막막한 가운데도 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 사역장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찬양이었고 나와 모든 형제들의 신앙고백이었다.
부를 때마다 많이 울었고, 듣는 이들도 많이 울었다. 표목사님은 이 찬양을 듣고 즉석에서, 북한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내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내 아래의 땅은 철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버린 북한과 주님을 잘 섬긴 남한과는 마치 심판과 축복을 구분해 놓은 것 같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신28:23
또한 고난을 통해 영성이 깊어지며, 고난이 영성의 최고봉이라고 하시며 (장차) 큰 시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날 기도회와 함께 선생으로 임명된 선생들 대부분이 훗날 체포되어 북한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의 감옥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찬송부르고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북한선교는 북한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람에게 복음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북한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세기동안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내가 북한 형제들을 처음 만났을 때, 외국인도 모자라 하물며 외계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또한 아무리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북한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보다는 본능적으로 북한 선생이 해주는 말을 더 신뢰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키우신 북한 출신 선교사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온 우리 선생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배운 것 없고, 거칠고, 사나운 이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일을 해내고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었다.
이제 우리의 사역은 바야흐로 4기 사역으로 접어들었다. 사역장 인원도 무려 5백 여 명으로 불어날 것이다. (*1기 8명 → 2기 약28명 → 3기 약 80명 → 4기 약 5백명(예상)
나는 북한선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교의 기도지원군, 소록도 북성교회
날로 확장되어가는 사역을 생각하니 우리 사역을 위해 밤낮 없이 기도하고 계시는 소록도 북성교회에 남권사님이 보고 싶어졌다.
1992년 내가 대구 신학교에 편입했을 때 동기 전도사의 소개로 남권사님을 기도의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권사님은, 나의 사역과 우리 가정을 위해 전적으로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 북성교회의 수석 장로이신 남효선 장로님, 강석환 집사님 등 다른 성도들도 나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셨다.
중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소록도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권사님 과 장로님 그리고 성도님들을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니 장로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순교의 각오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북한선교 아닙니까. 선교사님은 현장에서 순교의 자세로 사역하세요. 우리는 여기서 순교의 자세로 기도할게요!'
그 후부터 북성교회에 부탁하는 기도제목들은 전부 응답이 왔다.
나는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새벽 2시 건, 3시 건 무조건 북성교회에 전화해서 기도 부탁을 드렸다.
밤낮 없이 혼신을 다해 기도를 올려주시는 이분들의 공로는 우리 사역에 가장 큰 힘이었다.
나는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칠 때마다. 소록도 북성교회에 중보기도를 부탁하며 어려움을 이겨내곤 했다.
-어머니가 온 몸이 마비되어 위독하실 때, - 1기생 선생들 파송을 앞두고 칼빈선생의 폐병으로 사역장의 해체 위기 때, -칼빈선생과 요한선생, 선주선생이 체포되었을 때 -제남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권능선생의 형제들이 체포, 북송되었을 때 -다윗 형제가 귀신 들려 발악할 때 -2기 때 갑작스런 호구조사로 사역장에 안전이 매우 위험해 졌을 때 -3기 때 사역장을 한 번에 여러 개 세우며, 많은 물질이 필요했을 때 등등
소록도성도님들의 기도와 함께, 그 어려운 고비고비를 넘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북성교회는 꼭 들렀다.
선교상황을 자세히 보고하며, 성도님들의 기도를 통해 형제들이 안정을 찾고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 모두 자기 자식 일처럼 기뻐하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많은 기도 부탁을 받고 많은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왔지만 북한 사람들 한 영혼, 한 영혼을 붙잡고 기도하는 이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냐고..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하셨다.
나름대로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며 성의를 표시하려고 하면 중국과는 여비와 사역비에 보태라며, 오히려 나를 더 많이 물질로 섬겨주셨다. 70세가 넘은 분들에게 정부에서 매달 삼 만원씩 지급하는 돈을 모아 두었다가 주시는 피눈물 나는 돈이었다.
소록도에 들릴 때마다, 나는 이분들의 헌신적 기도와 사랑에 매번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사역장에 형제들도,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남장로님을 비롯하여 북성교회 성도님들께 편지를 써 주었다.
형제들은 사역장이 안전하고 말씀의 은혜가 매우 큰 것이 장로님과 많은 성도님들이 24시간 쉼없이 올리는 중보기도의 열매라고 감사의 편지를 드렸다.
형제들은 병과 싸우고 있는 소록도 성도님들에 대한 눈물 나는 소식을 들으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중보기도를 드렸다.
기도 속에서 매일 영으로 교제를 나누다보니 한 가족같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떤 형제들은 '꼭 우리 친척 형제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것 같다'고 하였고 남장로님의 이름을 따서 붙인 최효선 형제는 장로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고 했다.
형제들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말씀을 믿고 많은 기도제목을 써 보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주님의 종이 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역장 형제들의 이름과 구체적인 형편을 자세히 적어 보내며 '꼭 잊지 말고 기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선생들도 있었다.
또한 이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사역을 책임진 나를 위해 전날 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울러 앞으로 북한에 복음의 불길, 말씀의 불길, 성령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라 북한의 모든 영혼이 구원받으며, 북한 땅에 기근과 저주가 끊어지도록 힘써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하나님께서 소록도 북성교회 성도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북한에 놀라운 변혁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그분들의 기도의 수고를 위로하였고,
북성교회 성도님들은 '탈북자들을 통해 복음의 씨앗이 북한 땅에 뿌려져 저 땅이 다시금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부흥할 것이라고'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