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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5:1~11 아브라함 증후군

LNCK 2023. 1. 18. 19:04

아브라함 증후군 - YouTube

◈아브라함 증후군           창25:1~11, 갈3:1~2          2015.01.02.

 

어떤 사람은 이런 관점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신랑 그리스도와 정혼한 상태이고, 
신랑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참된 자기 신부를 "구별, 분리"해 내는 것이라고요.

이런 관점의 방점은, 
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확장보다는 (물론 이것도 구별, 분리를 위해 필요하지만)

 

그런 숫적 확장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목적은
알곡 성도의 분리,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분리, 좁은 길을 가는 성도의 분리,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분리, 좋은 밭 성도의 분리(구별)에 있다는 거죠.


............................................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죽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근데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증후군"을 남기고 죽습니다. 

아브라함 증후군은 어떤 것이냐? 
이 땅에서 자기 마음을 뺏어 가는 가장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기 마음을 죽여가는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 증후군' 이에요. 
죽이는 이유는, 그것들에 대해서 소홀하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땅에서 사는 동안에,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기 위해서 

이 땅에서 자기의 마음을 빼앗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죽어 가는 것, 자기 마음을 죽이는 것...   

그래서 일어난 게, 번제단 쌓기와 에셀나무 심기 등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번제단을 쌓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여호와 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과 다르지요. 
베르테르의 증후군이란, 그 책 내용처럼, 주인공을 따라서  
유명인의 죽음에 동조하는 죽음이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자기 마음을 연예인이라든지, 유명인이라든지 
우리가 요새는 그게 제대로 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님들을 향해서도 '저는 목사님 팬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목사님 팬이면 안 돼요. '목사님 덕분에 예수님 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지요. 

'베르테르 증후군' 이라는 거는 
그렇게 유명하고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에게 
내 마음을 빼앗기는 거예요.

'스톡홀름 증후군' 이라는 것은, 나를 사로잡는 인질범에게 
마음을 뺏기는 건데, 다 자기 마음을 뺏기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걸 영적으로 보면, 
마귀가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잡고 저주로 끌고 가고 있는데 
그 마귀 역사에 동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무슨 증후군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다 그런 것들이지요...
무슨 우상같은 것에, 자기 마음을 다 빼앗겨버리는 것이지요.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뺏기는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증후군"은 뭡니까? 어디에 마음을 뺏기는 겁니까?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에요. 
유명한 사람에게, 인기 연예인에게, 무슨 유명 목사님에게 뺏기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온통 다 뺏기는 것입니다.

자기는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뺏기는 것 

그래서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번제단에서 끊임없이 죽여가며 사는 삶,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사느냐/ 죽느냐를 어디에다가 두고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마음을 이 땅에 있는 것들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느냐/ 아니냐?' 

언제? 
지금 이 순간에!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내 마음을 뺏앗아 갈 수 있는 하는 것들이 있어요. 
베르테르 증후군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따라 자살하는...) 에서 처럼
이 세상에는 매력적인 사람들,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많지요. 

내 마음을 끄는 많은 것들이 있는 이런 세상에서, 
내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뺏어 가면, 내 생명이 죽어버린다.. 라고 보는 거죠.
 
▲오늘 본문은 이상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제 자기 죽음에 가까이 오면서, 어떤 행동을 취하냐면 
사라가 죽고 나서 그두라 라는 후처를 얻게 됩니다. 

그 후처에게서 여섯 아들을 낳게 되고 
창25:1~4 에는 그 여섯 아들의 이름과, 그 손자들의 이름이 쭈욱 나열이 돼요.

근데 이 많은 자손들을,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 집안에서 다 내보냅니다. 

재산들을 다 나눠 줘 가지고, 적당하게 재산을 분배해서 다 나눠주고 
아브라함 자기가 죽었을 때는, 오직 집 안에 이삭만 딱 남게 만들어요.   

이제 여기서 우리가 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뭐냐면, 
이 그두라 후처에게서 난 자식들이 결국은 아람 사람들, 

즉 아라비아 북부 ~ 팔레스틴 동부 ~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퍼져 있는 
아람 자손들의 조상들이 되고, 

12절부터 나오는 하갈의 이스마엘 자손들은, 아랍 사람들이 조상이 됩니다.   

근데 그들이 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자손들이 에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들에게 아브라함이 여호와 신앙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삭에게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 주고 
이스마엘이나 그두라의 자식들에게는 
여호와 신앙을 안 알려 줬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근데 하여간 그 뒤의 역사를 보면,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들 말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 주변이 다 지금 누구냐 하면, 
에서의 후손들도 에돔 땅에 머물게 되는데 
그들도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아닙니까? 
근데 그들에게 여호와 신앙이 하나도 없어요. 

가정 교육적 차원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교육했을까/ 안 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러한 문제 제기에, 답을 해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구분, 구별"입니다.                       

참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분해 내는 겁니다. 
근데 이상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분해 냅니다. 

그두라 라는 후처가 낳은 자식(아람인)들이나 
애굽 사람으로서 사라의 여종이었던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그 자손(아랍)들이 
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난 자손들입니다. 

근데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이삭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내보냅니다. 
지금 결과로 보면, 다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회교권이 되었습니다. 

이 구분, 구별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열방에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먼저 구분이 없으면 될 수가 없는... 성취가 불가능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으로서 구분됨이 없이, 
아브라함 자손 중에서도 언약의 자손으로서 구분 됨이 없이 
통합하고, 화합하고, 일치하는 것은... 바벨탑 사건의 재현일 뿐이에요.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하게 구분되어야 하고 
그 구분 되기 위한 차별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완벽한 차별화가 유지되는 가운데 
다른 자들을 동화(전도)시켜 나가는 것이지 

이 언약의 자손인 아브라함 자손 중에서도 
언약의 자손으로서의 차별화가 없어진 상태에서 
한 밀가루 반죽처럼 뭉치고 화합하는 것은, 
아브라함 자손의 멸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차별화의 내용이 뭡니까? 
그게 바로 "아브라함 증후군"이라는 거예요. 

베르테르 증후군과 다르게, 스톡홀름 증후군과 다르게, 
리플리 증후군, 스탕달 증후군과 다르게, 

모든 증후군이 이 땅에 있는 것들에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거라면, 
아브라함의 증후군은, 이 모든 증후군과 다르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드리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난 뒤에, 자기 마음 없이 세상을 살 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빈 자기 마음 자리에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들어오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삶을 이끌어 나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을 이제까지 보면 
창25장에서 아브라함이 죽는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죽는 순간까지 아브라함의 삶은, 
전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언급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려간 삶이에요. 

이게 '아브라함 증후군'의 삶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쥐고 가시는 겁니다. 

'내가 복을 주겠다. 내가 이끌어주었다. 내가 땅을 주겠다. 내가 자식을 주겠다...' 
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내가 네 아내를 지켜주겠다!' 이렇게 전부 다! 

아브라함의 부메랑  (tistory.com)

   

이렇게 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서, 일을 잘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거죠.

목회를 할 때도 어떻게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무나 끌어들여서는 안 돼요.
 
지금 아브라함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엄청난 부흥이 일어난 겁니다. 
그두라 라는 첩을 통해서 많은 자식들을 낳고 
하갈-이스마엘을 통해서 많은 자손들이 번성되었는데 
그 후손들을 다 하나로 끌어 모으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부흥'이잖아요. 

그런데 그 후손들을 다 하나로 뭉뚱그려서 끌어안고 있지 않고, 다 내 보내요. 
이삭 하나만 남겨 둡니다. 

자기가 죽은 다음에 이삭과 그 형제들끼리 싸움이 일어날까 봐 
미리 다 정리하고, 이삭 하나만 남겨 둡니다. 

그리고 이삭 하나에게만, 여호와 신앙을 전수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여호와 신앙이 야곱에게, 요셉에게로 내려갔어요. 

우리가 목회를 한다 그럴 때도 
사람을 끌어모은다는 생각은, 성경에 없는 얘기라는 거예요. 

그럼 뭐 하는 거냐? 
약속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내는 거죠. 
사람을 무조건 많이 모으는 게 아니라는 거죠! 
물론 그렇게 찾아내려면, 구별해 내려면 많이 모아야 하겠지만요...

   

▲그래서 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군분해 내기 위한 
"차별화 작업"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계속 일어나는 거에요.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애굽에서 200만 명 이상이 돼가지고 출애굽 하지 않습니까? 

출애굽 할 대, 장정이 60만 명이었는데, 60만명이 광야에서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아브라함 증후군'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죠.
즉 다른 사람 모두가 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 있는 가나안 땅에 
자기 마음을 뺏겨 버리고 정탐 보고를 하는데 

이 여호수아와 갈렙 만큼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보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에서 사울왕과 다윗을 비교, 구분해 냅니다. 

또 할례를 받게 합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의 증거가 할례입니다. 

근데 사울은 할례받은 효과가 하나도 안 나타나요. 
다윗은 할례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 갑니다. 

왜 사울이 그랬습니까? 골리앗에게 마음을 빼앗긴 거예요. 
적이지만, 사람(골리앗)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겨 버린 거죠.

'와 저 사람 싸움 되게 잘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에게 동화되어 가지고, 꼼짝을 못 해 버립니다. 

△신약에 와서 본격적으로 또 시작이 됩니다. 
신약에 오니까, 육체적인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상태죠.

그리고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진 이스라엘 자손만 모여있는 공동체였어요.
근데 이 이스라엘 민족만 모여있는 공동체 안에서..
 
약속의 자손인 이삭으로부터 시작된 공동체 아닙니까! 
첩인 그두라의 자손도 아니고,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섞여 있는 것도 아니죠.

순수하게 이삭의 자손들만 핏줄로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근데 여기서 또 갈라냅니다. 구별해 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 그러냐면 지독한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서
'독사의 자식들아!' 그래요.

'아브라함의 자녀들아!' 라고 불러야 되는데,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불렀어요.
'독사의 자식'은 무슨 뜻이에요?

스톡홀름 증후군 걸렸다는 거죠. *인질범에 동화되어, 그를 이해하는 것
'마귀가 지금 너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 
너희들이 지금 마귀에게 동조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 아비가 마귀니까, 너희가 그대로 마귀처럼 행한다. 
만약 너희 아비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아브라함은 너희가 나한테 하는 것처럼 이렇게 행하지 않았다.'  

왜? '내가 하늘에서부터 와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데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것을, 내가 듣고, 보고,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면, 내게 이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을 하늘에 두지 않고 있고 
이 땅에 무엇인가 빼앗겨 있기 때문에 
분명히 베르테르 증후군이나, 스톡홀름 증후군 등 
그 어느 증후군 중의 하나에 걸려 있기 때문에 

'너희에게서는 아브라함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라고
요8:30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게 또 사도바울에게 가면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4장에서는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냐? 라고 할 때
믿음이라는 말을 쓰고, 

믿음이 뭐냐? 라고 할 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부활시키신 그 하나님을 믿는 것,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는 거죠.
이렇게 얘기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를 내립니다. 

근데 왜 십자가(자기 죽음)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어요.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나타납니까? 

베르테르 증후군으로 나타나든지, 다른 어떤 증후군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놓치는 순간, 반드시 이 땅에서 이런 여러 가지 증후군들이 나타나죠. 

심지어는 자기 자식에게 마음이 뺏겨서 살다가, 
갑자기 자식이 죽든지, 자기를 결별하고 떠나버려가지고 
엄마인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살 맛이 전혀 안 나고 있다... 
이게 바로 베르테르 증후군이 연장선상에 있는 거예요.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온통 다 뺏겨 가지고 
그 사람(자녀)에게 일어난 일이, 자기에게 그대로 동조가 되고, 공감이 되고, 
공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 그러냐면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아주 분명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뭐라 그러냐면 
갈3:1절에 이제는 교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갈라 냅니다.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어떻게 갈라 냈습니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아브라함 자손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자들,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가라지)로부터 
알곡 아브라함의 자손을 골라냈습니다. 

'속으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돌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이게 세례요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죠.

이렇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또 알곡 아브라함의 자손을 갈라내는데,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을 또 갈라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로 치면, 
교인들 가운데서 또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별해내는 거예요. 
갈라내야 돼요!

▲목사님 중에서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분들이 종종 있죠.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

'예배당을 크게 건축 합시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긍정의 마인드를 가져라' 이게 다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거짓말로 설교하고, 거짓말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냐면 
교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갈라내는 기준입니다.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인다는 게 무슨 뜻이죠?

성도가 자기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지금 현재의 사건으로 보고 있는 자들, 

그러니까 지금 그 골고다 십자가를, 현재 사건으로 보면서 
내가 지금 저렇게 죽어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거예요.

갈3장을 잘 들여다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냐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갈3:7

근데 믿음이 뭐냐?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현재 이 순간에 보고 있는 자입니다.
자기 죽음을 오늘의 현재 사건으로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 십자가가 아브라함 자손의 판별 기준이 됩니까? 
십자가를 지금 내가, 현재 사건으로 보고 있지 않으면 
아브라함 증후군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베르테르 증후군 이나 스톡홀름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자기 마음이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십자가가, 현재 내가 죽어 있는 사건이다. 매달려 있는 사건이다.. 라고 볼 때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서, 그 순간에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고, 비로소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증후군이 나타나는 그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과거 2천년 전의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을, 
지금 현재 사건으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지금은.. 영원히 이어지는 게 '지금' 아닙니까! 
매순간 내가 살고 있는 모든 시간이 '지금'인 거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떠나게 해서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 속으로 내려와서 
당신의 주체성을 표현해 나가시면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삶이고, 아브라함 증후군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내 마음을 다른 증후군 들로부터 건져 내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증후군이 나타날 수 있도록!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그래서 금년 한 해 살아가면서,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요거 하나만 제대로 하면 돼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 갈2:20
이거 하나만 하자는 겁니다.

다르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요것 하나만 하자는 겁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끌어 가실 거예요. 

아브라함 증후군이 나타나야 돼요.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고, 
가는 곳마다 번제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내 사라를 아예 고향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에서 떼내고, 

아브라함의 부메랑  (tistory.com)

롯과 헤어질 때 그 당시에 그렇게 중요한 땅에 대해서 
자기 마음이 죽어버리고... 

그리고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으로 호의를 베푸는 왕의 호의를 거절합니다. 
왜요? 
하나님께 근거는 재물만 받기로 작정했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재물이 아니면 안 받는 것입니다. 
이삭도 자기 마음에서 죽여 버리고, 그래서 여호와 이레로 드리고

그리고 며느리를 구할 때도, 자기 눈과 귀와 입을 봉쇄해 버리고... 

이게 다 '아브라함 증후군'입니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난 '아브라함 증후군'입니다. 

이 아브라함 증후군이 우리에게도 나타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회 하는 분들은, 목회를 성공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아브라함 증후군이 나타나기를 위해서 
그리스도 십자가가 지금 현재 사건으로 자기 마음에 드러나게 하고 

자꾸 다른 거를 신경쓰다가 보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흐려지는 거예요. 밝히 보이지 못하게 되는 거죠. 갈3:1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일에 주력하면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때분에 걱정하느라고 십자가가 시야에서 흐려지면 안 돼요. 

자식 키우는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때문에 염려가 되는 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도록 해야 돼요.

다른 모든 세상 것들을, 내 마음에서 떨쳐내는 위한 기도를 많이 하면 돼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의 증후군이 나타나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의 삶을 이끌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죽었으니까,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 아브라함이 살던 방식의 삶을 내가 살아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금년 한해 내내, 완전히 아브라함의 증후군으로 꽉 찬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내가 2천년 전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그 사건이 
현재화 되어서, 내가 세상에 대해 죽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서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내 마음이 살아 있음으로써 
내게서 끊임없이 아브라함 증후군이 나타나는 
아브라함 자손으로서 살아갈 2015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