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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부메랑 2899

LNCK 2011. 3. 4. 13:22

◈아브라함의 부메랑            창20:1~18        07.01.08.인터넷설교스크랩, 출처



◑서론

 

▲아브라함의 부메랑 효과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애굽 왕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려받습니다.   창12:15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부메랑이 돌아오듯이, 또 아내가 돌아오게 됩니다.  창20:5


이상하게 아브라함은, 하여간 버렸다하면 돌아옵니다.

독자 이삭까지도 던지고 버리는데.. 또 되돌아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나, 물질이나, 땅이나.. 이런 것들을 집착해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주인공이라서

온통 자기 눈에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

그 상태에서.. 자기 마음에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다 버립니다.

다 버리는 데..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옵니다.


▲성도도 버리는 삶을 살면, 다시 얻게 됩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19:29


이 말씀이 선포되기 벌써 2천 년 전에,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던 겁니다.

집이나 전토를 버렸습니다. 아내를 버립니다. 땅을 조카 롯에게 버립니다. 다 버립니다.

그런데 몇 배로 되돌려 받았습니다.


오늘도 아내를 버렸는데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하는 때와 똑같이

큰 재산을 아내가 받아가지고 돌아옵니다.  창13:2, 20:14


예를 들어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주고,

사라의 수치를 보상하는 대가로 은 1천 세겔을 줍니다.    :16


그런데 그 당시 노비가 한 사람이 은 20세겔이었습니다. (요셉이 은 20개에 팔렸음)

그러므로 은 1천 세겔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재산입니다.

노비 500명을 거느릴 수 있는 그런 재산 아닙니까?

이런 막대한 재산을 도로 묻혀가지고 돌아옵니다.



◑본문 설명


▲그런데 여러분, 참 본문이 이해가 안 되지요?  

①앞서 창12장에서도, 애굽의 바로 왕 앞에 그 아내를 보냈다가,

되돌려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20장에, 이제는 그랄 왕 아비멜렉으로 그 대상이 바뀌어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뭐하러 별로 좋지도 못한 일을 2번씩이나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이 설교문의 주제)

 

②더 이상한 것은,

지금 사라는 거의 90세입니다. (정확하게 89세)

아비멜렉 왕이 90세가 된 할머니를 데려간 이유가 모호합니다.

경수가 끊어졌다고 했는데, 폐경이 된 것입니다.


이 아비멜렉 왕도 할아버지라서 그랬을까요?

그 당시 문화는, 늙고 성숙한 여자를 좋아했었나요?

그러나 성경이 그 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으므로, 일단 넘어갑니다.  주1)


③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바로 왕 앞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를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한 마디도 아브라함을 나무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치졸하고 비겁한’ 아브라함을,  (그런데 저/설교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 아내를 왕 앞에 자기 누이라고 속이면서 들여보내는

이런 행동에 대해서.. 어쩌면 하나님은 이렇게 단 한 마디도 말씀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공평의 저울이 무너진 것입니까?


▲많은 주석가들이,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불신앙과 잘못됨을 지적하려고 애를 씁니다.

저/설교자는.. 그런 관점과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창20장을 죽 읽어볼 때 느껴지는 느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역정을 내시고, 화를 내시는 것은.. 아브라함에게가 아닙니다.

아비멜렉 왕에게 입니다.


‘너! 그 여자 건드려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될 것이다.’ 라고 엄포하시고

이미 그의 집안에 모든 여자들의 태를 막아 버리셨습니다. 벌써 저주가 임했습니다.


아비멜렉 입장에서 보자면,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니, 자기에게 거짓말하고 누이라고 말한 건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에게는 한 마디도 꾸중도 안 하시고,

아비멜렉 자기에게만 야단치시니..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뭘 잘한 게 있다고

아비멜렉 왕으로부터 나올 때, 사라가 그 많은 재산을 갖고 나오도록 하시는 겁니까?



그 해답이 13절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모든 아브라함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키가 13절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꾸중을 듣고, 또 자기 집안에 태가 닫히는 재앙이 임하자,

아비멜렉이 난리가 나서, 아브라함을 불러가지고

"내가 너한테 뭘 잘못을 했기에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느냐?" 라고 따질 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는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20:13


아예 바로 왕/아비멜렉 왕 앞에 갈 때, 그때 처음으로 얘기한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는 상황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이미 아브라함은 이미 사라에게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자,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 담고

믿음으로 고향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버립니다.


떠나려고 하는데 고민과 번민이 생깁니다. 어떤 고민입니까?


당시에 그 치안부재의 상태에서 (지금도 그곳은 납치, 약탈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가족이라고는 아내 사라 밖에 없는데

이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분명히 힘 있는 자들이, 사라를 빼앗아 갈 것이고,


또 이동하면 그 당시에 이방인으로서 거주하게 되는 곳마다

자기가 힘없는 이방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텐데,


이 상황에서 아내 사라는 당연히 뺏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불 보듯 뻔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고민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할까? 갈까, 말까?


▲자, 이런 상황에서 고민할 때, 3가지 유형이 나옵니다.

①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현실적으로 내가 손해보고 위험에 처할 것이 뻔할 때,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는 것을 포기합니다.


②둘째, 하나님을 따릅니다. 그래서 집을 떠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내를 뺏길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때 어떻게 합니까?


“이건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내를 지켜 주실거야. 믿습니다!” 하고 일단 떠납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좋은 믿음’입니다.


③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번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하여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내를 뺏길 것 같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때 고민합니다.


그러면 뺏기게 되면 뺏기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의 신앙)


번은 ‘하나님이 사라를 지켜 주실 거야!’ 라는 믿음이고,

번은 ‘뺏기면 뺏기리라’, ‘죽으면 죽으리라’입니다.


번은 ‘위험 가운데, 내가 요리조리 잘 피해서 살겠다’는 생각이고,

번은 ‘위험이 와서 내가 죽게 되면, 죽으리라’는 각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가지는 ‘좋은 믿음’은 번이고,

아브라함이 가졌던 ‘정말 좋은 믿음’은 번이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고요?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창20:13

이것을 ‘비겁한 거짓말’이라고 해석하지만,

저는 이것을 ‘죽으면 죽으리라, 뺏기면 뺏기리라’는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할 때부터,

아내 사라를 뺏기고 포기할 각오를 하고, 내 줄 각오를 한 것입니다. (안 그러면 죽으니까) 

그래서 사라에게 사전 동의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20:13


앞서 아브라함은, 창12장에서도 바로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내를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먼저니까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라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아내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라를 지켜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보고, 하나님이 팔 걷어부치고 나서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힘이 없는 상태에서, 왕을 만나고 사라를 아내로 달라고 그럴 때,

안 주면 죽일 것 같으니까, 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아내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보고, 하나님이 팔 걷어부치고 나서신 것입니다.


(창세기는 그것-아브라함의 죽으면 죽으리나는 믿음-을 보여주고자,

비슷한 사건을 12장, 20장에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브라함의 비겁함을 보여주려는 메시지가 아닐 것입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있어서,

믿음이 없어서, 그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애굽에 내려갔기 때문에

당한 불행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한 환란인데.., 하나님이 구해주셨다.. 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꾸짖지 않으시는 겁니까?

오히려 애굽왕 바로에게만, 아비멜렉에게만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굶어 죽게 되면, 애굽으로 내려가서 사는 것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적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자기 마음에서 내려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 이미 아내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니 애굽에 내려가는 것도, 거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애굽에 내려간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기반을 굳히게 됩니다.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창12:16

 

아비멜렉 때도 은 1천 세겔과 가축들을 얻었고요..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서 범죄했는데, 결과는 의외로 좋았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뺏기면 뺏기리라’ 했다는 것입니다.



◑해석 및 적용


▲죽을 각오를 한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을

하나님이 지켜주고, 이루어주고, 성취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사실을

간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졸라대지도 않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축복/도우심/기적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렇게 신앙생활 하잖아요?


내가 아프면, 기적적으로 치료되기 바라고,

우리 사업이 기울면,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믿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가지요?

자기가 모든 걸 버리고 떠나면,

마땅히 하나님이 자기 가정을 지켜 주실 거라고.. 믿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바램, 자기의 성취를 이루려고.. 생각을 왜 안 하느냐는 것이에요.


이 분의 믿음 자체가, 나를 정말 돌아버리게 만듭니다.

그만큼 믿음이 강력했다는 뜻입니다.

가미가제 식입니다. 애당초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죽으러 뛰어든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았지, 하나님과 흥정이 없었습니다. 

‘자, 제가 순종했으니까, 하나님 제게, 이것 저것 해주세요!’

이렇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give and take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목숨 걸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자기 생활의 필요에 대해서는, 전혀 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전혀 구하지 않는다는 말)

세상 사람이 당하면, 나도 당하는 거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 아내가 아이를 못 낳으면, 몸종을 데려다가 아이를 낳게 하는데

자기도 그렇게 하면서... 특권이나 특혜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주시옵소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먼저 그 나라와 그 의 만을 구한 것이지요.


이렇게 간구하지 않는 점을, 우리는 ‘믿음 없는 것’으로 보통 해석하는데,

설교자는, 이 점을 ‘아브라함의 절대 믿음’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조금도 우월한 특권을 누리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give and take 개념을 아예 꿈도 꾸지 않습니다.


이 사람 마음 속의 생각은

오직 오직 하나님 한 분, 영광의 하나님 한 분밖에 아무 것도 안 보여요.

자기 소원, 자기 열망, 자기 기도제목.. 뭐 이런게 없습니다.


자기의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그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조금이라도 나아지겠다(복 받겠다)는 생각을 눈꼽만큼도 안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에요. (정말 좋은 믿음입니다.)


그냥 아내를 잃어버릴 것으로 마음 먹습니다.

‘그 위태한 현실을 보면서, 아내를 잃어버릴 것을 마음 먹고 잃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가면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뿅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 한 분 갖는 것 말고는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좀 개선해보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지.. 하는 이런 마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눈에는 정말 사람 같게 보이지 않고, 비겁해보이기까지한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건드리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마치 당신의 아내를 건드리려고 했던 것처럼 화를 내시고 난리를 치시면서

그리고 그 집의 재산까지 다 뺏어가게 만드시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진짜 믿으면, 세세하게 기도 안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진짜 믿는 겁니까?


-진짜 믿는 사람은, 그렇게 세세하게 조목조목 자기의 필요를 기도 안 합니다.

진짜 믿는데, 뭘 그렇게 자기 필요를 기도로 간구하겠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세세하게 기도해야죠.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세세하게 안 합니다.)

 

우리는 안 믿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저 딴전 피우시는 하나님을, 밤새 기도해서 내 일에 주목하게 만들어야 되고.

그저 하나님은 내게 주시기가 아까워서, 인색하기 그지없는 분이라서

목청을 돋우어서 강청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응답을 주시지 않는 분이시고...


내가 금년에 이루고 싶은 것들을 하나님께 매달려

정말 하나님을 일깨우고 그래야.. 하나님이 내 사업을 도와주시지..

내가 깨워야, 강청해야 겨우 일어나 움직이시는 분 정도이겠지...

이게 우리 믿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금년에 한번 이렇게 해보시지요.

하나님 믿고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정말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안 믿은 사람보다 좀 더 팔자 펴겠다고 하는 생각은

내 스스로 하지 맙시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은 행하되,

하나님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통해서, 남이 못하는 것을 특별히 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남보다 우월한 자리에까지 나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마음이 나의 일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하나님만 가지면 되는 거라고 생각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위해서,

이 사람의 아내와, 이 사람의 자식과, 이 사람의 재산과,

이 사람의 땅과, 이 사람의 일생 전체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팔 걷어 부치시고 나서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다 버린 것들을

부메랑처럼 다 되돌려주시고, 그것도 몇 배로 더 많이,

무엇보다 하나님이 마치 아브라함이 되신 것처럼 살아 주십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이 내게로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내가 발로 차고 밀어내고 미워해도 나한테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내가 쫓아가서 잡을 수도 없거니와,

잡았다고 해도.. 그건 더 큰 화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작정하신 복이면.. 내가 발로 차도 내게로 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하지 않은 것을.. 내 노력으로 잡을 수도 없거니와,

잡았다고 해도 내게 화가 되는 거니까,

뭣 때문에 내가 잡겠다고 난리를 치느냐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생에,

이 세상에서 자기 삶에 대해서는 그저 부메랑을 던지는 것으로 일관했고,

마음속에는 이 세상 것을 가지려는 것도, 이 세상 것을 이루려는 것도 없이,

영광의 하나님 한 분만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아브라함의 이 세상 삶을 다 하나님이 살아 주셨습니다.


모든 주의 백성들의 삶이, 이 세상에 대해서는 부메랑을 던지는 삶이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으로 채우려는, 믿음의 조상의 뒤를 잇는 삶이 되게 하소서...


....................................


주1)

그래서 제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어요.

여러분 혹시 화장품 회사 차리시면, 이름을 ‘사라 화장품’으로 하세요.

영어로는 ‘세라 화장품’


‘사라 파운데이션, 사라 밀크 로션, 사라 영양크림’ 이렇게 이름 붙이면서,

‘90이 되도 늙지 않는 사라.

90이 되도 서로 남자들이 서로 달려드는 여자’

그런 식으로 광고하면.. 어쩌면 잘 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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