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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LNCK 2023. 1. 20. 14:25

[요한복음]0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요1:1-18절)│ - YouTube

*위 동영상 4:40초부터 녹취, 정리                요한복음 04강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요1:4~5, 시119:130           2023.01.04.
  
◑지난 시간 복습

지난 시간에, 말씀이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았죠. 

그분은 말씀이시기고, 우리는 말씀을 듣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음 받기를, 애당초 '말씀을 들어야 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셔서,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는데 
우리의 영은, 말씀을 들어야만 정상적으로 충만하게 작동하도록, 

애당초 그렇게 지음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 그러셨냐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우리의 몸과 육신은 물론 떡으로 살지만,
그것만으로도 살 것이 아니요, 하나가 더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왜요? 인간은 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흡을, 그분의 영을 우리에게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한 가지가 더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그랬습니다.  마4:4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그것은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그것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영이 충만해지고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쭉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요한이 얘기하고 있는 두 번째, 세 번째 본질 
즉 생명이시고, 빛이시라는 내용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부터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대요.  1:4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4

근데 불행하게도 아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 합니다. 
자기 땅에 오셨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고 영접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빛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큰 특권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진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1:12

▲여기서 '생명'이 나오는데, 당연히 '영의 생명'을 얘기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생명'이라고 얘기 했을 때는 
단순히 호흡이 붙어 있는 '육신의 생명'을 얘기 하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의 생명과, 영의 생명은 좀 다릅니다. 왜 다르냐면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지만, 영은 소멸되지 않아요. 

영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신데,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잖아요. 

모든 영적인 것은 소멸하지 않아요. 그냥 존재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봤지만, 마지막에 마귀 사탄을 심판하실 때도 
'소멸시킨다'는 말이 안 나와요. 

어디에도 마귀 사탄을 '소멸시킨다'는 표현이 안 나오고 
그냥 '무저갱에 봉인시켜' 버리시죠. 
또는 '불못에 던져버리시죠.' 거기서 계속 지내는 거죠. 영은 소멸되지 않아요. 

 

그래서 '생명'이라고 얘기할 때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표현은 뭐냐면, 하나님 안에 있는 속성을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생명'이라고 얘기할 때,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생명'이라고 얘기할 때도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내재되어있는 속성'을 얘기합니다. 

그 '하나님 안에 내재되어있는 속성'은 뭐냐면 
그것은 사랑이고, 그리고 기쁨이고, 그리고 샬롬이고, 
선함, 충성됨, 온유함, 소망, 열정, 행복, 절제, 감사... 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태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
사랑이시고요. 그 안에 항상 즐거움이 있으시고,
온유하시고, 절제하시고, 감사하시고, 행복하시고, 샬롬 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고, 선하시고, 온유하시고, 소망이 넘치시는... 
그런 분이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내재적 속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때, 어떻게 창조하셨냐면

우리 안에 이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으셨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인 인간도, 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어요.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주신 축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축복'을 
모든 사람들이 풍성이 누리도록.. 그렇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삶을, 그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다는 거지요. 
왜 충만하게 누리지 못 할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영이 충만하지 않아서!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는 결국 이런 생명들을 누리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속성, 그것들을 충만히 누리게 된다는 거죠.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거든요.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실 때 
그 하나님의 속성을, 그 생명을.. 우리가 충만히 누리게 된다는 거죠. 당연히!

그런데 문제는, 내 영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 생명을 누리지 못 하거나, 아주 제한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영이 언제 충만해 질까요?
그렇죠. 말씀을 들을 때 영이 충만해 진다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생명이 
언제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겁니까?
말씀을 들을 때죠.

그래서 요한이 뭐라 그러냐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1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1:4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거죠.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기 시작할 때, 영이 충만하게 역사하기 시작하고 
그 영이 충만하게 역사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 안에 있던 이 내재적인 속성들, 즉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과 
안식과, 감사와, 자비와, 온유와, 충성과... 
이런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들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 

그 영 안의 생명이 분명히 우리 안에 있어요. 

 

예수 그리스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걸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뭐냐면 
우리의 혼과 육이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우리 혼의 생각들, 육의 욕심들이 있는데 
그것이 성령의 생각을 대적한다고 바울이 얘기합니다. 

우리의 혼의 생각들과, 육의 욕심들, 정욕들이 있을 때
이것이 영이 하려고 하는 일을 계속 방해하고, 계속 반대되는 일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혼의 생각과 육의 정욕들에 끌려가기 시작할 때 
영이 하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게 되고, 반대편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뭐를 누리지 못하는 거예요?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거예요. 생명을 놓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뭐를 해야 되냐면 
혼과 육의 생각들을 걸러내야 돼요.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위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떤 일을 행하는지를 
아주 정확하고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즉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판단한다' 합니다.

여기서 '판단'은 헬라어로 '크리티코스'인데, 영어로 cirticize 죠.  
판단하다. 구별하다. 분별하다.. 이런 뜻입니다. 

말씀이 무슨 일을 하냐면,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criticize 한다는 거죠.
판단하고 분별하고 비판한다는 거죠.

'활력이 있다'는 말은, 옛날 성경에는 '운동력이 있다' 라고 나오는데 
과거 성경의 번역이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 뜻은 '효과적이다. 움직인다. 능력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죠.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능력 있고, 
뭔가 효과적으로 행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혼'은 프쉬케,  '영'은 프뉴마죠.
'관절과 골수'는 육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종합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서 어떤 일을 한다는 거예요. 

즉 말씀이 혼과 영과 육체의 관절과 골수를 cirticize 하십니다.
그 얘기가 뭐냐면, 어디까지가 영적인 일이고, 어디까지가 혼적인 일이고, 
어디까지가 육적인 일인지를... 판단, 분별, 비평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들이, 이게 영적인 건지, 혼적인 건지, 육적인 건지 
분별을 잘 못 해요. 막 뒤섞여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내 속에 많은 생각들과 많은 욕심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분명히 영적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 보면, 내 욕심이었고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뒤에 가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이런 경험들 많이 있을 겁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게 과연 성령께서 주신 생각인지, 
아니면 이게 내 욕심인지, 아니면 내 꾀인지... 이게 구분이 잘 안 돼요. 

그런데 이걸 구분하는 분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있어서,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 cirticize 한다는 거예요. 

'그건 영적인 거야, 그건 육적인 거야!, 아니 그건 혼적인 거야!' 
말씀이 이것을 분별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정말 살아서 
우리의 혼과 육의 일들을 드러내고, 분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들을 때, 말씀 앞에 설 때 
우리 안에 있는 것(생각, 행동, 마음)들이 이렇게 정확하게 드러나고 분별되죠. 

'아 이게 내 욕심이었구나.. 아 이게 내 혼의 생각이었구나..
아 이게 죄였구나.. 아 이게 숨어있는 불순한 동기들이 있었구나..' 
하는 이것을 분별해 주는 게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절대로 이것들이 분별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생각, 행동은 아주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아주 복잡하게 섞여 있어서 다 속아요. 사람은 다 스스로 속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게 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혼의 생각, 육의 생각, 영의 생각들이 
비로소 구분되기 시작하고,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걸러지는 거예요. '아 이거는 성령의 생각이 아니구나. 
이거는 내 육체의 욕심이었구나, 이것은 내 혼의 생각이었구나!'
이렇게 걸러지고, 필터링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영의 생각들이 더 명확해지고, 
명확해진 영의 생각들을 우리가 순복하게 되고, 따라가게 되고, 
그랬을 때 우리 안에 있는 혼과 육의 생각들을 누르고, 영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안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생명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 내가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육과 혼의 생각들을 걸러내고 
영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안에 내재되어있는 속성, 생명!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환난 중에도 평강을 누리게 되죠.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죠?

정말 환란으로 인해 마음이 혼잡하고 불안하고 그럴 때 
말씀을 읽기 시작하잖아요. 
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하면, 내 속에 있던 불안함들이 
정말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렇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이게 뭐예요? 말씀 안에 있는 능력입니다. 
말씀이 우리 혼의 생각들과 모든 두려움들을 다 걸러내고
영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더 충만하게 역사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 말씀을 들을 때, 슬픔 중에도 기쁨을 누리게 되고 
또 말씀을 들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사랑해야겠다'고 하는 용기가 생기고, 

또 말씀을 들을 때,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소망을 갖게 되고 
말씀을 들을 때, 고통 중에도 인내하게 되고 
이게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대로 여러분 삶 가운데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아멘! 
슬퍼하는 자가 화관을 얻게 될 것이고,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라.. 하는 칭함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생명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매일 들으십시오!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혼과 육의 생각 속에서, 혼란과 절망, 우울과 낙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예민한 줄 아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휩쓸리고,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줄 아십니까? 

아주 작은 일 하나에도, 우리 마음이 분노하고요. 
작은 일 하나에도 염려 하고요. 
작은 일 하나에도 평강을 잃고, 작은 일 하나에도 낙심하고.. 그렇게 됩니다.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공급되지 않으면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가운데 공급되지 않으면 
정말 아무 것 아닌 작은 일 하나가,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립니다. 
우리 마음은 참 예민하고 약해요. 

제가 요번에 그 기도사역 들어갔을 때, 미국에서 기도 하고 있었는데 
정말 제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리라.. 
진짜 독하게 마음먹고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4주간 정도 기도하고 말씀보고 있었는데 
정말 집하고 기도실 외에는 다른 곳에 거의 가본 적이 없었어요.
잠깐 장보러 나간 일 외에는, 아무 데도 안 가고,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했죠.

근데 그 시간이 점점 지나니까 성령충만해 지더라고요.
그렇죠 여러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면, 당연히 성령충만해 집니다. 
성령충만 해지면, 원수도 막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그러다가 하루는 장을 보러 장을 보러 월마트에 갔을 때 
카운트에서 계산하는 젊은 자매가 있었어요.

물건을 사고, 돈을 내고, 거스름 돈을 받는데, 
직원이 쿼러(25센트) 동전으로 잔돈을 거슬러 주면 되는데,
5센트 짜리로 잔돈을 수북히 거슬러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막 화를 내요.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잔돈을 수북하게 받았어요.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세상에 이렇게 거스름 돈을 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순간 황당했죠.
그 동안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받았던 은혜가, 순간 다 깨지는 순간이었죠.
제 마음에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혹시 인종차별하나?' 이런 의심도 들었죠.

'매니저를 부를까?' 하다가
제가 '고객 센터'에 찾아갔거든요. 

거기서 받은 수북한 동전을 내보이면서 '이거 괜찮은거냐?' 물으니까
거기서 '캐시어 직원이 그렇게 하면 안 돼죠!' 

 

그 말에 제가 좀 위로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제 정신이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서 매니저 부르고 한 바탕 소동을 일으킬 뻔 했다가.. 그냥 거길 나왔죠.
 
하여간 우리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작은 거 하나에도 쉽게 무너지고, 
얼마나 작은 거 하나에도 쉽게 평정심을 잃고 휩쓸리는지...

지나고보면 정말 별거 아니지 않아요. 
그런데 순간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은혜를 다 까먹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말씀묵상하며 받은 풍성한 은혜를, 
낮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그 은혜를 다 쏟아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에.. 허물어져 버린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 삶에서 생명을 누리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정말 이거밖에 없어요. 
말씀이 늘 순간순간마다 나를 주장하게 하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혼의 일과 육의 일로, 
마음의 평강과 마음의 생명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말씀은 여러분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혼과 육의 생각을 걸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없이, 우리가 어떻게 평강을 누리겠습니까? 
말씀의 능력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겠습니까? 

말씀을 날마다 대면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과 생각이, 혼과 육체의 일과 생각에, 휩쓸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천국에 갔다가 내일은 지옥이구요. 
오전에는 평강인 것 갔다가, 오후에는 온통 불안인 거죠.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같다가, 저녁엔 또 자기 혼자인 것 같죠.
그런 우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왜요? 

혼과 육의 역사가, 영의 역사와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믿음으로 반응하지만, 1시간 뒤에는 혼과 육으로 반응하게 되요.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혼적인가 영적인가? / 잭 푸닌 (tistory.com)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가운데 
하루, 이틀, 일주일, 6개월, 매일 쌓여 갈 때 
그것이 우리의 삶을 흔들리지 않게 세워가는 거예요. 

말씀 속에서, 영의 소리, 성령님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듣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무엇보다도, 그 길은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문자로 바꿔 놓으신 거예요. 

이것을 읽지 않고, 이거를 무시하고서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다 써 놨는데, 그건 안 읽고 
'주님의 뜻이 뭡니까?' 하면 
주님은 '한 번만 읽어 봐!' 하시죠.

말씀을 읽으면, 우리 안에 복잡하게 섞여있던 생각들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수록, 우리 안에 영의 소리는 더 명확해집니다. 

여러분, 말씀은 혼과 육의 소리를 분별하여 잠잠케 하고 
잠잠한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는 그런 축복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펀 글) 흑인 노예해방을 가능하게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저력 
링컨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힘을 얻고 기도하면서 힘을 얻은 것입니다. 

링컨은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백악관이 기도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부르짖고 기도하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다 풀 수 있었습니다.  

노예해방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간단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죄의 노예 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신앙이 아니면 그런 걸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그 당시 1차, 2차 산업, 즉 농사를 짓는 때 였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버리면 
마치 서울 시내에 자가용을 다 없애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누가 농사짓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가르칩니다. 
링컨이 용기가 나는 겁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노예를 해방시키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 수 있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에 
그 올바른 판단으로 인류역사에 가장 위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수님 가신 이후에 2천년 동안 인류역사에 최대의 인물로 
언제나 링컨이 뽑히는 이유가 
바로 남이 결단하지 못 한 일을 결정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말씀의 원리를 따라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 생명, 이어서 빛)

 

말씀이신 예수 안에 '빛'이 있습니다. 
빛은, 기본적으로 어둠을 밝히는 거지요. 

어둠이라는 건 뭐냐면, 빛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사실 실체는 아니에요. 
어둠이라는 어떤 물질이 있는 게 아니에요. 
어둠은 빛을 없는 상태로 어둠이라 하죠.

빛은 실체입니다. 
빛은 '광자' 라고 하는 입자가 있죠.

그래서 빚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둠이 뭔지를 먼저 얘기해야 돼요. 

빛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빛이 없으면 사실을 바로 인지 하지 못합니다. 
바로 코앞에 뭐가 있어도, 그게 뭔지를 몰라요. 

▲제가 예전에 몽골 초원에 한번 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동굴 속으로 깊게 걸어들어가는데,
한참 걸어 들어갔을 때, 가이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불을 끌텐때, 이 불을 끄면 
여러분은 빛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처음으로 보게 될 겁니다'

고러고 불을 딱 껐는데요, 
야, 절대 어둠이란 걸 그때 처음 체험했어요.

우리는 문명사회에 살아가지고, 아무리 깜깜해도 어디 불이 하나 있고,
하늘에 별빛도 있고, 절대 어둠이란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정말 깊은 동굴 속에서 절대 어둠을 경험해 보니까, 
내 손을 들어올려도, 코 앞에 내 손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흔적도 안 보이더라고요.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빛이 없으면.. 절대 어둠입니다.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무지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어두운 가운데 있는 인간은 
코 앞에 있는 사실도 인지 하지 못합니다. 

바로 앞에 위기가 있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 길로 가면 큰일 나는데, 그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우리 앞에 원수의 화살이 코앞까지 와 있어도 인지하지 못하고 
이게 다 빛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뭐가 진리인지
사람은 어디서부터 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인지 하지 못합니다. 

또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시간은 
무엇을 위해서 주신 시간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허락하신 사람들, 가족들, 
교회에서 만난 우리 형제 자매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주신 건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무지하게 됩니다. 그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펀 글) 화려한 기병대보다, 진흙탕 포병대를 선택한 나폴레옹
나폴레옹도 포병장교 출신입니다.

당시 포병은 힘들고 더러운 곳이어서
귀족출신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화려한 군복에 멋진 말을 타고 근무하는
기병대를 택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개념이 바뀌면서 
당시 실제 전쟁에서 기병대의 역할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포병이야말로 전쟁의 중심에 서있던 존재였지요.

나폴레옹은 이런 흐름을 잘 알고 있었고,
포병장교가 되어 강력한 포병대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34세에 황제에 올랐습니다.

화려한 기병대를 택했던 귀족청년이 아니라
힘들고 더러운 포병대를 선택한 나폴레옹이
역사의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그가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선택을 잘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말씀안에서.. 나폴레옹보다 더 선택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사람은 흑암 속에 살게 된다는 거죠. 
너무 소중한 것들, 우리가 절대 버리면 안 되는 것들을.. 막 버리게 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살다가.. 결국 망하게 되죠.
말씀이 없는 인생은, 정확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빛(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자기 삶을 망가뜨리게 되고, 
그리고 이렇게 삶이 한 번, 두 번 망가지다 보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 선택에 대한 두려움, 상황에 대한 두려움... 
그런 두려움을 갖게 되면, 그 두려움은 내 혼을 더 움츠려들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영을 얼어붙게 만듭니다.
딱 두려움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반응 할 수가 없어요.

우리 영은, 평강과 확신가운데 움직이게 되어 있지요. 
두려움 가운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움직이는 거예요?
계속 혼으로 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혼의 생각과 육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결과 생명을 더욱더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두움은,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하는 저주입니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필요한 게 뭐예요? 빛이라는 거예요.

그 빛은 어디서 옵니까? 말씀 에서부터 옵니다. 
이 말씀의 빛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 보면,  5절 말씀은 참 놀라운 말씀인데 
빛이 어둠에 비쳤다는 거예요. 시제가 과거예요. 이미 비쳤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되어 오셨을 때, 이미 빛이 임했다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할 때, 이미 빛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이미 빛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에, 말씀이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이 말씀을 우리 손에 쥐어 주셨어요.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강림 하셨어요. 
그래서 이미 우리에게 다 주셨다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말씀을 주셨고,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이 말씀을 살아나게 하시는 (도우시는)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이미 오셨어요.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각 사람에게 빛이 이미 임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건 왜일까요? 

내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죠.
시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자 빛대신 말씀이 이미 임했어요. 성령께서도 이미 강림하셨어요. 
그래서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친다'고 했어요.

이미 각 사람에게 빛이 비췄는데 
왜 어둠가운데 있는가요? 

내가 눈을 열지 않고 있으니까, 내가 성경을 펴지 않으니까
어둠 가운데 있다는 거죠. 우리가 말씀에 눈을 감고 있다는 거죠.
이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친다는 것이에요. 아멘!

이미 우리에게 빛이 임했습니다. 우리 손에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와~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열면..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119:130

새해 2023년에는, 이 빛을 보게 되는 한 해가 되기를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길이 보이는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움이 물러가고, 평강이 임하는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새로운 일과 새로운 계획들이 
놀랍게 펼쳐지는 한 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