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을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지키는 7가지 절기 중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레16:31절에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속죄일은 큰 안식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안식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란 의미로 ‘안식일 중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속죄일이 가장 중요한 안식일이라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된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잘못된 길도 있고, 바른 길도 있다. 대속죄일이 제정된 배경은 16: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아론에게 나답과 아비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라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나답과 아비후가 자기 향로와 자기가 가져온 불로 하나님 앞에서 분향하려다가 분향단에서 불이 나와 타 죽었는데, 그것이 레위기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사건 후에 하나님이 대속죄일의 규례를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불타 죽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올바른 길을 멸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함부로 하나님께 접근하면 멸망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잘못된 길을 통해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16: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이라고도 하고 회막이라고도 하는 이 직사각형의 건물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됩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법궤 윗 뚜껑은 금판으로 되어 있어 ‘시은소’(Mercy Seat, 속죄소)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Shekinah)이 임재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인 아론이라 할지라도 아무 때나 지성소 안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1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기 방식대로,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안 됩니다.
잠언 14:12절과 16:25절에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 같은 말씀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강조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고 사회봉사를 많이 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믿는다면 착각에서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올바른 길은 아닙니다. 유익한 일이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바른 길이 아닙니다.
또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수련을 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 역시 방탕하는 것보다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학위를 받고 많은 책을 저술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바른 길과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6장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진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대제사장이 대속제물을 죽여서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려야 죄인 된 인간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속죄제사라고 하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 죄인이 결코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도 하나님이 임명한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임명받은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의 정하신 날에 하나님이 정하신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시고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16장은 죄인이 바로 속죄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명확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9:22절 말씀은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대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인정하신 대제사장이 드리는 대속제물의 피가 있는 제사를 통해서만 죄인 된 인간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올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려주신, 나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구약의 대제사장은 불완전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중보자시다.
대제사장은 그림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십니다. 대속죄일의 속죄제사는 오직 대제사장인 아론만 행할 수 있습니다.
17절에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
그러니까 성막에는 다른 아무도 거할 수 없고, 오직 대제사장 아론이 혼자 다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짐승을 잡아도 혼자 잡아야 하고, 피를 가지고 들어가거나 뿌려도 아론이 혼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회막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대제사장이 죽으면 어떻게 속죄제사를 해야 할까요? 대제사장의 아들 가운데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람이 대제사장의 직무를 계승하여 제사해야 합니다.
31~32절에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그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아비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성의를 입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계속 속죄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인데,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소천한 경우 직무를 계승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의 속죄제사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하라십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에, 우리 죄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대제사장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임명한 사람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명하신 분만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죗값을 사함 받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의 죗값을 갚아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호메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싯다르타 고타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가능하십니다.
▲대속죄일에 속죄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의 직무는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고독한 일입니다. 모든 직무를 혼자 수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도 얼마나 고독하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향해 잠깐 기도하라 하셨을 때도 제자들은 참지 못하고 다 잠들어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홀로 기도하시고,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홀로 피를 흘리셔야 하셨죠. 매우 고독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위험한 일입니다.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다가 혹 한 가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되면 현장즉사입니다.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셋째, 극도의 겸비한 자세로 행해야 합니다. 원래 대제사장이 입는 의복은 매우 화려한 옷입니다. 그런데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갈 때는 화려한 대제사장의 의복을 벗고 일반 제사장 의복만 착용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겉옷, 에봇, 판결흉패, 우림과 둠밈과 같은 것들은 다 벗어놓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들어가야 합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 갈 때는 가장 겸손한 자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 먼저 향을 피워 지성소 안에 향연이 가득하도록 한 다음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직접 봤다가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조차도 하나님을 뵈올 때는 이처럼 극도로 겸손한 자세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도 중요한 것이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교만한 자세로 신앙생활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쁘게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6:18).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 거치는 5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는 대제사장도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과 가족들의 죄를 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송아지 한 마리를 잡습니다.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시은소에 뿌립니다. 그러면 자기와 가족들의 죄를 사함받게 됩니다.
2단계는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속죄할 때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 그 대상은 온 이스라엘의 백성입니다.
한국사람, 일본사람, 인도사람의 죄를 다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르미니우스 주의자가 주장하는 ‘일반속죄설’ 즉, 예수님의 속죄가 예외 없이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죄가 예외 없이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했다고 하는 일반속죄설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속죄의 진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저는 칼빈이 가르쳤던 제한속죄설이 성경적인 교리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침례교회에서도 이런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이 많이 퍼져 칼빈주의 신학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례교는 원래 칼빈주의입니다. 장로교와 신학사상이 비슷합니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했지, 그 당시 생존하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염소 두 마리를 취해서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숫염소,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숫염소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여호와를 위한 숫염소를 죽여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피를 시은소 위에 뿌리고 그 앞에도 뿌립니다. 또 성소 바닥에 뿌리고 성물에도 뿌립니다. 그래서 지성소와 회막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3단계는 수송아지 피와 숫염소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서 나와서 성막 뜰로 갑니다. 거기에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에는 뿔이 있는데, 거기에 수송아지와 숫염소의 피를 바르고 번제단 위에 피를 일곱 번 뿌려 단을 성결케 합니다.
4단계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 머리 위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의와 모든 죄를 다 고하여 그 모든 죄악을 염소에 실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 무인지경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냥 끌고 가서 광야에 놓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그 곳에서 죽는 것입니다.
다른 짐승에게 잡아 먹혀 죽든, 굶어 죽든 죽었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불의를 지고 죽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사셀’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광야 귀신의 이름이라고도 하고, 광야의 지명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제일 납득이 가는 설명은 히브리어로 ‘염소’라는 의미의 ‘아즈’와 ‘보낸다’는 의미의 ‘아잘’이 결합되어 ‘아사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사셀은 ‘보내어진 염소’라는 의미입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허물과 모든 죄를 다 지고 무인지경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모든 죄에 대한 죄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서 떠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로 죄 사함 받았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로 말미암아 죄책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린 사람들입니다.
5단계는 대제사장이 본래 자기 의복을 입고 자기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숫양 두 마리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로 기름은 태워드리고 가죽과 고기와 똥은 모두 진밖에서 불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속죄일의 속죄제사가 끝나게 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히9~10장이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속죄제사는 1년간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매년 제사를 반복해야 합니다. 또 대제사장이 늙어서 죽으면 아들이 계승해야 하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제물도 짐승이기 때문에 영원히 속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유일한 대제사장이시고 그 직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예수님, 내일은 부처님, 모레는 공자님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임명하신 대제사장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는 매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의 희생제사로 단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죠.
짐승의 몸이 아닌 자기 몸을 찢으시고 피 흘리셔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히 사죄를 얻게 하는 놀라운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12절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러므로 대속죄일에 행하는 대제사장의 속죄제사가 예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대속죄일의 속죄제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 죄책이 영원히 떠나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화목하여 살 수 있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대제사장의 속죄제사를 의지해야 한다.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리는 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괴롭게 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대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사 효력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29~31절에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합니다. 금식하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사가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 사함의 복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길 이외에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을 때 한두 가지 죄만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를 다 사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는 우리의 모든 죄, 모든 불의를 총체적으로 다 사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이 한 가지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모든 허물’, ‘모든 죄’입니다. 21절에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절에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30절에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16장에 총 여섯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렸지만 이 상번제로 해결이 안 되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면 7월 10일 대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총체적으로 모든 죄와 불의를 사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제 파악을 잘 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은 관심을 두지 않아도 상관없을 만큼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재미를 떠나서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아주 심각한 주제입니다.
죄인 된 인간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나의 모든 죄와 불의를 깨끗케 하시는 속죄제사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접근 하는 올바른 길입니다.
여러분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고 회개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스스로 높여봤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일 뿐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대제사장 되심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어야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좁은 길이고 남들이 우습게 여기는 길이라 할지라도, 이 길만이 진실된 길인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게 보일지 모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국에서 받아주시고, 이 땅에서도 복된 인생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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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많은 사람들이 종교인들을 비난합니다. 목사님, 스님, 신부님이 잘못했다고 하고, 특정 종교를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종교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왜 필요하냐며 비아냥거릴 수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종교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우리가 직접 만들지 않은 신기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만들었습니까?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습니까? 바다를 만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이 하는 일도 아니고, 러시아 수상이 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참으로 신비로운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지 않고 만들지 않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지을 수 없는 생명체들 속에 우리도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서 기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을 통해 정죄를 받습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지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속에 신을 의식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가 죄인이라는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종교를 만들기도 하고 특정 종교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원시사회로부터 시작해서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필요는 단순히 먹고 사는 생물학적인 필요가 아닙니다. 의식주 문제를 도외시하고 살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필요는 아닙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인생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영적인 필요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없을 수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가 필요 없고, 하나님도 필요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
어리석은 자들은 얼마든지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만들지 아니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언젠가 하나님을 일대일로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암4:12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