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3장, 해석 및 주석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아이 사무엘'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넓은 의미로는 유아(infancy)의
나이로부터 청년기(adolescence)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나,
대체적으로는 '소년(boy)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다. 한편 히브리 사회에서는 12세부터를 성전으로 간주했으므로(눅 2:42), 하나님께서는 그 통념을 인정하셔서 그때 사무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토록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엘리 앞에서'는 '엘리의 감독을 받으면서'란 뜻이다.
그리고 '섬긴다'(솨라트)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성전 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출 28:35, 43, 29:, 30, 민 16:9, 신 10:8, 대상 15:2, 대하 8:14).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사무엘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희생 제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여호와의 말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던 신적 계시(神的 啓示, divine revelation)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이다(사 38:4, 렘 1:2,4, 6:10).
'희귀하여...보이지 않았더라'
이 표현은 그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즉 계시의 희귀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서 볼 때, 백성들의 영적.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종이었다(암 8:12).
한편 여기서 '보이지'(니프라츠)란 말은 '크게(널리) 퍼지다'(파라츠)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곳곳에 충만히 퍼지다'의 뜻이다(Driver, 잠 3:10). 따라서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시74:9), (2)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마 7:6).
'이상' (하존).
또는 '환상'(사 29:7)으로도 번역되는 이 말은 정상적인 시각(視覺)이 아닌 꿈과 황홀경 등의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는 묵시(黙示, revelation)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아예 오감(五感)이 완전히 마비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자아의식은 분명한 가운데 다만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신적 계시의 전달 방법 중 하나이다.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이와같은 사실은 나이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4:15)을 감안할 때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본절의 표현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 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점점 약해져가는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을 암시해준다. 그러므로 본절은 또한 엘리 제사장이 왜 4-9절의 내용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는 분명치는 않으나 사무엘이 잠자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 곧, 성막의 입구쪽 별관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 성막은 실로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제반 부대(附帶) 시설들' 예를 들면 당직 제사장들의 처소, 사무엘처럼 성소에 헌신한 자들및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처등' 이 성막 주변에 세워지고 준비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하나님의 등불'
이것은 매일 저녁마다 성소(the Holy Place)의 안을 밝히기 위하여 켜지는 일곱 가지로 된 등잔의 등불이다(출 27:21). 이 등불은 저녁에 점등되어 등의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는 새벽까지 계속 켜져 있었다(출 30:8, 레 24:2). 출27:20, 21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이 말은 때가 아직 완연한 새벽기 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말이다.
'사무엘은...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이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막(tabernacle)안에 머물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서는 '여호와의 전'(헤칼 예호와)은 법궤 또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the Ho, y of Holies)나 분향단이 있는 성소(the Holy Place)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시 11:4).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맛소라(Masoretic Text)는 1:9에 이어 여기서도 성막을 '궁전' 또는 '궁궐'이란 뜻의 '헤칼'로 취한 듯하다.
'하나님의 궤 있는...전 안에 누웠더니'
이것은 사무엘이 지성소(支聖所, theHolies)안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언약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것은 사실이지만(출 26:33), 그 언약궤는 넓게 생각하면 또한 '전'(殿, 헤칼)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씩 들어갈 수 있었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 뜰 주변에 제사장, 레위인, 헌신자들을 위해 지어놓은 거처에서 잠을 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저자가 본절에 '하나님의 궤' 라는 말은 본절에 특별히 삽입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다음 절에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상으로 인해 여화와의 말씀이 휘귀하던 때에, 마침내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본절은 나실인으로서 레위 지파의 헌신자에 불과했던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소명받는 순간이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과 은혜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사무엘은 엘리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줄로 착각하고 즉시 일어나 엘리에게로 갔다.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거의 보지 못했다는 2절의 언급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이는 당시 사무엘이 대제사장 엘리의 인정을 받고, 그의 개인 시종의 역할도 감당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이때 엘리는 사무엘이 깊은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헛 것을 들은 줄로 생각해버린 듯하다.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내 아들아'
본래 이 말은 나이나 신분상의 차이가 현격할 때,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다정하게 부르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에 덧붙여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난감한 심정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한편 이같은 표현은 특히 본서에 많이 나온다(16절, 2:24, 4:16, 24:16, 26:17).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본절은 사무엘이 세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제대로 응답치 못했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그 이유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지 못했다'란 말의 의미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와 전인격적인 개인적 교제가 아직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다'(야다)란 말은 단순한 지식적 깨달음 뿐만 아니라, 남녀가 동침하듯(창 4:1)체험적으로 아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 '알지 못하고'는 사무엘이 율법을 배움으로써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은 아직 없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처럼 사무엘이 그때까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경험하지 못한 탓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엘리가...깨닫고'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육이 노쇠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도 희귀(稀貴)한 상황 탓으로 처음 두 번은 사무엘의 행동을 단순히 착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세번째 사무엘의 행동을 보고,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줄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사무엘을 세 번씩이나 부르신 이가 여호와인줄 늦게나마 깨달은 엘리 제사장은 이제 동일한 부르심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사무엘에게 가르쳐 주었다.
'말씀하옵소서...듣겠나이다'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대한 존경과 겸손,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이다.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임하여' (야보)는 '오다'(come)란 뜻이다. 그리고 '서서'는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서서 계실 육체를 갖고 계시지 않은 영이신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람과 같이 서 계신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본절이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 앞에 실제로 임재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28:13, 출 34:5, 욥 4:16).
그러므로 본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무엘아 사무엘아'와 같은 반복적인 부르심의 표현이 성경 여러 곳에서 신현(神顯)의 장면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에서 또한 증명될수 있다(창 22:11, 46:2, 출 3:4).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한 일을 행하리니'
여기서 '한 일'은 앞에서 상세하게 언급된바 엘리 가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실제로 성취시키는 일을 가리킨다(2:27-36).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들어 앞에서 예언하신 대로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두 귀가 울리리라'
이 말은 곧 '사건의 충격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안에 내리실 심판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 소식을 접한 자가 공포와 전율로 인해 귀가 멍멍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제사장 엘리 집안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1) 법궤가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기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사실(4:11, 17, 5:1), (2)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은 사실(4:18), (4) 엘리의 며느리가 해산하다가 죽은 사실(4:19-22)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두 귀가 울리리라'는 말은 성경 다른 곳에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파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킬 때 역시 사용되었다(왕하 21:12, 렘19:3).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본절은 엘리의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예언한대로(2:31-36) 반드시 있을 것임을 다시 확증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는 어떠한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세심하고도 철저히 이루어가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내가 ...맹세하기를'
이하 선언되는 내용과 같은 하나님의 맹세는 구체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2:27)의 엄중한 심판적 예언(2:27-36)은 하나님의 맹세와 결코 다를 바가 없다.
'엘리 집의 죄악은...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은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 이유는 (1) 엘리 집안의 죄악이 엄중한 경고 후에도 계속되었고, (2) 그러한 죄악을 속하는 거룩한 제사마저도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이었다(2:12-17).
'제물이나 예물로나'
여기서 '제물(제바흐)은 피흘림이 있는 희생 제사를 가리키며, '예물(민하)은 소제와 같은 피흘림 없는 곡식 제사를 가리킨다. 한편 이 두 가지는 구약 시대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여호와께 속죄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여기서 '문'(門)은 히브리 본문에는 '문들'(doors)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성막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고, 그 문들을 열고 닫는 일이 사무엘의 중요한 임무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문'(델레트)은 나무로 만들어진 '두짝 문'(a tow' leaved door)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다'는 말은 성막의 휘장들(출 26:36, 36:37)을 열어 젖혔다는 뜻이 아니라, 성막에 부속된 여러 별관 건물들의 문들을 열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성막이 실로(Shlioh)에 오래 머무는 동안 성막 뜰 주변에는 제사 업무상 필요한 여러 부대(附帶) 건물들이 고정적으로 지어졌던 것 같다. 2절 주석 참조.
'그 이상을...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사무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상(異像)은 엘리 가문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엘리 가문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고도 즉시 엘리에게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그같은 비극적인 예언으로 인하여 대스승 엘리 제사장이 심히 괴로워 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년 사무엘의 사려깊은 신중함이 엿보인다.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지난 밤 사무엘에게 어떠한 내용의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는지 엘리가 무척 궁금해 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내 아들 사무엘아'
이것은 평소 엘리와 사무엘의 관계가 부자(父子)관계와 같이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내 아들아' 라는 호칭은 애정과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난감한 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6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은 엘리에 대한 사무엘의 존경심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말이다(8, 9절)
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사무엘이...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사무엘은 엘리의 엄숙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고, 또한 선지자적 소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엘리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이런한 사무엘의 메시지 전달은 다음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1) 메시지 전달로 부터 실제 심판이 임하기까지 약10-15년의 기간이 있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사무엘을 통해 엘리 집안을 각성시키고 회개시키기 위한 목적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2)소년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어 대제사장 엘리에게 메시지를 선언하도록 했다는 것은 향후 사무엘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그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여호와시니'
사무엘의 모든 말이 틀림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엘리가 겸손히 인정하는 말이다.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이 말은 엘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순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즉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집안의 멸망과 죽음에 관한 무서운 심판의 내용이었지만, 엘리는 강퍅하게 거부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 일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엘리는 이처럼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듣고도 옷을 찢고 통회하며 재를 무릅쓰고 회개한 참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으로 우리는 엘리의 신앙 면모를 얼핏 살펴볼 수 있는데, 즉 그는 개인적으로는 후덕(厚德)하고 어느 정도 신앙적이었지만, 공적으로는 죄에 대처함에 있어 유약하고 미온적인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본절의 내용은 19절 내용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즉 선지자로서의 사무엘의 예언이 말한대로 모두 성취되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무엘을 의심할 나위없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우심을 입은 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은 민 12:7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의 경우와 관련되어 '충성됨'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그 직무상의 충성되고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께로 말미암아 세움받은 그의 선지자 직의 정통성이 입증된다는 의미이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단'은 이스라엘 북쪽 변경의 한 성읍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의 원래 지명은 '라이스'(삿 18:29)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단 비파의 사람들이 이주, 정착해 살면서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라 이와 같은 지명을 붙였던 것이다. 단 지파는 원래 여호수아로부터 약속의 땅 중 남쪽 부분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분배 받았었다(수 19:40-48).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의 원주민을 몰아내지 못함으로, 그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삿 18:1). 그러던 중 정착지를 찾아다니다가 머무른 곳이 바로 이 단 지역이었던 것이다(삿 18:27).
한편 '브엘세바'는 팔레스틴 최남단 곧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에 위치하였다(창 21:14, 26:23, 삿 20:1). 따라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가리키는 관용적이 표현이다(삿 201).
'선지자'
어원적으로는 '부름을 받은 자'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어원적인 의미와 더불어 이 단어의 문맥적인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본장의 문맥은 선지자의 의미가 (1) 여호와께서 임하신 바 된자(10, 21절), (2)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자(17, 21절)임을 시사한다.
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본절의 내용은 사무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성막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사무엘이 머물던 것이다(1:3 , 2:11). 1:3 주석 참조.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 말은 혹자들의 생각처럼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2위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호와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되, 당신의 말씀을 매개체로 사용하셨음을 뜻한다(사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