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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7:32~47 엘라 골짜기에 등장한 4명의 거인

LNCK 2023. 3. 7. 21:55

◈엘라 골짜기에 등장한 4명의 거인          삼상17:32~47            2013.08.18.

◑서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훈하실 때, 때로는 
뚜렷한 대조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자와, 하나님이 택하신 자의 대조, 
또 망하는 자와 흥하는 자의 대조,
또 성공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의 대조를 통해서 우리를 교훈 하십니다.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문화에 있는 사람을 대조해도 교훈이 되지만 
같은시대, 같은 문화, 같은 장소, 같은 문제, 같은 위기 앞에서 
서로 대조되는 인물들을 보여주셔서,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무엘상하>는 대조의 책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인물의 분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한나와 자녀였던 사무엘과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죠. 

  
사울과 다윗은 더 뚜렷한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바울은 점점점 몰락해 가고, 점점점 리더십을 잃어가고, 

자기 스스로 그 위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점점 영향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다윗은, 어떤 위치에도 관심이 없고,  
왕이 되려는 노력도 하지 않지만, 그는 점점점 부각이 되면서 
리더십을 얻어가고, 인정을 받아 가는 그러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비정상적인 상태는 소문이 급속도로 빨리 퍼졌습니다. 
왕이 악한 영에 시달림을 받고, 광기 어린 행동들을 할 때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블레셋까지 소문이 났을 겁니다. 

'왕이 비정상적이다' 라는 소문은, 이스라엘의 침범을 노리는 나라에게는
호기가 되는 것이죠. 

또한 삼상14장에 보면, 요나단과 병기 든 자를 통해서  *믹마스 전투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고, 블레셋은 패배했죠. 
그 이후로 그들은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겁니다. 

바로 그때, 이런 사울왕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소문은 
'바로 이때다' 라는 전쟁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발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가 블레셋이었어요.
블레셋은 일찍 지중해의 철기 문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때문에 더 발전된 무기를 가진 블레셋은 
언제나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었고,

당시에 이스라엘의 일부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죠. 

바로 이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와 버리신 자가 본문에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자와  *다윗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울

하나님은 위기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위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회 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를 통해서, 사울과 다윗 이 두 사람을 뚜렷하게 들어내고 계십니다.

본문 삼상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공이라는 위기 앞에서 
<누가 진정 역사를 움직이는 영적 거인인가?>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죠.

◑본 장에 거인처럼 보이는 세 사람과, 진짜 거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세 사람은 진정한 거인이 아니라, 소인이었어요.
진정한 거인은 조금 후에 등장합니다. 

이 네 명의 주요 인물 통해서 진정한 믿음의 거인이 누구인가를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나타나는 거인은 골리앗 입니다. 
그는 키가 3미터에 육박했습니다.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의 무게는 5천 세겔, 57 KG 입니다. 
한 사람의 몸무게와 비슷한.. 그런 갑옷을 두르고 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청동으로 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창끝의 쇠의 무게만 해도 거의 6.8 KG (600세겔) 이었죠.

한 사람이 들기도 어려운 무게의 갑옷을 입고,
그가 들고 있는 창끝의 무게가, 그 정도이니 가공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위협을 느끼게 하는, 그런 육체적인 거인이었죠.

성경에서 '그는 가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데 
여호수아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가드에는 거인 족속들이 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수11:22

그는 실제로 거인이었습니다.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위협을 할 때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떨게 하는.. 
그런 거인어었죠.

그러나 그가 진정 거인이었을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거인이고,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면, 
뭐가 두려워서 그렇게 온 몸을 갑옷으로 덮고 나왔을까?
투구에 각반(다리 보호대)도 찼다고 했습니다.  :6

머리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두꺼운 갑옷으로 동여 메고 나오는 것 자체가 
그는 '거인' 이라고 말할 수가 없죠.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교만과 자만으로 가득한.. 
정말 하나님의 대한 경외심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백성의 대표.. 이것이 골리앗의 모습이었죠.
몸집은 육체적으로 거인이지만, 그는 거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소인이었죠.

2 두 번째 거인은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거인이죠.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왕정시대에 왕이 말하는 것은 곧 법이었던 시대에
그는 최종 결정권을 가진, 그러한 정치적 거인이었죠.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지만,  13:14, 15:26
여전히 그는 정치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거인이었죠.

그는 왕이 된 직후에, 암몬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잠시 거인처럼 보였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가 교만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로부터 떠난 이후에, 
그는 두려움에서 사로잡힌 소인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사울이겠지요.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어쩌면 이스라엘에서 키가 큰 거인을 꼽으라면.. 사울입니다. 

왕의 직분으로서나, 또 육체적인 신체 조건으로나,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사울입니다. 

그러나 이 사울은,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죠.
그는 두려워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러한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3 본문에 세 번째 거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엘리압입니다. 다윗의 맏형이죠.
그는 이새의 가정의 거인입니다. 
한 가정 속에서도 목소리를 크게 내는,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맏형의 존재감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장남보다 훨씬 컸죠.
아버지 다음의 권위지만, 실상은 아버지도 눈치를 보는 그러한 존재가 맏형의 존재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맏형이 모든 것들을 이어가는 그러한 문화 속에서 
엘리압은 심히 교만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아닌가?' 하고 착각했을 정도로 
그는 위용이 대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압은 전쟁터에 형들을 문안하러 찾아온 다윗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모욕을 주는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17:28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엘리압 상처 속에서 나오는 분노를 보십시오. 
상처란, 그가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고, 다윗이 받은 것을 보고서 생긴
상처였을 것입니다. 16:13

보통 큰 형이라면, 전장터에 먹을 것을 싸들고 찾아온 막내 동생을 보고
오히려 칭찬해 주고, 감사를 표시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그렇죠. 이 위험한 전쟁터에 왜 막내를 보냅니까? 
다섯 째 아들도 있고, 여섯 째 아들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혹은 다윗을 다른 아들보다 더 신뢰해서, 그 일을 시켰다는 해석도 있죠)

아버지 이새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그 위험한 곳에 가서 
'막내는 어떻게 돼도 좋다'라는 마음이 있는 거죠. 

가장 유명한 곳에, 가장 아끼는 사람을 보내겠습니까, 덜 아끼는 사람을 보내겠습니까?
지금 첫째 둘째 셋째는 국가의 부르심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거고요...

엘리압은 고맙다는 말은 못할 망정, 이 막내동생 다윗에게 분노를 퍼붓고
있는 거예요. 골리앗 앞에서는 벌벌 떠는 엘리압이 
가장 막내동생한테 분노를 퍼붓고 있는 거예요. 
그는 거인이 아니었던 거죠.

특별히 엘리압이 다윗에 대해 화를 낸 것은, 다윗이 옳은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다윗이 골리앗을 위협하는 장면을 보고 
'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단 말인가?' 
그런 의분을 다윗이 쏟아냈거든요. ↙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 다윗의 말을 듣고서, 엘리압이 화를 발한 것입니다.  :29  
다윗이 옳은 말, 바른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지금 엘리압도 골리앗에 대해 분노가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표현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못 하는 것을, 막내 동생이 하고 있으니까 
화가 난 거죠!

어쩌면 엘리압은, 사무엘이 자기 대신 기름부음을 받은 후부터
때가 있을 때마다 다윗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일어났을 거예요.

그래서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쓰신 글을 보면 
엘리압을 가리켜 '연장자 신드롬 older brother syndrom' 이라고 말했죠. 

오늘날에도 나이 어린 사람이, 자기보다 더 일을 잘하거나 또 옳게 말하면 
그냥 화가 나고, 분노 하는 사람이 거에요. 소인배의 모습이죠. 

진정한 거인은, 나이가 작건, 많건
자기보다 경험이 적고 또 어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내 동생이라 할지라도 
옳은 주장을 하면 '네 말이 옳다. 네가 옳다'라고 인정할 줄 아는, 
그리고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거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압은 소인 중에서도 소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4 진정한 거인은 네 번째 나오는 다윗입니다. 
그런 영적 거인이었습니다. 

그런 육체적으로 거인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도 거의 아니었고, 
그리고 가정에서도 존재감이 없는.. 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영적 거인이었고, 위기를 해결하는 거인이었고 
역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새의 막내아들이었고 전쟁으로 나갈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가 전장터에 온 것도, 형들을 문안하려고 온 것이지, 
전쟁하러 온 것도 아니었죠.

그가 골리압의 위협을 들은 것도, 우연히 듣게 된 거 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위기상황에 부딪치자 
그가 하나님의 부름받은 영적 거인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영적 거인은, 스스로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감을 나타내고, 스스로 자신을 부각시키고 
자신을 나타내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에 부딪히면, 누가 거인인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다윗은 모든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골리앗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와 물맷에 돌 다섯 개를 주워가지고 
그는 골리앗 앞에 나아가,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진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어요. 

'아 작은 목동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동화같은 이야기로, 무용담 같은 이야기로, 신화 같은 이야기로 
'다윗이 나가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냥 돌을 힘껏 던졌을 때 
하나님이 신비적인 힘을 발휘하셔서, 그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박히게
하셔서, 다윗이 이겼다' 이렇게 단순하게 여깁니다만,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영적 거인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 오히려 그 이전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 사건이 어떤 단순한 심리적인 사건으로 
다윗이 이겼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다윗이라는 인물을 하나님이 왜 택하셨는가? 
그리고 그를 어떻게 준비하셨는가?

그가 비록 20세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젊은 날, 
어떻게 보면 아직 인생의 경험이 많 않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영적 거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 거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한 두 번의 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어떻게 영적 거인으로 세움을 받았는가? 
오늘 말씀에 3가지 중요한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1 첫째로 다윗은, 그 이전 기간을 통해서 
홀로 하나님과 은밀하게 동행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확신있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이야기를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다윗이 어린 나이였지만, 전장에 와 보니 모두가 벌벌 떨고 있고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 이 골리앗 앞에 나가 싸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조국을 위해서 목숨 바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나라도 바치겠다. 내가 죽을지, 살지 모르지만 
내가 죽더라도 싸우다가 죽겠다..' 그런 불확실한, 어정쩡한 생각으로 나간 게 아닙니다. 

이 다윗이 한 말을 하면 사무엘상 전체를 통해서 한번 면밀히 읽어보세요.
'내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뉘앙스는 전혀 없어요. 

다윗은 결코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운 게 아니에요. 

놀랍게도 다윗은, 자신이 확실히 이긴다고 믿었어요. 
이런 확신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다윗의 확신은 아래 구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36~37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의 확신과 사울의 불확신을 느낄 수 있죠. 언어의 차이를 보세요.
다윗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여호와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확신이에요! 

그런데 사울은 뭐라 그랬어요?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라'
그냥 바랄 뿐이지, 건져 내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요.

이 뚜렷한 차이를 보여 주는 거죠. 
또한 46절 말씀도 보십시오 더 큰 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다윗은 '내가 지금 죽을 지도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충성하리'
'내가 죽더라도.. 내가 죽음으로써 뭔가 변화가 될 수 있다면.. 내가 기꺼이 죽겠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다윗은 결코 자신이 죽을지, 살지 모른다.. 라는 
불확실성 속에 뛰어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 골리앗을 오늘 내 손에 붙이셨다!' 
마치 가나안을 정탐하러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보면서 
10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이제 죽었다'라고 두려워 떨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는 확신의 고백을 했죠. 

똑같은 위기 앞에서, 똑같은 문제 앞에서 
한 사람은 확신을 얻었고, 한 사람은 두려움으로 떨었다는 거예요.

△자 다윗이 지금 전쟁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요.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 라는 결심을 한 시점이 언제일까요?

그것은 분명히 전쟁터에 온 직후예요.
골리앗의 위협을 들은 직후부터, 사울 왕에게 자신이 싸우러 나가겠다고 말한
그 사이 시점에, 다윗이 결심한 거예요. 짧은 기간 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이런 결심을 한 이유가 뭘까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틀림 없이 다윗은
그 사이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음성을 들은 거예요.  *확신으로 볼 때!

골리앗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그 다윗에게 
하나님을, 그 사이에 다윗을 부르신 거예요. 
'네가 나가서 싸워라. 내가 저 골리앗을 네 손에 붙일 것이다!'

이 뚜렷한 하나님의 음성을, 다윗은 들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가 싸운 겁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골리앗의 위협 앞에 두려워 떨지 않고 
그가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나갔던 것은 
하나님의 보장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결과로 볼 때)

여러분, 이러한 경지의 영적 생활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라봐야 됩니다. 
요17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 하실 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무슨 때입니까? 십자가의 때였죠.
예수님은 때를 분별 할 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 이 때입니까, 저 때입니까?' 

예수님의 기도의 수준은, 무슨 때를 묻는 그런 수준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이 때입니다. 이 때가 이제 왔습니다!' 하고 

마치 하나님께 알람을 켜 드리는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하죠. '하나님 이 사람입니까, 저 사람입니까?'
물론 그런 기도부터 시작해야겠죠. 

거기서도 한 단계 나아가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군요!' 

배우자를 앞두고 있는 그런 젊은 남녀가 
'하나님, 이 사람입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되지만 

그러나 더 깊은 영성에 도달하게 되면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 사람입니다!'

다윗이 상황속에서 틀림 없이 기도했을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 전쟁터에 오게 해서, 저 골리앗의 위협을 듣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틀림 없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너는 우연처럼, 형들을 문안하는 것처럼 이 자리에 온 거지만 
내가 오늘 골리앗을 네 손에 붙일 것이다. 담대하게 나가 싸워라!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 

이 위기의 때에,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것은.. 갑자기 되지 않습니다. 
평상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은 것이지 

일상 생활 속에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교제가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이러한 부르심을 듣지 못해요.

여러분, 우리가 특별한 상황에서, 위기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비결은, 단 한가지 밖에 없어요. 

일상 생활 속에서 뚜렷하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뚜렷하게 말씀하시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2. 다윗은 양을 지키면서, 수없이 많은 체험을 했어요. 
사울 앞에 나아가자, 사울이 말리죠. '얘야, 나가 싸울 생각도 하자 마라.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장수로 자랐고, 너는 목동으로 컸는데, 무슨 그런 생각을 하니?'  :33

그럴 때 다윗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위 말씀을 읽어 보면, 다윗은 어리석은 사람 같아요. 
제 같으면, 제가 목동 인데, 잠깐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지금 물어서 가고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이고, 내가 없을 때 사자가 와서 큰 다행이다.
내가 있을 때 왔으면, 나까지 죽을 뻔 했는데 
내가 없을 때 와서 양을 잡아가니,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다, 보호해 주셨다'
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냥 양을 물어가도 내버려 둬도 되는 건데 
다윗은 그 사자나 곰을 뒤쫓아 갔어요.

여러분 양 한 마리의 목숨이 귀합니까? 
자기 자신의 목숨이 귀합니까? 이해할 수 없는 목동입니다.

그냥 양 한 마리 내주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게 낫지,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자와 곰하고, 양 한 마리를 되찾겠다고 싸우는 그 목동은... 
좀 이상한 사람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너, 저 곰을 뒤쫓아가라' 이런 음성을, 그는 들었을 거예요!
'네가 저 사자를 뒤쫓아가서 싸우면, 양을 되찾게 될 것이다!'

물론 심리적으로 그가 허약하고, 팔 힘도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열심히 자기를 단련했을 거예요.
물맷돌을 던지는 훈련도 열심히 했을 거예요.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기 위해서, 그는 틈탈 때마다 물맷돌을 던지면서
훈련 했을 거예요. 그의 노력과 실력이 아무것도 없이 
어떤 기적적인 힘이 나타나서 그렇게 사자를 물리쳤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 연습하고 훈련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그 다윗의 연습과 훈련을 사용하신 거죠.

한 마리 양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걸고 싸울줄 아는..
정말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 놓고 버리려고 하는 목자로, 
그를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골리앗이나 곰이나 사자나 다를 바가 없었던 거에요. 
하나님은 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준비시키기 위에서 
그가 목동이었을 때부터, 들짐승 들과의 싸움을 이미 시키셨던 거예요. 

여러분이 위기의 때에. 평상시에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순간에 순종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이 

위기의 때 쓰임받하는 거예요. 이미 골리앗과 대변하는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훈련하고, 연습하고 있었던 거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내가 당하는 위기의 때는, 
앞으로 닥칠 어떤 사명의 길에서, 위기를 만나게 될 때
그게 다 소중하게 사용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미리 훈련시키시는 거죠.

그래서 다윗은 확신을 가지고 나갔다는 거예요. 

▲3 다윗은, 그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의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동기는 뭡니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그게 그의 마음속에 있는, 그를 움직였던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진정한 영적 거인은, 그 동기가 언제나 순수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언제나 순수합니다.

본문에서, 사울이 큰 상을 내걸었어요.
골리앗이 너무 위협을 가하니까, 누군가가 나서서 좀 싸워 보라고
사울은 포상금을 내걸었는데, 
자기 딸을 줘서 사위로 삼겠고, 
그 집안의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는 상금을 내걸었어요.

그러나 아무도 그 상에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만큼 두려웠다는 거죠.
다윗이 움직인 이유가, 상을 받기 위해서 움직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사울이 내 건 어떤 상금을 목표로 해서 싸우러 나간 것이 아니에요.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동기는, 거룩한 분노였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여호와의 군대가 모욕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거룩한 분노! 그것이 바로 순수한 동기였어요.

이렇게 영적 거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동기가 
그의 마음속에 끌어오르는 거예요. 

△하용조 목사님을 추모하는 2주기를 보냈는데 
하목사님은 언제나 아이디어가 많으셨죠.
그 끓어오르는 열정이 끊이지 않았죠.

저는 '그 많은 아이디어와 열정이 어디서 샘솟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다윗과 같이 순수한 마음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동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는 순수한 마음,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느냐.. 하는 거룩한 분노, 
그것이 거룩한 열정을 만들어내고, 거룩한 도전을 만들어 내고 
담대한 용기를 갖고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영적 거인은 언제나 그 동기가 순수합니다.
때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우리 이기적인 동기가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죠.

이때 우리는 아무리 승리를 외치지만, 패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그 순수한 동기로 가득차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승리하는, 그런 승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4 다윗은, 하나님의 전쟁 법칙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전쟁은, 하나님께서 주신 무기로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울이 싸우러 나가는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 줍니다.
다윗은 그 갑옷을 입지 않습니다.

갑옷이 있다고 보호를 받고, 갑옷이 없다고 보호 받지 않는게 아니라는 거죠.
'인간이 주는 어떤 무기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기로만 이길 수 있다!' 

그렇게 하면서, 물맷돌 다섯 개를 주워가지고 나갔어요. 
왜 다섯 개 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한번 던져서 일을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내다보았던 거죠.

여러분 지금 골리앗은 투구부터 발목까지 완전히 청동으로 다 감싸고 있어요. 
어디를 찔러도, 어떤 창과 칼로 찔러도, 찔려지지 않는 몸이었어요.
유일한 급소가 있다면, 바로 이마, 미간이었어요.
투구는 쓰지만, 앞은 봐야 되니까요.

유일한 급소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 미간을 향해서, 달려가면서, 
그 움직이는 표적을 물맷돌로만 맞춘다는 것은.. 쉽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여러분 그 일을 미리 해 봤을 거예요. 
사자나 곰은 달려오는 표적이었어요. 그것을 맞춘 적이 있지요. 

여러분, 사자나 곰이 나를 향해서 달려올 때, 몇 번 정도로 물매를 던질 기회가 있을까요?
물매를 한 번 던진 게 꼬리에 맞았어요. 두 번째는 발톱에 맞았어요.
그러면 맹수가 더 화가 나서 달려들겠죠.
아마 세 번 안에는 물매로 급소를 맞춰야 되지요. 안 그러면 자기가 죽죠.

다윗은 비껴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돌을 5개 준비했던 거죠.
하나님은 그러나 한 번 만에 정확하게 미간에 맞추게 하셨어요.
그리고 골리앗이 쓰러진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무기로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런 이런 고백으로 나갔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성격을 알았던 거예요. 

'이거는 나와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다. 
나를 이 전투에 나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 싸움은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이 전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싸움에 나가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을 모욕하는 저 골리앗과 하나님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나는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그는 담대하게 물맷돌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서 다윗이 떨었을까요? 그렇게 않다고 봅니다. 
그는 미소를 띄면서, 담대한 마음으로 골리앗에게 향하여 물맷돌을 던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갑옷이 아니라 
내가 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있는 무기가 되어 있는
물맷돌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어떤 직업이건, 어떤 삶의 모습이건 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그것이 바로 다윗에게는 물맷돌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무기가 되도록,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될 때 
이 모든 위기속에서, 우리가 영적 거인으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사건은, 우연한 모험심이 성공한 기적이 아닙니다. 
믿음의 영적 거인이 보여준 통쾌한 승리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위기앞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동기,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분노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승리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의 법칙을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무기로 승리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닥치는 삶의 위기 앞에서 
우리 앞에 서 있는 골리앗이 어떤 존재인지... 나 자신은 알고 것입니다. 

그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떠는 그런 소인배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과 칼과 창을 의지함으로 이겨보려는 그런 소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타이밍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리의 언어를 가지고 담대하게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영적 거인으로.. 오늘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