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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한그릇, 다윗이 도피 중 최저점을 찍다

LNCK 2023. 3. 16. 20:01


◈다윗이 도피 중 최저점을 찍다      삼상21장    여러설교정리

▲최근 줄거리
사울은 단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두 번이나. 18:11, 19:10
이때까지 다윗은 '장인이 발작을 했구나'로 여기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죠.
 
그리고 자기 집에 가서 잡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람을 보내서, 미갈의 집 앞에서 지키게 합니다.
미갈은 다윗을 창문에서 다윗을 달아 내려 도피시킵니다.  19:12
그리고 침상에는 드라빔으로 위장해서, 다윗이 집에서 자는 것처럼 꾸몄죠.  

1) 그러자 다윗은 라마 나욧의 사무엘에게 갑니다.  19:18
(사울의 왕궁 기브아에서 북쪽 3.2Km지점)

이때까지는 다윗은 사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어요. 긴가민가 했어요.
정말 사울 장인이, 자기를 죽일지는.. 몰랐던 거죠. 그건 상상밖이었으니까요.
그저 사울의 일회성 발작 정도로만 이해하고자 했을 거예요. 
선한 사람 David 은, 항상 사람 Saul 을 선한 의도로 보거든요.

2)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잡으로 라마 나욧에 왔다가 
신에 감동되어 벗은 몸으로 예언할 때, 
거기를 빠져나와 기브아(사울 왕궁)로 요나단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마음을 테스트 해보기로, 두 사람은 약속합니다.

월삭에, 사울의 식탁에 참석을 거부한 일을 계기로
사울의 본심을 비로소 파악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다윗의 본격 도피생활이 시작하게 되죠.  약10년 추정합니다. 

3) 요나단과 작별한 후, 제일 먼저 그는 놉 땅의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놉은 기브아 동남쪽 4Km

4) 그 다음에는 거기서 블레셋의 가드로 피신합니다. 
*가드는 놉 남서쪽 약 37km지점

위 3)과 4)의 스토리가 오늘 본문 삼상21장의 내용입니다.

▲안타깝게도 다윗은 지금 계속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뭐 사람이 언제나 신앙이 올라가기만 하겠습니까? up and down 하는 거죠.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후부터, 왕이 되기까지 약 15년이라고
가정할 때, 그의 가장 최고 꼭지점은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라면,
반대로 그의 가장 최저점은 본문의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한 때이죠.

혹시 그게 미갈과 결혼하고, 왕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교만해졌던 것일까요?

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사무엘과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거기를 빠져나온 것 부터,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입니다. 내리막길의 시작!

2) 다윗이 기브아의 요나단을 찾아옵니다. 
   거기서 그는 인간적으로 요나단을 몰아세우며, 요나단의 도움을 요청하죠.
   앞서  20장, 흔들리는 다윗의 도피생활   에서 살펴보았죠.

3) 다윗이 본격적인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놉 땅을 찾아갑니다. 
   거기서 거짓말을 해서 제사장에게 진설병을 얻어먹고, 
   또 골리앗의 칼을 받습니다. ... 이것이 '내리막길'임을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4) 다윗이 놉을 떠나 블레셋 가드로 갑니다. 
   여기가 다윗 망명 10년의 최저점입니다. 제일 컨디션이 나빴을 때죠.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5)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다윗은, 아둘람 동굴로 들어갑니다. *22장
   이때부터 다윗은 다시 오르막 길을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봅니다.


◑다윗이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감  (21:1~9절)

다윗은 아직 왕이 아니죠. 왕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왕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의 일생을 통해 하나님이 가장 많이 다루신 영역이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을 100 으로 친다면, 거의 한 70~80%를 이쪽으로 다룹니다. 
그것은 '사람을 통해서 고생을 시키는' 겁니다. 
시적인 표현으로 그것을 성경에 '사람 막대기'라 그랬어요. 삼하7:14

다윗은 그런 측면에서 무슨 배가 고파서 굶었다든지 
또 병이 나서 고생을 했다든지... 그런 대목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참으로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근데 겪어본 분들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돈 걱정? 별 거 아니다. 사람 때문에 고생해봐라. 그것처럼 끔찍한 게 없다!' 
겪어본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요. 

유독 다윗에게는 '사람 막대기'를 통한 곤고함이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자식들 문제도 '사람 막대기'였고, 
초창기에는 사울 때문에 굉장히 고생을 합니다. 

사람 막대기가 왜 힘든지 아십니까? 
사실 밥이 없어서 굶으면.. 두 끼만 먹으면 돼요. 
돈이 없으면.. 좀 덜 쓰고 살면 되고 
아프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 때문에 밀려오는 고통은 참 혹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는 영원한 가슴앓이다' 그런 얘기를 해요. 

제가 젊을 때는 그 말이 별로 실감이 안 났는데 
이제 나이를 한 살 한 살 차곡차곡 먹어가면서, 너무 그 말이 실감이 나요. 

목회가.. 공장에서 이게 제품 찍어내는 일이 아니거든요. 
또 목회라는 것이.. 무슨 매니지먼트(경영, 관리)가 아니거든요. 
관리로만 치자면 누가 못 하겠어요? 

근데 목양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살펴서.. 어디에 상처가 나고, 덧이 났는지.. 
왜 괴로운지 말씀으로 격려해주고.. 붙들고 기도해주고.. 
세워지기까지 또 옆에 같이 머물러 주고.. 회복의 자리까지 같이 가는 거거든요. 

그러니 목회, 목양이 힘든 거예요. 

다윗이 평생 그렇게 사울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라마 나욧에 있다가, 불안해서 
그는 후다닥 그곳을 떠나서, 요나단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그도 별반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놉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삼상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당시 놉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었어요.
거기에 진설병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죠.

 

근데 아히멜렉이 다윗을 보자마자 '떨며 영접했다' 그랬어요. :1
왜 떨었을까요? 당연하죠.. 지금 다윗은 누굽니까? 
이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가 목숨을 노리고 호시탐탐 찾고 있는 인물이에요. 
그런 인물이 덜커덕 자기 처소로 들어오니까, 제사장 입장에서는 겁이 났죠. 
 
또 자기 직분이 제사장이니까, 성소 라는 곳은 
오늘날의 교회로 치자면, 거기는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과거에는 시내에서 학생들이 데모하다가 어디로 도망갔느냐 하면 
시내에 있는 교회나 성당으로 도망갔어요. 
거기는 경찰이나 공권력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죠.  
  
▲다윗이 놉의 성소로 들어왔는데 아히멜렉이 떨며 그를 영접합니다.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1
이 질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다윗이 혼자 불쑥 들어온 거예요. 
다윗을 따르던 일행이 있었는데, 근처 떨어진 곳에 그들을 남긴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상하게 본 겁니다.
그가 이상하게 본 것은 굉장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이런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죠.

이 노래가 온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서, 이웃 이방나라까지 알고 있었어요. 
마치 케이팝 처럼! 
 
그 노래가 이웃나라 블레셋 사람들까지 다 알 정도로 
유행이 되고 있었어요. 21:11

그러니까 나라의 그 정치공학상태는 이런 겁니다. 
다윗에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깃발만 딱 세우면 
얼마든지 자기 추종 세력을 모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요. 

사울의 어쨌든 사위요, 또한 군대장관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이란 말이에요. 이게 중요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가 뭐냐하면 
다윗은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힘이 있는데 힘을 쓰지 않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저는 우리 예수님 생각하면, 정확하게 그 마음이 들어요. 
12 군단 더 되는 군사를 동원해서라도, 원수를 처치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죠. 
그런데 베드로에게 뭐라 그러죠? 
'칼을 거두어라.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 

근데 우리는 조금만 힘을 갖고 있어도 
자루속에 송곳이 어딘가는 삐져나온다고... 
그거 가지고 얼마나 재고(자랑하고), 폼 잡으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쓸 수 있는 힘을 쓰지 않았어요. 
나라도 반쪽 낼 수 있고, 반역도 할 수 있는... 추종 세력이 모이던 때였어요. 
   
그래서 다윗이 자기 인기를 힘입어서 깃발 딱 들고 나오면
다 자기를 따라 나왔겠죠.. 

그런데 중요한 게 뭐냐면, 다윗은 그 힘을 쓰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식을, 하나님의 때를 가만히 기다렸어요.

그리고 힘있을 때, 힘을 안 쓰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오죽했으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라는 얘기가 그 얘기에요. 

왜요? 돈 있는 사람은 돈 의지하게 돼 있거든요. 
근데 가끔 가다가 크리스천 가운데 신실한 사람들, 부자들이 있어요. 

저는 '왜 저 사람에게 하나님이 돈까지 줬을까?' 궁금해요. 
부자인데 예수까지 잘 믿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에게 역설적인 메시지가 항상 있더라고요. 
'돈이 있는데, 돈을 의지하지 않더라고요!'  

다윗은 홀로 덜커덕 성소로 들어오고, 자기 세력을 규합하지 않습니다.
세를 과시하지 않아요. 나중에 사람들이 아둘람 동굴로 찾아나왔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받아서 거두어줬죠.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2절에서, 다윗이 지금 거짓말을 한 거죠.
'내가 지금 급하게 왕의 은밀한 명령을 받고 급하게 나와서 
이렇게 혼자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은 어디 은신처에 지금 숨어 있습니다.' 

허겁지겁 그는 어떤 두려움에 빠져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인간이 참 어쩔 수가 없어요. 22장 아둘람 동굴에서 회복될 때까지

다윗의 영성이 지금 밑바닥이에요.

오늘 본문이 좀 복잡한 복선을 깔고 있어요. 
그래서 뭘 도대체 메시지로 전달하고자 하는 건지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헷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기본적으로 신앙이 있는 건 맞는데 
그도 역시 신앙인이지만 인간인지라 
어떤 인생 막대기를 통해 계속되는 곤고함 속에서 
그의 심령의 중심을, 어떤 두려움이 휘감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을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왜 거짓말을 하냐면요. 
악해서가 아니라.. 물론 기본적으로 인간은 악한 존재이지만 
악해서 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약해서 그래요. 두려워서 거짓말 하게 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주1)

그렇게 신앙이 좋은 다윗도, 결국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해요. 
'내가 왕의 특별한 특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식사를 제대로 못했거든요. 
이제 허기가 졌던 모양이에요. 떡 다섯 덩이를 달라고 합니다. 
아마 부하들 4명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마12:4

그런데 이 아히멜렉은 제사장으로서 그 떡을 줘요. 불법입니다.    

그리고 다윗도 이 성소에 들어와서 떡을 요구하는 것이, 원칙적으론 잘못이죠.
레위기 율법에 보면, 다윗은 진설병을 먹을 자격도 없고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그 떡을 줘서도 안 돼요. 

성소안에는 진설병을 여섯 개씩 두 줄로 떡상 위에 진설해 놓았다가
매 안식일마다 교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레24장
그래서 그 떡은 교체한 다음에, 제사장과 그 자손들만 그 떡을 먹도록 돼 있죠.

그런데 다윗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배가 고프니까 
성소에 뛰어들어와서 '떡좀 주세요. 그랬어요' 
그리고 정확하게 5 덩어리를 얘기합니다. (아마 일행과 함께 모두 5명인듯)

여기서 이제 우리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요. 
'제도냐, 생명이냐?' 
교회 안에도 미묘하게 이런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논란이 벌어질 때가 있어요. 
그대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인데 
안 하자니 생명이 죽겠고... 
그래서 그 때마다 '제도가 법이 우선이냐, 생명이 먼저냐?' 
이렇게 가치관이 충돌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마다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항상 생명이 먼저입니다. 살리는 일이 먼저입니다.

법도, 생명을 살리고 보호하고자 법이 존재하는 거예요. 
신약에 예수님께 극찬을 받은 백부장이 나오죠. 백부장은 이방인이에요. 

그런데 그 집에 종이 하나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이 그 종을 호칭하기를 '내 아이가' 그랬어요. 

종하나 병들어 죽은 들, 누가 그 당시에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 이 백부장이 자기 병든 종을 고치고자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데리고 온 겁니다. 

그래서 그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의 부탁은 들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거기서 뭘 볼 수 있는가 하면, 백부장의 '생명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본문 사건이, 먼 훗날 뜻밖에도 예수님의 입에 의해서 거론됩니다. 
마12장에,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갈 때, 제자들이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 먹었죠.

안식일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겁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엿보고 있다가 포착하고 
예수님에게 지금 컴플레인을 한거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2:3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배고파서 떡을 요구하는 다윗에게
제사장들 외에는 먹어서 안 되는 그 떡을 준 아히멜렉을 
예수님은 지금 사실상 손들어 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가 옳았다. 사랑이 옳았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았다'는 뜻이죠.

율법적으로는 이 두 사람(아히멜렉과 다윗)의 행동은 틀렸어요. 
법에 어긋난 행동을 했어요. 그런데 그 법보다 우선인 가치가 뭐냐하면 
시장 한 사람,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살려낸 겁니다.       

그게 뭘까요? 그게 오늘날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어야 하고 
또 성소의 기능이어야 하는 거예요. 

성소의 기능은 뭐에요? 생명을 살리는 거예요. 
근데 여기에 아주 묘한 역설이 감춰져 있어요. 그 역설이 뭐냐 하면 

오늘 이 설교내용이, 제가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렸죠.
'복선이 깔려 있기 때문에 자칫 초점을 놓치기가 쉽다' 그랬어요. 

 잘 보세요. 다윗의 행동도 틀렸어요. 아히멜렉의 행동도 틀렸어요. 
연약해서 넘어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틀린 걸, 손들어 주고 계세요. 

놀라운 게, 참 이런 성경의 관점과 흐름을 우리가 만날 때마다
성경이 역시 복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눈 시울이 뜨끈해지는 감격이 있어요. 

'아~ 하나님은 인간의 그 실수, 연약함, 넘어짐속에서도 
그 넘어짐, 연약함, 우리의 실수 때문에 
복음이 중단되거나, 하나님의 자비가 멈추는 법이 없더라'는 겁니다.

우직하게 뚝심있게.. 주님의 십자가에 구속은 
그 사랑의 원리는, 그냥 계속 그대로 흘러가고 있어요. 
그 하나님의 자비는, 뚝심 있게 죄인들의 그 죄를 덮고 
그냥 계속 가고있는 거에요. 여기에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겁니다. 

나중에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이 일 때문에 사울에게 처형을 당합니다. 
커튼 뒤에서 사울에 부하 도엑이 이 과정을 모두 다 보고 있었어요. 

△근데 나중에 이 아이멜렉도 그렇게 죽임을 당하지만 
그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이 다윗 왕국의 제사장 역할을 합니다. 
다윗 편에 서는 거에요. 

요나단이 아무리 인간적으로 우정으로 다윗하고 친한 척 했지만 
결국 그는 사울의 집으로 들어갔어요. 이게 신앙이에요. 

신앙이 뭐에요? 신앙은 줄을 잘 서는 겁니다. 
'나는 어쨌든 십자가 앞에 넘어진다' 
'나는 못 나고 부족해도 십자가 붙든다' 
이렇게 십자가 편에 줄 서는 게 신앙의 싸움이에요. 

못 나고, 오만궁상을 다 떨고, 깨지고, 넘어져도 
'내가 십자가 붙들 수 있느냐?' 항상 그 싸움을 거는 거예요. 

7절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이라고 소개하는데,
신학자들에 따라서, 좀 다르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울의 목자장' 
당시 가축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도엑'이 사울 왕의 목자장이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하죠. 

또한 최근 들어서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목자'(로임)를 '로임'이 아닌 '라침', 즉 '달리는 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죠.

즉 '달리는 자'는 왕의 병거보다 앞서 나가는 왕의 시위대를 뜻하는데(8:11), 
따라서 도엑을 '달리는 자의 우두머리'로 봅니다.

이같은 견해는 도엑이라는 인물이 
1) 왕의 시위대 가운데 끼어 있었으며(22:17, 18), 
2) 많은 사람들과 가축을 쳐죽일 만한 무예 및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 됩니다. 참고할 만한 견해입니다.

22: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에게 하는 말이죠.
네 아비 아히멜렉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아달을 그 아비로 인하여 우대하죠. :23
자기 왕국의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21:8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위 말도 거짓말입니다.
지금 다윗은 비무장 상태입니다. 
도망자가 비무장으로 도망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겠죠.. 

그래서 그는 이미 떡을 구해 배부른 김에 
아히멜렉에게, 자기를 보호할 무기를 구합니다. 
그러자 제사장은 그에게 골리앗의 칼을 내어줍니다. :9

이것은 17장, 골리앗과 싸울 때의 장면과 대비됩니다.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성경 저자는 일부러 이 기록을 남겼다고 봅니다. 

이것이 다윗이 때 묻지 않았을 때, 기개가 시퍼렇던 시절에 
믿음으로 일궈낸 기적 같은 하나님의 승리였어요. 

그가 지금 성소에서 골리앗의 칼을 보자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9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와 대비되죠.)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양파같아요. 까면 깔수록 속이 안 보여요. 
그래서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내가 과거에 은혜받았다' 그리고 어쨌단 말이에요? 
자꾸 추억의 앨범을 뒤적거리는 사람들은, 오늘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도 넘어져요. 수없이 넘어지잖아요. 
여기서도 그는 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죠.
앞서 20장에서 요나단을 찾아갔을 때도, 넘어졌고 (요나단의 도움을 구했고)
본문 21장에서 아히멜렉을 찾아가서도,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죠.

지금 본문의 다윗은, 우리 모습과 별 차이 없어요. 거기서 거기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 이런 다윗의 찌질한 모습을 여과 없이 그대로 다 드러내요. 
드러내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어떻게 가지를 쳐내고 만들어가는 가를 
질기게 계속 보여주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또 붙잡아 일으켜서, 새옷 갈아입히고 또 데리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목적지까지! 

그 주도권이 내게 있었다면 진작에 끝났죠.. 
그런데 감격인 것은, 그 주도권이 한 번도 내게 있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더라고요. 믿습니까? 


◑다윗이 가드로 내려갔다가, 미친 척해서 위기를 모면함  (10~15절)

그래서 그 칼을 들고 이제 떠납니다. 
그런데 다윗이 정신이 진짜 헷가닥했어요. 

골리앗의 칼을 들고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넘어갑니다. 
사실상 국외로 망명을 택한 거죠.

'도저히 내가 이스라엘 땅에서는 내가 살 수가 없다. 피할 곳이 없다.' 
그리고 블레셋의 가드로 들어갑니다. 

▲가드로 갔더니 대번에 자기를 알아보죠. 
워낙 유명한 인물인데 왜 모르겠어요?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11
다윗은 아직 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드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부르고 있어요.  *멜렉

이것은, 일종의 복선인데
지금 이방인들은 다윗을 왕으로 부르고 있음을 통해서, 
저자는(하나님은) 슬며시 다윗의 장래의 그림을 
메시지로 암시할 때가 종종 있어요.  주2)  *22장에는 '에셀 나무'가 또 암시죠.

 

지금 다윗이 지금 절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망명객으로 가드 땅에 흘러들어왔는데 
그 땅 사람들이 다윗보고 '이스라엘의 왕 아니냐?' 

이게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아니죠. 다윗의 목숨이 경각에 처한 것입니다.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래서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이제는 미친 체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얘기라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저희 어머님 고향이 황해도 해주 입니다. 
그때 625 전쟁이 딱 났는데, 그때는 부잣집에 여자들이 있으면 위험할 때에요. 
공산군들이 집집마다 막 총을 들고 들쑤셔가지고 다 잡아갈 때입니다. 

근데 저희 어머님이 연기를 했어요. 실제로 부엌에서 바보 흉내를 낸 겁니다. 
갑자기 기지를 발휘해가지고... 
인민군들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다른데를 보더니, 집을 나가더래요. 

그래서 바로 그 다음날로 딱 언니와 이모하고 
어머니께는 안녕 인사 한 마디 남기고 월남하신 겁니다.

또한 다윗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미친 자 행세는 
아마도 악신들린 사울의 행동에서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성도에게 임하는 선악간의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합력하여 마침내 선이 이루어짐을 알 수있죠(롬 8:28).

▲결국 다윗은 가드에 정착하지 못하고, 거기서 미친체 해서 간신히 탈출하죠.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10년간의 도피 생활 가운데서
영성의 가장 최저점을 찍은 때입니다.   *최고점의 반대 

이 경험을 토대로, 다윗은 일생일대에 큰 교훈을 한 가지 배웁니다.
다윗이 이 일을 겪고나서 쓴 시가 시34편입니다. 

표제에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아기스는.. 그 왕의 이름이고
-아비멜렉은.. 왕의 호칭입니다. 그러니 둘은 같은 사람입니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시는 다윗의 사색의 결론이 아닙니다. 몸으로 쓴 거에요. 
그가 사울 이라는 인생 막대기를 통해 
광야를 미친 척하며 헤매이고 돌아다니다가 
'여기가 안전할까, 저기가 보호받을까?' 오만가지 인간적인 수단을 강구하며 
돌아다니다가, 그는 결국 남의 나라까지 가서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쫓겨난 다음에야, 

비로소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되도다'
이것은 책상 신학이 아닙니다. 자기 몸으로 쓴 거예요. 
자기 삶의 처절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시편 한절 한절은 그냥 읽을 책이 절대 아닙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제야 다윗은, 하나님이 유일한 피난처요. 
여기 저기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 참된 소망임을 비로소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이 시를 남기는 거에요. 

여러분, 위태하고 삶의 위기를 당할 때, 여기 저기로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살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이리 저리 도망도 다니고.. 하지 마십시오!
도망가면 더 위태한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예수님이 소망되어 주시는 줄을 믿습니다.

그냥 기도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라마 나욧에 남아 있었어야 했던 것이에요.

 

가드 왕 아기스에게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다윗은

아둘람 동굴로 들어갑니다. 다음 장인 22장에 나오죠.

거기서 다윗은 '4백인의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받아줍니다.

도피자 신분에서, 다른 도피자들을 도와주면서, 진정한 회복을 시작하게 되죠.

  

이제껏 20장 21장에서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다윗이,

시34편의 고백을 한 이후부터, 이제 22장에서 오르막길을 시작합니다.

'역시 다윗이다!' 하는 것을, 22장부터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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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거룩한 떡' 이 떡은 이전(以前) 안식일에서부터 돌아오는 안식일까지 
일주일 동안 여호와 앞 즉 성소의 떡상에 베풀어 놓았던 '진설병'을 가리킨다. 
이 떡은 일 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새 것으로 교체되어야 했고, 
물려낸 떡은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의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수 있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다(출 25:30,  35:13, 39:36,  40:23,  레 24:8, 9).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떡에 대하여 이같은 율법 규정을 두신 근본 정신은 
이 떡을 아론의 후손들 곧 제사장들에게만 특혜로 먹게 하려는데 있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 앞에 놓여졌던 거룩한 떡이 부정(不淨)하게 소용되는것을 
막으려는 데 그 근본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왕의 임무를 띠고 먹을 것을 급히 요구한 

굶주린 다윗 일행에게 성결(聖潔) 여부를 확인한 뒤 진설병을 내어준 일은, 
후일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율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라고 인정되었다(마 12:3, 4,  막 2:25, 26,  눅 6:3, 4). 

한편 여기서 성소의 떡상 위에 진열되던 '거룩한 떡' 즉 '진설병'에 대한 언급은 
블레셋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실로'의 성소가 
여기의 '놉'에 재건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시사해 준다. 

주2)
사사기에도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이 쳐들어오니까 
미디안은 아무 때나 막 쳐들어오지 않고, 꼭 추수할 때 들어와요. 
농사를 세가 빠지게 다 지어놓으면, 그걸 와서 싹 걷어갑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거 미치는 거죠. 

그때 기드온은, 포도주 틀 속에서 밀을 까고 있어요. 
원래 밀은 (껍질을) 어떻게 까는 겁니까? 
툭 터진 넓은 평지에서, 바람 잘 부는데서 타작하는 거예요.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기드온이 몰래 밀타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이게 옹색해 보여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가지고 딱 한마디 하세요. 
'큰 용사요!'

성경에 유머가 많아요. 하필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기드온이 얼마나 낯부끄러웠을까요?

그러니까 성경에는 그런 인간의 진상같은 삶의 현장에 
슬쩍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쿡 하고 찌르실 때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