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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한그릇, 도망자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들다

LNCK 2023. 3. 17. 18:13

◈도망자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들다            삼상22장              여러설교정리

<삼상22장의 개요>

아둘람 동굴에 다윗에게 모인 자들 (1-5절), 
놉 땅 제사장들의 피살 (6-19절), 
다윗에게로 간 아비아달 (20-23절)

앞서 20장, 21장에서 다윗은 
라마나욧(사무엘 만남) → 기브아 (요나단 만남) → 놉 (아히멜렉 만남)
→ 블레셋 가드 (아기스 왕 만남)로 이어지는 도피 행각을 벌입니다.
이때 다윗은 '두려움' 때문인지 영적으로 계속 내리막 길을 내려가죠.

본문 22장에서 다윗은 가드에서 아둘람 굴에 머무릅니다.     
여기부터 그는 영성을 회복하고, 우리가 아는 믿음의 용사 다윗을 보여줍니다.

아둘람 굴에서 다윗은 4백인의 무리로 불어나죠.
 → 다윗은 부모를 맡기러 모압으로 잠시 내려갑니다.  :3~4
 → 갓 선지자의 권고로, 다시 유다 땅 헤렛 수풀로 돌아와 은신합니다.  :5
    헤렛은, 헤브론 남서쪽약 8-9km 그일라 와 인접 지역

◑아둘람 동굴로 사람들이 모여들다   (1~5절)

지금 다윗은 계속 사울에 의해서 쫓겨다니고 있죠. 이곳저곳을 피신해 보지만 
아무도 받아줄 자가 없고, 다 거절되고, 거부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드디어 성소에까지 뛰어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얻어서 먹게 되죠. 

거기에서 골리앗의 칼을 받아 들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라는 탄성과 함께 
그곳을 떠나면서... 그의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이방나라 블레셋까지 흘러들어가서 
거기서도 쫓겨나고, 또 미친 척을 하고, 온갖 추태를 다 드러내면서 
계속 도망자의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시편 기록을 통해서, 이런 고백을 우리에게 내놓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할지어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34:8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피난처"라는 사실을, 시행착오 끝에 깨닫게 됩니다. 한 수 배웠던 거죠.

이제 우리는 본문 삼상22장을 보면서 
그의 아주 중요한 인생의 새 국면을 맞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다윗의 도피생활 속에 잊을 수 없는 굴이 있었는데 
엔게디 굴의 생활과, 바로 아둘람 굴의 시절입니다.   
우리는 이 두 곳을 구분 못할 수도 있는데, 구분해야 됩니다.  주1)

이 아둘람 굴은, 구속사적으로도 굉장히 다윗의 일생에 유명한 흔적이 되는데 다윗은 여기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동굴은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 굴은 피난처입니다. 
굴은 은신처요, 피난처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는 굴이 많았고요.

그래서 전쟁사에 보면, 왕들이 전쟁할 때 은신처로 삼기 위해서 
굴 속에 숨어 있거나, 도망가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굴은 매장지 였어요. 

이스라엘에 가면, 땅을 파서 시신을 매장하는 게 아니고 
굴에다가 시신을 안장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25:8등
이 표현은 이런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굴 중앙 한복판에다 시신을 안치하겠죠. 
그리고 세월이 흐르다보면 백골이 돼서 육체는 썩고 유골만 남습니다. 

그럴 즈음, 후손들이 와서 그 뼈를 추스려요. 
그래서 굴 속 벽에 조상들의 뼈를 계속 쌓아놓도록 만든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역대 조상들의 뼈가 계속 축적이 되는 공간이에요. 
거기다가 그 수습된 뼈를 얹어놓습니다. 
그 말이 히브리사람들에게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 동굴은, 히브리사람들에게는 매장지 개념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아둘람 굴은, 본문에서 어떤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이 처절한 인생의 국면을 맞으면서 
이 아둘람 굴 속에서 다윗의 왕국이 준비되기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우리 기독교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작되었듯이 
다윗의 왕국이 아둘람 동굴(무덤)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이 굴로, 그의 형제들과 아비들이 듣고 여기로 달려왔다 그랬어요. 

'아둘람'은 '피난처', '보호처'란 뜻이죠. 
위치는 베들레헴에서 15km 떨어져 있었죠.
본래는 유다의 영토였으나, 그 당시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아요.
과거에 한 신하가 반역자로 낙인 찍히면, 가족들도 다 이렇게 피난가야 했죠.

다윗의 형제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베들레헴 자기 집에서 평안하게 거할 수 없는 형편에 맞닥뜨린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숨어있는 곳으로 오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모형을 우리에게 드러낼까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히 이 땅에서 겪는 그림이 됩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기독교인으로서 산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불편해지고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도 보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도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어쩌다가 복음의 변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평안을 누리려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적인 복에 탐닉하는 존재가 되었죠.'

이게 뭔가 성경에서 말하고자, 또는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와는 
영 지금 그림이나 방향이 맞지 않는 거죠.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다윗의 집안과 그 형제들이 
다윗 (그리스도 상징)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어요. 

우리는 일터에서든지, 일상생활속에서든지 
사실은 예수님을 제대로 좇는 자의 자리에 있다면 
우리는 본문처럼, 그분 때문에 불편을 겪고, 손해를 겪고,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둘람 굴로 4백 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환난 당한 모든 자' 
그 당시 사울의 학정으로 인하여 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빚진 자' 
이들은 사울 왕국의 부당한 세정(稅政) 또는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高利) 등으
로 인하여 주로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죠.

'마음이 원통한 자' 
아마도 이들은 사울 왕국의 비도덕성 또는 비종교성 등으로 인해 
심적, 영적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끼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들에 앉혀놓고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저녁이 되어 가요. 그런데 그 들에는 아무것도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죠.
그 후 예수님은 한 끼 식사를 가지고 오병이어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그때 성경기자는 '그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
이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너무 마음이 아프면 속이 들러붙죠. 속이 뒤틀려요. 
예수님이, 먹을 것이 없어 빈들에 버려져 있는 그 청중들을 보면서 
'마음에 민망히 여기셨다' 즉 '단장(장이 끊어지는)의 아픔을 경험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본문의 '마음이 원통한 자'는 그런 대상들을 얘기합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상하고, 끊어질 듯이 아픈 자를 뜻하죠.

지금 아둘람 동굴에 모인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나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5천명을 먹이신 사람들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거죠.

즉 22:2의 굴에 모인 자들은, 정확히 "구원받을 백성들의 그림"이에요. 
환난 당한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빚진 자!

그들은 지금 무엇을 찾아 이 굴로 모여 들었을까요? 
피난처로 이 굴을 삼고자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굴에서 이 허접한 무리들이 
후에는 잘 훈련된 군대조직이 되고, 나라의 조직이 돼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늘 이렇게, 고린도전서 1장의 기록처럼 
세상에 못난 것들, 천한 것들, 부족한 사람들, 없는 사람들을 택해서 
강한 자를,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에요. 

여기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모형으로 담고 있는 다윗의 왕국이 
이 무덤 겸 피난처로 인식되어 있는 아둘람 굴에서 
태동이 되고, 준비되고,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통해서! 
☞22:1~2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다윗이 4백인을 다 실로 꿰었다)

▲팔복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그랬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자들의 것이고, 그런 자들로부터 만들어지고 
그런 자들로 시작이 됩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부유한 자들에게는 이런 목마름이 있을 수가 없어요. 
이런 자들의 심령 속에 마지막으로 기대고 소망할 것이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분들이 피난처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 피난처로 올 수밖에 없도록 (환경을 조성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부르시고 택하신 거예요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원문 순서는 이렇게 되어 있죠.
복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고 
복이 있기 때문에 애통하는 심령이 되는 거에요. 

우리말 성경에서는 마치 마음이 가난해야 복이 있는 것처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처럼, 
마치 조건절처럼 쓰여졌는데  (심령이 가난해야 복이 있는 것처럼 되어있는데)
원문은 어순이 그렇게 되어있지 않죠.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고 
가난한 마음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고.. 왜 그게 가능했을까요? 
우리에게 원천적인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겁니다. 

이렇게 이 아둘람 굴로 4백 여명의 가난한 무리들이 
애통하는 무리들, 빚진 자들이 모여들었어요. 

근데 이것이 기독론적인 예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표로 보여주는
다윗의 나라가 태동되고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사울이 놉 땅의 제사장들을 죽이다   (6~19절)

▲사울과 창

22: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사울이 지금 손에 단창을 들고 있죠. 
그리고 에셀나무 아래에 앉아 있어요. 

자 이것은 그저 사실을 기록했다기 보다는
사울의 어떤 캐릭터를 예표하고 있어요. 

사울은, 그의 일생을 추적해보면, 항상 곁에 창이 있었어요. 
악기를 타던 다윗을 향해서 사울이 두 번이나 창을 던졌죠.
항상 그의 머리맡에 창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또 늘 창을 지니고 다녔죠.

6절에도, 사울이 단창을 들고서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아 있습니다.

창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도구입니다. 
사울의 일생은 항상 사망의 냄새를 풍기면서 살았어요. 

그의 모든 일관된 목적은 '누구를 죽일 것인가?' 
그의 살해 의도는, 항상 두려움에서 시작이 됩니다. 
또는 시기와 잘못된 악감에서부터 시작이 돼요. 

사울은 평생 사람을 살리는 쪽의 삶을 살지 않았어요. 
죽이는 쪽의 삶을 살았어요.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항상 그의 지근거리에, 또는 몸에 창을 지니고 살았죠.

이 창을 단순히 무기로만 보지 마세요. 
그 창이 내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들은 뭘 지니고 평생 삽니까? 
친구들을 만나도 이런 친구들이 있어요. 
만나기만 하면 누구 흉보고, 찍어내기에 바쁜 친구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을 정말 만나기가 싫어요. 

사람이 늙어가는데 어른들도 두 종류가 있어요. 
늙어갈수록 청년들 얘기를 잘 들어주는, 수용해주는 어르신들이 있어요. 

그리고 '곧 나아질 거야, 괜찮아!' 말 한마디라도 향내가 나는 어르신이 있죠. 
근데 연세가 들수록 이상하게 청년들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자기 말만 해요.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이 자식아!' 
이러면서 청년들 기만 죽이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자식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자식은 저래서 안 되고...'

반면에 어떤 어른은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봐, 뭔가 이유가 있겠지. 
너무 낙심하지 마, 지나보니까 그거 별거 아니더라!' 이런 사람들!

그러니까 같은 인생을 살아도 
마음 한 켠에 단창이나 칼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사울 같은 사람이죠.

왜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아십니까? 
다윗은 원수 갚을 기회도 있었지만 
자기의 뜻과 혈기와 감정대로 죽이는 쪽에 언제나 서질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윗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겁니다. 
그것이 다윗이 갖고 있었던 상징성이에요. 

그래서 그 혈통을 통해서 생명의 주가 오시는 거예요. 
결국 성경의 이야기는 두 얘기에요. 
사망의 편과 생명의 편!

▲사망의 기운 아래 살았던 사울

그런데 여러분, 사망의 편에 선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항상 고발하는 거에요.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이게 뭔가 있지도 않은 상황을 
자기 머릿속에 상상으로 만들어가지고 
그 두려움으로 꽉 짓눌려서 사는 거에요. 

지금 쭉 읽은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에요. 있지도 않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이렇게 상상을 하는 거에요. 

'내 아들이 다윗과 맹약해서.. 언젠가는 내가 저 놈의 칼에 죽는다..' 
그러니까 항상 단창을 갖고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지금 에셀나무 밑에서 그 행동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에셀나무 밑에 사울은 죽어서 묻힙니다.

31:13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그러니까 31:13절을 통해 볼 때, 
본문 22:6절의 '사울이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다'는 것은
장차 사울이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예고편으로 보여주죠. '예표'하는 거죠.

지금 사울은 살아있지만, 죽음을 예고하고 있는 거죠. 

▲이때 도엑이 등장합니다.

9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도엑이 놉 땅에서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즉시 공개하지 않았어요.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올 것을 기다린 거죠. 굉장히 정치적인 인물입니다.

그걸 품고 있다가, 사울 왕이 열 받아 있을 때 
바로 이때 도엑이 나서서, 그때 그 사실을 고발합니다. 

그의 말에 사울이 발악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모두 소집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제사장들이 불려왔습니다. 
사울과 제사장 사이의 대화가 12~16절에 오가죠.

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사울의 호위병들이 제사장들을 칼로 치기를 꺼려하니까 도엑이 나섭니다.
도엑의 역할은 고발하는 자예요. 

성경에 보면 도엑의 혈통을 소개합니다. 
그는 '에돔 사람 도엑'입니다. :18

여러분 결국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야곱의 혈통과, 에서의 혈통의 충돌이에요.  *도엑은 에서의 혈통

야곱도 부족한 게 많았고, 흠도 많았고, 연약했지만 
야곱이 궁극적으로 왜 복을 받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이 쪽에 있었어요. 

그런데 에서는, 그 장자권, 그것을 한끼 먹을 식량에 팔아 넘깁니다. 
그래서 에서는 계속 성경에 어떤 존재로 등장하냐면 
'하나님 편의 반대세력'으로 등장을 해요. 

에돔사람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살리는 쪽에 있지 않아요. 

다윗의 가문을 통해 나타난 '덮어주시는 은혜'
자 우리는 본문에서 사실상 도엑에게 포커스를 맞출 일이 아니고 
여기 더 중요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메시지가 감춰져있는데, 뭐냐 하면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도망했다가 
그가 유다 땅으로 들어오면서 잠시 그 식구들을 모압 땅에 맡겼던 적이 있어요.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그러자 거기 잠시 머물다가, 그는 갓 선지자의 권고로 
유다 땅 헤렛 수플로 돌아오게 되죠. 

전체 그림을 한번 퍼즐을 맞춰 보십시다. 
아둘람 동굴은 다윗의 왕국이 놀랍게도 준비되는, 잉태되는 
신비의 시간이었고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이 아둘람과 그 지역은 
다윗의 집안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창37~38장에 보면, 유다가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기죠. 
그리고 유다의 집에, 아들이 죽어요. 
죽고 집안의 대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어요. 

계대혼인법에 의해서 그 동생이 혈통을 이어야 되는데 
오난이 땅에 설정을 하는 바람에 혈통을 잇지 못합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다말에게 약속을 해요. 
'하여간 내가 무슨 수를 쓰든지 혈통을 잇게 하겠다'

근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아버지가 대책을 세워주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변장을 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하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집안에 참 희한한 일입니까. 오욕스러운 과거죠.

근데 그때 그 일을 도와줬던 사람이 아둘람 사람 히라 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유다 집안의 대가 끊어질 뻔했는데 
어쨌든 며느리를 통해서라도 생산을 하게끔 도와준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아둘람의 히라 라는 사람이에요.  *유다에게 창녀를 소개해 줌

 

지금 본문에, 또 다시 아둘람의 도움을 받아서 다윗 왕국이 태어났다는 얘기죠!

 

그래서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죠. 베레스 와 세라 입니다. 
룻4: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원래 이 아기는, 이방 며느리 룻이 낳은 아들입니다.
근데 성경기자는 '나오미가 낳았다'고 기록을 해요. 
기록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이방에서 따라온 며느리 룻이 아기를 낳습니다.  *오벳 : 다윗의 조부

나오미는 남편도 죽고, 자기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어요. 
집안이 끊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다가 모압 여인 룻을 통해서 생산합니다. 

룻4: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그러면 다윗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외갓댁(룻의 친정)이 룻이에요.
*지금 그래서 다윗이 자기 부모를 모압에 잠시 맡긴 거죠. 22:3~4  

 

모압은 다윗의 외갓댁이 됩니다. 
그 할아버지가 오벳이고, 오벳은 룻이 낳았어요. 

자 그런데 그 뒤에 기가 막힌 족보가 또 하나 나옵니다. 

룻4: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낳은 쌍둥이 아들이에요. 
이게 다윗의 친가 족보입니다. 

정리하면, 다윗의 외가 족보를 추적해보니까.. 모압사람이었어요. 
모압에서 과부가 되어 흘러들어온 룻이 그 외가 출처예요. 

친가는 추적을 해보니까, 유다가 며느리에게서 생산한 베레스의 후손이에요.

자 족보를 추적하다 보면, 친가 쪽이나 외가 쪽이나 
뭐 내놓을 만한 번듯한 족보가 됩니까? 전혀 안 돼요. 

족보를 추적하다보면, 무슨 소리밖에 할 말이 없는가 하면 
'야 이거 덮어버리자!'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이 '덮다' 에서 시작됩니다. 
노아가 배를 만들어 놓고, 배옆에다 역청을 발라요. 
그 역청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덮다' 라는 뜻이에요. 
물이 새어 들어가지 못하도록 덮는 거예요. 

우리가 '좋은 신앙'이라는 게 뭘까요? 결국 이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놓치지 말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신앙 덕목이 있다면 
'덮어주는 은혜'를 받아야 돼요. 왜요?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시작이 되었어요. 

여러분, 잘 보세요. 
아둘람 굴에 어떤 사람들이 모였어요?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였어요. 
'굴'이라는 곳은, 피난처요,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으로 쓰이던 공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잉태한 다윗 왕국이 꿈꾸고 시작이 돼요. 
하나님이 그들의 허물을 다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족보를 추적해 올라가면 뭐가 나와요? 
덮을 수 밖에 없는 족보가 나와요. 아시겠어요? 

'인간의 믿음의 실패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실패로 연결되느냐?' 아니죠.

성경의 역사를 보면, 전부 뒤틀리고 오욕된 역사에요. 
그런데 그 불순종과 뒤틀림과 오욕의 역사를 뚫어내고 
하나님이 아예 오욕에 몸을 뒤집어 씌워서 
예수그리스도를 오욕의 족보 속에 보내시는 거에요. 

그게 우리의 구원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치지 않는 그분의 열심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그 자비와 긍휼이, 우리에게까지 명명백백하게 흘러들어온 거에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전부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잘나 보이지만, 다 죄인이라는 거죠.
이스라엘에서 가장 신실한 다윗의 족보를 보십시오.

다윗의 족보를, 외가 쪽이나 친가 쪽으로 추적하다 보면 
덮을 수 밖에 없는 족보예요. 정통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지혜를 폐하시고 
못나고 부족하고 연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방법이 그런 방법이에요. 
누구나 꺼려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소망의 길을 열어놓지 않았습니까!


◑다윗에게로 간 아비아달 (20-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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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참고로, 다윗의 그 유명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시57편도,
다윗이 아둘람 굴에 머무를 때 지은 시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굴에 머무를 때 지은 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