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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4장 사울의 옷자락을 벤 다윗

LNCK 2023. 3. 21. 18:46

[이재훈 담임목사 예배 설교] 사울을 살려준 다윗 (삼상 24:1~12) - YouTube

◈사울의 옷자락을 벤 다윗       삼상24장          설교녹취, 정리       

◑도입                       

다윗이 사울왕 피해 기브아-라마-놉-가드-아둘람 굴-모압-헤렛 수풀-
그일라-십 광야-엔게디 황무지에 이르렀습니다. 

십 광야에서 십 사람들의 밀고로 붙잡힐 위기에 있었으나 
블레셋이 유다를 침공하여 사울이 극적으로 회군하였고 
다윗은 그 틈을 타서 엔게디 황무지로 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까지 추적하여 밀고한 사람들이 있어서 
사울왕이 다윗을 붙잡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엔게디 황무지로 가게 됩니다. 

쫓기고 쫓는 상황에서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지만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다윗의 인품, 특히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는 인품이 드러나는 장입니다. 

1-7절은 동굴속에서 사울을 살려 준 다윗 
8-22절은 사울과 다윗의 대화


◑사울을 살려주는 다윗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어서 상황은 아주 중요.합니다.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우리를 오류에 빠지게하는 3가지 은밀한 유혹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짓된 사상으로부터 오는 은밀한 유혹들이 3가지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성공주의 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성공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상황이 잘 풀리면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지 않고 실패와 어려움 속에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으로만 인도하시지 않고, 
때로는 실패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하나님의 뜻의 구별 기준이 된다면, 
성공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상황논리 입니다. 
상황논리란, 그 상황 속에서, 그 현실속의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그런 논리로 자기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이죠. 

이런 사상이 우리의 신앙 안에 들어올 때는 
'모든 상황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합리화 하게 됩니다. 

3) 세 번째는 결과지상주의 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그 과정과 수단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라는 잘못된 생각이죠.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에 보면, 
'군주란 국가의 보존과 또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때로는 도덕심과 동정심도 버릴 수 있어야 된다' 
이런 무서운 말을 한 까닭에, 그 후에 많은 독재자들이 나왔죠. 

사람들의 생각에 '결과만 좋으면, 과정과 수단은 때로는 비도덕적이어도,
옳지 않아도, 결과가 모든 것을 다 보상한다'고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이런 결과지상주의 가 들어오게 될 때 
그 과정과 수단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가 좋으면.. 결과가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보이면 
어떠한 과정도 상관없다..' 라고 생각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선택을 보면, 그가 처한 상황속에서 
이러한 세 가지 잘못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선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그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 속에서 

('동굴속으로 발을 가리러 들어온 사울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순간에서)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답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 내고 순종합니다. 

▲다윗을 잡으려는 사울이, 다윗이 엔게디 광야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천 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다윗을 추적해 나섭니다. 

사울은 다윗을 끊임없이 추적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 

3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는 엔게디 광야로 들어갑니다. 
엔게디는 '새끼 염소의 샘'이란 뜻인데, 사해 서부지역이죠. 
거기엔 아주 깊은 동굴들이 많죠. 거기엔 연못이나 오아시스도 꽤 있죠.

그런데 '염소, 산양들이 사는 곳'이란, 아주 가파르고 험준한 산악지형을 뜻하죠.
대단히 접근성이 어려운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죠. 그곳으로 다윗이 숨은 거죠.

거기서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그 동굴 속 깊은 곳에 다윗 일행이 숨어 있었죠.

캄캄한 동굴 그 깊숙한 속에, 누가 있는지 확인 안 한채
사울이 자신의 용변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옷을 벗어서 자기 주위에 어디에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을 놓고,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인가요? 

 

만일 위에서 3가지 잘못된 세상적인 사고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면 
단연코 하나님께서 사울을 제거하라고 
다윗 일행 앞에 사울을 데려오신 기회라고 분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윗의 신하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만일 이 순간에,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면 
다윗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광야의 방랑생활은 끝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울의 폭력과 압제로 인해서 고통받는 수많은 백성들이 
새로운 살 길을 얻게 될 것입니다.
황폐화된 유대 나라가 평온을 되찾게 되는 그런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사울을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그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상황으로만 본다면, 
사울은 여기서 끝내야(죽여야) 되는 것이 맞다고 볼 수 있었죠. 

사울이 어떤 사람으로 변질 됐습니까? 
다윗을 도와줬다는 이유만으로 놉 땅의 제사장들을 다 학살해 버리는 
그런 미치광이 왕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 미치광이 같은 왕을 더 이상 내버려 두는 게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다윗의 신하들은, 분명히 다윗이 사울을 제거함으로써 
이 역사의 비극을 끝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2차대전 시절에 나치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할 때 
히틀러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죠.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어요. 

본회퍼 같은 사람도 그 암살에 가담했다가 발각돼서 총살당했죠.
정말 훌륭한 신앙인, 탁월한 신학자들도 
그 상황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몰래 사울의 겉옷 한 자락을 잘라내고 
그리고 그 작은 옷자락을 잘라낸 것 조차도, 자기 마음에 거리낌이 되어서
그가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다윗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에 도망가게 하심으로써 
그에게 주신 많은 시험들이 있고, 그 시험에 여러 단계를 있었는데,

그런데 본문의 상황을 통해서 주시는 시험은 
그가 지금까지 받았던 과거의 시험과는 다른 차원의, 
또 다른 종류의 (고도의 높은 단계의) 시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어떤 시험을 받았습니까? 
사울에게 쫓겨서 광야를 도망다니면서 받았던 시험입니다. 
자기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고,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 사람인가? .. 그런 시험이었던 거죠. 

우리는 아마 그런 1단계 시험을 받아도 쉽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애매하게 고난받고, 죄가 없이 억울하게 
불의한 자에 의해 고난 때 
과연 우리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다윗도 처음에는 흔들리죠. 블레셋으로 도망가고 
그리고 모압 땅으로 도망하고.. 정말 믿음의 사람 다윗 답지 않은 
그런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었지만, 

그는 광야의 연단과, 동굴에서의 (시편을 노래하는) 예배 생활을 통해서,
또한 그일라 백성들을 도와줌으로써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삼상19~23장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에서도, 
인간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그를 살려준 것을 보면,
그의 신앙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다윗이 만난 시험은, 다윗의 손에 사울을 붙여 주심으로 인해서 
다윗 마음대로, 그의 의지대로 
사울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그런 기회와 상황을 
다윗에게 주심으로 인해서, 
다윗이 자신의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걸 하나님은 보기 원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차원의 시험이었습니다. 

사울은 어땠습니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한을 잘못 사용해서 권력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권위 대신, 폭력과 공포로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다윗을 끊임없이 죽이려고 찾아 다녔지만 
자신의 권력은 점점 약화되었고, 자신의 권위는 점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점점 다윗의 권위는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오래 참음과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다스려가는... 
그래서 사람들로부터도 진정 권위를 인정받는 지도자로 
다윗은 성장해 가고 있었죠.


◑권위의 올바른 사용 테스트

영적지도자에게 있어서, 이 땅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있어서 
이 하나님이 주신/세우신 권위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시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을 하나님이 테스트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상황에 내모십니다. 

본문 삼상24장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손'입니다. 9번 나옵니다.

24:6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10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18 '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의 손에 하나님께서 때로 
누군가의 생명, 누군가의 미래, 누군가의 위치, 
누군가의 중요한 일들을 붙이실 때가 있습니다. 

내 손에 붙여진 어떤 상황, 그것이 크건 작건 간에 
내 손에 붙여진 그 일, 그 권한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것이 바로 중요.한 다윗에게 주어진 시험이요, 
오늘날 우리 각자가 만나는 중대한 시험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에 사울의 목숨이 넘겨졌지만 
목숨을 해치는 일은, 특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해치는 일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내 손에 붙여졌다고 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왜냐면 모든 권리는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이죠. 

△저는 지도자의 리더십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도자란 리더십이란 권위의 청지기이다." 

부모의 권위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권위 입니다. 
내 맘대로 휘두드라고 주신 권위가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요)

직위의 권위, 직분의 권위..
그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권위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정신으로, 그 권위를 행사해야 되는 거죠.

그러므로 내 손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도록 
내 손에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다시 올려 드려야 됩니다. 

내 손에 맡겨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내 성질 대로 그렇게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거죠. 

사울은 그랬죠. 자기 손에 주어진 나라의 왕이라는 권위를 
그는 자신을 위해서, 자기 맘대로, 욕심대로 행함으로 인해서 
그 권위를 남용해서 권력을 휘두르고 만 겁니다. 

권위와 권력은 다른 거지요. 
권위를 자기를 위해서 사용할 때 권력이 되어 버립니다.
그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로 알고 
자신의 손에 붙여진 모든 권위를, 하나님의 맡겨 드리며 행할 때 
진정한 권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상황 논리로 사울을 처치하지 않았습니다. 
결과 지상주의로.. '사울만 제거되면 얼마나 행복한 나라가 되겠습니까?' 
라는 논리로 사울을 처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맡겨진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의 돈에 그 상황을 올려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받은 시험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사울을 해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절대적으로 왕이 되려고 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실 때까지 
하나님이 사울을 해결하실 때까지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험은 참 어려운 시험입니다. 
내 손에 맡겨진 권한을 내 맘대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이 역사 하시도록 내어 드린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하나님 앞에 맡겨 드렸어요.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앞서지 않았던 거지요. 

단, 자신의 손이 하나님의 손의 대리자가 되기를 
그는 간절히 믿고 의지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험 Test 을 패스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변화됩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최우선 순위를 둔 도망자로 살았지만,
그런데 그일라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본문 24장에 이르러 그는 변화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도망자가 아니라
원수의 생명도 보존하는 권위자가 된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만일 이 상황 속에서, 그가 사울을 제거했다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한 성공한 도망자' 밖에 되지 않았겠죠.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원수 같은 사울을 알려줌으로 인해서 
그는 원수의 생명을 살리고,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시고 그들을 변화시키기 원하는 
진정한 영적 권위를 가진 권위자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시험에 패스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선택을, 자신의 손에 맡겨진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고 맡겨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런 나라와 영역이 되도록 
순종하는 다윗같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9~21에 동일한 맥락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나요?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원수의 생명에 대한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에 따르는 것입니다.


◑양심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것으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물론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것은 
자신이 해칠 수 있는데,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조차도 마음에 걸려 했다는 거예요. 

상상이지만, 드라마에 보면, 적을 붙잡으면 의자에 묶어서 취조하잖아요.
다윗은 사울을 결국 풀어주더라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거죠.
소위 고문도 하고, 험상 궂게 생긴 부하를 시켜서 고문을 한다든지 해서
그렇게 또 대화를 만들어 갈 수도 있었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사울은 자기 목숨만 살려 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죠. 

▲이 상황 속에 있는 다윗을 성경은 매우 예리하게 기록합니다. 
다윗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6

사울은 자기는 물론 부하들에게도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굴에서 나갔고 기회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조금은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부분, 
즉 다윗의 내면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예민하게 살아있는 양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참된 경건의 표지입니다. 
다윗은 후일, 인구조사를 행한 후에도 마음에 자책을 느끼게 됩니다. 삼하24:10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가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지적하자 
그는 또한 은폐하는 쪽보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다윗의 선한 양심은 이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가 느낀 잘못에 대한 가책이고, 
둘째는 사람들(부하들) 앞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까?

경건의 최상의 표지 중 하나는 양심이 민감한 것입니다. 
양심이 죄악을 허용하고 타협함으로써 더럽혀지면, 믿음도 다 바닥나게 됩니다. 
양심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이고, 양심은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을 통하여 양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들을 살펴보십시오.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다윗에게 양심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는 사울을 죽인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옷자락을 베었을 뿐임에도 
마음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부하들 중 누구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가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이 부하들에게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을 부하들에게 고백합니다. 

선한 양심은 아무도 문제삼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문제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예민한 양심이 뭔가를 느꼈을 때 그것을 고백하고 
그로 인한 수치감과 죄책감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6).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 

성경의 개념에서 통치자들은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어 세우신 대리인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웠다는 이 개념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손을 대실 것인데)
다윗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단지 옷자락을 베었을 뿐인데도 그 권위를 자신이 침해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사울이 굴에서 나간 후, 다윗이 사울에게 외쳤습니다. 
“내 주 왕이여”하며 다윗은 땅에 엎드려 사울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2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지만, 이것이 솔직한 다윗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늘 법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과 사울의 문제를, 하나님이 판결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죠.

시편에는 다윗이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렸던 많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기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양심이 살아 있으십시오!

▲이것은 사울의 굳어진 양심과 대조됩니다.

사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사울은 매우 격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말하면서 왕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소리 높여 웁니다. 그는 자신의 악함과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선함을 은혜로 갚아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했듯이, 다윗이 왕이 될 것과 
그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도 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족들을 선대해달라고 부탁합니다. :16~21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사울이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울이 지금 보인 이 반응이 
회개가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사울이 진실성이 없게 연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사울은 이 시간 자신의 감정에 진실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감동하게 만들었습니까? 
다윗의 선함이 사울의 굳어진 양심에도 찔림이 된 것입니다. 

비록 굳어진 양심이라도, 이렇게 반응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너무나 굳어져 있어서 
그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자리까지 인도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압니다. 도덕적 양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사울이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악행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사울의 굳어진 양심 위에 점점 더 단단한 껍질을 형성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빠질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입니다. 양심이 그를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찔림은 찔림으로 끝났습니다. 
다윗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행한 일(회개)과는 다른 반응인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선한 양심 안에 담겨진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행하는 회개이며, 
이런 역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대화

더 나아가 다윗은 보복의 기회를, 대화의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8~12절에 다윗과 사울의 대화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악화되기도 하고, 더 격한 감정을 일으키고, 더 나빠집니다.

그러나 다윗은 갈등의 상황을 진화시키며 대화로 풀어나가려 노력합니다.
그게 당장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기 잘못을 인정했으니까요.
그러나 영구적인 효과는 없었습니다. 사울은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윗에게 배우는 것은,
사태를 점점 키워 악순환을 만들지 않고
갈등을 점점 누그러뜨리고, 대화로 풀어내려고 시도한 그의 노력입니다.

보복할 수 있는 기회를 보복하지 않고 
대화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내 주 왕이여!' 라고 사울을 부른 그의 호칭을 보십시오.
'이 원수여!'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겸손히 벼룩과 같은 존재라고까지 낮춥니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더 나아가 그는 대화의 기회를, 기도의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15절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뭔가 풀리지 않는 사람과, 
갈수록 감정적으로 대립되는 사람과 대화할 때
한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어조로 대화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 보십시오. 
기도의 자세로 대화하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며 대화할 때
그 대화가 의외로 풀어지고, 어떤 합의점이 도출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갈등/대적/대립의 관계가 
대화의 관계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기도의 관계로 성숙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원수된 사울을 지금 함깨 기도 하는 데까지 끌고 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다윗의 영성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영성에, 순간적으로는 사울이 정말 감동합니다.
물론 진정한 회개는 아니었지만요...

사울은 다윗에게 '너는 나보다 의롭구나' 라고 하죠.
이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나도 의로운데, 너는 나보다 더 의롭구나' 라는 뜻이죠.
사울은 '나는 악한데, 너는 의롭구나' 이렇게 말했어야죠.
사울은, 다윗의 화해의 요청에 응하는 듯 했으나, 
여전히 온전한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서로가 인정을 해요. 
그래서 20절에 사울은 이렇게 말하죠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다윗도 얼마 있지 않아서 이 나라가 자기에게 넘어올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사울도 이미 자기 손에 이 나라가 떠나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하나님의 나라 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찬탈하거나 빼앗아서는 안 되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에게로 넘어갈 때 
정당한 과정과 방식을 통해서 다윗의 손에 넘어가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