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하11장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LNCK 2023. 4. 25. 05:52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하11장         여러 설교 정리           
                                                                           ▣<다윗>관련글 모음                            
◑1.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다 

▲본문의 배경
다윗이 왕이 된 후,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즈음의 
일입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오던 
서쪽나라 블레셋 군대를 영토밖으로 몰아냈고 
시리아 제국(소바 왕 하닷에셀)의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북진하여 
이스라엘의 영토가 다마스쿠스를 넘어 하맛 어귀까지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대상18:3

그 중 암몬과 사이에서 일어났던 전쟁에 관한 기록이 
삼하10~12장 사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인 삼하11장 후반부를 보면, 암몬과의 싸움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다윗은 요압의 부대를 보내, 암몬의 수도 랍바를 포위하게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해 가며 
암몬의 도성 랍바를 점령하던 전쟁 중에 
다윗이 밧세바와 관련하여 저지른 범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설명
11: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1절을 얼핏 보면, 왕들이 직접 출전하는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왕들이 출전한다'는 말은, 나라들이 서로 전쟁을 한다는 뜻입니다. 
고대 왕정시대에 전쟁의 주체는 왕이었으니까요. 
두 나라가 싸우는 것은, 두 나라의 왕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푸틴이 결정하면 러시아 전체가 나가서 싸우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겨울이 우기라서 겨울에 전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한 해가 가고 봄이 돌아오면 (3~4월 경) 비가 그침으로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기에 좋은 여건이 됩니다. 
  
다윗의 사령관 요압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암몬의 수도 랍바를 포위했습니다. 
그 기간에 다윗은 왕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다윗은 옥상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 여인은 다윗의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와 동침합니다. 

처음부터 무작정 데려와 동침한 게 아니고,
-처음에는 사람을 보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3
-그 다음에 전령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게 합니다. :4
이렇게 점차적으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게 된 거죠.

본문이 한 가지 분명하게 서술하는 것은 
본문은 '이 모든 일의 주체를 다윗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옥상에서 쳐다보았고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고, 
-다윗이 전령을 보내서 그녀를 데려왔고 
-다윗이 그녀와 동침했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다윗의 책임 하에 일어난, 
다윗의 범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 정보가 많지 않은 가운데서도 
본문이 유독 세밀하게 정보를 제시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이 마침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이었죠. :4

구약의 정결규례에 의하면, 여인이 피를 흘리는 동안은 부정하고 
피가 멎고 나서도 7 일간 부정합니다. 
그래서 레15:19절 이하에서 유대인 여성들은 
생리기간과 생리가 멎은 7 일간은 부정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11:4절은 '밧세바가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 이라고 말하지요. 
생리가 끝난 후 1주간이 지났다는 뜻입니다. 

여성의 평균적인 생리주기를 계산해 보면 
대체로 그 때가 임신 최적기입니다. 

밧세바가 임신 최적기에 다윗과 관계를 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왜 이런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걸까요? 
'그 아기가 다윗의 아기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됩니다. 

5절에서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뭔가 조치를 취하라는 암시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자기 인생의 중요한 대목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여기까지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적용 :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심을 잊어버렸던 다윗

본문 마지막절은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27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이죠.
요셉이 그랬죠.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39:9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를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가 12:9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다윗의 범죄는 근본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다윗이 하나님을 무시했다고 성경은 서술합니다. 
그의 모든 범죄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이 여인의 무엇에 반했습니까?
이 여인의 심성에 반한 것도 아니고, 신앙인격에 반한 것도 아니에요.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2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 반한 것입니다.
남자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이 눈을 질끈 감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자의 다른 점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이끌린 것입니다.   주1)

이때까지는 그래도 남성의 특징이라고 우리가 이해해 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새가 자기 머리속에 둥지를 틀기 시작할 때, 
그 새를 내쫓기는 커녕, 그 생각을 계속 키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3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여인을 알아본 것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있는 (죄가 발전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고하는 사람의 말투를 보십시오. 벌써 떨떠름한 어투입니다.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3

벌써 이 사람이 다윗의 심리를 예상하고,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여자입니다' 라는 투로 말하고 있죠.
자기의 충신의 아내이니까요.

여기서 멈추면 됐어요. 그러나 다윗은 멈추지 않고
다시 전령을 보냅니다. :4

'전령'은 어떤 정식 수행원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완전히 왕이란 신분을 이용한 거죠. 아마 순종적 최측근 예스맨이었나 봅니다.

전령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영어성경들도 죄다 messengers 복수로 번역했죠. 
지금 다윗은 정식으로 밧세바를 왕궁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부하의 남은 가족을 위로하는 만찬' 정도로 포장하는 거죠.
아마 이때까지는 다윗이 동침할 생각보다는, 그냥 알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지배적이었을 겁니다.

만약 다윗이 처음부터 동침할 마음이 가득 차 있었으면,
혼자 변장을 하고서, 자기 신분을 속이고 어떻게 하든지 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여인을 공개적으로 초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범죄가 분명히 드러난 이 순간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실망스럽게도 다윗은 범죄를 덮으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상황이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보다, 죄를 덮을 길을 찾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먼저 의식됩니다. 
왕이 부하의 아내를 범한 일로 인해 받게 될 도덕적 비난, 실추될 명예,
그리고 손상될 왕이 권위.. 이런 것들이 먼저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길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죄를 덮을 방법을 찾기에 급급하게 됩니다. 

이때 다윗도 일반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이 위기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사람의 꾀로 죄를 덮을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것이 비교적 더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힘을 가진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기 꾀로 덮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왕의 권력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지점에서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회개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윗은 이 지점에서도, 회개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죠.
아니 어느새 하나님은 이미 그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죄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편에 보냅니다. :14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우리아는 '자신을 죽이라'는 편지를
멋도 모르고 충성스럽게 요압에게 전달해 줍니다.

그의 편지에는 '우리아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선에 앞세워 보내고 
나머지 부대는 뒤로 빠져나와 그가 적군에게 맞아 죽게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지시대로 합니다. 
다윗은 '전쟁 통에는 사람이 죽는 법이지 뭐!' 하고 덮어버립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후 밧세바는 남편을 애도하고 
애도가 끝난 후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삼하11:27절은, 여기까지 보도한 후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오늘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눈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우리는 죄의 정욕에서 스스로 물러나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범죄를 위해 자기 직권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고, 2차로 전령들을 보냈습니다.
-요압에게 기별해서, 우리아를 왕궁으로 소환합니다. :6
-그리고 편지를 써서, 다시 우리아를 전방으로 보냅니다. 

자기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자기 죄를 덮기 위해서
다윗은 계속해서 자기 직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계속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뭐냐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죄를 짓는 것과
사람이 자기 직권을 남용해서 죄를 짓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다윗이 가진 '왕'의 지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 사욕을 채우는데 오용, 남용한 것은.. 일반 범죄와 다른 거죠.

하나님도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나중에 나단을 통해 책망하실 때
'나는 너를 사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하시며, 다윗이 왕으로서 자기 직무를 이용한 것을 책망하셨죠. 12:7

우리는 각자 자기가 가진 직권, 권한, 이런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자기 직권이라고, 헬기에 자기 가족이나 동창을 태워서 이동, 유람시키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도 안 좋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11:27

△우리 중에 죄를 지어 보았고, 그 죄로 인해 갈등해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다윗의 범죄 과정이, 우리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보고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후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응은 멀리 있는 반면에 
사람들의 비난은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가지는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죄 자체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만일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는 듯 숨기고, 덮어버리고, 지나가게 되겠죠. 
  
죄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덮으려 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죄는 또 다른 죄를 낳습니다. 

다윗의 간음이 사실 조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처참한 배신과 살인으로 결과가 난 것처럼 말입니다. 

또 죄가 죄를 낳는 동안 
우리는 죄의 지배의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죄의 영향력이 갈수록 더 커지고, 갈수록 그 지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서 주님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은 
'너 이 자식, 뭐 하나 보자' 하며 매를 들고 살피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여 죄 앞에 넘어진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 여정을 끝까지 완주하고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합시다. 
거기에 진정한 길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더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에 취약하고, 
어떤 사람은 돈에 취약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와 명성과 권력에 취약하고 
어떤 사람은 분노와 절망과 같은 감정에 취약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특별히 취약한 부분이 없어 보이는 대신 
남을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그 취약한 부분이, 우리에게 자주 범죄의 위기로 다가오고 
사탄은 그것을 기회로 활용하여 우리를 지배하려 됩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취약한 부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 함께 계시고 
우리의 연약한 부분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점들이 죄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장점을 사용하실 뿐 아니라 약점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취중인 우리아가, 다윗보다 훨씬 더 경건했고,
이방인 헷사람 우리야가, 다윗보다 더 의로웠죠.

△어떤 신학자는 지적하기를, 

본문 9~11절은 사무엘서 저자의 '의도적 비교'라고 했죠.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9

다윗과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비교하는 형식으로, 본문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우리아는 신기할 정도로 계속 충성합니다.

'우리아가 조금만 덜 강직하고, 덜 충성스러웠어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요...'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벨이나 우리아 같은 사람은.. 일찍 죽더라고요.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계략을 꾸미는데,

모든 것이 계략대로 술술 풀려나간다면..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아를 전장의 일선에 서게 해서, 고의적으로 살인하고서
그 범죄를 덮으려는 다윗의 계략이, 아무런 브레이크도 없이 술술 풀려나갑니다.
마치 요나가 불순종해서 다시스로 가려는데, 배가 딱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요.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잘되는 인생이 
과연 좋은 인생일까요? 
다윗이 광야에서 쫓겨다니던 시절, 힘들었던 시절이.. 오히려 축복이었죠.
그때 그는 시편을 지으며,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며, 사명 감당하며 살았어요.

모든 게 잘 풀리고, 사방이 평안하기만 한게.. 축복이 아닐 수 있다는 거죠.

  
인생이 일사천리로 돌아갈 때 조심하십시오. 
누구도 당신을 막아 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당신을 제지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스스로 무너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쓴소리 하는 사람을 반드시 곁에 두세요. 
여러분 인생에 쓴 조언을 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존중하세요. 

◑예방책1 : 치열한 현장을 떠나지 마십시오!

삼하11: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본문 앞부분인 삼하10장을 보면, 요단 동편에서 암몸과 전쟁이 진행중이었죠. 끝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승기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10장
이러한 계절적 문제로 회군하였으나, 이제 다시 건기인 봄이 돌아와 
다시 출정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10:14  
요압 장군이 나가서 전쟁 중인 상태에서 본문이 진행됩니다.

11절에 군대장관인 '요압과 왕의 부하들'이라고 했는데,   
그냥 부하들이 아니라, '요압과 다윗의 정예부대'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 용사들과 이스라엘 온 군대를 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라는 것이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1
그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2절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은 저녁 때에 침대에서 일어나.. 낮잠을 잤었나요?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다윗은 약 50세 경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안목의 정욕 을 이기지 못하고,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 보고 
그 여인을 불러들여서 동침하고, 
그 이후로는 뭐 말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죄들을 연속적으로 짓게 됩니다. 

▲정말 내 인생이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기를 진정 원한다면, 
마지막 날까지 전쟁터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쟁터를 떠나지 마십시오. 
나라가 강성해지고 군대가 막강해져서 
다윗이 나가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니까 
다윗은 전쟁에서 물러나 있었던 것이죠. 말하자면 조기은퇴 한 것입니다. 

왕이 목숨을 걸고 거기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그런 팀이 된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팀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감독이 경기장에 나오지 않는다면, 
물론 선수들끼리 세계 최고의 팀이라서, 모든 경기를 이길만한 팀이라 할지라도 
그런 감독은 더 이상 존재의미가 없는 것이죠. 

세상에는 은퇴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은퇴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은퇴가 있을지 모르지만 
크리스천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데는 은퇴가 없어요.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은퇴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20~30대 때 청년회장하고, 임원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게 노년에 내가 잘 믿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신앙은 보장을 쌓는 게 아닙니다. 

다윗, 그렇게 존경스럽던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 심각하게 추락했는가요? 
솔로몬은 나중에 더 심했죠.

신앙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이제는 좀 쉬어야지!' 하는 순간, 미끄러지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에서 임원하고 사역하다 보면, 좀 쉬고 싶어질 때가 옵니다. 
그러나 부르심이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은퇴하지 마십시오. 

'아~ 내가 이정도 했으면, 좀 쉬어도 되겠지..'
이런 인간적인 생각으로 사역을 내려 놓지 마세요. 
부르심이 멈추면, 그때 일도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있는 동안에는, 일을 멈출 수 없어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 드리는 거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 나를 붙잡아 주고 계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사역을 내려 놓는 순간 '저는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근데 세상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직장을 5년 10년 다니다 보면, '딱 1년 정도만 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어떠세요? 
그래서 막상 집에서 쉬어 보면, 인생을 잘 사는가? 
그러면 잘 쉬는 게 아니라, 의미 없이 시간을 허비하게 되더라고요. 
백수가 되어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내 인생을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아서
1년을 쉬고 싶더라고요. 
학점 따느라 맨날 시간에 쫓기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인생을 사는 거냐? 내가 휴학을 하고 좀 의미 있게 
인생을 살아 봐야 되겠다' 

그래서 제가 학기 휴학을 했어요.
물론 제가 10월에 군대를 가게 돼서, 아예 3월부터 휴학을 해 버린 거죠.
그런데 휴학을 해 보니까,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더라고요.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뭘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학교를 안 나가니까, 1교시 전에 선교 단체에서 모이는 아침큐티 모임에도 
안 나가도 되니까... 일단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아점을 먹고 
시내 나가서 뭐 친구 한 사람 만나면...  저녁이 되고...
하루가 금방 다 지나가더라고요. 한 게 없어요. 뭐 시골 노인이 된 것 같았어요. 

'내가 지금 뭐 하려고 휴학을 했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바빠서 못 하는 게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원래 바쁜 사람이, 일을 하나 더 하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죠. 
일을 안 하는 사람은, 일을 더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치열한 현장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쟁터가 위험한 곳이 아니라, 안락한 왕궁이 위험한 곳이에요. 

그것은 다윗에게 그렇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40대 후반 까지만 일하면 되지' 
'그때까지 일하고 돈 많이 모아서 50년은 놀고 먹겠다!'가 
인생의 비전이 된 것이 오늘날 세상 가치관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인생설계 라고 이야기 하고, 노후 설계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어디에도 그렇게 얘기 하신 적이 없어요. 

사명이 있는 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갈 것입니다. 
사명이 끝나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겁니다. 

여러분 천국 가야 인생을 retire 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 전까지는 인생에 은퇴는 없어요. 
나머지 50년 무위도식하며 놀면서 지내는 것처럼 비참한 삶은 없다는 거예요. 
'50세 이후에 무엇을 먹고 살까?' 지금부터 걱정하지 마시고요. 
'50세 이후에 내가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하면서 살까?'를 걱정하세요.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비전이 필요합니다. 
국가가, 나라 전체가, 사회 리더십들이 
나머지 50년을 놀고 먹는 게 인생의 비전이라고 가르치는 나라는 
앞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여전히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지금 다니는 직장으로 돈 버는 거 말고요. 
'정말 내가 죽는 날까지, 숨을 거두는 날까지 
내가 존재하는 게 가족에게 민폐가 되지 않고, 사회의 민폐가 되지 않고 
유의미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지금부터 고민하세요. 

돈 버는 것은 어떤 자리에서든 돈 벌 수 있잖아요. 돈 버는 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인생은, 물질로 사는 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감동적인 인생을 사는 거죠. 

돈 많이 벌어서 재밌게 사는 거... 재미있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재미가 있어도, 의미가 없으면... 그 인생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원로 목사님들만 모이는 교회가 있대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그분들이 주로 하는 것은, 그날 예배가 끝난 뒤에 
서로가 설교에 대해서 평가해 주고...

그런데 어떤 원로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나는 그런 원로목사 되고 싶지 않다.' 

제가 굉장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인데 
그분이 동생을 말씀 사역을 하시던 분이고,
굉장히 말씀 사역을 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거를 다 내려놓고 훈련원에 들어가시더라고요. 
성경 배우는 훈련을 들어가시더라고요. 

'목사님, 담임 목사 자리 내려놓으면 뭐 하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성경공부 하고 싶어! 
내가 주님 앞에 가기까지, 말씀을 공부해서
말씀을 가르치는 인생을 살고 싶다!'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여러분, 평생에 여러분이 무엇을 할 지를 고민하세요. 

제가 하나님 만나고 나서 인생이 변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서 살고 싶지 않다. 
생각의 감옥에 갇혀서 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실패와 실수를 할지라도 
도전하면서 살겠다!' 

금요일마다 저희 목회자들이 축구를 합니다. 
양재와 서빙고로 나눠서 하는데, 물론 부상을 당합니다.

제가 뭐 발목을 여러번 다쳤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난 번에 축구하다가 발목 다치지 않았냐고?
그런데 또 축구하십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운동하는 건데, 그거 다치는 거 위험하다고 
가만히 앉아서 평생 골골대다가 죽느니.. 

축구하다 인대가 끊어졌었고, 발가락 뼈가 골절된 적이 있었고 
발목을 여러 번 접질렀어도.. 나는 뛰다가 가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인생의 태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그걸로 주저앉아 버려요.

20대 30대에 왜 인생에 안주를 하려고 합니까? 
지금까지 공부한 것으로, 지금까지 일한 것으로 
마치 내 인생이 마감된 것처럼 안주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지금 여러분이 어떤 직장을 갖고 있는데, 그 직장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직장에서 은퇴를 하는 것으로도, 여러분의 인생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평생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세요. 

지금부터 그 시간을 준비하세요. 
여러분, 조금 발목이 아파도.. 뛰는 게 차라리 낫고요. 
조금 피곤해도.. 직장에서 일하는 게 감사한 것이고요. 
조금 힘들어도.. 예배에 나오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힘들수록, 몸이 지칠수록.. 운동을 해야 살아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적극적인 스피릿이 필요해요. 

△제가 학생시절에, 저희 큰 형이 해준 조언이 있어요. 
저희 큰형이 정신과 의사인데, 
제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데 울렁증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발표하다가 창피를 당하더라도, 발표 한번 안 하고 도망 다니는 사람 되지 말고
창피를 당하더라도 앞에 나가서 발표하면서 창피당하는 인생을 살아라! 
네가 만약에 그렇게 피해 다니기만 하면, 너의 인생을 전혀 못 살게 돼 있다. 

너의 인생의 스테이지를 다른 사람들이 내 주지 말고 
너의 인생에 무대 한가운데 서라!
거기서 영욕이 있을지라도 (영광도 있겠지만 수치가 모욕이 있을지라도) 
비켜가지 말아라!'  정면돌파 라는 것이죠. 

프로 운동선수라면, 여러분 팬들의 입장에서 
프로운동선수 가장 마음에 실망스러울 때는 
경기가 잘 안풀린다고 도중에 포기해버리는 선수를 볼 때 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대충대충 산다면 
소중한 인생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당신의 인생에 최대의 팬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 행위죠. 

'하나님, 저는 뭘 해도 어차피 잘 안 될 거 같아요. 
그러니 그냥 대충 놀면서 살겠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학생이라면 시험성적이 20점 30점 일지라도 
백지 답안을 내는 거 보다, 그 성적을 받는 게 나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자존심이 있거든요. 
백지 답안을 내버리는 학생들이 있어요...

비록 낮은 점수를 받더라도, 내 인생의 기회를 남에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기회를,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살아 가세요. 

대학 입시가 지난 주에 있었죠. 
그 수능 성적 하나 가지고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포기하지 마세요. 
어려워도 버티고, 그 시간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수치를 당하더라도 내 인생의 무대에서 
내가 먼저 포기하고 내려오면 안 됩니다. 

마음이 어려운 것은, 성전에 나와서 쏟으면서 그 마음을 해결하시면 돼요. 
그 현장에서는 밀고 나가셔야 돼요. 포기하지 마세요. 타협하지 마세요. 

이렇게 조기은퇴 하지 마세요. 
사실 청년들인 우리는 조기은퇴할 나이도 아니죠. 

그렇지만 청년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빨리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마음속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리타이어를 해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직장을 다니지만 '뭐 내 인생에 무슨 비전이 있겠어?'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도울 수 없어요. 

하나님이 끊임없이 오늘도 '생명'이라는 찬스를 주고 계신데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도우실 수 없어요. 

여러분, 일어나십시오! 
전쟁터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편안한 왕궁이 위험한 것입니다. 

◑예방책2 : '왕궁 옥상'을 주의하십시오!

11: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저녁 때에'
사람들이 주로 죄를 짓는 거는 밤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일찍 자는 것이 좋습니다. 

도시는 불야성 이에요. 
도시는.. 하나님의 자연질서, 창조질서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20대에 온전한 인생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야행성'으로 살지 말고 '새벽형' 인간 으로 사세요.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세요. 
노는 애들 보면.. 전부 밤에 놀고 낮에는 퍼질러 자고.. 
저녁 쯤에 일어나서, 그제야 몸이 막 깨어나기 시작해요. 
그게 문제입니다. 

다윗이 지금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제부터 이렇게 새벽 기도도 안 하고, 
늦게까지 낮잠이나 자는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다윗이 원래 어떤 찬양을 불렀습니까? 
시57:8절에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와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거는 유대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새벽에 부른 찬양이에요. 
그가 도망자 시절에 사울에 쫓겨다닐 때는
광야에서는 새벽을 깨웠는데 
지금 왕궁에서는 낮잠을 자고 있는 거에요. 

찬송을 이유가 없었던 그 광야에서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찬송을 했는데 
감사할 이유가 넘쳐나고 넘쳐나는 이 왕궁에서는, 밤에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새벽을 깨우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온전히 살고 싶으면 새벽을 깨우십시오. 

▲새벽 예배 드리다보면 안 보이던 얼굴이 이렇게 가끔 나타나요. 
'아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마치 스폰지 같은 얼굴 하고 앉아서 좍좍 다 빨아드려요. 
의자도 뒤에 기대고 앉지 못합니다. 

그렇게 새벽마다 울고, 위로 받고, 다시 힘을 얻고... 
그러다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이 용답해 주시고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되기 시작하면 
요즘 자세가 편안해져요. 이렇게 의자에 등을 기대기 시작해요. 

그러다가 졸기 시작해요. 
그러다가 새벽에 안 보이기 시작해요. 
저는 '아~ 문제가 해결 됐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죠. 
그 청년은 다시 야행성으로 사는 거죠. 

△여러분, 위기는 여러분이 가장 편할 때 찾아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불편하게 사는 인생을 선택하세요. 

온전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불편하더라도 
그 불편한 삶을 자기 라이프스타일로 만드세요. 

다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어려움이 찾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이 빈들에서 방황할 때는, 시글락에 가서 쉬고 싶었잖아요.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서 망명을 하죠. 
그러다가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 왕이 으르렁거리고 있는 유대광야보다
편안한 시글락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경험한 거예요. 

여러분, 지금 다윗에게, 전쟁터보다 예루살렘이 더 위험한 곳입니다. 

'아, 이제는 직장도 됐고, 결혼할 사람도 만났고,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지금이 최고로 기분 좋은 때이다..' 하는 순간 
긴장하셔야 됩니다.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래서 여러분 직장을 얻기 위해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내 인생이 잘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을 모른 척하고.. 그 인생은 다시 또 위기의 소용돌이 가운데 빠져드는 것이죠. 

'내가 이제 괜찮다'하고 생각할 때 스스로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낮추시더라고요... 

여러분, '평생 새벽을 깨울 수 있는 건강과 영성을 하나님 내게 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갈급해 하는 마음을 제게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세요. 

▲왕궁 옥상을 주의하고, 성전 바닥에 엎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니까 왕궁 옥상이 항상 문제더라고요.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도 
자신이 세운 제국의 왕궁 그 옥상을 거닐면서 
'야 이 제국을 봐라, 이 놀라운 도시를 봐라! 이거 누가 세웠느냐?'
자기가 세웠다는 거죠. 막 교만이 하늘을 찌르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셔서, 그가 짐승같이 되어서 
7년 반을 풀을 뜯고 이슬을 먹는 그런 미친 인생을 살았어요. 

사물의 무게중심도 낮을수록 안전하고, 높을수록 불안해지기게 되어있어요. 
사실은 누구나 왕궁 옥상에 올라가고 싶어 합니다. 
거기에는 권력이 있고,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산해진미가 있고, 
미남미녀들이 있고, 세상에 좋은 것들은 다 거기 있어요. 

사람들은 왕궁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그곳이 얼마나 끔찍하게 무서운 곳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헨젤과 그레텔, 또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잔혹 동화' 라고 하지요. 
애써 올라간 왕궁이 그런 케이스가 되는 거예요. 

화려한 세상은 '잔혹 동화' 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세상 성공은, 겉으로는 페어리 테일 (멋진 이야기) 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화려하게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는... 
내 인생의 꿈을 만족시켜 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잔혹함'이 깔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다윗의 실패를 보세요!

<위대한 개츠비> 라는 영화를 봤어요. 
그 세계에 뭐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가끔 비행기 탈 적에 본 적이 있어요.

1922년 뉴욕 외곽에서 주말마다 호화파티를 여는 백만장자의 이야기입니다. 
개츠비 라는 사람의 이야기죠. 

그의 삶을 동경에서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뭐 정치 경제계 인사들, 유명인들이 다 모여 듭니다. 

그러나 개츠비가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 마저도 
그 남자의 화려함을 사랑했던 것이지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영화 말미에 밝혀지지요. 

그를 사랑했던 게 아니에요. 그의 화려함을 사랑했던 것이지... 
결국에 영화 마지막에, 이제 개츠비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화려한 세상(왕궁 옥상)이 '잔혹 동화' 라는 걸 잊지 마세요. 
우리는 왕궁 옥상에 올라가기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크리스천 청년 여러분! 우리는 왕궁에 들어가기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왕궁에서 살기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당신이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 해서 내가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왕이 되는 거 찬성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저도, 당신이 그런 비전을 가지고 왕이 되었을지라도 
왕궁 옥상에 올라가서 자만과 여유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전 바닥에 엎드려서 겸손과 긴장 속에서 인생을 살아야만 
그 왕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요. 당신은 망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성전 바닥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성전 바닥에 엎드릴 때는, 내 인생이 가장 힘들고 비참할 때죠. 

'오 하나님, 난 너무나 힘듭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저는 못 살겠습니다!'
통곡하며 엎드리는 자리지만 
그렇게 인생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식입니다. 

그 성전 바닥이, 내 영혼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삼하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앉아서 기도했죠.

△물론 돈을 많이 버는 건 좋은 것입니다. 
높은 지위를 얻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재밌는 인생 사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고 권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될지 모르고 
쾌락을 어떻게 다 써야 될지 모르는 사람 
그러면 그 사람은.. 성공한 후에는.. 중독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물질중독, 권력중독, 쾌락중독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중독이라는 것은 내가 그것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게 나를 사용하는 거에요. 그게 나를 붙잡는 거예요. 

만약에 당신이 그런 중독에 빠져 살게 되면 
잔혹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궁 옥상에 올라가기 전에, 또한 옥상에 올라가서도
신앙으로 자신을 늘 무장해야.. 그 '왕궁 옥상'이 잔혹 동화가 되지 않죠!
안 그러면, 왕궁에 들어가는 날부터.. 위기가 시작되는 거죠!

......................................................

주1) 제가 20대 초반에 이런 테스트를 해 봤어요. 
제가 그런 결심을 하고 나서 
누가 제 앞을 지나가는데 가만히 있는 거죠. 가만히 있는 거죠. 

하루는 전철에 이렇게 앉아 있었어요. 
앉아 있는데 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 자리에만 꽉 채워서 앉은 거에요.

그러면 누가 칸을 이동하면서 지나가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무슨 모델이 워킹 하는 것처럼, 앉은 형제들은 열심히 보는 거에요. 

근데 저는 그렇게 지나가는 자매를 쳐다보니 형제를 관찰해 봤어요.
제 앞에 있는 남자를 계속 지켜봤어요. 
이 분이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이렇게 돌아가더라고요.
지나가는 사람을 따라 시선이 돌아간 거죠.

물론 쳐다보는 게 죄는 아니죠.
그러나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쳐다보면.. 실례고, 예의바르지 않죠.

그건 정상적으로 쳐다보는 게 아니라 
영어로 핍핑 PEEPING 이라고 하는데, 훔쳐보는 거죠. 

1992년 여름에,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여기에 관해 글을 하나 썼어요.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아름다움을 훔쳐 보는 것은 다르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을 조성하신 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훔쳐보는 것은,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자기만의 아름다움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아름다움을 훔쳐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아름다움을 훔쳐 보는 게 아니라, 볼 줄 아는 것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보기가 사람에게는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 

아름다움을 만드신 이의 아름다움이 마치 자신의 것인냥 
교만해하던 천사장의 타락과 오만이 사람들에게 이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아름다움을 소유했으면서도 또 그 아름다움을 훔쳐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평생 아름다움을 찾아다녔지만, 아직도 더 아름다움이 있다고 헤매는 사람들, 만족이 없는 사람들... 

오늘도 지하철을 타면서, 또 거리를 지나면서
나는 아름다움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형제자매들은, 멋진 형제자매를 보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렇게 안들리던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하고 결혼해라!' 영적 혼돈에 빠지는 거죠. 

형제들은 멋진 자매를 보는 순간 
묵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말도 걸어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기는 그 사람하고 마음으로 결혼했어요.

그래서 가끔 희한한 경우도 있더라구요. 
만나서 한 번도 말도 안 해 봤는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갑자기 
'저랑 결혼해 주세요!' 라는 말을 들을 때, 너무 충격적인 거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