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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4장 압살롬 반란의 배경은 '가정 불화'

LNCK 2023. 4. 27. 20:59

◈압살롬 반란의 배경은 '가정 불화'             삼하14~15장         설교 정리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애증                ▣<아버지>관련글 모음 

<사무엘하>에 다윗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에 관련된 기록은 삼하13~19장까지, 장장 7장에 걸쳐 길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일곱 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가운데 상당수가 
다윗의 가정 안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련된 기록입니다.  

13장에서, 암논이 다말을 범한 사건이 벌어지죠.
2년 후에 압살롬이 암논을 보복살해 합니다.

압살롬은 그술 왕 달매에게 피신해 가서  
거기서 세 해 동안, 만 2년간 머물러 있었습니다.  13:37

그 사이에 아버지 다윗 왕의 마음에는 
아들 암논은 잃은 충격이 가라앉았고 
살아있는 아들 압살롬을 향한 그리움이 간절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애증"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그를 고국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4장에, 요압이 그것을 눈치채고, 압살롬의 귀국을 주선합니다. 
(요압은, 압살롬이 차기 왕권 상속 서열 1위니까, 압살롬에게 줄을 서는 거죠) 본문 14장 전체가 그 이야기입니다. 

요압은 드고아의 한 여인을 물색하여 
초상당한 어머니로 가장해서 다윗에게 보냅니다. 

그리고는 지어낸 이야기를 사용하여, 다윗의 마음을 돌립니다. 
다윗은 요압의 청을 받아들여, 압살롬을 귀국시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돌아온 후에도 다윗은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 대목에서, '아버지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압살롬을 사랑했으니까 이스라엘로 불러들였죠.
나중에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이 슬퍼한 것만 보더라도, 그를 사랑했습니다.

혹자는 반대로 '다윗이 압살롬을 근실히 징계하지 않았다'라고 해석하는데
아닙니다. 아래 23~24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술에서 돌아온 압살롬을 
2년이나 만나주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압살롬을 징계한 것입니다.  

그 2년의 징계기간이 끝난 후에,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들여 입을 맞춥니다. :33

혹자는, 다윗이 그술에서 압살롬이 돌아온 때에, 입맞추어야 마땅했다고 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징계'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죠.
왕이 공의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반란을 준비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너무 사랑으로 키웠거나
-너무 사랑없이 키웠기 때문이라고
본문에서 다윗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양극단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자꾸 아버지 다윗의 잘못으로 몰아가려고 하는데, 
그런 이유가 일부 있다 하더라도

압살롬 반란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압살롬 자신의 회개 없는 반항심 때문이며
-12장에서 선포된 밧세바 사건으로 인한 '나단의 계시' 때문입니다. 

이게 큰 그림이지, 
'아버지 다윗의 사랑부재, 또는 공의부재'로 보는 것은 작은 그림입니다.」

14:23~24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이는 단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 표명을 한 것이죠.

이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다윗 왕의 조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즉, 다윗 왕은 일단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상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어야 옳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악독한 죄악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앞으로 백성들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이번 조치는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마땅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죠. 

아무튼 이처럼 다윗과 압살롬 간에 형성된 껄끄러운 관계는 
결국 압살롬으로 하여금 부친에 대한 미움으로 
반역이라는 새로운 죄악을 저지르게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에 예고한 징벌이 
이렇게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12:10-12).」

◑반역을 차곡차곡 준비하는 압살롬  *삼하15장

그래서 압살롬은 귀국한 후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요압의 중재로, 아버지 다윗 왕과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13장과 14장 전체가 다윗 집안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압살롬의 반란에 관해 서술하는 삼하13~19장에서    
'다윗의 가족사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 반란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물론 왕이 되기 위해서 였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표면적인 이유였고 
심층에서 더 깊은 역학이 작용하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 사이에 일어난 부자간의 갈등이었습니다.

그 갈등은 꽤 오랜 시간을 통해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에 대적하는 반란 음모를 시작한 것은 
암논이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범한 후 6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그 사건 후 압살롬이 암논을 보복살해하기까지 2년, 
압살롬이 그술로 피신해서 지낸 것이 만2년 
고국으로 돌아온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만나 기까지 2년 
이렇게 도합 6년의 기간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갈등 속에서 보내왔습니다. 

아마도 그 6 년간 압살롬에 가슴에는 깊은 좌절과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쌓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본문 다음 장인 15장 앞부분에는 그 후 4년간 용의주도하게 반란을 준비해 가는 
압살롬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압살롬은 왜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까요? 

압살롬은 다윗 왕의 셋째 아들이지만 
첫째 아들 암논이 죽었고 
둘째 아들 길르압은 아마 일찍 병이나 사고로 죽었고
이제는 셋째인 압살롬이 서열 1 위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압살롬 자신이 왕이 될 차례였습니다. 

물론 압살롬은 그동안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온 태도를 볼 때 
자신에게 그렇게 순순히 왕위를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성격이 명민하고 치밀한 사람입니다. 

만일 왕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피를 흘려 반란을 일으키기보다는 
왕실의 여론을 움직여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압살롬은 이미 백성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의 마음에는, 압살룸을 향한 "애증"의 감정이 병존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압살롬을 향한 미움의 감정은 점차 줄어들었고 
그 아들을 향한 미안한 감정은 더 커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고 
아버지를 향해 반란의 칼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더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왕위 계승자가 되는 방법을 택할 경우엔, 자신의 유능한 만 입증하면 되지만 
반란을 택할 경우에는, 아버지의 잘못까지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윗에게는 오랜 전쟁 경험을 통한 
강하고 잘 훈련된 군대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더 어려운 길(반란)을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아버지를 향한 서운함이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하15 장을 보면, 압살롬이 반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 한 일은 백성의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성문 앞으로 나아가서 
억울한 일로 재판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마음을 얻고, 백성의 지지를 얻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5:4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압살롬은 왜 재판관이 되고자 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형 암논에게 피해자가 되었을 때 
그 억울함을 풀어줄 공정한 재판관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하13:21에, 다윗은 암논의 범죄사실에 관해 소상히 전해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다윗이 암논과 압살롬 사이에서 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피해자인 압살롬과 다말의 수치를 풀어주었다면 
그 일이 거기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2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아무런 후속 조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스스로의 힘으로 암논에게 보복함으로써 
수치를 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1)

그 일로 인해 압살롬은 형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다윗은, 압살롬은 벌하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술에서 돌아온 압살롬을 2년간 다윗이 만나주지 않은 것은 '징계'라고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것도 '피의 보복'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압살롬을 무조건 벌 줄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주1) 

 

32절에 압살롬은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어떻게 보면 뻔뻔스럽게, 자기가 죄가 없다는 식으로 항변합니다. 

자기가 형 암논을 죽인 것을, 만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지금 압살롬은 '내게는 죄가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는 그가 스스로 '암논을 죽인 것은 살인이 아니라, 정당한 피의 보복이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적어도 압살롬은 스스로 그렇게 자기를 변호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정당한 피의 보복'에 대해서는  주1)을 참조하세요.

이 모든 것은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줄 사람이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다윗의 가정 내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국가적 문제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성문앞에서 맞이하며 이렇게 선동합니다.

15: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그 사정을 대신 말해줄 사람이 왕에게는 없다'는 말이었죠.

다윗 왕실에서 공정한 재판이 시행되고 있지 않다는 말인데요. 
이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재판관 행세를 함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 것으로 볼 때 
압살롬의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압살롬이 다윗 통치의 허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가려운 부분을 긁어줌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행동은, 이런 현실적 의미 외에도 
몇 가지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함의를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위협을 피해 다니던 중에도, 다윗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주위로 몰려들어 그의 지지자가 되고 
부하가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들이 나중에 다윗의 군대의 용사들이 되었죠. 
삼상22:2절에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또는 오히려 그들을 억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억울한 처지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서 
동병상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윗의 당국에서 억울한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다윗의 사법 시스템이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행동은 그 점을 드러내고 부각시켜서 
다윗 왕국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15:4절에서 압살롬은 백성의 '재판관'이 되고자 했는데요. 
여기서 재판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쇼페트는 
이스라엘의 사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사라는 말이 재판관이라는 뜻이지요. 

스스로를 재판관, 곧 사사로 내세웠던 압살롬의 행동은 
그러한 '왕정 반대론자들'에게 주는 상징적인 신호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2)

재판관으로 자처한 압살롬의 행동은 
이렇게 여러 면에서 정치적이고, 상징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윗 왕에게 반대하는 여러 세력을 
하나로 끌어모으는 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윗 왕을 반대하는 세력들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 사울왕을 지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삼하2:1절 이하를 보면, 다윗은 처음에 유다지파의 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8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의 나머지 11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서는 그들을 가리켜 '이스라엘'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스보셋 왕실이 자중지란으로 무너진 후 
모든 지파가 다윗을 찾아와 그의 백성이 되었지요. 

다윗은 통일 왕국을 세우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통합했습니다. 
그러나 분열의 불씨가 늘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그 분열의 불씨를 다시 지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반란을, 과거 사울시대의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비도덕성과
사울이 여자 관계에 비교적 깨끗했던 면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첩으로 알려진 자는, 성경에 리스바 뿐이었습니다) 

삼하16:1절 이하를 보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날 때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가 찾아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은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시바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16: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통일왕국은, 매우 불안한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12지파의 부족공동체로 (사사시대까지) 쭈욱 살아오다가, 하루 아침에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바뀌긴 어려웠겠지요.
사울 왕 때도, 12지파가 뿔뿔이 나뉜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여줍니다. 
특히 전쟁할 때 보면, 12지파가 제대로 다 모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연약한 지반 위에서 
통일국가를 일궈낸 다윗의 정치력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을 통일하여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위협에서 구해 냈을 뿐 아니라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이스라엘을 팔레스틴의 최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전에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살던 이스라엘이 
다윗 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어깨를 펴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정한 재판의 부재가, 압살롬의 반난에 계기를 제공했지만 
다윗 왕국에 사법제도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삼하8:15절은, 다윗이 왕의 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그는 언제나 백성 모두를 '공평하고 의로운 법으로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사법제도를 잘 갖추어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모든 제도에는 허점이 있고 
좋은 제도가 있더라도 잘못 운용하면 무용지물이 되듯이 
다윗 왕국에도 그러한 그림자들이 일부 있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왕자로서, 그 허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요. 

그러한 사태 인식을 토대로 
압살롬은 불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가정 내에서 일어난 부자간의 갈등이 
'왕자의 난'으로 발전했고 
그것은 통일된 이스라엘의 분열의 불씨를 다시 지피는 비극으로 발전했습니다. 

◑적용

다윗은 30살에 왕이 되어 70세까지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5:4
다윗은 그 가운데 처음 7년 반을 헤브론에서 보냈는데요. 
암논과 압살롬은 그 기간에 낳은 아들들입니다.  3:2~

그것을 기초로 생각해보자면 
삼하13~19장까지 압살롬의 반란과 관련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시기는 
대체로 다윗의 즉위 20~30년 경까지 
이때 다윗은 50대 였고, 압살롬은 20대였던 10년 어간입니다. 

다윗의 전성기였습니다. 나라를 확장하느라고 매우 바쁜 시기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일국가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시기에 
다윗은 미처 가정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가정에서 일어난 갈등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평생을 통해 일으켜 세운 
통일왕국의 기반을 흔드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읽으며 떠오르는 단순한 적용으로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저를 포함하여 아버지이신 분들, 깊이 반성하며 가정을 잘 돌봅시다. 

다윗은 왜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을까요?
다윗은 왕으로서 온 나라에 하나님의 왕되심을 실천하는 일에 
모범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무던히 노력하면서도 
정작 자기 가정에서는, 그런 노력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주 되심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출발점은 가정입니다. 

본문은 압살롬의 반란이 오랜 과정을 통해 배태되었고 
그러는 사이 다윗에게는 더 안타까운 일을 막을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만일 암논의 폭행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다윗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상처입은 딸 다말을 보살폈더라면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그술로 피신했던 압살롬이 
2년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라도 

아니면 압살롬이 돌아오고 또 2년이 지난 후 그를 만났을 때라도 
다시 아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더라면 
적어도 반란으로 가는 길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이들이 너무 커버려서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경험적 진리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늦게라도 부모가 자녀에게 손을 내밀면 
자녀들이 처음에는 '왜 저래?' 하다가도 
그러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질 때 
자녀도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줄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해 갈 뿐 아니라 
부모로서도 계속 성장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죽는 순간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가장 접근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하여 부모로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채우셔서 
우리의 가정이 잘 되고, 교회가 잘 되고, 일터가 잘 되고, 이 나라가 잘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을 세우시고 선하게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가 모든 교우들 가운데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량을 받아본 사람이 배워서 나중에 베풀게 됩니다.
제가 지금은 성직자가 되었지만, 
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잘사는 친구들이 주로 들고 다니던 물통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은 가난해서, 물통을 가질 수 없었죠.

제가 한번은 냇가에 갔는데, 
먼 발치에는 퇴비를 준비하는 어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냇가에는, 그 분 것으로 여겨지는 물통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물통이 너무 탐이 난 나머지, 
그것을 훔쳐다 집에 몰래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안 그런 척하고 냇가에서 다시 놀았습니다. 
  
얼마 후 물을 마시려던 그분이 물통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제게 '물통을 못 봤냐?’고 묻길래, 
저는 ‘못 봤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사람이 다녀간 건 너 뿐인데...’ 하면서 다시 자신의 일을 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가 가져갔다는 것을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며칠 후 그쪽 동네를 지나가다가, 
그분이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그분이 저의 잘못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전 성직자가 되어서도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데 지금보다 훨씬 인색했을 것 같습니다. 


유대인 학살로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아돌프 히틀러도 
어릴 때는 여느 평범한 아이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종교의 영향 안에서 자랐고 
어릴 때에는 수도원에서 자주 놀기도 했습니다. 
  
한때 성직자가 되려는 꿈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히틀러가 선동가로, 학살자로 변해갔던 그 밑바탕에는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아버지와, 그 당시 성직자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릴 적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의 치유를 위한 것 

2004년 북경 코스타를 갔을 때 한 자매와 상담을 했습니다.  
성령께서 자매에게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지시하시는데, 
자기는 정말 그렇게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자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도 곁에서 보면서, 
딸로서 아버지에게 배신감도 느끼고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아버지에게 마음을 닫아버렸어요. 
그 아버지를 거의 잊고 지내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서 
‘제가 아빠를 미워한 것을 용서해 달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싫은데 
아버지에게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에요. 도무지 싫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아버지가 했는데, 왜 내가 아버지에게 오히려 잘못했다고 해야 하고,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 되느냐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꼭 그렇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 상담을 하면서 성령님께서 제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매에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위함이 아니고, 자매의 마음을 치유하려 하심이에요. 

앞으로 한 형제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될 텐데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지고는 그 형제를 괴롭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모습을 남편에게 투사) 

자매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그냥 가지고 결혼을 하면 
남편에 대한 의심, 남자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어서 
자매를 사랑하는 그 형제는 결혼생활이 그것보다 더한 지옥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자매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아버지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가 아버지의 허물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아버지 미워했던 것 고백하고, 아버지의 용서도 받고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성령님께서 하시라는 대로 순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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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것은, 이스라엘 문화와도 관련 있다.
이스라엘 문화에는, 또는 율법의 전통에는
'원수 갚는 자' 히브리어로는 '고엘 하담', 
그 뜻은 '피의 보복자'(avenger of blood) 라는 것이 있다. 

민35:19에서는 '피를 보수하는 자'로 번역되었는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가리킨다. 

율법에 의하면 가족이나 친척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면,
가까운 친척(피의 보복자)이 반드시 복수할 의무를 지니며, 민35:12
그것은 살인죄가 아니었다. 

다말이 암논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압살롬은 다말이 '거의 살인'을 당한 것과 다름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암논에게 '피의 보복'을 한 것이다.


주2)  재판관/사사/쇼패트
이 단어는 우리의 관심을 사무엘의 시대로 돌리게 합니다. 
사사시대 말기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나와서,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지요. 

사무엘상에는 이러한 왕정요구에 대해, (백성들 가운데)
부정적 태도와 긍정적 태도가 공존합니다. 

한편으로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은 왕정에 대한 요구를 
하나님의 주 되심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고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왕정을 통해 '하나님의 주되심을 구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제가 들어서게 됩니다. 

구약역사가들은 이렇게 사무엘서에, 
왕정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긍정적 태도가 공존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역사 속에도 그러한 두 입장이 공존해 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왕정제도가 정착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사사시대를 이상으로 삼아서 
왕정제도의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압살롬을 중심으로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다시 사사시대에 이상적인 정치에 제도를 회복하자는 기대를 자극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