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이 성폭행 당했으면, 압살롬은 아버지 왕에게 알려서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상적인 해결 수순입니다.
암논이 지금 왕국의 2인자요, 실세이기 때문에, 압살롬은 더더욱 그런 ‘절차’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발생 ‘당일부터 결심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압살롬이 ‘피의 보복자’가 되기로 스스로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당시 문화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가족 중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피의 보복자’로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패륜아, 몹쓸 집안’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피의 보복자’ 문화는, 성경에도 나오지만 삼국지 등 다른 문화권의 고대소설 등에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사법적 절차에 의해서 처리하는 문화이지만, 과거에는 ‘가족 의리’ 문화에 의해서 처리하던 시절이었고, 만약에 그 의무를 무시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지요!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 ‘보복하지 말라, 원수 갚지 말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면 고대사회에.. 보복하고 원수갚는 문화가 아주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죠. 더욱이 그것이 제멋대로 오용, 남용, 악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압살롬 자신의 지나친 떳떳함도 ‘피의 보복 문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14:32 ‘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이게 무슨 생뚱맞은 얘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 보면, 압살롬은 빼도박도 못하는 ‘살인자’가 맞죠. 그런데 그가 ‘나는 죄가 없다’는 식으로 항변하는 것은
다윗 왕이 어떻게 판결을 내릴지는 모르나 ‘피의 보복자’ 문화에서는, 자기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여동생 다말의 원수를, 자기가 갚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원래 ‘피의 보복’은 제사장의 관리 감독하에 하는 것입니다. 근데 압살롬은 자기 스스로 ‘피의 보복자’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죠! 잘못입니다.
어쨌든 다윗 왕이 볼 때, 압살롬이 암논에게 ‘피의 보복’을 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해 준 거죠.
압살롬이 형을 살인한 것은 맞는데, 어느 정도 정상 참작했다는 거죠. 그래서 압살롬에게 즉각적인 징계를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린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징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징계를 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 하는 것을 눈치챈 요압이 그를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혹자는 반대로 '다윗이 압살롬을 근실히 징계하지 않았다'라고 해석하는데 아닙니다. 아래 23~24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술에서 돌아온 압살롬을 2년이나 만나주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압살롬을 징계한 것입니다.
14:23~24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이는 단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표명한 것이죠.
이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3. 요압이 고용한 간교한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도 ‘피의 보복자’ 문화가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14:6 ‘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드고아 여인은 자기 아들이, 다른 아들을 ‘과실 치사’로 죽였다고 말합니다. 들에서 싸우다가 어쩌다 잘못되서 죽었다는 거죠.
율법에, 당시 이스라엘의 나랏법은 율법이었죠. ‘과실 치사’로 죽인 사람은, 도피성에 가서 도피해서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피의 보복자’에 의해서 복수만 당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습니다. ‘과실치사’인 경우에만 한정됩니다. (*고의 살인은 안 됨)
그러니 여인은, 압살롬이 암논을 과실치사로 죽였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과 다른 거짓말입니다. 다만 법정 공방이 그렇다는 것이죠. 압살롬을 그렇게 봐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주3)
(위 ▲1과 ▲2는, 압살롬이 ‘피의 보복자’로 나선 것이요, ▲3은 압살롬이 살인자로 쫓기는 입장이라서.. 약간 케이스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피의 보복자’ 문화에서, 지금 압살롬과 드고아 여인은,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논리를 주장합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남은 아들마저 죽으면 상속자가 아무도 남지 않는 그런 상황에서
둘 중에 남은 아들이 들판에서 ‘과실 치사’로 살인한 것이면, 면죄 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배심원이 판단할 문제죠) 그리고 지금 현실 사정도 ‘상속자가 없어져 버리는’ 딱한 형편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압살롬을 데려온다면, 누가 왕에게 허물을 돌리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14:9
정리하면, 이렇게 '피의 보복자 문화'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다윗의 무책임한 태도가 많이 이해가 됩니다. 그는 압살롬의 징계에 무책임했던 게 아니라, 압살롬의 범행을 이해한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위 본문을 기록한 의도, 목적,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위에서 전개한 논지는 ‘삼하13~14장 본문이 다윗의 리더십의 부재, 마땅한 징계의 결여.. 라는 해석적 관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본문이 기록된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런 해석은 비록 맞는 말이라 할지라도, 숲을 못 보고, 나무만 보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기록한 성경 저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큰 그림으로 보자면,
삼하10장까지만 해도 <성공한 왕으로서의 다윗> 이야기가 중심이었다면 삼하11장부터는 그 초점이 <실패한 죄인 다윗>으로 옮겨집니다.
'밧세바 통간 사건 (11장)'을 분깃점으로 해서 그 이전까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종 다윗 이야기를 서술했다면, 그 후로는, 찌질하고 깨지고 못난 죄인 다윗 이야기를.. 성경은 풀어나갑니다.
11장, 유부녀와의 간통과 충신을 살해하는 사건 12장, 암논의 성폭행과 압살롬의 암논 살해 13장, 압살롬의 피신과 귀환 후 계속되는 부자 갈등 등
성경 본문은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성공한 사람 다윗’의 모습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철저한 죄인 다윗’의 모습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승승장구만 했다면...
-그는 전쟁에 나가 백전백승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셀럽 중의 셀럽이었죠. -그는 전쟁에서 거둔 수많은 전리품들을, 모두 하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수 조원의 천문학적인 액수를 헌금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과거보다 2배 이상으로 확장한 영웅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영토를 ‘하맛 어귀에서 홍해’까지 넓혔죠.
-그는 이스라엘의 동사남북의 모든 주변국을 다 복속시켰습니다. 동쪽 암몬과 모압, 서쪽 블레셋, 남쪽 에돔과 아말렉, 북쪽 수리아
이런 영웅인 그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전쟁 나가서 종종 지는 사람 -아까워서 하나님께 작은 것도 드리지 못하는 자들 -영토를 자꾸 뺏기고 축소시키는 사람 -주위 사람들에게 늘 공격당하고 얻어맞는 사람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은 ‘자기 의 self-confidence, self-righteousness’ 에 1백%가 아니라, 1만% 완전히 도취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안 그럴 사람이 있을까요? 그 자리에 올라가면 다 그렇게 됩니다!
그게 뭐가 문젠가 하면,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죠!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의로워서, 잘나서, 성공해서, 탁월해서’ 구원받는게 아니죠. 우리는 ‘내가 불의해서, 죄인이라서, 비천해서’ 주님의 의를 의지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