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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보복자’ 관점에서 본 다윗과 압살롬

LNCK 2023. 4. 28. 11:09

◈‘피의 보복자’ 관점에서 본 다윗과 압살롬           삼하14장        여러설교정리

삼하13장은, 암논이 다말을 강제 성폭행한 사건의 기록이고
삼하14장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에 도망갔다가 돌아오는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문화 즉 율법의 전통에는
그 뜻은 '피의 보복자'(avenger of blood) 라는 것이 있습니다. 민35:11~19

히브리어로는 '고엘 하담'인데, 억울하게 죽임 당한 자를 대신해서
원수 갚는 자를 뜻합니다.

민35:19에서는 '피를 보복하는 자'로 번역되었는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가리킵니다. 

율법에 의하면, 가족이나 친척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면,
또는 우발적으로, 과실치사로 죽임을 당하면 (고의적 살인은 해당 안 됨)

피해자의 가까운 친척(피의 보복자)이 복수할 의무를 지니며, 민35:12
그것은 살인자를 죽여도 살인죄가 아니었습니다. 정의의 복수죠!

다말이 암논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압살롬은 여동생이 '거의 살인'을 당한 것과 다름 없다고 여겼을 것이죠.
그래서 압살롬은 암논에게 '피의 보복'을 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과 배경에서 본문 삼하13~14장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다윗의 아들에 대한 징계 결여로.. 모든 위험을 초래했다는 해석이 있죠.

그런 점도 없지 않고 조금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본문을 기록한 주된 목적이나 의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근실히 징계해야 한다’고, 잠언에도 나옵니다만  
그 말은 맞지만, 그런 가정생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본문이 기록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피의 보복자’라는 이스라엘 문화의 관점을 가져오지 않으면
다윗을 ‘아들 압살롬의 징계를 소홀히 한 무책임한 아버지’로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참고로, 다윗이 <암논>을 징계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주1)

◑다윗이 <압살롬>을 징계하지 않은 이유는 
  ‘피의 보복’ 문화 때문일 것입니다. 

즉 압살롬의 살인에 다소 정당한 이유나 측면이 있다고, 압살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1. 13:32 (요나답의 말입니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여동생이 성폭행 당했으면, 압살롬은 아버지 왕에게 알려서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상적인 해결 수순입니다. 

암논이 지금 왕국의 2인자요, 실세이기 때문에,
압살롬은 더더욱 그런 ‘절차’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발생 ‘당일부터 결심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압살롬이 ‘피의 보복자’가 되기로 스스로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당시 문화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가족 중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피의 보복자’로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패륜아, 몹쓸 집안’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피의 보복자’ 문화는, 성경에도 나오지만
삼국지 등 다른 문화권의 고대소설 등에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사법적 절차에 의해서 처리하는 문화이지만,
과거에는 ‘가족 의리’ 문화에 의해서 처리하던 시절이었고,
만약에 그 의무를 무시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지요!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 ‘보복하지 말라, 원수 갚지 말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면 고대사회에.. 보복하고 원수갚는 문화가 아주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죠. 더욱이 그것이 제멋대로 오용, 남용, 악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압살롬 자신의 지나친 떳떳함도 ‘피의 보복 문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14:32 ‘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이게 무슨 생뚱맞은 얘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 보면, 압살롬은 빼도박도 못하는 ‘살인자’가 맞죠.
그런데 그가 ‘나는 죄가 없다’는 식으로 항변하는 것은

다윗 왕이 어떻게 판결을 내릴지는 모르나
‘피의 보복자’ 문화에서는, 자기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여동생 다말의 원수를, 자기가 갚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원래 ‘피의 보복’은 제사장의 관리 감독하에 하는 것입니다.
근데 압살롬은 자기 스스로 ‘피의 보복자’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죠! 잘못입니다.

어쨌든 다윗 왕이 볼 때, 
압살롬이 암논에게 ‘피의 보복’을 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해 준 거죠.

압살롬이 형을 살인한 것은 맞는데, 어느 정도 정상 참작했다는 거죠.
그래서 압살롬에게 즉각적인 징계를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린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징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징계를 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 하는 것을 눈치챈 요압이
그를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혹자는 반대로 '다윗이 압살롬을 근실히 징계하지 않았다'라고 해석하는데
아닙니다. 아래 23~24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술에서 돌아온 압살롬을 
2년이나 만나주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압살롬을 징계한 것입니다.  

14:23~24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이는 단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표명한 것이죠.

이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3. 요압이 고용한 간교한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도
‘피의 보복자’ 문화가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14:6 ‘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드고아 여인은 자기 아들이, 다른 아들을 ‘과실 치사’로 죽였다고 말합니다.
들에서 싸우다가 어쩌다 잘못되서 죽었다는 거죠.

율법에, 당시 이스라엘의 나랏법은 율법이었죠. 
과실 치사’로 죽인 사람은, 도피성에 가서 도피해서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피의 보복자’에 의해서 복수만 당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습니다. ‘과실치사’인 경우에만 한정됩니다. (*고의 살인은 안 됨)

그러니 여인은, 압살롬이 암논을 과실치사로 죽였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과 다른 거짓말입니다. 다만 법정 공방이 그렇다는 것이죠.
압살롬을 그렇게 봐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주3)

(위 ▲1과 ▲2는, 압살롬이 ‘피의 보복자’로 나선 것이요,
▲3은 압살롬이 살인자로 쫓기는 입장이라서.. 약간 케이스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피의 보복자’ 문화에서, 
지금 압살롬과 드고아 여인은,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논리를 주장합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남은 아들마저 죽으면 
상속자가 아무도 남지 않는 그런 상황에서

둘 중에 남은 아들이 들판에서 ‘과실 치사’로 살인한 것이면,
면죄 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배심원이 판단할 문제죠)
그리고 지금 현실 사정도 ‘상속자가 없어져 버리는’ 딱한 형편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압살롬을 데려온다면, 누가 왕에게 허물을 돌리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14:9 

정리하면, 이렇게 '피의 보복자 문화'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다윗의 무책임한 태도가 많이 이해가 됩니다. 그는 압살롬의 징계에 무책임했던 게 아니라, 압살롬의 범행을 이해한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위 본문을 기록한 의도, 목적,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위에서 전개한 논지는
‘삼하13~14장 본문이 
다윗의 리더십의 부재, 마땅한 징계의 결여.. 라는 해석적 관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본문이 기록된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런 해석은 비록 맞는 말이라 할지라도,
숲을 못 보고, 나무만 보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기록한 성경 저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큰 그림으로 보자면,

삼하10장까지만 해도 <성공한 왕으로서의 다윗> 이야기가 중심이었다면 
삼하11장부터는 그 초점이 <실패한 죄인 다윗>으로 옮겨집니다.

'밧세바 통간 사건 (11장)'을 분깃점으로 해서
그 이전까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종 다윗 이야기를 서술했다면,
그 후로는, 찌질하고 깨지고 못난 죄인 다윗 이야기를.. 성경은 풀어나갑니다.

11장, 유부녀와의 간통과 충신을 살해하는 사건
12장, 암논의 성폭행과 압살롬의 암논 살해
13장, 압살롬의 피신과 귀환 후 계속되는 부자 갈등 등

성경 본문은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성공한 사람 다윗’의 모습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철저한 죄인 다윗’의 모습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승승장구만 했다면...

-그는 전쟁에 나가 백전백승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셀럽 중의 셀럽이었죠.
-그는 전쟁에서 거둔 수많은 전리품들을, 모두 하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수 조원의 천문학적인 액수를 헌금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과거보다 2배 이상으로 확장한 영웅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영토를 ‘하맛 어귀에서 홍해’까지 넓혔죠.

-그는 이스라엘의 동사남북의 모든 주변국을 다 복속시켰습니다. 
 동쪽 암몬과 모압, 서쪽 블레셋, 남쪽 에돔과 아말렉, 북쪽 수리아

이런 영웅인 그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전쟁 나가서 종종 지는 사람
-아까워서 하나님께 작은 것도 드리지 못하는 자들
-영토를 자꾸 뺏기고 축소시키는 사람
-주위 사람들에게 늘 공격당하고 얻어맞는 사람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은 ‘자기 의 self-confidence, self-righteousness’
에 1백%가 아니라, 1만% 완전히 도취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안 그럴 사람이 있을까요? 그 자리에 올라가면 다 그렇게 됩니다!

그게 뭐가 문젠가 하면,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죠!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의로워서, 잘나서, 성공해서, 탁월해서’ 구원받는게 아니죠.
우리는 ‘내가 불의해서, 죄인이라서, 비천해서’ 주님의 의를 의지하는 거죠.

☞관련글 자기 의 끊기 - 다윗 

물론 하나님은, 다윗이 타락하고 범죄하도록.. 사주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타락과 범죄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죠.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막지 않으시고, 그렇게 내버려 두신 것은
‘다윗이 깨어져야 하기에, 자기 의를 버려야 하기에’ 방관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영생 구원 얻는데 필요했던 것은
-성공하고, 잘나고, 탁월하고, 무결점한 모습이 아니라
-실패하고, 깨어지고, 죄 짓고, 흠결 투성이의 모습이 되어서
‘자기 의’를 버리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에 예수님도, 당시에 성공한 사두개인(정치권력), 바리새인(종교권력)은
오히려 다 물리치시고
세리, 죄인, 창녀들을 찾아가신 이유도
‘자기 의’로 똘똘 뭉쳐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 각자도 ‘다윗처럼 못난 점, 모자란 점’이 
최소한 하나씩은 있죠. 여러 개 있는 사람도 있고요.

-건강이 모자라고, 건강이 남들 평균에 훨씬 못 미치는 성도가 있죠.
-선천적인 외모가 모자라서, 외모가 평균보다 훨씬 밑도는 성도들도 많죠.

-머리나 스펙이 모자라서, 어디 남들에게 내놓기가 꺼려지는 사람도 많죠.
 스펙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디 같은 사람!

-도덕성이 모자라서, 남들에게 본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 믿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뒤처지는 경우도 있죠.

-‘자녀’라는 말만 나오면 괜히 움츠러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안 망신, 부모 망신 다 시키는 자녀가 나올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고 했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9

▲위 적용은 전체적인,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적용이고,
14장에서 한정된 적용을 살피자면,
압살롬 - 요압 - 드고아 여인의 연대는.. 각자 "자기 이익에 따른" 연대, 연합이죠. 

의를 위한 연합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연합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실은 남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가 좋을 리가 없죠. 뭔가 그들은 좋은 목적으로 연합을 도모했겠지만,

결국 압살롬도, 요압도..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같은 모양의 다른 두 길 (tistory.com)

 

......................................

주1)
많은 해석가들은, 암논이 다말을 성폭행한 것을 보고서,
다윗 자신이 과거에 밧세바를 성폭행 하다시피한 사건이 기억나서
자유롭게, 당당하게 암논을 징계하지 못했다.. 라고 해석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게 성경에 나타난 이유는 아닙니다. 
이 해석은 ‘상상’이나 ‘개연성’에 기초한 것이지, 성경적 근거는 없죠.

그럼 다윗이 암논을 징계하지 않은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

(개역) ‘다윗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13:21

그런데 (공동번역)은 조금 다릅니다.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났지만, 
암논이 사랑하는 맏아들이라 기분 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 삼하13:21

공동번역이 길고 자세하게 번역한 것은, 맛소라 사본을 따랐기 때문이죠.
실제로 몇몇 영어성경들은, 맛소라 사본을 따라서 
위 공동번역처럼 번역했습니다. 주2)

그래서 다윗이 암논을 징계하지 않았던 이유는, (맛소라) 성경에 의하면
-암논이 장자였기 때문이고,
-암논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암논)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13:37

다윗은 장자 암논을 사랑했습니다.
암논은 차기 왕이 될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태어나지 않았거나 너무 어림)
다윗은 암논에게 어떤 흠결이나 스크래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죽은 장남 암논을 생각하며 슬퍼하며 울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피해자인 다말에 대해선 슬퍼했다는 기록이 성경엔 없죠.

압살롬의 복수 사건으로 인하여 
‘다윗은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누웠습니다.’  13:31
처음엔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오해하고 그랬습니다만, 
왕의 관심은 항상 왕세자에게 있기 마련이죠. 왕세자를 사랑하게 되어있죠. 

(일부 해석가들은, 이때 다윗이 과거에 자기가 지은 죄가 생각나서
옷을 찢고 드러누웠다.. 라고 해석하는데, 그럴 수 있겠지요.
근데 추측이죠. 성경적 근거는 없어요. 상상에 근거한 해석은 자제해야죠.)

또 한 가지 더 생각하자면,
암논의 성범죄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오직 피해자 다말 한 사람의 증언만 의존해서, 암논을 징계하긴 어려웠겠죠.
(그리고 다말이 응하지 않았다는 점도 아마 참작되었을 것입니다.)


주2) MSG
King David heard the whole story and was enraged, but he didn’t discipline Amnon. David doted on him because he was his firstborn.

그외 CEB, CEV, DRA, ERV 등이 맛소라 사본을 따름

주3)

요압의 사주를 받은 드고아의 여인에 대한 ‘지혜로운’이란 표현은 
‘간교한’으로 번역되는게 좋다. (:2) 

여인은 요압이 꾸며준 대로 다윗에게 말하고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아들을 사면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낸다(:11). 

그리고는 이 일이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라는 것을 말하면서 
압살롬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이 여인이 한 ‘자기 아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사실상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이야기 속의 두 아들은 서로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하나가 죽게 된 경우였지만, 
압살롬은 <계획적>인 살인, 즉 모살을 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으로 볼 때 두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우발적 살인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모살을 한 자는 단에서라도 끄집어내서 사형에 처해야 했다(출21:14). 

그녀의 이야기 속의 남은 아들은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다윗은 압살롬 외에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 같지만(:14), 
회개했다는 증거도 없고 희생 제사를 드리지도 않은 압살롬에게 
은혜가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그녀는 간과하고 있다. 

결국 이 여인은 요압의 말로 다윗을 속인 것이다. 
이 시도는 겉으로는 용서와 화해의 시도로 보였지만 
사실 교활한 계략에 불과했다. 
다윗은 대충 넘어가라는 유혹을 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