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모양의 다른 두 길 삼하14:1-24 08.05.15.
그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도
어느 세팅setting에 두고 말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두 길이 설정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서,
나를 향해 던져주는 옆에 있는 자들의 말을 따라... 내 발걸음이 옮겨지게 됩니다.
나단선지자와 요압 장군은
겉으로 보기에 다윗 왕을 향하여 똑같은 모습으로 조언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쪽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어버리는
그러한 내용을 오늘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경 배경을 아시는 분은 그냥 점프 하세요!)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누이동생 다말을 범한 것을
셋째 아들이며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2년이 지나도록 그 마음에 복수심을 품고 있다가.. 결국 암논을 죽였습니다.
압살롬은 참 집요불굴의 사나이에요.
그리고 형을 죽였으므로, 그 살인죄에 대한 어떤 죄값이 두려워서
외갓집으로 피신을 갑니다.
그렇게 피신을 간 지 세월이 3년 지났습니다.
▶다윗은, 세월이 지나면서, 죽은 암논에 대한 마음의 서운함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살아있는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자기 마음에 점점 커져갑니다.
압살롬이 굉장히 보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은 자가 없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하나 없었다’고 했습니다. 삼하14:25
어떻게 하면 남자가 도대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하나도 없고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칭찬받은 자가 없을 만큼 아름다웠을까요?
그러니까 다윗이 얼마나, 얼마나 그 압살롬을 보고 싶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남녀를 불문하고 외모가 준수하면, 누구나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을 데려오지 못합니다.
사람을 죽였는데 더군다나 형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애굽 땅에 있는 애굽 군인 하나를 죽였다고
왕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동생이 첫 번째 왕자인 형을 죽였는데,
어떻게 그 나라 안으로 고이 데려올 수가 있겠습니까? 보고는 싶은데...
▶이 갈등을 요압장군이 본 거예요.
요압장군이 보고서는 그 다윗의 양심적인 갈등에서부터 해소를 시킵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데려오게 만듭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압살롬의 죗값에 대해서 다윗이 자기 마음이 갖고 있었던
그 무거운 중압감으로부터 풀려나오게 만듭니다.
그런데 방법을 어떻게 쓰냐 하면,
나단선지자가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 그 죄를 지적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을 쓰는 거예요.
나단선지자가 다윗 왕 앞에 가서 한 말이 뭡니까?
어떤 부자가 있었고 가난한 자가 있었다,
가난한 자의 양 한 마리를 이 부자가 탈취했다,
자기는 양이 수도 없이 많으면서 가난한 사람의 양은
정말 딸과 같이 키우던 양이었다.
그러니까 다윗이 노발대발하지 않습니까?
이런 허구적인 픽션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의 죄를 지적한
나단선지자의 방법을 이 요압이 옆에서 보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서
그대로 사용합니다.
▶자기 고향 베들레헴 옆에 있는 드고아 마을에서 (아마 소문을 들었겠지요)
아주 지혜로운 여인, 일을 잘 처리하는 민첩한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을 불러다가, 나단선지자가 말했던 것 같은, 허구를 입에 담아줍니다.
‘너, 과부라고 얘기해라.
남편을 잃은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슬픈 기색을 띄고 가라,
그런데 너한테 아들이 둘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두 아들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하나를 죽였다.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이 그 죄악을 멸하겠다고, 그 악행을 근절시키겠다고,
나머지 자기 형제를 죽인 내 아들을 마저 죽이겠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렇게 말하게 해요.
그러니까 다윗이 ‘아, 내가 이제 막아줄게, 대가 끊어지면 안 되지,
과부의 처지가 불쌍한데 거기다가 대까지 끊으려고 하다니...’
비록 죄가 중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네 아들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
다윗이 이 말을 할 때, 이 드고아 여인이 압살롬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다윗 왕이여, 형제를 죽였다고 말한 내 가상의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말한 것처럼
당신의 아들 압살롬을 이제는 용서하시고, 데려오십시오.’
▶그래서 다윗 왕으로 하여금 이 중압감으로부터,
압살롬이 살인을 했다고 하는 죄가에 대한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게 만듭니다.
요압이 힘만 쎈 장비 같은 무식장이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머리도 아주 비상한 장군이었습니다.
◑나단과 요압의 조언.. 결과가 정반대로 나뉘다
여러분, 여기서 아주 우리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요.
우선 나단 선지자가 조언한 길을 걸어갔을 때
다윗은 회개하고, 하나님이 멸망의 길에서 그를 구원을 해주십니다.
결과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요압장군이 조언한 길을 걸어갔을 때,
압살롬이 돌아와서 아버지와 2년 만에 화해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부터 시작한 게 뭐냐 하면.., 자기 군사를 키워나갑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고 나라를 삼키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마지막에 결국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말했던 요압장군에 의해서
창에 찔려 죽습니다.
결과가 많은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또한 압살롬도 비참했습니다.
차라리 요압의 말을 듣지 말고, 그의 죄악됨을 보고, 죗값을 보고,
차라리 쫓아내버려서 그술 땅에서 살게 만들었다면
압살롬을 이렇게 비명에 죽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은 이렇게 데려와 봤자, 자기가 옆에 두고 같이 살지도 못하고
결국 악행을 더 강화시켜서 더 큰 악행을 저지르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말았어요.
그리고 그 아들은 결국 요압장군에 의해서 비참하게 창에 찔려,
심장이 찔려 죽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단과 요압의 조언의 같은 점/다른 점
▶그런데 여러분, 요압장군이 한 말과 나단선지자가 한 말을 놓고 볼 때,
방법은 똑같았습니다. 픽션을 사용해서 없는 이야기를 꾸며대서
다윗을 어떤 길로 인도합니다.
방법은 거의 똑같은데, 그러나 그 결과가 정반대로 달랐습니다.
나단은.. 회개를 촉구하게 되고
요압은.. 죄의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듭니다.
두 사람 다 똑같이, 다윗이 죄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었지만
요압은.. 그냥 간과하게 해버리고,
나단은.. 그 죄를 자복하게 합니다.
물론 하나는 ‘아들의 죄’고, 하나는 ‘자기의 죄’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왜 결과가 그렇게 정반대였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이 설교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요압과 나단이 다른 게 뭡니까?
나단선지자는.. 다윗에게 말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세팅을 두고 말합니다.
요압장군은.. 다윗에게 조언할 때, <인간적인 관계>에 세팅을 두고 말합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로서 다윗이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다윗 왕에게 점수를 따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압살롬과 자기 관계>를 위해서 말을 합니다.
압살롬과 좋은 관계를 맺어 두어서
암논이 죽고 난 다음에, 차기 후계자는 압살롬에 될 가능성이 가장 높으므로
미리 어떤 인맥을 형성해 놓자는 포석이겠지요.
요압은, 무슨 유익을 얻겠다든지,
그런 자기 이기적인 목적을 앞세워서 다윗에게 조언합니다.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니, 결국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다윗에게 조언했다면
압살롬의 죄악을 묵과하고 그냥 잊어버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간절히 통회, 회개하고 새사람 된 후에 오라고 했어야죠!
◑적용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요압처럼, <내 입장과 나와의 관계>에서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관계>를 두고 얘기하지 못합니다.
‘내가 남편인데, 남편인 나에 대해.. 당신의 입장과 태도가 왜 그 모양이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아내의 관계>에 세팅을 두고, 남편이 아내에게 말을 했어야 옳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세팅(setting, 설정)을 두고 말을 하라 이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대화의 모든 것은
사실은 <자기와 그 사람의 관계>에 세팅을 두고 말하는데,
그 때는 종종 자기 입장에 유리한 데로만 말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나 공동체에서나 늘 ‘말’ 때문에 시험드는 일이 많은데,
그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고, 판단해서.. 말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보고, 판단해서.. 말하다 보니까
위에 나온 ‘요압의 조언’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들에게 얘기할 때,
대학입학시험을 봐야 된다, 취직을 해야 된다, 결혼을 해야 된다,
이게 모두 <하나님과 너의 관계>에 두고 말을 해야 되는데,
<부모인 나와 너의 관계>에 두고 말을 하다 보니,
내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말을 하게 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 아이에게 반발심만 자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엄마 인생을 대신 살아줄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아무리 사랑하는 것 같고, 아무리 좋은 말인 것 같고, 아무리 그를 위한 것 같아도
결국 그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요압장군이 나단선지자와 똑같은 방법을 동원해서 말을 합니다.
같은 모양이에요. 그러나 전혀 다른 결과이었던 것은
요압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놓고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자, 딸이 어떤 남학생과 이성교제를 하고 있다고 할 때,
<하나님과 그 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딸에게 조언하라는 것입니다.
괜히 <딸과 그 이성과의 관계>, 아니면 <딸과 들어가야 될 대학과의 관계>,
또는 <딸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다른 남자와의 관계> 등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하나님하고의 관계에서 필요한 말을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하고의 관계에서 얘기하려면, 천상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어떻게 해요?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지 않고는 말 못하는 거지요.
하나님하고의 관계에서 어떻게 되는 것인지...
▶자, 남편이 심하게 아픈 분이 계세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얘기를 합니까?
<나하고 남편하고 관계>에서, 그 아픈 남편을 바라볼 것이에요?
그러면 서로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과 하나님>하고 관계에서 보는 거예요.
매사를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 남편이 하나님하고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이고,
어떤 길을 가야 되고, 왜 그런가를 생각하다보면
나의 입장도 정리가 되는 것이지요. 나의 길도 정리가 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내 시각>에서 그를 보지 말고,
<하나님이 그를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나도 그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게 하나님의 뜻대로.. 잘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세팅에 두고 그 사람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내 입장에 세팅에 두고 그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느냐,
-하나님의 시각에 세팅을 두고서 그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느냐...
판단, 결과가 완전히 달라져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세팅을 놓고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전문가를 화실에 집어 넣어놓고 같이 그림을 그려라,
이거 말이 안 되는 거지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예요.
화실에 들어가면 컴퓨터전문가는 바보가 됩니다.
그러나 컴퓨터 앞에 놔두면 천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세팅이 중요합니다.
고양이도 말입니다, 쥐가 없는 동네의 고양이는
할 일이 없는 놈팽이 중에 놈팽이입니다.
그러나 쥐가 많은 동네에 들여놔 보면
고양이처럼 똑똑하고 쓸모 있는 놈이 달리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은, 하나님하고의 세팅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걸어가야 될 길에 대해서
우리의 말이 그 사람들의 길이 되어주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때 절대 조심할 것은
어떤 사람이든지.. <그와 하나님하고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보는 겁니다.
자,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아이들,
그러면 대학과의 관계에서 얘기하지 말라, 이거에요.
대학이라는 과제를 앞두고 있는 그 아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를
기도하고, 생각하고, 보면서 얘기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그 아이에게 삶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에요.
▶인간적인 충성심... 그거 전적으로 좋은 것 아닙니다.
요압은 인간적인 충성심, 얼마나 우직하며 따뜻했겠습니까?
아무도 거론하지 못하는 문제를 꺼내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윗이 그렇게 아끼던 아들이 비명에 죽고 말았습니다.
요압의 말을 따라 걸어가다가...
인간적인 충성심을 보고 좋아하다가...
저가 나를 지극히 사랑한다고요? 좋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언하고 상담해 주더라도
<하나님하고의 연관성 안에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부모인 내가 사랑하니까 잔소리한다고요?
사랑하는 것 맞습니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관점>으로 잔소리하는 것은... 진짜 소모적인 잔소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가 충고하는 것은... 그에게 ‘예언자의 음성’이 될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 같은!
▶오늘도 누구를 만나든지 길거리에서 한번 스쳐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옷이 눈에 띈다, 특별한 옷차림 때문에 눈에 띄었다 하면,
그 사람을 바라볼 때 ‘의상을 잘 입느냐, 못 입느냐’ 라는 세팅을 두고 보지 마시고
그 사람을 보면서 '저 이름 모를 저사람, 내 앞을 스쳐지나가는 저 사람은
<하나님하고 관계>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 이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해야 될 일과,
그에 대해 내가 해야 될 말과,
내가 가져야 될 마음가짐이 다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참되고 올바르게 내게 주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08.05.15. 인터넷설교 스크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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