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2장, 다윗의 승전가 여러설교모음
◑1. 서론
1) 본문 삼하22장은 <다윗의 승전가>라는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이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왜냐면 1절에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노래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2) 본문 삼하 22장은 시편 18편과 내용이 같습니다.
삼하22장은 총 51절이고, 시18편은 총 50절입니다.
삼하22장은 표제어가 1절에 들어갔고, 시18편은 표제어 없이 시작합니다.
그러니 두 시는 똑같은 시입니다.
3) 본문 삼하22장의 시는, 삼상2장 한나의 노래(2:1~10)와 대구를 이룹니다.
사무엘서는 본래 한 권의 책입니다.
그러니 사무엘서는, ‘한나의 찬양’으로 시작되고
삼하 22장에 나오는 ‘다윗의 찬양’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두 노래의 주제는 동일합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4) 본문 ‘다윗의 승리의 노래’의 내용은
단순히 사울 왕과 다윗 왕 사이에 있는 권력과 갈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사무엘상하>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그 구원에 대해 다윗과 이스라엘은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다윗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 사용되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윗은 그리스도를 예표하죠.
◑2. 본문 내용 파악하기
가급적 간략하게 이해하기 위해, 3단락으로 나눠서 이해해 봅니다.
1~20절, 여호와의 강림, 임재
21~28절, 다윗의 자기 의로움 고백
29~51절,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노래함 주1) 에 자세히 나옴
◑3. 적용
본문의 내용 구분에 따라, 3갈래의 적용으로 나누어집니다.
▲1. 여호와의 강림, 임재 (1~20절)
♣당신에겐 신앙의 고백이 있는가요? 2~4절, 29, 32, 33절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고백은 남의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지만,
‘이게 정말 나의 고백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내면 속 진심의 고백인가’
하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다윗 처럼 시인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다윗의 시편을 가지고
우리의 고백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게 내 고백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뭔가를 고백하고 싶다면
그 고백은 어떻게 표현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함께 해 온 사랑하는 사람들,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뭔가를 말하게 될 것입니다. 보통 그것을 유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그는 역시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자기의 평생에 은혜를 베푸시고
일평생 나와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뭔가를 고백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유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평소에 나의 진심어린 ‘고백’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백이 만들어지는 환경은 대적의 손, 사울의 손입니다 1, 5~7절
5~7절에서 자기가 당한 환난의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물결’이었고, ‘불의의 창수’였으며, ‘음부의 줄’이고 ‘사망의 올무’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쓰나미와 같은..
그가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환난의 상황 중에, 사망의 물결과 불의의 창수는
오늘 저로 하여금 쓰나미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는 엄청난 물결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자기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로 고백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곧 썩고 맙니다.
7절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단순히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난이 온다고 해서, 환난을 겪는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환난이 올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자들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다윗은 3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시는가요?
바로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자에게’인 것입니다.
다윗의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교훈은
“기도로 고백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곧 썩고 만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말인데 아무리 봐도 잘 표현된 진리입니다.
다윗은 환난 속에서 기도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난 하나님, 그가 알게 된 하나님,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를 보십시오.
그는 평생에 자기가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노래와 시로 표현된 기도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삶에서 배워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시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갑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우리는 인생을 통하여 다시 경험하고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의 삶의 환난을 통해서 얻은 것이든지,
아니면 설교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이든지
그 지식,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여러분의 지식이 여러분의 엎드림 속에서,
기도로 고백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지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속에서 썩어서 냄새를 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도로 고백되어야만, 기도로 고백될 때에만
향기로운,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지식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저의 기도를 통해서 고백되게 하옵소서!”
(일화) 저희 교회의 교회학교에 들렀다가, 게시판에서 배껴온 글입니다.
시편 107편을 가지고 ‘갑수의 시편 107편’, ‘윤영이의 시편 107편’처럼
선생님과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시편 107편을 다시 쓴 것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이렇게 썼습니다. "고백"의 예입니다.
「OO의 시편 107편 *다른 시편도 가능
두 좋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다.
행복한 가족을 내게 주시고 나를 살게 해주심에.. 감사하도다.
멋진 오빠를 주셔서.. 감사하도다.
좋은 학교를 주심에, 그 학교를 무사히 다니고 있음에.. 감사하도다.
슬플 때 같이 울고 기쁠 때 함께 기쁨 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에..
감사 하라.
좋은 선생님과 함께 공부할 수 있음에.. 꼭 감사하라.
나에게 건강한 몸 주신 것에.. 감사하도다.
건강한 몸에 은사를 더하셨으니.. 더 감사하도다.
모든 친구와 잘 지내게 해주시고
친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다.
기쁨도 좋지만, 내게 슬픔도 함께 주셨으니.. 감사하도다.
내가 그 슬픔을 통해 내 잘못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하도다.
고난을 통해 내가 배우고, 새로운 것을 알게 해 주심에.. 감사하도다.
내가 행복하고 즐겁게 살게 해주심에.. 감사하도다.
나를 위해 내 미래를 미리 예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다.
나를 죽기까지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을 예비하심에.. 감사하라.
언제나 밝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초등학교 6학년이 썼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목사 되기 몇 년 전, 신학대학원 때
이것을 과제로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쉽게 못 쓰겠더라고요. ‘도대체 무얼 어떻게 쓰라는 거야!’
제가 당혹스러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2. 다윗의 자기 의로움 고백 (21~28절)
이 단락에서 다윗은, 자기가 의롭고, 정직하게 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 사건’ 이전에 본문이 쓰여졌다고 보는 관점이 있고,
-‘밧세바 사건’ 이후에, 다윗이 용서받은 이후로 의롭게 정직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죠.
♣오늘날 무시되고 있는 신앙의 <의지> 영역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다윗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1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킨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요)
이 시는, 다윗이 자기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지은 시라고 보는데,
하나님이 산성, 방패, 요새가 되어주셔서 다윗을 일평생 지켜주신 이유도
그가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때문일 것입니다. :23
다윗은 어떻게 자신을 죄악에서 지켰는가요?
다윗은 지속적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죄악을 향하지 않고 우리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감지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앙이 극단주의(익스트림)에 빠지면 ‘자기 책임성’이 관과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하나님의 주권, 예정, 은혜로 구원받음’ 이런 (칼빈주의) 신앙이 극단주의에 빠지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 주시고
즉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택해 주시고, 은혜로 믿게 해 주시고, 은혜로 성화도 이루어주시고..
그러면 ‘자기 책임’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렇게 '의지'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택해 주시고, 은혜로 믿게 해 주시고, 은혜로 성화도 이루어주시고..
이런 칼빈주의 신앙이 틀린 것인가요? 아니요, 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칼빈주의 신앙은
모든 면에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하려는 알미니안 신앙을 보완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지요..
정리하면, 칼빈주의, 알미니안 주의가 성경에 둘 다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강조하면.. 극단적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한국은 장로교 칼빈주의 신앙이 강한 토양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앙의 자기 책임성’이 약화되는 (치명적) 단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물론 성령님이 인도해 주시죠, 물론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역할은 ‘코치’로서 도와주시는 역할이고요,
필드에서 뛰는 ‘선수’는 다윗 자신이고, 우리 각자 자신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의지적으로) 스스로 지키는’ 신앙도 꼭 필요하다는 것이죠.
오늘도 하루에 약 30만명씩 전세계에서 사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 다수가 지옥에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건 하나님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자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2021년 통계를 보니, 한국에서 1년간 약 10만쌍이 이혼했다고 합니다. (결혼은 19만쌍)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하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건 하나님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자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혼해놓고, ‘하나님이 나를 막아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신앙의 자기 책임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지적 신앙’입니다.
지성적 신앙, 감정적 신앙, 의지적 신앙.. 이 신앙의 3영역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쪽은 ‘지성적 신앙’입니다.
-지적인 신앙인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신앙서적도 읽고..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고,
-감정적 신앙인 (감성적, 감수성.. 다 같은 뜻)
이들은 뜨거운 것을 선호합니다.
뜨거운 통성기도, 뜨겁고 열정적인 찬양, 심금을 감동시키는 설교...
그런데 뜨겁게 눈물지으며 손을 들고 찬양하다가도
설교시간이 되면 또 졸기도 합니다.
-의지적 신앙인
이들은 ‘순종, 실천’을 강조합니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많은 성경구절, 성경지식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예배 드리는 것보다,
거리에 나가서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힘주어 실천합니다.
오늘날 지성적 신앙이 제일 강조되고 *주로 장로교
감성적 신앙도 어느 정도 강조되고 있는데 *주로 은사주의, 오순절파
의지적 신앙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일부 사람들만 이 영역을 강조합니다.
정리하면 다윗은 ‘신앙의 자기 책임성’, ‘의지적 신앙’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다윗은 지적인 신앙, 정적인 신앙, 의지적 신앙의 균형을 갖추었습니다.
-그의 시편은 모세오경의 성경구절을 많이 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에도 능통했고,
그는 언제나 주의 법과 율례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시편에.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는 감정적으로도 뜨거웠습니다. 법궤를 가져올 때, 그가 몸이 드러나도록 힘껏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의지적으로도 균형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우리도 지/정/의의 이런 균형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진정 '믿음 있는' 신앙인입니다.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자는
자기가 특별히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에 대한 계명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크게 괘념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영혼은 그렇지 않죠.
그는 자신이 자주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런 죄에 대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애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5:19)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지킵니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시119:6)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23a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완전성이란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다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실 만큼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의 죄악"
사람마다 특히 범하기 쉬운 죄가 있죠. 사람마다 취약성을 보이는 죄악이 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나의 죄악"이라고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마치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로 이 죄악"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사람들은 자신이 별로 유혹을 느끼지 않는 죄를 극복했다고
자신이 성장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연모하는 죄악을 극복한 것으로 자신을 측정해야 합니다.
의사가 위암 이라고 판정하면 (다른 암도 마찬가지지요)
몸의 다른 부위들이 건강해도, 위가 병든 사람은.. 그는 암 환자인 것입니다.
어떤 질병을 진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부분은 건강하더라도,
그들은 질병의 특유한 증상을 보고서, 환자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측정합니다.
혹시 나는 영혼의 암환자는 아닙니까?
다른 부분은 다 건강해도 '나의 죄악'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암 환자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노래함 (29~5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