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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3장,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한 다윗의 마지막 노래

LNCK 2023. 5. 11. 20:14

◈삼하23장,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한 다윗의 마지막 노래          여러설교정리

23장 전체는, 
-다윗이 남긴 말(유언)과   23:1~7
-다윗이 남긴 용사들        23:8~39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다윗 같은 인물이 왕이 되니
신하들도 그를 닮은 사람들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임종을 앞두고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은 놀랍습니다.
그의 신앙이 살아있었고, 잘 마무리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철저히 '나 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쉬우나
성경은 지루하리만큼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오실 그리스도'만 줄곧 증거하고 있으면, 
우리 생활의 교훈, 삶의 적용.. 이런 것은 너무 약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늘 똑같은 주제라서, 설교가 지루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 한 분만 우리가 올곧게 바라보고, 
응시하고 있으면 삶의 나머지 문제들은 자동해결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애써서 '삶의 적용'을 하지 않더라도, 
성도가 '그리스도 한 분만 집중해서 바라볼 때' 
우리가 원하던 다른 삶의 문제들은 자동 해결되고 풀려버리는.. 
그런 신비한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66권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이 맞습니다. 

◑본문 해석

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본장의 노래는 22장의 다윗의 시 다음에 배열되어 있지만, 
이 두 시는 시기적으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 저작되었다.
 
즉, 22장의 시는 다윗이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정복한 직후 
곧 그의 이스라엘 통치 초기에 저작된 것인 반면(22:1), 
본 장의 시는 모든 역경과 좌절을 맛본 다윗 통치 말년 
곧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저작한 시이다.

곧 22장이 시의 활기찬 흐름으로 보아 다윗의 최전성기에 기록되었다면, 
본문 23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던 때 
곧 범죄 이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섭리와 
그와 동시에 베풀어지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했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이 고백적 찬양은 단순한 다윗 개인의 신앙과 감사를 다룬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공의로운 메시야 왕국을 예언했다는 점에서 
'선지자적 찬양'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결국 본 장은, 22장의 감사 시와는 성격상 다른 것으로서, 
모세가 죽기 전에 축복의 시를 지었듯이(신 33장) 
다윗이 임종하기 전에 그의 마지막 소원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소원은 다윗의 개인적인 소원이라기 보다는 
성령에 의해 감동된 '메시야적 소원'으로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베푸신 '다윗 언약'(7:8-16)에 기초한 소원이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이새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란 호칭과는 대비되는 호칭으로서,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의 보잘 것없음과 비천함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21장과 22장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 다윗을 부각시켰다면 
24장과 24장은 다윗을 '죽음을 맞이하는 한 인생'으로 
그리고 '이새의 아들'로서, 즉 보통 사람으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다윗은.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이 거룩한 노래를 시작함에 있어서, 
자신의 어떠한 자랑거리도 나타내지 아니함으로써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려고 이 호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한편, 그리고 여기서 '말함이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움' 은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과 관련된 말이다. 

이 말은 선지자가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갖추었던 '여호와의 말이니라'에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이 시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시적 형태로 전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높이 올리운 자... 기름 부음 받은 자' 
다윗은 본래 양치는 미천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아 크게 높아진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22:34, 44).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구약 선지자들은 종종 예언을 노래 형식으로 전달했다.
실제 다윗은 양치는 소년 시절부터 악기 잘 타는 자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사울 왕궁의 수금 연주자로도 활동했었다(삼상16:16).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다윗은 자신의 시가 사적 감정에 의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장받은 계시적 성격의 노래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여호와의 신 곧 성령임을 고백한 말이다. 
즉 지금 자신이 성령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음을 고백한 말이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여기 소개되는 다윗의 노래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혀 준다. 

한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지시고 
그들을 바로의 압제하에서 구원하신 선민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다윗이 이 시에서 특별히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은 
본 시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주인공이신 
의로운 통치자 메시야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야에 대한 노래는 3절의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부터 시작해서 7절에 마친다. 

'사람을 공의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이는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의 자세를 보여 주는 구절로서 
일차적으로는 다윗 자신을, 
궁극적으로는 '메시야'(the Messiah)를 가리킨다. 

즉 신정 국가의 이상적인 왕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정의롭고(렘 23:5, 33:15),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심(시 7:8)을 갖춘 바로 그러한 신앙 인격자라야 했다. 

다윗 왕은 바로 이러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백성을 공의로 다스렸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따라서 다윗은 역대 유다 왕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그 기준이 되었다(왕하14:3, 18:3, 22:2).
이런 점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기에 묘사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지금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는 ‘다윗 언약(삼하7:8~16)’을 통해, 
오실 그 분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어서.. 이런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것이다.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여기서 언급된 비유어들의 주어는 혹자의 주장처럼 
-3절에 암시되어 있는 '메시야'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분이 오셔서 이루어질 ‘새 세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면 본 구절에는 명확한 주어의 형태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역한글의 '그는'은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서 번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어들의 주어는 비인칭(非人稱) 형태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비유어들이 묘사하고 있는 대상은 
메시야(신정 국가의 이상적인 왕)가 아니라 
메시야가 강림하신 이후의 신세계 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처럼 비유어들의 묘사의 대상이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로 말미암는 신세계라는 사실을 강하게 입증해 주는 단서는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메시야(그리스도) 자신 보다는 
메시야 통치의 복스런 결과를 의미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돋는 해 아침 빛 같고'라는 말도 
메시야의 시대에는 이와 같을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메시야의 시대에는 고통과 죄악과 부패의 온갖 어두운 흑암의 밤은 물러가고, 
기쁨과 번영과 행복의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추이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구름 없는 아침'은 온갖 근심과 염려의 구름이 
완전히 걷힌 청명한 하늘처럼, 곧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기쁨과 번영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징이다(사 44:3). 
즉, 비는 초목의 생장을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후에 내리쬐는 광선은 더욱더 초목을 싱싱하게 자라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이 생명력 넘치게 자라나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볼 때 '움이 돋는 새 풀'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다.

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이는 3, 4절에서 언급된 메시야, 곧 의로우신 통치자가 
다윗의 집(후손)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다윗의 확신에 찬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결코 자기 개인에 관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다윗이 이 부분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일을 언급했다면, 
분명히 7:18에서 보여준 대로 겸손히 자기를 낮추었을 것이다. 

아울러 본 구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말하고 있으므로, 
이 구절이 다윗 자신의 일을 말한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4절에 묘사된 신세계가 그의 후손을 통하여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기 '집'이란 용어는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7:11).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여기서 언약은 7장에 기록된 '다윗 언약'(7:8-16)을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다윗이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분명 다윗은 장차 자신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질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계심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을 세우실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구원과...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여기서 '나의 모든 구원'은 다윗과 다윗의 집에 약속하신 구원을, 
'나의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언약 위에 기초하고 성령에 감동된 다윗의 
거룩한 메시야 소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그분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사악한 자는... 가시나무 같으니' 
의로운 왕이 도래할 경우에 있게 될 축복의 측면을 이미 언급한 다윗은(4절), 
여기서 또 다른 측면인 심판의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즉, 메시야의 강림과 통치는 경건한 자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불경건한 자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다. 

즉, 가시나무는 발견되는 즉시로 농부가 밭에서 뿌리채 뽑아 불태우는 
쓸모없는 것으로서, 이는 불경건한 자가 받을 철저한 심판을 묘사한다.

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가시나무는 맨손으로 잡을 수 없으므로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이 구절은 밭에서 백해 무익한 가시나무를 불태우기 위해 
철제 도구를 사용하여 한 자리에 거두어 모으는 장면을 묘사한 말로서, 
하나님의 피치 못할 심판으로 말미암아 멸절당할 불경건한 무리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불사르리로다' 
'불'은 하나님의 진노와 그로 인한 심판의 상징이다(마3:10, 13:30, 눅19:27). 
결국 사악한 자의 철저한 멸망이라는 냉혹한 심판 선언으로 마무리 짓는 
다윗의 이 노래는 
1) 메시야께서 통치하시고 건설하실 그 나라에서는 
불의한 사단의 세력이 완전 소멸될 것과(사27:4), 
2)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에 대적하고, 그 나라를 해롭게 할 
가치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필연성을 깨우치고 있다(마25:30).

나머지 절별 해석은 ☞삼하23장 절별 해석 및 주석   을 참조하세요!

◑적용

▲1. 다윗 같은 인물이 왕이 되니
신하들도 그를 닮은 사람들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다윗이 임금이었을 당시에 용사들의 명단이 길게 나옵니다

다윗이 임금이었을 때에, 이스라엘 땅에 성직자들의 명단은 나오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누구였다고 소수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좇아 공로를 세운 장수들의 명단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소위 다윗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에요

다윗 같은 인물이 왕이 되니
신하들도 그를 닮은 사람들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 용맹한 사람이 임금이 되었더니
신하들 중에도 그런 용맹한 사람들이 나오더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명단을 성경이 기록했고,
그들이 정확하게 어떤 공로를 세웠는지를
성경에 기록한 것은

이건 그냥 우연한 일이 아니고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우리가 칼로 누구를 죽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부분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대장이 되신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임금이라고 믿는다면
예수님이 이 시대에 여전히 하시는 일들이 있고
여전히 싸워야 될 영적인 전쟁이 있다면

예수님을 섬기는 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신하로서,
우리도 이 장수들이 다윗을 좇아 공로를 세운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공로를 세워야 할지,
어떤 수고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화국 제도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즉 군주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섬김’에 대해서 핸디캡이 있다는 내용..

☞설교전문 보기 *23:8~23  왕이신  예수


▲2.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이루기 원하셨던 꿈

‘너(다윗)는 새벽 빛과 같고, 구름 끼지 않은 아침과도 같으며,
비 온 뒤의 햇살과도 같고,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살과도 같다.’ :4

비단 다윗을 통해서 뿐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기 원하십니다.

☞설교 보기 *23:3~4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린 다윗


▲3. 하나님은 오늘도 ‘생명수 샘물’을 길어올 세 용사를 찾고 계십니다.
베들레헴 우물물을 길어온 세 용사 처럼!

☞설교 보기 *23:14~17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