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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라

LNCK 2023. 5. 18. 10:39

◈잠잠하라                 막1:21~28          고성준 목사 막2강 27분~끝까지 정리

본문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내쫓으시는> 정황입니다.

▲마가복음은 "5회복 2충돌"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막1:21~27절 까지는 첫 번째 회복이 나옵니다. 

5회복 중에 첫 번째 회복인 본문은, '귀신들린 사람의 회복'인데, 
그 내용을 따지고 보면 "종교의 영으로부터 회복"이에요. 

본문에 두 종류의 종교인이 등장합니다. 
-서기관 (종교인이 맞죠)
-귀신들린 사람 (그가 왜 종교인인지 아래에 설명)

이 두 부류는 다 '종교에 묶인 사람들'이에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말을 잘 살펴 보면 
굉장히 종교적인 귀신인 걸 알 수 있고, 
또 행하는 특징들은 '종교의 영'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그대로 묘사합니다. 

사실 여기 '귀신'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원어를 찾아보면 '귀신'이란 말이 없어요. 

원어에는 그냥 '더러운 영'이라고만 되어 있요. *프뉴마티   

우리말로 번역 할 때 '귀신 들렸다' 이렇게 번역했는데 
원어를 보면 '더러운 영의 사람' 이런 뜻이에요.   :23

어쨌거나 이 영은, 굉장히 종교적인 영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척 알아봐요.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 이렇게 신앙고백 까지 합니다.  :24

이 당시에 아무도 이런 고백을 못 했어요.
이 고백은 베드로가 3년 좇아다니고 나서, 그 다음에 이런 고백을 헀는데,

이 사람은 얼마나 종교적인지, 예수님을 딱 보고 알았어요. 
그는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종교의 영'에는 몇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있는데 
그 특징들을 이 '더러운 영' 들린 사람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1) '종교의 영'에 들린 사람의 특징 첫번째는,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 지르고 다니잖아요.
왜냐면,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거예요.
계속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고,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거죠. 

무엇이라고 소리를 지르는지 아십니까? 
꽥꽥 소리지르는 게 아니에요. 신앙고백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십니다!'

정확한 얘기를 하잖아요. 정확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정확한 신앙 지식을 고백합니다. 

귀신들린 사람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동일합니다.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지요. 
인정받고 싶어하고,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고 싶어 하죠. 
그래서 계속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게.. '종교의 영'의 특징이에요.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거나 과시하려고 하지 않아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아요. 

성령께서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더 드러나지 않는 곳으로 가려고 하고, 
그게 성령께서 행하시는 어떤 속성인데, 
'종교의 영'은 계속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과시하고 싶어해요. 

이게 여러분,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그래서 뭐 집사 되고, 장로 되고, 나중에 목사 되고 이러잖아요. 
그러면 '종교의 영'에 휘둘리기가 참 쉬워요. 
과시하고 싶어하고... 

나중에 목사 되면, 교세 과시하고 싶어지죠.
건물 과시하고 싶어하고...
'그래도 우리는 사역이 이만큼 돼!' 이런 거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
이게 '종교의 영'의 특징이거든요.
그러면 사실은 그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볼 수 없지요. 

물론 성령께서 강권적인 은혜로, 높이시고 드러내실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 안에 성령의 사람이라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면 안 되고 
그냥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냥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마치 내가 그 일을 행한 것처럼'
'마치 내가 그 일을 해 놓은 주역인 것처럼...' 
이게 다 '종교의 영'이 하는 일이에요.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누구든지 금방 한 방에 훅 가요.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다가....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제 교회 안에서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 여러 재료들을 찾습니다. 
그 중에 좋은 재료가 '은사'예요.

과거에 은사운동이 왜 그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을까요? 
좋은 거거든요. 은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은사가 종교의 영에 사로잡히면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싶어져요. 
왜? 과시하고 싶어 지거든요.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은사는 문제 없죠)

딱 내가 기도 했는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러면 아픈 사람들이 이제 그 사람 앞에 줄을 서죠.

그래서 치유기도 할 때는, 혼자 기도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만약 낫게 되면, 사람이 시험에 들어요. 
마치 자기가 치유한 것 처럼.. 교만해지기 십상이죠.

그래서 치유기도는 여러 명이 함께 하는 게 좋아요. 
누구 기도로 나았는지 모르게... 그래야 안전하지요. 
그래야 성령께서 치유하신 거지요. 

그래서 우르르 다 함께 기도하는게 가장 좋습니다. 
그래야지 그 가운데 치유가 일어나도 
'와 저 사람에게 신유은사가 있나 보다'하는 교만이 원천 봉쇄 되죠.

또 종교의 영은 '지식'을 추구합니다.
신학교 가서 신학석사, 박사, 출간.. 이런 것으로 자기 명예를 쌓으려 합니다.

학위나 저작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진짜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으면..
또는 교수로 부름 받았으면.. 학위가 필요하고, 저서도 필요하지요.

그런데 목회자로 부름도 받지 않았는데, 특별한 소명 없이
그저 아무 목적 없이 신학석사, 박사를 취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책을 써 내는 사람도 있고요. 자기 자랑이나 명예욕 때문이 아닌지 의심됩니다.

그 동기가 뭐냐는 거죠? 존경 받고 싶다는 거죠.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와 있으면 
그런 학위나, 저서 출간.. 이런데 그렇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꼭 시키실 때만 그렇게 합니다.

주님께서 '몸된 교회를 섬기는데 이게 꼭 필요하니까 가서 해라' 
이러면 하면 되죠.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하는 분들이 있어요.

복음은, 그 안에 평강이 있는 거예요. 

제가 이번에 이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설교준비 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왜 힘들까?' 제가 기도하면서 분별해 보니까,
왜 그러냐면 '종교의 영'을 다루는 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게 '종교의 영'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에 쉽지 않구나... 

이 설교도 굉장히 사실 예민해요. 
까딱 잘못 얘기하면.. 오해 받기 쉽고, 
또 까딱 잘못 얘기하면 공격받을 거예요. 
'종교의 영'이 반발하며 일어날 수도 있죠.

그래서 여러분이 저를 위한 보호기도를 많이 해주셔야 돼요. 
이거 기도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굉장히 (말하거나, 듣기에) 힘들 수 있는 내용들이에요. 

여러분 이게 '종교의 영'은, 건드리면 죽는 거잖아요. (살인사건 나는 거잖아요) 
예수님께서 이거 건드렸더니.. 예수님을 죽여버렸잖아요. 

종교의 영.. 가장 무시무시한 영이에요. 
종교의 영은.. 건들면 그냥 일단 칼 들고 나와요. 

그래서 여러분 이거, 중보기도 진짜 세게 해주셔야 되고요.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셔야 되고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셔야 돼요. 

'종교의 영'에 대한 문제를 건들기 시작하면 
사방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몰라요. 

설교자인 저를 어떻게든지 죽이려고... 
실제로 죽이지 못하겠지만 
하여간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온갖 가십들이 사방에서 나올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메시지 준비하는데, 영적으로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깊게 깊게 기도 하면서 계속 물어봤어요. 
   '뭔가 약간 굉장히 이렇게 좀 버겁고 막 이런 느낌이 있는데.. 이게 뭘까?' 
   '이게 내가 무슨 뭐 아직 해결 안 된 죄가 있나?'

   아무리 기도해봐도 그런 건 잘 안 떠올랐어요.
   '그럼 뭐지? 내 기도가 좀 부족한가?'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근데 제가 오늘 예배 전에 기도 하는데.. 분별이 오더라고요.
   '이게 지금 종교의 영을 건드리는 문제라서, 쉽지 않은 싸움이구나.. 
   보통 때와는 다르구나...' 

   그래서 여러분, 2020년도에 정말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면 
   저를 위한 기도들을 많이 해주셔야 될 것 같아요. 

2) 두 번째 '종교의 영'의 본질은, 두려움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평안을 기초로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평안이 있어요. 
그것이 기초가 돼서 뭔가가 나와요. 

그런데 '종교의 영'은 평안이 없어요. 두려움이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두려움이 있어요. 
두려움을 기초로 합니다. 

   자기를 과시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교만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두렵기 때문에 그런 이유도 있어요. 

   이게 '종교' 와 '복음'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두려움에서 움직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움직이느냐.
   결국 이 점에서 달라지는 겁니다. 

   -두려움에서 움직이느냐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기쁨, 은혜,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느냐.

   이게 종교 와 은혜, 
   종교와 복음을 가르는 본질적인 기준이에요. 

   오늘날 교회 봉사하는 분들을 보세요!
   이 사람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무슨 두려움일까요?
   자기 존재감이 없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거 같아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고, 
   또 내가 무시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도 있겠고... 

3) 종교의 영은,  늘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해요. 
겸손하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늘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말이 많습니다. 말이 깁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세요. 늘 가르치려고 하죠. 

성령의 사람은 가르치긴 가르쳐요. 
왜냐면 성령의 은사 중에 '교사 은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가르칩니다. 
그런데 언제 가르치냐면, 자기에게 가르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진 자리,
그 타이밍에 가르쳐요. 아무 때나 나서서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자기에게 가르치는 권위가 하늘로부터 주어졌을 때 
그것은 어떤 직분으로 주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시간 그 때가, 그 사람이 말해야 되는 타이밍일 수도 있고 
하여간 (하늘에서) 권위가 자기에게 주어졌을 때 가르쳐죠.

그런데 '종교의 영'의 특징은 뭐냐하면, 그런 권위와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자기가 스스로 나서서 가르치려고 해요. 
그 태도 자체가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태도가 습관이 된 거예요.

성령의 사람은, 가르쳐야 될 때는 가르치지만 
그 태도 자체는 늘상 배우려고 하는 태도에요. 

   제가 제 영적인 아버지이신 이재환 선교사님을 참 존경하는데 
   존경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제 2020년 3월달에 은퇴하시는데 
   은퇴하실 때까지 어디를 가든지 간에 배우려고 그러세요. 

   그 나이 들도록 계속 책을 사서 보시고, 뭔가 배우려고 그러시고... 
   가르치려고 그러지 않으세요. 
   이게 성령의 사람의 태도라는 거죠.

본문 막1:22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들은 늘상 가르치는데, 권위는 없다는 얘기잖아요. 
자기 권위가 아닌 자리에서도 계속 가르치려고 했다는 거죠.
그럴수록 권위는 더 없어지죠.

근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르셨다는 거에요.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대요.' 

'권위있는 새 교훈'이라고 그러세요. 
이게 여러분 성령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권위 안에서, 질서 안에서 가르치는데 
종교의 영은 늘상 가르치는데 권위는 없어요. 

4) 그 결과 종교의 영은 소란, 즉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르치는 곳에 와서 자기가 떠들어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 

말은 맞는데, 지금 자기가 떠들고 소리지를 자리는 아니거든요.  행16:17참조.
지금은 권위가 예수님께 주어져있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있는 자리거든요.

그는 소란을 일으키는데 '종교적인 이야기'를 계속 내뱉습니다. 
그 결과 소동이 일어나고 그렇죠. 

5) 종교의 영은 상대방을 정죄합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24
태도 자체가 굉장히 삐딱해요. 계속 비판적이고 정죄해요. 

그런데 성령은 그렇지 않아요. 성령은 굉장히 부드럽고 격려합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격려하고 다시 세워주려고 하고... 
이게 성령의 역사죠. 

그렇지만 종교의 영은, 맞는 말을 해요.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틀린 말을 하는 건 '거짓의 영'이고 
종교의 영은 다 맞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태도 자체가 정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교회 안에 '종교의 영'이 역사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아주 괴로운 곳이 됩니다. 계속 서로 정죄하고 다니니까요. 

교회 안에는 여러분, 종교의 영이 있으면 안 돼요. 
교회 안에는 성령께서 역사 하셔야지요! 
그래서 연약함이 있어도 어떻게든지 격려해주려고 하고 
어떻게든지 세워주려고 하고,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품어주려고 하고 그래야지요..  주1)

▲여러분, 이 종교의 영에 사로 잡혔던 이 귀신이
예수님을 딱 보고 처음 했던 말이 뭔 줄 아세요.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이게 뭐에요?   :24
두려움과 죄책감에서부터 나오는 거잖아요. 

하나님도 이런 태도로 대하는 거예요. 
'우리를 벌하실지도 몰라.. 나를 미워하실지도 몰라..' 

계속 반복적으로 얘기하지만 우리 안에 혼재돼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신실하고 성실한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바리새인의 종교가 같이 혼재해 있는 거거든요. 

이건 누구에게나 정도 차이가 있지만 전부 다 있는 거예요. 
이 부분이 해결이 안 되면, 계속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종교의 영의)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딱딱하고 두렵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딱딱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아세요?
마음에 딱딱함은 두려움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두려움이 계속 내 마음을 공격하고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워요? 
그러니까 마음이 예민하게 반응하면 고통스러운 거에요.
그래서 마음을 스스로 딱딱하게 만들어요. 방어기재죠. 
 
기쁨과 은혜의 감정이 계속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면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습니다. 왜요? 
그걸 하는 것 자체가 나한테 기쁨인데, 뭐 하러 마음을 딱딱하게 하겠어요. 

근데 계속 두려움과 계속 어두움이 내 마음에 치고 들어와요. 
그러면 이거를 허용하면 어떻게 돼요? 힘들잖아요.
이때 자기방어 기재가 작동하는 거예요. 
계속 감정을 블락하는 (막는) 거예요. 

잊어버리려고 그러고.. 반응 안 하려고 그러고.. 
그러면 마음이 딱딱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두려움이 계속 역사하고 있으면, 마음이 굳어져버려요. 
그래서 성경은 '너희 마음을 딱딱하게 하지 말라'고 하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3:8

종교의 영이 역사하면,
여러분 결국 미혹의 영이 역사하면 
우리의 마음은 딱딱해지게 되어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돼요. 

이것이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던, 소란스러운 귀신들렸던 사람의 모습이고 
동시에 안 그런 척하고 앉아 있지만, 그 가운데 삐딱하게 예수를 바라보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도 여러분, 이 모습들이 있지 않습니까? 
크고 작음의 차이이지, 혼재해 있을 수 있죠.

우리 안에 있는 이 부분들(종교의 영)을, 어떻게든지 올해는 제거합시다. 
두려움으로부터 빠져 나오셔야돼요. 

두려움에서부터 시작됐던 일들이라면 멈추세요. 그거 계속 하지 마세요. 
두려움에서 계속했던 일이라면 일단 멈춰야 돼요. 
종교에서 시작됐던 일이라면 일단 멈추세요. 
그리고 하나님 옆에 다시 시작해야 돼요. 

우리 마음이 바뀌어야 돼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시작해야 돼요.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기 시작해야 돼요. 

그래서 이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귀신 들린 자 플러스 서기관 모두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절에 '잠잠하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5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이 소란스러움을 향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거에요. 
'잠잠해라!' 
'너의 그 퍼포먼스를 멈춰라, 하던 거 계속하지 마라, Stop 해라' 
'잠잠해라 더 이상 소리지르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우리의 종교성은, 본문의 귀신들린 자처럼
악악 소리 지르면서 나타나지는 않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사람들이 계속 소란스러움을 떨고 있을 수 있어요.

'나 좀 봐주세요. 나 좀 인정해주세요.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믿음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에요.' 

악악 소리지르고 있지는 않아도 
더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 
더 많은 지식 추구를 통해서 
더 많은 은사의 나타냄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한테 먹을 것 사다주는 걸 통해서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 동기가 여러분, 두려움에서부터 나온 거라면 
오늘 예수께서 하시는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말하자면 Stop your performance!
 
'그렇게 소란떨지 않아도, 너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야!
그렇게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너는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야!
너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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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령의 음성이, 종교의 영의 속박을 벗어나게 합니다.
종교의 영의 속박을 벗어나는 길은, 
더 큰 열심이 아닙니다. 
더 큰 헌신도 아닙니다. 
더 많은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학위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의 영)의 속박을 벗어나는 길은, 이 성령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는 내 기뻐하는 자라' :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며, 너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성령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는 거에요. 
이거 이게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인 줄 믿습니다. 

'너는 퍼포먼스를 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이미 내 아들이고, 내 기쁨이야! 
너는 은사를 발휘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아들이고 내 기쁨이야! 
너는 학위가 없어도 내 아들이고 내 기쁨이야!' 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거에요. 

'너는 성공해도, 실패해도 
착해도, 죄를 지어도 
잘 생겼어도, 못 생겼어도 
능력이 많아도, 없어도 
이런 것들과 아무 상관없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나의 기쁨이니라'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 잭 푸닌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앞에서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잠잠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은 여러분, 이 하나님의 음성, 이 은혜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두려움이 떠나가는 거에요. 
그리고 마음이 잠잠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마음이 잠잠하지 않습니다. 계속 요동칩니다. 
'이 두려움을 어떻게 피해 가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지?'

계속 불안하게 돌아가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지기 시작하면 
우리 마음이 잠잠해지기 시작하는거에요. 

비로소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강이 역사하기 시작하고 
비로소 우리 삶 가운데 안식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거에요. 
딱딱해졌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거에요. 

▲누가복음에 동일한 본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4: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상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이 종교의 영에서 떠나왔는데 상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우린 상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두려워하고 있는데, 
무시당할까봐.. 뒤쳐질까봐.. 열심히 열심히 뭐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종교에서부터 빠져나왔는데 '상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 소란스러움을 멈춰도, 그 소리지름을 멈춰도 
상하지 않습니다. 안전합니다. 
비로소 두려움의 속박이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여러분 자유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에요. 
이 복음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임한 줄 믿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들에게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왕을 맞이하십시오. 고된 종교의 삶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자녀라 부르시고 기쁨이라 칭하십니다. :11 
오늘 예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종교의 영아!)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25
그 영과 결별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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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제가 이 말씀을 이제 곰곰이 묵상해봤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인생, 그리고 바리새인들... 
'그들이 어떻게 종교인이 됐을까? 어떻게 종교의 영에 사로잡히게 됐을까?' 

이게 뭐 성경에 나오는 얘기는 아니니까, 어떻게 잡혔는지는 몰라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봤어요. 

아마 이렇게 됐을 거 같아요. 대략 비슷할 겁니다. 
시작은 뭐겠어요? 두려움이에요. 

항상 종교의 영이 역사하는 시작은 '두려움'에서부터 시작돼요. 
이 귀신 들린 사람도, 또는 바리새인도 
아마 분명히 어렸을 때부터 두려움 속에 있었을 거에요. 

열등감이 있었을 수도 있고, 두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뭐 사람들이 혹시 조롱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나아가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
죄를 짓다보면 '와 이러다 지옥가는 거 아니야?' 하는 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이렇게 수많은 두려움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리 주변의 있죠. 
분명히 이 사람들도 이런 두려움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종교의 영'에게 
이렇게 함몰돼 갔을 거에요. 

이 죄와 두려움이 반복되다 보면, 이런 두려움이 또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벌하실거야' 이제 종교적인 두려움이 더해져요. 
죄와 두려움이 반복되다 보면 
'하나님도 나를 벌하실거야,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거야' 
이런 생각이 들면서, 새로운 두려움이 형성됩니다. 

이 포인트가 여러분 모든 '종교의 영'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에요. 
거의 예외없이 다 이 포인트를 지나요. 

항상 종교의 영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기 시작하는 포인트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나와요. 

내가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짓고 막 두려움에 휩쌓이다 보면, 
'하나님도 나를 벌하실거야, 하나님도 이런 나를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이 포인트가 딱 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죠. 
여기서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종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으로 종교의 역사..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종교를 찾게 됩니다. 

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빌어보기도 하고 
불교를 찾아가서 잊어버리려고도 하고, 뭐 해탈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교회를 찾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두려움이 역사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고 나의 기쁨이라'고 하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해요. 
계속 두려움 속에 의심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까? 
내가 매일 죄를 짓는데, 나도 내가 용납이 안 되는데 
난 능력도 없는데..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실수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