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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전10:1~5, 막1:11. 출처보기
Truth in God's Word and Jesus 중에서
Zac Poonen 영어설교 번역.
고전10: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
우리가 정직하게 위 말씀을 읽어보십시다.
위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위 본문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 받고, 물 세례도 받고..
3절에, 그들이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건 성경말씀을 먹은 것을 뜻합니다.
4절에,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했는데.. 그건 성령의 역사로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러고도, 안타깝고 불행한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대다수 멸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서론/ 하나님은 광야의 백성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5절, ‘하나님이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심각한 경고>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 백성들이 광야에서 무엇을 어쨌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역사상 그 어떤 시대의 사람들도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적들을 매일같이 보고 목격하며, 그 가운데서 살았던
어떤 의미에서 놀라운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례로, 어떻게 2백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매일 같이,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을 먹고 사는.. 그런 기적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40년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기적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남은 생애 내내, 그 기적을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간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백성들은, 단 하루가 아니라,
40년이면, 모두 몇 날입니까? 1만 날 이상을, 그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이, 그들에게 정말 ‘일상, 평범한 일’이 될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소풍을 간다고 가정하고, 2백만 명이 먹을 물을 준비해 보십시오.
그 생수병이 아마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계속 물이 공급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기가 하늘에서 날아와 공급되는가 하면,
불뱀에 물려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도, 기적적으로 치료되는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의 의복이 닳아 없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신, 샌달도 해어지지 않았습니다. 신29:5.
이걸 뭐 유통구조로 만들어서, 물류를 공급하려고 했다면..
어마어마한 물류창고와 유통구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기적적으로 그들의 의복과 신발을 입히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뭐 약간 특별한 기적 한 가지만 체험하기만 하면
‘아!,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나 보다. 그래서 이런 기적을 나에게 주셨구나!’
하고 자부심을 갖고, 자랑할 것인데,
이 출애굽 백성들은, 수 천, 수 만가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문제는, 그러고도.. ‘하나님이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본론/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쉽게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요. 저는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이 시간에, 조금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 드리려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시고, 강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난 것을 아시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은, 위에 나온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다’ 라는 구절과
선명하게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두 구절을 한 번 대조해 보십시다.
왜 하나님이, 광야 백성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으며,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기뻐하셨는지.. 그 핵심 이유를 한 번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약 30세였고, 막 공생애를 시작하실 시점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아주 기뻐하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때까지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을 몇 번이나 행하셨나요? ... 답은 제로입니다.
즉,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위대한 설교말씀을 몇 번이나 전하셨나요? .. 답은 제로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귀신을 몇 번이나 쫓아내셨나요? .. 제로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공적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뻐하셨나요? ..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사역을 거창하게 수행하고,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겨서’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창한 사역과 업적을 남기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근본적으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정말 식사하실 겨를도 없으실 정도로, 열심히 사역을 하셨고,
사도바울도, 말할 필요도 없이, 열심히 사역적 열매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제 포인트는, 사역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삶(또는 생명력)’입니다.
그냥 열심히, 숨 돌릴 틈도 없이 일만 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사역자에게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안 하고는.. 차제의 (그 다음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보시고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은
아직 예수님이 아무런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30년 성장하시는 기간 동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반 기간도, 그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교제관계를
한 번도 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33년 반을 사셨습니다.
그 중에 3년 반만 공생애 기간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약 10%입니다.
예수님은, 90%의 삶을,
아버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관계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사시다가,
오직 10%의 삶을, 사역에 투신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그 반대는 아닙니까?
90%의 시간을, 사역에 다 소진하고,
10%의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배정하진 않습니까?
10%도 배정 못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역적 거창한 열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관계, 거룩한 삶을 보시고..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앞서 서두에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창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기적을 다 보고서도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셔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 받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로,
무슨 거창하고 위대한 사역을 하고, 업적을 이루고,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즉, 교회를 크게 이루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도 있지만, 기뻐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외적 업적, 사역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거기에서 오는 거룩한 삶!’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생각,
즉 ‘내가 그래도 거창하지는 못 해도, 뭘 그럴듯하게 이루어야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겠지..!’
그건 인간적인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보십시다.
성경은 그런 ‘인간적인 생각’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정말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남루하고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격 속에서, <천상의 보좌의 영광과 위엄>을
오버랩 해서 (겹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천상의 예수님의 모습과, 지상의 예수님의 모습을.. 두 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극적으로 다른 두 모습이.. 신비하게도.. 하나로 겹쳐집니다.
(우리 각자 자신도, 그렇게 겹쳐질 수 있습니다.)
별로 뚜렷한 사역적 업적도 없이 사는 여러분이,
스스로 보기에도 고달프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이 그대로 닮아서 녹아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경천동지할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정도로,
위대하고 놀라운 사역적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만약에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이 스며나오지 않는다면,
실례지만, 광야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다수를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TV, 인터넷, 신문.. 이런 것 좀 대폭 줄이시고,
겸허하고 정직하게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성경은, 독자인 우리들에게, 무슨 경천동지할 큰 업적을 이루어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크시고 높으시고 엄위하시고, 천군천사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거룩하고 친밀하게 하나님과 교제하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 인간적으로 남루한 그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함, 엄위함, 천군천사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이, 인간적으로 큰 영웅호걸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게 되면 좋지만, 안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각자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 관심과, 신앙의 목표와, 지향점과, 포커스가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성경을 펴고, 겸허하게 읽고 분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당신을 향하신 그 위대하고 존귀한 뜻을,
여러분이 오해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일평생 달려가다가
나중에 ‘내가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하시는 그 그룹에
포함되지 않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래 영어설교의 0:00~6: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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