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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그물

LNCK 2023. 5. 19. 16:24

베드로의 그물 [마가복음3]  - YouTube

◈베드로의 그물       막1:16~20       마가1~10장 설교모음

◑서론
2020년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진짜 예수진짜 복음 앞에 설 때, 우리 안에 진짜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회복들이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쫓겨나고, 또 병든 자가 치유되고, 
또 끊어졌던 관계들이 이어지고, 
또 무기력증, 수치심 등의 마음의 질병들이 회복됐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쪽에서는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 또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진짜 예수가 나타나니까, 아주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 충돌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가 오셨을 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공존'하면서 일어났습니다. *회복과 충돌 둘 다 

한쪽에서는 회복이 일어나면서, 또 한쪽에서는 충돌이 일어나는... 
그리고 이것은 초대교회 때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사람들..
진짜 복음앞에 서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 안에
회복과 충돌이 동시에 일어나고, 공존하는 일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들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종교화 되었던 것들은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2020년 한 해 동안에는, 이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연약했던 것들은, 다시 한번 회복해야 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동시에 우리 안에 부서져야 될 것들은, 충돌해서 부서지는... 
그래서 다시 한번 생명이 살아나게 되는 그런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2020년에 마가복음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마가복음 1장 후반부 부터 ~ 2장과 3장에 걸쳐서 
<회복과 충돌의 이야기>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5가지 회복에 대한 얘기가 쭉 나오고 
바로 이어서는 2가지 충돌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시작되기에 앞서서 
마가복음의 제일 처음, 1:1~20절까지 말씀은 
<본격적인 회복>의 이야기에 앞서서 
<두 가지 준비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죄로부터 돌이킴)
-또 곧은 길을 굽은 길을 곧게 하라 (부르심에 응답)

그러면서 그 예수께서 오실 길을 맞이해야 되는 
두 가지 선행돼야 될 준비 작업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첫째는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새로운 삶으로 초청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된다
이 두 가지 선행작업이 있을 때, 
우리 안에 회복과, 
또 부서져야 될 것들이 부서지는 충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죄와 거기에 따른 회개에 대해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회개    
-오늘은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로서의 두번째 단계인 부르심에, 
 나의 순종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현재 페이지

◑본론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던 야고보
이 사람들은 다 어부들 이었죠.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던질 그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제자들에게, 고기 잡는 인생이 행복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 그들이 진짜 행복했다면 
이렇게 쉽게 예수님을 따라갔겠어요? 좀 망설이기라도 하지 않았겠어요? 
'가만 있어 봐, 그물을 던져두고 따라가도 되는 거야?' 
'이러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조금 머뭇거리라도 했어야 되는데 

본문에 보면 여기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곧" 이렇게 되어있어요.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8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버려두고 갔다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어부 생활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 어부의 삶이 하이클라스 의 삶도 아니고 
귀족의 삶도 아니고, 매일 매일 똑같이 고기 잡아야 되는 
고달프고 지루하고 별 의미 없고 이런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삶이 그렇게 행복하고 만족스러웠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데, 그물을 고치고, 던지고 그랬는데 
이것은 대단한 미래나 소망을 낚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그날도 그물을 펴고 손질하고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어제와 다른 날이었습니다. 
예전에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그분이 이들을 찾아오셨어요. 

소문으로만 듣던 분, 서기관들과는 전혀 다른 권위로 말씀하신다는 분,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는 분, 
바로 예수께서 이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던지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복음에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그냥 마법같이 인생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는 이 복음에 '반응(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그 반응은 두 가지라 그랬어요. 
-첫째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초청하시는 그 초청이 있는데 
우리 인생에게 제시하시는 인생의 소명이 있는데 
그 소명, 그 부르심에 내가 응답하는 거에요. 

그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새로운 삶'이라는 그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 반응할 때, 비로소 우리 삶 가운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회복'의 역사라 그랬어요. 

여러분들이 2020년에, 많은 복음의 역사들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근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파트는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과 더불어 
-예수께서 우리에게 초청하시는,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그 소명에 
내가 응답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이게 뭔지 아래에 설명합니다.

베드로도 이 당시에는, 이 초청에 응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정확히 다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초청은, 고기잡이하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의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초청이었어요. 

▲복음에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혁신적인 부르심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우리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부르심이 있어요. 

그리고 이 혁신적인 부르심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의 역사는 이 소명에 우리가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교회를 50년을 다녀도
그 삶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 사람 가운데 복음의 역사, 복음의 능력들이 경험되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분명히 예수께서 오시면,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죠.
마가복음에도 서두에서, 명확하게 두 가지를 제시하잖아요.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야 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청하시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랬을 때 그 뒤에 이어지는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도 동일하게 재현되는 줄 믿습니다. 
이 소명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이루어야 되는 
소명이 있습니다. 

소명은 '하늘의 부르심'이라는 뜻이죠. 
다른 말로 하면 데스티니, 다 같은 말이긴 합니다. 
하여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이 있습니다.  

*참고로, 소명 calling 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구원으로의 콜링과, 사명(직업)으로의 콜링

그저 구원받고 나서 끝! ..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이루어가야 될 어떤 목표가 있다는 거에요. 

단순히 구원받고 나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출애굽(구원)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들어가야 될 가나안 땅이 있다는 거예요. 
이제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소명은, 단순히 헌신이나 의무가 아니에요. 
이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가지셨던 계획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데스티니 destiny 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 삶가운데는 죄로 말미암아 망가져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망가지고 왜곡되고 부서져버린 인생을 
다시 회복시키는 거에요. 왜곡된 삶의 방향을 다시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복이에요. 

그리고 이 "소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왜곡된 삶의 방향을 다시 올바로 제시해주는 거에요. 

'너희가 인생이 회복되길 원하니? 
그러면 원래 하나님께서 네 인생은 이 방향으로 만드신 거야' 
그것을 제시해 주는 거에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르는거에요. 

그래서 소명이라는 것은 
'의무, 헌신' 겉으로는 그렇게 좀 보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본질에 들어가 보면, 어떤 의무감이나 헌신이나 희생이나 
이런 것이라기보다는, 이 소명은 회복에 더 가까워요.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방황하고 있던 인생의 방향이 
원래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돌이켜 지는 거에요. 
자기 소명을 무시하고 살던 인생이, 자기 소명에 충실하게 살게 되었다는 거죠.

▲1. 첫째로 소명이란..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구원으로의 소명 calling' 이죠.
그 부르심에 응하여, 구원받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죠.

구원받은 후 이제부터는 
예수가 추구했던 것들을 나도 추구하고 
예수가 살았던 방식들을 따라서 나도 살고 
예수가 사람들을 대하셨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나도 사람들을 대하고 
예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나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하는 이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왜냐면 스승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니까요.

▲2. 둘째 이 부르심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에요. 
(오늘은 이제 이 말씀을 깊게 살펴볼 겁니다)

예수를 따라갈 때, 그 목적지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열심히 따라가면, 스승같은 사람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바리스타 스승을 열심히 따라가면, 결국 바리스타가 됩니다.
도자기 만드는 스승을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는 도공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로, 예수를 열심히 따라가면 
우리는 누가 된다는 거에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거에요. 
왜냐면 예수님께서 그거 하셨던 사람이니까요. 

자 그렇다면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뭘 하셨죠? 

죄로 인해 망가진 인생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하셨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뜻은 뭐냐면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물고기를 낚는 어부는 
모든 자기의 관심과 에너지와 시간을, 다 물고기에게 투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은,  
사람들의 인생을 다시 원래 (창조의 목적) 대로 회복시키시는 일이었어요. 
 
고기잡이하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안드레와 요한은 
그저 자기 먹고 사는 문제에 매몰되어서 
세상에는 생선 공급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임팩트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방황을 하던, 힘들어하던, 절망가운데 있던...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그저 그들의 관심은, 오늘 잡을 생선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기를 내가 잡을까?' 이게 유일한 관심이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이들을 초청하셨을 때 
그래서 이들이 그들의 소명을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스승 예수가 그랬듯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회복시키는 사람이 됐잖아요.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 억눌려있는 사람, 귀신 들린 사람 등 
수많은 인생을 회복시키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고, 부르심의 본질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저희의 모습도 한번 돌아봅시다. 
저희 각각 개개인을 향한 부르심도 있지만 
저희 공동체에게 주신 소명도 있지요. 

그 소명과 부르심을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응했을 때, 
저희가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관심 가져본 적도 없던 중동의 난민들... 

여러분들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아~ 이 교회를 향한 부르심과 소명이 이거구나!' 그러고 반응하기 전까지 
중동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알기나 하셨어요? 
그 난민들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으셨어요? 

실질적으로 이 중동 난민들에게 뭔가 영향을 미치고 
작게 나마 도움이 되고,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소망을 주고 
다시 생명을 주고 하는 일을... 
여러분 이 소명에 응하기 전까지 상상이나 해보셨어요? 

저희 교회에 오래 계셨던 분들은 
'뭐 이건 당연히 우리 교회에서 하는 일이지' 이렇게 생각하지만 

제가 밖에 나가서 다른 목사님들을 만나 뵙고, 교회들을 만나 뵙고, 
난민사역에 대해서 나누면요. 굉장히 눈이 휘둥그레 집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자기들은 한번도 개념도 가져본 적이 없던 일이에요. 

중동에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무 개념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만난 목사님도, 
자기도 그 중동 난민들을 너무 돕고 싶긴 한데.. 무섭대요. 
'중동' 소리만 들으면 일단 소름부터 끼친대요.

그런데 저희가 작게 나마, 정말 미약하게나마 
'소명, 부르심'에 응하기 시작했을 때 뭐가 일어나는거에요? 
사람을 낚는 일들이 시작되는 거죠. 

그 사람들의 회복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일들이 시작된 거죠.
여러분 이것이 부르심이고, 이것이 소명인 줄 믿습니다. 

참 신기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 낚는 어부! 
맞아요. 예수께서는 당신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의 인생을 회복시키십니다. 
어떻게요? 

그가 또 다른 사람의 인생에 회복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쓰십니다)
이 회복의 역사가 한 해 동안 저와 여러분 가운데 풍성해지기를 축복합니다.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이들이 예수를 따랐는데 '그물을 버려 두고'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뿐만 아니라, 뒤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 역시 마찬가지죠.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두어야 할 그물이 있다는 거에요. 
먼저 내려놓아야 할 그물이 있다는 거에요.   

사람들이 이 좋은 초청에, 소명으로의 부르심에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쉽게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냥 아무것도 내려놔야 될 것이 없고, 아무것도 버려두고 가야 될 것이 없고, 
그러면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훨씬 쉽겠죠. 그냥 따라가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들의 손에는 그물이 들려져 있단 말이에요. 
이거를 버려두고 가야되는 거예요. *자기들 생계 였을 거예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초청에는 쉽게 응하지 못해요. 부르심에는 쉽게 응답하지 못해요. 

자꾸 머뭇거리고 망설인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너무 공짜로 신앙을 먹으려고 합니다. 

요즘 너무 공짜로 신앙을 먹으려 해요. 날로 먹으려고 그래요. 
여러분 안돼요. 

왜 날로 먹는 게 안 되는지는, 
이건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왜 날로 먹는 게 안 되는지... 
뭐 당연한 얘기에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축복이 있는데 
이 복은 관계적인 축복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관계적인 축복은 날로 먹을 수가 없어요. 
관계적인 축복은, 관계를 쌓아야.. 관계적인 축복을 얻는 거잖아요. 

관계를 쌓으려면.. 희생과 뭔가 약간 양보하고, 뭔가 투자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만 관계가 생기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관계적인 축복이 내려지는 게 없어요.

그래서 신앙은 철저하게 관계에 대한 거거든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랬어요. 
그러면 여러분, 공짜로 안 되는 거죠. 

반드시 뭔가를 포기하고 버려둬야만 
그 신앙의 유익들과 신앙의 본질들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중세 수도사들이 뭘 했는가 생각해보세요.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버립니다. 
계속 포기하고 또 버리고 또 버리고 
심지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권리 까지 다 버립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차치하고 
하여간 이들에게는 예수를 따르는 삶이, 그만큼 비중있고 중요했다는 거죠.
공짜로 먹으려 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지금 '그물을 버려두고'를 설명하는 중

그런데 오늘날 오늘날 현대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공짜로 변화된 삶, 공짜로 회복된 삶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혹시 우리도 그거 기대하고 있지 않아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서 공짜로 회복된 삶, 또 공짜로 변화된 삶,
이걸 원한다는 거예요. 

아니 여러분, 성경은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라' 그래요. 

또 마가복음의 뒤에 가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뭔가 우리가 포기하고 내려놓고 희생해야만 예수를 따라갈 수 있다는 거에요. 

신앙에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지불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신앙에는 대가가 있어요. 
좋은 말, 사탕발림의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공짜, 아무것도 없어도 돼, 그냥 받기만 하면 돼!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에요. 은혜는 그냥 받기만 하는 거니까요.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닌데, 실제적으로는 틀려요.

그 은혜를 받기만 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지 생각해보면 
관계적인 축복을 누리는 거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 쪽에서도 그 관계를 위해서 지불해야 되는 게 있는거에요. 
그러지 않으면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청년 남녀가 결혼을 했어요. 
근데 처음에 남자가 여자와 연애를 시작할 때 
양쪽이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아요. 

'시간쯤 내서 좀 만나죠'
그런데 시간이 아깝다면서 만나지 않아요. 

'어디 가서 밥이라도 좀 먹죠'
그러면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까워하고... 그러면 결혼이 안 되는 거죠.
그러면 결혼 후에 누리는, 모든 가정과 부부의 축복도 못 누리는 거죠.

관계는 뭐에요?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희생하고 투자돼야 될 게 있는 거에요. 
내 시간, 내 물질, 내 노력... 이게 투자가 돼야 관계가 생기는 거지 
그게 하나도 투자가 안 되는데, 어떻게 관계가 생겨요? 

그래서 예수를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 안에 내려놔야 될 것들이 있어요. 
당연히 희생해야 될 것들이 있어요. 

그것을 내려놓고 희생하지 않으면 
그 (하나님과, 성령님과)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아무것도 투자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냥 공짜로 회복, 공짜로 변화, 공짜로 축복
다 아무것도 (투자) 안 하면서 얻고 싶어 한단 말이에요. 
이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안 하면, 여러분들이 얻게 되는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피상적인 것, 종교적인 지식, 또 뜨겁게 예배드리면 약간 감정이 고조됨,
이런 아주 피상적인 것 외에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과 회복은, 그런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거든요. 
원래 하나님 우리를 만드셨을 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길 원하셨던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관계, 또 서로서로 간에 누리는 깊고 풍성한.. 
무엇으로도 대체하고 싶지 않은.. 무엇으로도 잃고 싶지 않은 그 관계.. 
이거를 하나님이 누리길 원하셨잖아요. 

이걸 누리려면, 거기에 따르는 대가를 당연히 치러야 되는 거에요. 
연애해서 결혼하는 젊은 커플을 보면, 제일 쉽게 이해가 되죠;

결혼 후에 자녀를 낳고 누리는 가정의 복을 생각해 보면,
결혼을 위해서 투자하는 모든 자원이 하나도 아깝지 않죠.
성경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관계'로 설명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신앙에는 여러분 반드시 치를 대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도 있고요.
더구나 우리의 삶은 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죄에 쩌들어있어요. 

그래서 이 찌든 살들을 떼어내는 치열한 싸움이 없이는
예수 따라가는 게 녹록지 않습니다. 

자기의 욕망, 원하는 것들, 자기 보호본능, 교만, 열등감, 수많은 것들에
우리가 찌들어 들어있거든요. 이게 그냥 어렸을 때부터 자라면서 
진득진득 붙어있어 가지고서 
어디까지가 쩌든 때인지, 어디부터가 진짜 내 몸인지 구분이 안 가요. 
죄가 내 삶과 뒤엉켜 있다는 거죠.

이 죄의 찌듦, 이 죄를 벗겨내는 싸움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때를 벗기다 보면, 살에서 피가 날 때도 있어요.

그래서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라' 했을 때, 그냥 확 버려두고 이렇게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 부르심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제자들은 '곧 immediately'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어요.

그런데 어쨌든지간에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이 초청에 응하기 위해선 
내려놔야 될 베드로의 그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베드로의 그물'이에요. 

사실 이 그물은, 내가 붙잡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나중에 돌아보면, 그물이 나를 옭아매고 있어요. 항상 그래요. 

내가 그물을 붙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보면 그물이 나를 꽝꼭 붙잡고 있는 거에요. 

▲이 그물을 끊어버리고 그랬을 때, 자유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그물은 어떤 거였을까요? 
이 의미를 조금 더 깊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내려놔야 될 그물인데, 이 그물에 속성이 뭘까요? 
일차적으로 베드로의 그물은, 당연히 먹고 사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의 그물은 일차적으로 '직업'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먹고 사는 수단을 바꿔야 될 경우도 있어요. 
만약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면 그래야죠.

원래 우리를 그 일을 하도록 만드신 게 아닌데 
욕심때문에, 자기 안에 열등감, 교만, 다른 것 때문에 
그 직업 갖고 있으면, 당연히 먹고 사는 걸 바꿔야 될 수도 있지요. 

회복이라고 하는 게 여러분, 그렇게 생각처럼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죄로 쪄들어서, 원래 가야 될 길에서 한창 빗나가 있다면 
이거 다시 떼내고 돌이킨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충격적이고, 아주 힘든 일이죠. 

▲또 '베드로의 그물'은 <익숙한 삶의 환경> 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렸을 때부터 어촌에서 살았잖아요. 
맨날 보고 자란 게, 그물 깊고 또 고기 잡고 이런거 였단 말이죠. 
자기에게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삶이었죠. 

어쩌면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익숙한 삶을 바꿔야 될 수도 있어요.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환경을 바꿔야 될 때도 있어요. 

자 이런 것들이 평면적으로 보이는 '그물'의 의미입니다. 

◑'베드로의 그물'은,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버렸다고 할 때,
예수 믿으면 반드시 직업을 바꿔야 되는 거냐, 
익숙한 환경을 반드시 떠나야 되는 거냐?

아뇨,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건 사람마다 다른데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어요. 

▲'베드로의 그물'은, 베드로의 인생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거였어요.
인생에는, 그 사람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태그가 있습니다. 

요즘 인스타그램 할 때, 해시태그 다는데, 태그가 무슨 뜻이에요?
'그게 뭐다' 하고 딱 이렇게 달아놓는 어떤 타이틀 이죠. 

마찬가지로 인생에는, 그 사람을 한 마디로 규정짓는 태그가 있어요. 
예를 들어볼게요. 

빌게이츠.. 그를 한 마디로 규정하면, 그의 태그는
'성공한 사업가' 또는 '마이크로 소프트'죠.

아인슈타인.. 그는 한 마디로 '과학자, 물리학자'죠.

마찬가지로 베드로.. '어부'였죠. '그물'입니다. 

우리 각자도, '선생님' '사업가' '목사' '정치인' 등
그 사람의 인생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Tag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 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태그가 되어야 될까요?
그것은 보통 그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 
그가 생각하는 인생의 의미,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래서 가장 많은 삶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
그게 그 사람의 태그가 되는 거예요. 

당연히 빌게이츠도 가정에서는 아빠였고, 또 동호회 회원이었고
여러 가지 측면이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빌 게이츠가 생각했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생의 목표는 뭐였을 것 같아요?

빌 게이츠가 생각하기를, 자기 인생이 성공했다,
자기 인생의 존재의미를 찾는.. 그게 뭐일까요?
그가 창업한 '마이크로 소프트' 라는 회사죠. '윈도우' 만든 회사.

그가 자기의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관심을 투자하고, 일평생 추구하고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생의 의미 생각하고... 
그것이 여러분 결국 그 사람 인생에 '태그'가 되는 거죠.

속일 수 없어요. 잠깐은 다른 태그가 달릴 수 있어도 
쭉 인생을 살잖아요. 그러면 자기도 알고, 주변 사람도 알고 다 동의하져.
'이 사람의 태그는 OO다' 
'베드로의 태그는 그물, 어부!'
그럼 내 인생의 태그는 과연 무엇입니까?

과거에 베드로의 인생은
그물에 고기가 몇 마리 잡히냐에 따라서, 
자기 존재감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했어요. 그게 뭐라고...

물고기가 아예 한 마리도 안 잡힐 때는, 자기 존재감이 희미해지기도 했어요.
그게 뭐라고...

그런데 오늘날 사업하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거죠.
자기 직업상의 성취 여부에 따라, 존재감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고,
아예 희미해져버리기도 합니다. 아니, 그게 뭐라고....

여러분, 하나님 자녀의 존재는,
물고기 몇 마리 잡혔냐에 따라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로 따라나섰을 때,
베드로는 더 이상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태그가 변했어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죠.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했어요.

여러분,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부르고 
-나는 나 자신을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내 인생에 붙여진 태그를 바꾸는 거예요. 

과거의 일시적이고, 모래 위에 세워진 성과 같은 가자 '태그'를 허물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람, 사람낚는 어부'라고 하는, 새로운 태그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낚는 어부'란, 전도와 아울러
그 사람의 영적 회복과 성숙을 위해서 도와주는 모든 영적 활동을 의미하죠.
중보기도 해주고, 성경말씀을 나누며, 그의 슬픔을 위로 격려하고, 삶을 나누는 등..

그렇게 '사람 낚는 어부'의 태그를 붙이는 것이
예수의 초청/부르심/콜링에 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모르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신윤근' 그러면 
태그가 뭐가 떠오르세요? 원주 하나교회를 섬기는 전도사님인데요,
직업은 교수 입니다.

'신윤근' 그러면 분명히 세상에서는 '교수'라는 태그를 붙이겠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 분을 '전도자, 사람 낚는 어부'로 태그를 붙이죠!

그분은 '교수'이지만, 거기에 자기 생명을 걸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이 인생에서 추구하고 투자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성공이 아니에요. 
이거는 그 분도 알고, 우리도 알고, 동료 교수들도 다 알아요.

그분의 인생을 규정짓는 건 교수가 아니에요. 
교수로서 실적이 뒤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제가 얘기 들어보니까, 연구결과도 잘 나오시는 거 같아요. 
이렇게 뭐 이렇게 민폐 끼치고 있지는 않으세요.

거기서 뭐 대단한 업적이 나온다고 해서 존재감이 올라가고, 
거기서 별로 업적이 안 나온다고 자기 존재감이 내려갔고.. 이렇지 않다는 거죠.

그러면 이분의 관심은 뭐에요?
'사람낚는 어부'인 거죠. 이게 이분의 Tag 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어떻게 회복의 임팩트를 미칠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임팩트를 미칠까' 

이게 그분이 추구하고, 투자하고, 그래서 그 분의 인생을 규정짓는 태그 입니다. 
그래서 '전도사'로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죠.

△김무열 .. 이란 분도 있어요. 이 분은 전도사도 아니에요.
공식적 직함은 '비즈니스맨' 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도 알고, 주변에서도 알고, 모든 사람이 다 알죠.
'사업가'라고 태그를 붙이기에는 안 어울려요. 분명히 사업가인데...
돈도 많이 버는데 말이죠. 그럼 뭐에요?

그를 아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동의하는 것은 
'저 사람은 영혼 구령에 미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야'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께 인도 할까?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복음안에서 회복된 삶을 살게 할까?'
그것 때문에 맨날 울고, 시간을 쏟고, 잠도 안 자고, 그 일만 하고 있거든요.

사업은 그냥 주님 주시는 은혜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해나가면서
본래 목적은 '사람 낚는 어부'로 사는 거예요.

비록 사업을 잘 하고 있어도, 
비록 교수로서, 학자로서 업적을 많이 남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인생을 그거라고 태그를 붙이려고 하면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아요. 왜냐면 세상 그물을 내려놨기 때문이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그물을 붙잡았기 때문이죠.

그걸 통해서, 내 존재 의미를 찾겠다고 하는 거.. 다 내려놓은 거예요.
거기서 뭐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대단한 유명세를 얻겠다고 하는 것
그 옛 그물을 다 내려놓은 거예요.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여러분은 '베드로의 그물'을
혹시 아직도 붙잡고 계시지 않으세요? 

△저도 예수 따를 때, '베드로의 그물'을 내려놓고 좇았어요. 
그전까지 저는, 어제 간증과 책에도 여러번 나오지만 
저는 학자의 길 외에, 제가 다른 일을 할 거라고는,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요! 

그러다. 보니까 예전에 제 모든 존재가치는 어디에 달려 있었겠어요.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느냐' 
'많은 업적을 낼 수 있느냐' 

그래서 성적이 잘 나오면 존재감이 올라가고 
성적이 안 나오면 존재감이 내려가고...

수학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논문이 잘 나오면, 내 존재감이 막 올라가는 것 같았고

논문 결과가 잘 안 나오면 
'나는 쓸모없는 인간, 세상에서 없어져야 돼' 
그래서 존재감이 막 지하실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했어요.
예수 따르기 전이었죠.

그러다가 진정 예수를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베드로의 그물을 내려놓기로 결단'한 거예요. 

그 그물을 제가 내려 놓고 나니까,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뭔가 하면 "자유" 입니다. 

그래서 제가 깨닫게 된 거에요. 
'내가 그물을 잡고 있는 게 아니고, 그물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거구나' 

왜요? 그게 내 존재를 규정지으니까 얼마나 신경쓰였겠어요? 
그게 내 존재를 규정짓는데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어요?
계속 거기에 꽁꽁 묶여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제 존재를 규정 짓고 있던, 그 그물을 내려놓았어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일어난 변화죠.
'나는 이거를 통해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내가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인가 에서 내 존재가 규정되는 거야'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많은 업적이 나오고, 좋은 대학에 교수가 되고... 
 그게 아니고, 내가 얼마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인가?
 내가 얼마나 사람들의 인생의 회복의 임팩트를 미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게 내 인생을 결정하는 태그가 된 것입니다.
이건 제가 목사되기 훨씬 전의 얘기해요. 
그때는 제가 목사될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말더듬이 있었기 때문에, 목사할 생각도 아예 없었죠.
 
그런데 예수님을 진실로 만난 후, 제 인생의 태그가 바뀌더라고요.
관심도 바뀌고요...
관심이 바뀌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추구하는 목표도 바뀌고...
'사람 낚는 어부'를 추구하게 된 거죠.

▲여러분이 모두 다 목사나 선교사가 돼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풀타임으로 목회자가 되거나, 선교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자기 직업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인가? 

그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고유하신 계획에 따라 결정되는 거에요. 
이건 본질적인 게 아니에요. 

풀타임을 하든지, 파트타임을 하든지
태그는 똑같이 '사람 낚는 어부'라는 거죠.
사람들의 영혼 회복에 임팩트를 미치는 사람, 도우는 사람, 제자 키우는 사람!

오늘 여러분을 규정짓고 있는 태그가 무엇입니까?
-물고기 잡는 어부입니까
-사람 낚는 어부입니까?

목회자를 하든지, 사업가를 하든지
여러분의 인생을 규정짓고 있는 태그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주업, 본업이냐는 거죠?

여러분에게 베드로의 그물은 뭡니까? 
혹시 여전히 옛 태그를 달고 계시진 않습니까? 
베드로의 그물을 붙잡고 있는 한, 예수님을 진정 따라갈 수 없습니다. 
회복은 옛 그물을 내려 놓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