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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 이제는 놓자

LNCK 2023. 5. 25. 11:11

경험과 희망, 이제는 놓자!_ - YouTube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 이제는 놓자      민21:1~9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이 꼭 성경적은 아닙니다!

여러분 '경험'의 가치를 역설하는 많은 격언들, 속담들, 명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홍수가 되었을 정도로 '희망'이란 말이
넘쳐납니다.
'희망'이라는 말은, '꿈' '희망' '가능성' '할 수 있다'는 다른 말로 변신하면서
사실은 모든 자기계발서적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여간 '희망'이라는 말이 넘치는 세상이 된 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거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미래의 희망을 향해 가는 것 
이게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근데 이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라 그러면 
이런 보편적 세상 풍조에 대해, 한 번 의심해 봐야 됩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보편성, 본질적인 보편성은 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게 '보편성' 이죠.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이고 광범위한 보편성이 바로 '죄'예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세상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게 '보편적이다' 그러면 
그게 보편적이면 보편적일수록, 깊게 깊게 '죄'와 연관이 되어있고 
'죄'에 뿌리를 받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선민의 삶은, '죄'라는 원초적인 보편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올바른 선민다운 삶을 살게 될 때..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특수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그것이 
원초적인 죄성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들이기 때문에 
거북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과거의 경험에서 미래의 희망을 향하여 가는 
그런 수평적인 움직임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경험에 관한 격언 중에,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런데 선민에겐 이게 통하지가 않아요. 

내가 백번을 봐도, 백번 봤다고 
그곳으로부터 내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어떤 근거를 구축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백번 보는 것보다 
하나님께 한 번 듣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물은 건너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내 보아야 안다'

물은 건너 보아야 압니까? 
홍해바다를 건넜던 사건을 기억하면
과거의 어떤 경험이 홍해바다를 그렇게 건너도록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홍해바다 앞에서는 과거의 모든 경험이 죽습니다. 
홍해바다 앞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갈 뿐입니다. 과거 경험을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지내 보아야 안다'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 그 바로는 과거에 경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미 끝났어요. 

근데 어떻게 그 사람에 대해서, 관계를 하며 자기 할 일을 해 나갑니까? 
과거에 알았던 그 사람을 고려해서, 그 사람에게 맞추어서 관계를 맺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서 
시키시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희망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괴테는 이렇게 말했어요. 
'꿈은 계속 간직하고 있다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
이게 가장 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희망의 의미를 드러내는 명언입니다. 

근데 우리 선민이 계속 마음에 간직해야 될  대상이 뭡니까? 
희망이 아니에요. 하나님이에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앉을 때든지, 서 있을 때든지, 집에 있을 때든지, 나가 있을 때든지 
언제든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을 가르쳐라' 

꿈을 마음에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위한, 경험과 희망의 가치와 중요성을 찬양하는 명언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이 시대에 성도는 누구냐?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을 놔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선민의 삶은, 주님께서 직접 본문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해 주셨어요. 

지금 세상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미래의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은 
땅 지표면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지표면과 수평으로 움직여 가는 겁니다. 그렇죠? 

◑수직으로 올라가는 성도의 삶

근데 성도의 삶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요3:13절에 오늘 본문을 이용하시면서     *본문 민21:1~9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어지는 요3:16절에,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의 요체가 되는 말씀이 나와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주님 자신 외에는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에 머무르고, 하늘을 아는 자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주님만이 하늘을 아신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지금 돈이 필요한데, 
'하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나는 건강이 필요한데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간 자가 나밖에 없다' 하시면서 
'당신 혼자만 하늘에 대해서 알고 있다' 라고 하는 그 사실이 
지금 내 몸에 병이 난 것과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 자식이 일류대학을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주님이 하늘에 계신 것'과 '하늘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계시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그 하늘, 그건 나밖에 모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 중에서는, 
내가 이 땅에 다시 올 그날까지도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그 어떤 인간도 
이 하늘을, 
내가 하늘에 있으면서 경험한 것처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얘기를 왜 하시냐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십니다'  요3:15

다시 말해서 '주님께 믿는다, 주님께 마음을 드리면 영생을 얻는다'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다.. 이겁니다. 

성도 역시.. 주님이 알고 계시는, 주님이 경험하시고, 체득하시고 주님이 계셨던 
그 하늘로 올라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늘은 지금 있다는 겁니다. 내 위에! 
그리고 그 하늘에는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거예요. 

▲근데 그 사이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라는 말씀을 넣습니다. 

하늘을 갖는 자들이,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돈을 잘 벌고, 자녀들이 다 잘 되는 이 일을 
남보다 더 잘하는 자들이 선민이 아니라 

그런 것을 희망으로 삼고 미래를 향해 뛰어가는 자들이 선민이 아니라 
수직으로 하늘로 올라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올라갑니까? 
'뱀을 든 것 같이 들려야 되니' 십자가 사건을 말해요.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부활과 승천이 함께 이어져 있는 사건입니다. 
따로 떼서 십자가만 사건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자꾸 따로 떼서 '십자가가 나를 속죄해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의인이 됐으므로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세상에서 희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능력을 구하면서 달려가면 된다' 이렇게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는 '부활과 승천'과 떼어질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분리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십니까? 
'하늘은 나만이 안다. 그런데 영생이 뭐냐? 
너의 마음이,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늘로 가야 된다. 

이 지상에서 앞에 있는 희망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지금 위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그 하늘로 지금 가야 된다! 

그런데 어떻게 가겠느냐? 
내가 불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처럼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함으로써 
너의 마음이 내가 알고 있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낸다'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은 
과거의 경험을 발로 딛고 토대로 삼아서 
미래의 희망을 향해 좇아가는 게 아니에요. 수평적 움직임이 아니라는 겁니다. 

불뱀 사건이 예표로서 가리키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 마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승천하신 주님의 그 길을 따라 
수직으로 지금 올라가는 것, 지금, 올라가는 거예요.
미래를 향해 가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불뱀의 징계가 내리잖아요. 
이유가 뭐냐면, 
민21: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마음이 상한다'는 얘기는,
짜증낸다, 원망, 분노한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에돔을 우회한다고, 마음이 상해서 원망하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불뱀의 징계를 당하게 됩니다. 

바로 앞에 '므리바 사건' 때는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거 외에는 
사실은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징계가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지독하게 벗어났느냐 하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얼마나 못된 짓거리었느냐 하면, 
불뱀을 보내서, 그 뱀의 독에 죽게 만들어 버리신 겁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자 
그때 잘못을 깨닫고, 모세에게 중보를 부탁하고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쳐들고 
그걸 본 사람마다 살아난다.. 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 구원 받아야 될 인간의 상태, 그건 보편적인 상태 아니겠습니까.  

구원받아야 될 가장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그 상태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거예요. 

보편적인 상태라는 건 
'나도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 농후한...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본문을 보면 재밌어요. 뭐가 재밌냐면 
지금 에돔 땅을 통과하면, 그 팔레스틴 땅을 (요단강 동편에서)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왕의 대로'라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에돔 땅을 통과해서 왕의 대로를 만나면 
가나안 땅으로 접근하기가 너무너무 쉽게 돼요. 길이 너무 평탄해집니다. 

그런데 에돔과의 교섭이 결렬되면서 
에돔 왕이 자기들 나라를 통과하게 해 주지 않으니까 
에돔을 돌아서 멀리 우회해서 갈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그렇게 좋은 길을 놔 두고, 지치고 힘들고 거친 길을 가니까 
백성들에게 분노가 생긴 거예요. 짜증과 원망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게 모세의 잘못, 또한 하나님이 자기들을
잘못 인도하고 계신다고 생각함으로써 생기는... 그런 원망이라는 겁니다. 

근데 그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악했던 건데 
왜 이렇게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었느냐? 

지금 백성들은 지난 38년 동안 광야생활에 적응된 사람들이에요. 
우회한다 그러지만 2~3일 밖에 차이가 안 나요. 

근데 38년을 광야에서 적응됐던 사람들이 
2~3일 정도 여정이 더 연장된다고 한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낼 수 있습니까? 
이건 돌발 사건이에요. 

그걸 하나님은 도저히 용납 못해서 불뱀을 보내신 겁니다. 
뭐가 잘못된 겁니까? 

우리가 읽은 본문 민21:1~3절까지 아랏 족속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한 뒤에, 이제 에돔을 우회해서 길을 걸어갑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승리의 과거 경험이 있고, 그리고 앞에는 가나안이라는 미래가 있습니다. 

'승리'라는 과거의 경험이 밀고, 
'가나안'이라는 미래의 꿈이 당기는 가운데 
마음이 그렇게 과거의 경험에 밀리고, 미래의 희망에 끌려가는 거예요. 

백성들의 마음은 그렇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잘 가고 있는데 
현실은 우회로를 빙 둘러서, 그것도 험한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백성들의 마음이 상해 버려요. 마음이 분노하게 되는 겁니다. 

아랏과의 전쟁의 승리가 이젠 과거가 됐죠.  21:1 
그 아랏과의 승리의 경험이 
이제 그들이 자기들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기준으로 바라보니까, 이 아랏과의 전쟁이 있기 전에는 
'에돔과의 협상이 결렬돼서 우회로를 가야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할 수 없지!' 그렇게 받아들였다가 

아랏과 전쟁을 하고 승리를 하고 나서 
우회로를 걷다 보니까 
은근히 화가 치미는 거예요. 

에돔이 우리의 청을 거절하고 협상이 결렬이 되었으면 
아랏과 싸워서 이긴 것처럼, 그렇게 에돔을 무력으로 무찌르고 
에돔을 관통해서 왕의 대로 king's highway 로 직접 도달했어야지 
왜 우리가 우회로를 지금 걸으며, 이렇게 고생을 하느냐? 이겁니다. 

과거의 경험, 승리했던 경험이, 현재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마음이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미래의 가나안도 
이 아랏 족속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확신이 생기면서, 미래의 가나안을 취하고 싶은 마음의 조급함이 더해집니다. 

자신이 있으니까, 가질 수 있다고 확신이 되니까! 
싸워보니까 별거 아니에요. 우리가 이겼어요. 
그러니까 가나안에 대한 조급함이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터져버리고 만 거예요. '이럴 수는 없다. 에돔과 정면 승부를 했어야지!'
(에돔과 정면승부 않고 우회한 것은, 하나님 지시를 따른 것이었죠)

'그래서 왕의 대로를 갔으면, 지금 이미 가나안 입구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이게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면서 
자기 마음을 힘들게 사는 거예요. 그저 이렇게 괴로운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어제까지의 경험은 죽어야 돼요. 
그리고 내일 이룰 미래에 대해서도 죽어야 돼요

어제까지의 모든 경험이 
내 마음에서 백지가 되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의 경험이, 내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이미 인격체이시며, 모든 판단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이 내 마음에 간직이 되면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은 그 즉시 끝이 나버리고 맙니다. 
이게 무서운 일인 거예요. 
그런데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나갈 때 
하나님의 의도의 그 계획, 그림은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럼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을 향하기만 합니다. 모든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만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충만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세를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 모세를 보면서, 모세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을 보는 거예요. 
가나안 땅을 보는 게 아니에요. 

구름 기둥이 인도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래에 살게 될 땅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거고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모든 여정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광야의 여정을 그렇게 디자인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놓쳐버리는 거예요. 이게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죄예요.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 때문에!)

불뱀 사건을 보세요. 
놋뱀을 드니까 놋뱀을 본 자마다 삽니다. 
놋뱀을 본다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놋뱀을 나와 동일시 하라는 거예요. 무슨 얘기입니까? 
'내 인격 안에는 뱀의 독이 퍼져 있다'는 걸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걸 깨달으라는 얘기입니다

뱀의 독이 퍼져 있음으로써 내 인격에 나타나는 현상이 뭡니까? 결과가 뭡니까? 
놋뱀이 바로 나예요. 내 안에 놋뱀이 들어있어요. 뱀의 독이 퍼져 있어요. 

그 퍼져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 뱀의 유전자가 드러나는 거예요. 
뱀의 유전자가 뭡니까? 뱀은 길다란 몸으로 땅을 기어다닙니다. 
땅의 지표를 기준으로 바라볼 때, 배를 땅에 붙이고 
이 지표 위를 수평으로 움직여갑니다. 우에서 좌로, 좌에서 우로 나갑니다. 
항상 수평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마귀에 의해서 타락된 이후에,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난 일이 뭐냐면,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수평으로 움직여 가는 겁니다. 
항상 과거의 경험은 출발점이 되고, 미래의 꿈은 목표점이 됩니다. 
항상 땅의 일만 생각하고 추구합니다. 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게 불뱀의 독이 퍼져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과거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미래의 희망을 향해 나가는 것, 
이 수평적인 삶을 위해 
모든 서점의 자기계발 책들이 다 그것을 찬양하고 있고 
모든 지식인과 모든 대문호와 모든 철학자들이 
희망의 가치와 경험의 가치를 노래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 희망의 가치를 향해 부르는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경험의 가치에 대해서 수긍하고 
수평적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뱀이라고 하는 것은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은 거지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신 이유는 
'너희의 인격 속에 잠재되어 있던 본래의 독성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 독에 감염되고 중독되어진 결과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놋뱀을 보면서 '내 인격은 뱀의 유전자가 있다'는 걸 인정하라는 겁니다. 
뱀의 유전자가 뭐예요? 
내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마음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앞으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수평 운동을 
본질적으로 좋아하고, 편애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여 
그대로 살려고 하는 죄적인 기질, 뱀의 독이 
내 인격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가 다 연결돼서 움직이는 수평운동만 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죄라는 걸 알아야 
이것을 끊어내고, 위로, 수직적으로 길을 내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내가 죄사함 받았다. 나는 의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님 이 땅에서 들어주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부활과 승천과 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했으면 
반드시 내 마음이 수직적으로 하늘로 올라가 버려야 되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출발)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제까지 내가 빚을 졌다, 빚쟁이다.. 그러면 
십자가를 붙잡고 빚쟁이라는 의식 자체가 백지화가 되는 겁니다. 
백지화가 된 상태라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미 내 마음에 그려져 있는 많은 세상의 문제와 경험적 지식들이 있는 한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생각이 아무리 내게 주어져도 
이미 내 판단과 내 생각의 글씨가 있으면.. 알아볼 수가 없으니까.. 
글씨 위에 글씨를 쓰면 알아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백지상태로 만나면 
하나님이, 
내가 빚진 것도 아시고, 앞으로 나가야 될 길도 계획하고 다 아세요. 

원래 계획했던 것을,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내 멋대로 사느라고 
빚을 져가지고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그 목표지점을 향해서 가려면 
이 빚진 상태로부터는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 .. 그걸 하나님이 다 아세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제까지 살았던 일의 결과와 성과와 성취 
그 모든 것들을 다 십자가에서 백지화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왜냐면 그것이 있으면 조급해지고, 그것이 짜증나고 원망이 나는데, 
그것을 불뱀을 보내서 물게 할 정도로.. 하나님은 싫어하시는 거예요. 

'왜 이 수평선상에서 일어날 앞날의 꿈을, 나보다 더 좋아하시느냐?'
이것을 하나님은 납득을 못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이 지구 위에서 70~80년 사는 동안에 이루고 싶은 일을 
영원한 생명의 근원인신 나보다 더 너희들이 좋아할 수 있는가? 
라는 걸 이해를 못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래서 불뱀을 보내시는 겁니다. 
주님이 장대에 달린 놋뱀과 당신을 일치시키십니다. 이유는 뭐예요? 
수직으로! 
마음이 지금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선민의 삶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마음이 수직으로 올라간 그들에게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당신의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겁니다. 

우리의 일은 
늘 지금 마음을 수직으로 하나님께 보내는... 
수평 운동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수평 운동을 정면으로 잘라내고
그 수직으로 세워진 십자가에서, 내 마음을 하늘의 하나님께 보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선민으로서 이 땅에서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전부예요.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 
이제는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십자가를 붙잡기 위해 동시에 놔버려야 될 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