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진짜 복음, 진짜 예수, 진짜 회복"에 대한 주제를 2020년에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통해서 '진짜 예수가 이 땅 가운데 오셨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일이 성령님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지금까지도 똑같이 재현되는 것이, 복음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는, 2000년 전에 오셨던 바로 그분이시고 또 저와 여러분이 하고 있는 신앙 생활은 2000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일어났던 일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똑같이 재현되는 삶을 믿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때 신앙과, 오늘날 신앙이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그때 예수가 다르고, 지금 예수가 다른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날 똑같이 재현될 수 있는 역사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올해 저희가 가지고 있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마가복음을 살펴보면서 '그럼 2000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초반에는 "5가지 회복과 2가지 충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고 했는데 이제까지 5가지 회복의 내용들을 쭉 살펴봤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열병, 문둥병자, 중풍병자, 세리) 그런데 회복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충돌도 동시에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은, 첫 번째 충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충돌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오늘날은 한 공동체 안에서도, 심지어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가지 역사(회복과 충돌)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안에 정말 예수를 대면하게 되면 회복도 일어나지만, 동시에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들이 있다는 거예요.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죄성들, 또 죄 때문에 형성된 삶의 습관들, 죄가 만들어낸 가치관들... 이런 것들은요 진짜 예수 앞에 서게 되면, 격렬히 저항을 합니다.
예수 앞에 저항을 하면서,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충돌을 잘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이 충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들, 그 얘기는 뭐냐면,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의식이 없었을 거예요.
그것이 죄 때문에 내 삶이 바로 막히고 있고, 죄 때문에 내 삶 가운데 풀어져야 될 축복들이 막히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텐데
진짜 복음을 대면하게 되면, 인식하지 못했던 그런 부분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저희가 이 셀 사역을 하면서 기대하는 것 중에 하나도 그런 거예요.
그 전까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좀 더 깊이 있는 관계들로 들어가면서 우리 안에 있던 그 죄성들, 자기중심적인 생각들, 자기중심적인 판단들, 자기중심적인 가치관들... 이런 것들이 드러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드러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싫어요. 고통스럽고, 인정하기 싫고, '나한텐 그런 거 없다'고 시침이 떼고 싶고... 그런 마음들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그 문제를 회피해서는 우리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드러나는 문제들은 부서져야 돼요. 다시 묻어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부서져야 돼요. 도망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부서져야 돼요.
그 드러나는 문제들이 복음 앞에서 부서져야 돼요. 그것이 뭐냐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던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부인해야 될 것들이.. 부인되어지고 부서져야 될 것들이.. 부서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됐을 때, 이 복음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는 걸 가로막고 있던 장벽들이 부서지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의 비를 내려주시려고 해도 이런 막이 쳐져있어가지고 다 가로막고 있으면 아무것도 우리에게 흘러들어오지 못하잖아요. 이 막들이 다 깨지고 부서져야 돼요.
다 부서지면,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충만한 복들이 우리 삶을 촉촉히 적실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2020년에는, 부서질 것들이 부서지는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안에 변화되어야 될 것들이 변화되는... 그게 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고통을 뛰어넘어서, 부서져야 될 것들이 부서지고 내 안에 근본적인 것들이 변화되는 그런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본론 : 충돌의 시작
자 예수님이 오셨는데, 놀라운 회복과 함께.. 회복의 현장이었어요. 그 현장에서 이 회복을 불편해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죠? 종교 지도자들이었어요.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 또 뒤에 가보면 사두개인들.. 이런 종교지도자들이 불편해했습니다.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것이 참 독특합니다. 이 사람들은 군인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종교지도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이 하는 구원과 회복의 일들이 불편했습니다. 왜 불편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들의 종교적인 기준이 있고 룰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종교적인 기준과 룰을 자꾸 깨시는 거에요. 자꾸 깨면서 들어오는 거에요.
이 사람들은 금식해야 되는 때가 정해져 있었거든요. 근데 예수님은 그 룰을 깨시는 거예요. 바리새인들도 금식하고 있고, 심지어 세례요한과 제자들도 다 금식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금식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편한 거죠. '이들은 도대체 뭐냐?'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지금 기대하면서 따라가고 있는데 '이게 정말 맞는 사람들이냐?' 이런 의심들이 들기 시작하겠죠.
나중에는 안식일도 또 깹니다. 안식일은 어떻게 보면 유대인들이 모든 율법 중에 제일 까다롭고 철저하게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게 안식일 법이거든요.
많은 율법들이 깨졌는데도 불구하고, 깨졌다기보다는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두 가지는 굉장히 까다롭게 지금까지 지킵니다. 그게 뭐냐면 '안식일 법'이고, 또 하나는 '정결 음식법(코셔)' 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보신 분들은 혹시 경험하셨나 모르겠는데 아침에 식당에 가잖아요. 그러면 고기하고 우유가 같이 나오지 않습니다. 고기만 나오든지, 우유만 나오든지 합니다. 왜냐면 율법에 보면 '어미의 젖(우유)에 새끼(고기)를 삶지 말라' 그랬기 때문이죠. 이걸 적용해서, 우유하고 고기를 함께 먹지 않아요. 버거에 치즈가 없어요.
자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예수께서 오셔서 그 까다롭게 지키고 있는 안식일의 관습들을 깨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들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와 그 제자들이 참 불편했고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냐면 '이게 도대체 뭔가?' '룰 브레이커' 즉 룰을 계속 깨는 그런 반항아처럼 보였던 거죠.
근데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과연 예수님이 그런 성품이셨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룰을 깨시는 룰브레이커가 아니십니다.
그분의 성품을 보면, 반골도 아니고요. 당연히 반항아도 아니셨어요. 굉장히 온유하시고, 또 어떻게 보면 굉장히 질서가 잡힌 삶을 사셨고 그분이 하셨던 사역 가운데도 굉장히 질서가 잘 잡혀 있었지, 막 어수선하게 아무 룰도 없이 돌아다니는 떠돌이 나그네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종교 지도자들 눈에는 예수께서 질서를 깨시는 룰 브레이커, 또는 반항아로 보였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룰을 깨시는 분이 아니라, 룰을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기존의 룰이 있는데, 이게 잘못된 룰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잘못된 것을, 진짜라고 믿고 계속 가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리에 기초한, 정말 정확한 새로운 룰들을 다시 세우세요.
그러면 이 사람들 눈에는, 기존의 룰을 깨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룰을 깨시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뭐예요? 새로운 룰을 세우시는 게 목적이시죠.
이 관점을 잘 유지하십시오! 예수께서는 룰을 깨시는 분이 아니에요. 새로운 룰을 세우시는 분이세요.
같은 맥락으로 성령께서 오셨을 때, 성령의 아주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뭐냐면, "새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편해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본문입니다.
막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유명한 얘기죠. 바리새인들과 종교인들이 '너희가 지금 새 포도주가 왔는데, 옛 부대에 담으려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이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대한 얘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새 일을 시작하시는 예수님
올해 저희가 기대하는 말씀이 "진짜 예수, 진짜 복음"인데, 진짜 예수께서 역사하시면 뭐가 일어나냐면.. 새로운 바람이 입니다.
이게 '새 포도주'예요. 그래서 이 새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어떤 중요한 속성이에요. 그 속성 중에 하나는 뭐냐면 '새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에요.
하나님께 가장 먼저 붙여졌던 하나님의 별칭이 뭔지 아세요? 그건 바로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제일 먼저 나오는 하나님의 호칭이 뭐냐면 '창조자'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창조하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이 속성이 없으면, 천국은 여러분 붕괴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영원한 시간이 있는데, 그 영원한 시간을 계속해서 이끌어 갈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 없으면, 그 영원한 시간 동안 뭐 할 거에요?
시간이 끝나지 않고 계속 있는 '영원'을 뛰어넘는 창조의 능력이 없으면, 그 영원이라는 시간을 핸들하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세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붙었던 별칭이 뭐냐면 '창조의 하나님'이신 거예요.
천국은 여러분, 절대로 지루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다 모르죠.
그리고 어떤 사람도 '천국은 이런 곳이야!' 그리고 완전하게 천국을 설명한 사람도 없어요.
무한한 시간이 있는데, 그 무한한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란 말이죠. 천국은 지금도 계속 창조되고 있고, 영원히 새롭게 창조되고 있어요. 무한한 창조가 없으면, 무한한 시간을 우리가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중에 하나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예수께서 오셨을 때도 새 일을 행하셨는데, 성령님도 똑같으세요.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삶 가운데 오시면, 새 일을 행하세요.
사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항상 하나님이 오시고, 성령이 임하시면, 항상 새 일이 일어납니다.
과거에 부흥이 일어났던 때의 역사를 조사해 보세요. 항상 부흥이 일어나면, 항상 새 일이 나타났어요. 그 전에 했던 것을 그대로 하는 부흥이라는 건 없어요.
항상 부흥이 일어나면, 여러 형태에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요. 사역의 방법도 새 일이 일어나고 우리의 예배를 표현하는 방식도 새롭게 되고 여러 부분에서 새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새 일은, 우리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새 일 이에요. 우리 마음 가운데 새로운 일들을 하신다는 거에요. 우리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거에요.
그래서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십니다' 사43:19 이것은 꼭 조직이나 사역 등 외적인 얘기가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대한 얘기에요.
광야와 사막은.. 물이 없고 말라서 딱딱해진 마음을 말하죠. 생명이 없는 상태를 말하죠. 이게 오래 된 마음이라는 거에요. 이 광야 같은 마음에 새롭게 물(새 포도주)이 흐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이게 본문에서 얘기하는 새 포도주예요.
성령께서 오시면 새 포도주가 부어진다는 거예요. 포도주는, 생명과 기쁨의 상징입니다. 항상 성경에서는 생명과 기쁨의 상징인데 새 포도주가 부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이렇게 메말라 있고, 드라이해져 있고 기쁨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그러던 삶 가운데 다시 강이 흐르기 시작하는... 다시 기쁨과 다시 잔치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새 포도주가 부어진다는 거에요. 이게 성령께서 오실 때 행하시는 새 일입니다.
▲그래서 부흥이라고 얘기할 때 이 부흥은 많은 경우에, 어떤 외적인 모습과 숫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얘기예요.
그래서 부흥을 묘사하는 또 다른 단어가 영적각성이에요. Awakening, Revival 영적각성, 부흥.. 이게 다 같은 말인데 영적각성이 (부흥보다) 조금 더 이해가 더 좋은 표현인것 같아요.
우리 마음이 각성하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마음이 이렇게 사막처럼, 광야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 마음이 각성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거기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는 거죠. 새 포도주가 부어지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시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새 일을 시작하시는 건 줄 믿습니다.
그래서 2020년도에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새 포도주가 넘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새 일이 시작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가정 가운데, 셀 가운데, 또 사업 가운데, 일터 가운데.. 새 일이 시작될지어다! 새 포도주가 부어질지어다!
이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기쁨의 일들이 시작될지어다! 우리 마음을 흥분하게 하고, 기대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그 새 일들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실 줄 믿습니다.
◑새 부대를 준비해야
그런데 이 일을 경험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담아내려면, 새 부대가 준비돼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부어지실 때, 새 부대가 준비된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내서 누리는 것이고 새 부대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다 흩어져서 없어져 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잠깐 성령의 역사가 반짝하고 5분, 30분 이러고는 다 흩어져서 없어져 버린다는 거에요. 왜? 부대가 터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 성령께서 오셨을 때 진짜 복음과 진짜 예수의 역사가 있을 때 새 포도주, 즉 새로운 회복과 새로운 성령의 역사가 있는데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부대를 준비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새 부대"는 어떤 걸까요? 새 포도주가.. 우리 마음과 우리 영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라면 새 부대는.. 그것을 담아내는 어떤 외형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표현되는 행동방식일 수도 있고 -교회 구조일 수도 있고 -사역일 수도 있고 -교회 전통일 수도 있고 -교회 조직일 수도 있고 하여간 성령의 역사를 담아내는 어떤 외적인 것들이.. 부대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문화'와 깊게 연결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볼게요.
옛날에 중세 유럽에서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정말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마음이 시작되면,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에, 꽃을 한 송이 들고 창가에 가지요. 창가에 가서 조그만 돌을 톡톡 던집니다. 유리창을 두드리죠.
그래서 그 여인이 문을 열면, 노래를 부르는 거죠.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릅니다. 이게 중세 때 했던 방식이에요.
근데 오늘날은 '부대'가 달라졌죠. 일단 창문이 너무 높아요. 뭐 아파트 고층에 사는 사람을, 어떻게 잔 돌을 던져서 불러내겠어요?
요즘은 어떻게 할까요? 모르긴 몰라도 페북에다 뭘 남긴다든지 SNS에 무슨 이모티콘을 보낸다든지 하겠지요.
젊은이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죠. 그러나 그것을 담아내는 부대는, 시대마다 다르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우리 윗세대 선배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면 피아노나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거룩한 찬송가 hymn 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 분들은, 속마음들이 그 찬송가에 녹아들어가는 거 같아요. 그 당시에 '부대'는 찬송가 hymn 였어요.
그런데 젊은 세대는, 피아노나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는 감흥이 없다는 거예요. 이들은 힙합을 듣고, 드럼을 두드립니다. 드럼과 베이스의 강한 비트 소리에 맞춰서 랩을 쏘아댈 때 자기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해요. 이게 그들의 '새 부대'이지요.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세대들에게는 드럼과 베이스, 강한 비트, 랩...이게 알아 먹을 수도 없는.. 심하면 사탄의 소리로 들려요.
사탄의 음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저건 영적인 건 아니야, 그냥 전형적인 세속 음악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애들이, 외쳐대는 치기 어린 소리일 뿐이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도 한국교회 안에, 이런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있어요.
남미 문화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과 동양 유교문화권에서 표현하는 방식이 같을 수가 없죠.
감사를 표현할 때, 남미 사람들을 보면, 정말 깨방정을 떨면서 감사를 표시하는데 우리 같은 유교문화권에서 자란 양반의 나라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놈들은 이상한 놈들, 근본 없는 놈들'로 보이죠.
우리는 감사를 표현할 때, 말을 많이 안 하고 그냥 속 깊은 마음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진심을 표현하죠. 그러면서 이심전심 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남미 사람들은 '이심전심' 이런 것은, 절대 이해 못합니다. 반드시 말이나 몸으로 표현되는 것만, 저들은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마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문화마다, 세대마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세대는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어야만 은혜 받는 세대가 있죠.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조금 연세 드신 분들이 우리 교회 오셔서 예배를 힘들어하시는 것은, 이해를 해드려야 돼요. 그걸 또 '옛 부대'라고 비난하면 안 되는 거죠.
▲새 포도주 담기 위해서는 새부대가 필요합니다. 옛부대는 새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새포도주 담기엔 너무 낡았고, 굳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옛부대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옛부대는 여러분, 사탄도 아니고, 잘못 된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믿음의 싸움을 해 오셨던 그 선한 싸움들의 유업이고, 그 증거들이고, 우리의 자산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리스펙트는 해야 돼요. 옛부대에 대한 정리가 잘 안 되어 있으면, 쉽게 정죄할 수 있죠. '우린 새부대인데, 저들은 옛부대야!'
▲이게 마치 뭐와 똑같은가 하면, 이런 거예요. <전쟁기념관>에 가보시면, 625 때 사용했던 탱크,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죠.
그럼 그거 볼 때 무슨 느낌이 들어요? '아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저런 무기를 가지고 정말 피흘려서 싸웠구나!'하고 감사와 존경이 나오지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저 탱크와 저 비행기를 가지고 싸울 수는 없지요. 우리 시대는 다른 무기를 쓰니까요. 정확히 이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 탱크와 비행기를 보면서 '아이고 미련하게 저런 걸 가지고 싸우나? 저런 걸 갖고 싸우니까 안 되지' 하고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옛날 세대가 해왔던 신앙의 옛부대들에 대해서는 굉장한 리스펙트를 해야 됩니다.
그 '부대'를 가지고 오늘날 여기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온 거거든요. 그 탱크 하고 비행기를 가지고 여기까지 싸워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의 유업을 주신 거잖아요. 아주 큰 리스펙트 가 있어야 돼요.
그러나 동시에 그 무기로 우리가 사용할 수는 없어요. 그 무기로 우리가 지금 사용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우리 세대에 사용하는 다른 무기들이 있는 거죠.
▲그렇다면 새 부대는 뭘까요? 그것은 지금 이곳에서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담아낼 무엇입니다. "지금, 이 곳"이란 게 중요해요.
10년 전의 것도 말고, 외국 다른 나라 말고, '지금 이곳'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들을 가장 잘 표현하고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이, 우리가 준비해야 될 '새 부대'입니다.
우리가 옛부대를 존중하면서도, 새부대를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됩니다.
2020년도, 올해 저희 교회가 이제 개척한지 20년 됐잖아요. 20년이 되고 나니까, 이 부대의 위기들이 조금씩 느껴져요.
특별히 저희 교회에 오래 계셨던 분들은 대화 중에 이런 대화들이 가끔씩 나와요. '누가 글쎄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 분위기에서 이게 말이 됩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20년이 지나니까, 우리 교회 나름대로의 어떤 문화나 전통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 어긋나는, 엇박자인 어떤 새로운 질서가 출현했다는 거에요.
이럴 때는 제가 '영적으로 굳어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해 오던 방식이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좋은데, '굳어져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죠.
여러분, 굳어지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성령님의 새 역사를 담아낼 수가 없어요.
성령님은 뭔가 새로운 일을 하시려고 하시는데 우리가 이미 딱 Fix 시켜버려 가지고서 그 역사가 아닌 건 전부 다 내쳐버리려 하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뭔가 새로운 일을 하시려고 해도 기존에 있었던 (예를 들면) '삼각형' 이외에는 절대로 다른 게 교회 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거에요. '사각형'도 못 들어오고, '별 모양'도 못 들어오고...
근데 이게 성령의 새로운 역사, 새창조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거죠. 성령은 항상 새로운 새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이끌어오신 하나님의 역사가 더 파워풀하게 앞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 안에 정말 예리한 영적인 분별력들이 있어야 될 것 같아요.
무조건 질서를 깨부시는 것도 길이 아니고 그렇다고 이것을 딱딱한 옛 부대를 계속 고집하는 것도 그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는 성령의 역사를 담아낼 수 없어요.
새 일을 행하신다고 하는 것이 보이면, 우리 안에 과감하게 부대를 바꿔야 돼요. 새 일을 행하시는 게 보인다 그러면 과감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든 룰들, 형식들, 방식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10년 뒤에 우리가 뭐가 돼있을지 몰라요.
중략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하시는 새 일들을 기대합시다. 사람의 힘으로 계속 해가는 일들 말고, 성령께서 계속 새 일들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고, 그분이 일하실 자리들을 내어 드립시다. 즉 새 부대를 준비합시다.
즉 성령께서 뭔가 새로운 일을 행하시면 그 모양대로 그대로 틀과 룰을 만들고 그렇게 따라가야 돼요.
성령께서 매일마다 모양을 바꾸지는 않아요. 제가 경험해 보니까 그게 적어도 한 5년, 10년 정도의 긴 기간이 있어요.
성령께서는 무엇인가를 인스턴트로 탁 만드시고 또 다음날에는 새로은 것을 인스턴트로 탁 만드시고.. 이렇게 하시진 않죠.
보통 성령의 역사는, 이게 보통 한 세대 정도는 지속돼요. 짧게는 십 년, 길게는 삼십년 정도 간단 말이죠.
그래서 위험이 언제 찾아오냐면, 항상 한 세대가 지나면 위험이 찾아와요. 짧게는 십 년, 길게는 삼십 년... 항상 거기서 위기가 찾아와요.
짧게는 십 년, 길게는 삼십 년! 저희가 딱 개척한지 이십 년 됐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의 부대들을 돌아봐야 될 때입니다. 우리가 '헌 부대, 옛 부대'가 되지 않았나... 돌아봐야 될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부대들을 돌아봐야 될 때입니다. 리더들도 그렇고, 사역자들도 그렇고.. 우리 전부 다 잘 들으세요.
전통이나 익숙한 방식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룰들은 다 폐기하십시오 그 룰들을 왜 지켜야 되는지가 명확한 것만 붙잡읍시다.
◑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새 부대'에 해당하는 문화적 표현은 뭘까요?
제가 얼마 전에 미국 목사님 한 분이 Old wineskin과 New wineskin 즉 옛부대와 새부대를 비교해 놓은 글을 읽어봤는데, 소개해 드릴게요.
▲1. Beg / Declare? 애걸하느냐 / 선포하느냐? 옛부대는, 기도할 때 주로 애걸하면서 빈다는 거에요.
'간절히 기도하오니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게 제가 어렸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할머니들의 기도였어요.
그런데 새롭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조금 더 담대하라는 거에요. 이미 우리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까 애걸하지 말고, 그냥 믿음으로 담대하게 선포하라는 거예요.
이건 여러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간~절히, 불~쌍히'가 틀렸고 어리석었다는게 아니고 그냥 그 시대의 표현 방식인 거에요.
만약 그 시대 분들한테 '담대히 선포하십시오' 이랬으면.. 못했을 거예요. 왜 못하느냐면, 이분들은 여러분 봉건사회(조선시대) 끝 무렵에 살았던 분들이거든요.
그 당시에는 평민의 태도는 뭐냐면, 왕 앞에 나아갈 때는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하고 그 다음에 얘기를 시작하는 거에요.
일단 왕 앞에 나가면 기본이 뭐냐면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이어서 '오늘 처리하셔야 될 안건은...' 이게 기본적인 태도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왕에게 담대하게 선포하라' 이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대통령한테 나아간다고 해도, 우리 젊은이들 보면, 그냥 담대하게 나가요. 귀에 헤드폰 꽂고 음악 들으면서 나가는 친구도 있어요. 그리고 할 말 있어도, 담대하게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예배인도자, 찬양인도자가 앞에서 기도할 때, 요즘 젊은이들은 '선포하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이때 이전 세대 사람들은 다소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지만 (이것도 틀리지 않고, 저것도 틀리지 않지만) 요즘 새 부대의 방식은, 애걸하는 기도가 아니라, 선포하는 기도라는 거죠.
그렇게 할 때 오히려 우리의 영이 더 깨어나고,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그렇게 할 때 오히려 더 신앙에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러므로 새로운 기도의 방식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을 넓게 열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거죠. 무조건 '옛 부대, 옛 방식이 좋다'고 고집하지 말고요.
▲2. Pray hard / Pray believing 열심히 기도 / 믿음으로 기도
기도에 대한 옛 패러다임은 '지성이면 감천'처럼 열심히 기도하는 거죠. 열심히 정성껏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관념이 저변에 깔려 있었죠.
기도에 대한 새 패러다임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현실적 관점, 3차원의 세계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많고, 내 삶을 보더라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많지만,
영원적 관점, 또는 4차원의 세계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들이 많습니다. 그 이미 이루어진 일들을, 믿음으로 내 삶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기도의 새 패러다임이죠.
▲3. Many words / Few words 말이 많은 / 말이 적은 이거는 조금 조심스럽게 들으셔야 되는데 말 많은 사람은 다 옛부대 라는 뜻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면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느니라'
여러분, 성령으로 일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이 많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앞서 가시면서 일하세요.
굳이 내가 그걸 다 설명할 필요도 없고 굳이 내가 나를 변호할 필요도 없고...
그냥 성령께서 일하실 때 보면, 그냥 성령께서 앞으로 쭉쭉쭉 나가세요. 굳이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것 따라가면 되고 오해를 받고 공격을 받아도, 그걸 내가 다 방어하고 디펜스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일 따라가기 바쁘고, 오해나 이런 것들은 그냥 하나님께서 지지해주시고, 풀어주시고... 그러면서 풀어가는 거에요.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말이 많아져요. 혼으로 일을 끌고 가려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말이 많아져죠. 다 설명하고, 설득해야 되고, 안 하겠다는 사람들 끌어들여야 되고... 오해하는 사람을 설득시키려 하다보면 말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때 그 얘기를 한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많은게, 아니고 능력에 있다'
옛부대는, 성령의 역사가 그쳤는데, 시스템만 남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말로 꾸려 나가는 거죠.
근데 새부대는 성령께서 새 일을 행하시는 거죠. 이 때는 말이 많을 필요가 없죠.
▲4. Reactive / Proactive 뒷북 / 사전예방적 이건 단어가 좀 어려운데, 후행적 뒷북 / 선행적 앞서감.. 제가 번역한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새부대는 성령의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인데, 일이 벌어지면, 벌어진 일에 대한 리액션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하나님이 하실 일들에 대한 확신때문에 먼저 선행적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이게 영적 각성이 시들해지고, 교회가 시스템이 되고 종교가 되면 항상 문제에 대한 '사후 처방 방식'으로 일이 진행됩니다.
비전과 소망속에서 새 일이 막 촉진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하던 사역을 현상유지, 매니지먼트 하게 돼요. 그 말이 Reactive, 즉 리액션, 뒷북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일들에 대해서 현상유지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면 더 이상 새로운 일들을 일으키지 않아요.
더 이상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던 일들을 계속 매니지 해요.
그러다가 뭔가 문제가 생기고 펑크가 나면 '이거 큰일났네' 그러면서 땜빵을 해요.
그 땜빵하는 과정 가운데서 조금 사이즈가 줄어요. 그래서 안정되면 또 매니지먼트를 해요.
뭔가 계속 Proactive하게 선제적으로 새로운 일들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냥 기존에 해 오던 일들을, 그저 관리를 해 나간다는 거예요. 현상유지에 몰두하는 거죠. 현상유지만 해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계속 사이즈가 줄면서.. 결국 소멸되어가죠.
이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에요. 새부대, 새포도주로 일하는 방식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관리자가 아니라 촉진자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촉진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일들을 계속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새부대의 역사는, 계속 하나님의 새로운 일들이 일으켜지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촉진자란, 그냥 비전만 있어가지고 디테일없이 그냥 둥둥둥 떠다니는 허무맹랑한 사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비전만 있고 디테일이 없는 사람은, 일을 촉진시키지도 못해요. 거기에는 디테일한 일들이 있어야 되고 아주 구체적인 헌신이 들어가야 돼죠.
사람은 두 종류가 한 사람은요. -한 사람은, 맡겨 놓으면 관리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셀을 맡아도 그렇고, 행정사역을 맡아도 그렇고, 청소년부를 맡아도 관리에만 끝나는 사람이 있어요.
한 달란트 맡은 사람처럼, 원금보전에만 충실할 수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죠.
-또 한 사람은, 계속 Proactive 하게 일합니다.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새로운 일들을 계속 좇아가는 겁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새로운 일들이 펑펑 터지고 있는데, 그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계속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새부대'인 거죠.
관리자로 사는 일에 만족하지 마세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부어지지 않아요. 관리자가 아니라, 계속 새 일들을 일으키는 촉진자가 돼야 돼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성령이 일으키시는 새 일을 따라가는 자가 돼야 돼요.
▲5. Talk about porblems / Talk to the problems 문제에 대해 말함 / 문제를 향해 말함
옛부대는, 계속 문제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거죠.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우리는 큰 일 났다'
새부대는, 문제를 향해서 얘기하죠. '멈춰라, 해결될지어다, 끊어질지어다!' 문제를 향해서 기도 한다는 거에요.
전자는, 문제를 놓고, 사람들에 대한 정죄와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의논을 하더라도, '그 사람 떄문이야, 그 인간 때문이야' 이렇게 정죄로 의논을 마치게 됩니다. 옛 부대인 거죠.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그냥 함께 의논한다고 시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함께 기도할 때, 문제가 더 쉽게 해결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문제 가지고 회의 많이 해봐야... 별 열매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오히려 책임추구와 정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6. Stop devil and curses / Release God and blessing 옛부대는 영적 전쟁이라 하면서, 마귀를 꾸짖고 저주를 끊고 막 이런다는 거죠. 그런데 사실 이렇게 부정적인 거에 계속 집중하다 보면, 과하면 사람이 부정적이 돼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계속 마귀를 대적하고 뭐 저주를 끊고 그게 필요하긴 하죠. 성경에서 하라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메인으로, 주로 그렇게 해서는 곤란하고 메인으로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하나님의 승리와 축복들 이런 것들을 계속 풀어놓는 쪽으로 가야, 우리 영이 눌리지 않아요.
근데 안 그러면 계속 영이 눌려요. 계속 영이 눌리고 부정적인 사람이 돼죠.
여러분이 같은 어둠을 향해서 기도할 때도 '어둠아 물러가라!'만 하는 것과 '빛이 오시옵소서!'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같이 선포하는 것이 좋습니다.
▲7. Focus mainly on problems / Focus on testimonies and promises 문제에만 집중하지 말고, 약속과 간증에 집중해라!
이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가진 문제를 집중해서 보는 것과 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문제를 보기 시작하면 사실 문제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부정적인 면을 바라보면 끝이 없어요.
그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그 사람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뭔가? 그 간증들을 보고, 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라는 겁니다. 그랬을 때 그 사람이 소중해지고, 희망이 보입니다.
이 패러다임을 좀 바꿔야 돼요. 계속 우리는 안되는 부분들에 집중해서 자꾸 고치려고 하지 말고 결국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자동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 계속 그걸 가지고 이제 접근하자는 거죠.
특별히 우리 셀에서 지체들을 향해서 볼 때 그 사람의 해결 안 되는 힘든 문제들을 봐야 돼요. 볼 필요가 있는데, 그래도 메인이 그것만 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옛 부대
그 형제의 장점들, 간증들, 또 하나님이 그 형제를 통해 행하실 소망들.. 그래야 그가 귀해 보이죠. *새 부대
그렇지 않고 계속 문제만 보고 있으면 셀 모임에 나갈 때마다 치가 떨리지 않겠어요?
▲8. Mostly asking / Mostly thanking 기도가 계속 '이거 주십시오' 하는 기도와 *옛 부대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의 차이가 있다는 거에요. *새 부대
▲9. God is reluctant or hindered / God is good and has won the victory 부담스러운 하나님 / 좋으신 하나님
내가 만나기 부담스러운, 주저되는 하나님이냐 / 좋으신 하나님이냐?
▲10. Uncomfortable with silence / values soaking prayer 하나님의 침묵이 부담스럽다 / 새 부대는 기도에 푹 빠진다.
성령이 임하실 때, 보통 정적 가운데서 임하신다고 하죠. 예배시간이나 집회 때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면, 순간 고요한 침묵에 휩싸이죠. 그걸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옛 언약이고, 그걸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새 언약입니다.
▲11. Worship prepares for prayer / Worship is prayer 찬양은 예배의 준비단계 / 찬양이 예배
오늘날은 이런 '옛 부대'를 극복한 교회들이 많죠.
▲12. Fasting is an event / Fasting is a lifestyle 행사로서의 금식 / 일상생활로서의 금식
▲13. Burdened / Joyful 의무감이냐 / 기쁨이냐
옛부대의 특징은 의무감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새부대의 특징은 기쁨이라는 거죠.
우리 선배 세대 신앙의 특징은 의무감과 책임감에서 나오는 눈물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그 세대의 특징이었죠.
그래서 선교대회 같은 거 가 보면, 옛날에는 항상 눈물을 짰어요. 선교사님들이 고생 엄청하고, 막 죽을 고비 넘기고 이러면, 회중들은 막 울면서 은혜 받았어요.
그런데 선교도, 의무감도 있겠지만 메인은 기쁨이죠! 이게 새 부대의 흐름이라는 거죠.
▲14. Laughing is rare / Laughing is frequent 엄숙하다 / 웃음이 많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엄숙함도 필요하지만, 메인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이죠. 뭐든 일변도가 되면 안 되지만.
▲15. Focus on duties on prayer / Seek the depths of God 의무적인 기도 / 하나님을 앎
▲16. Expect spiritual attacks / Expect blessings and protection 영적인 공격을 기대하느냐 / 영적인 축복을 기대하느냐
옛부대는, 계속 마귀가 나를 공격할까? 이런 두려움가운데 있다는 거에요. 새부대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을 기대한다는 거죠.
예수님이 세 포도주와 새부대를 말씀하실 때 정확히 흐름이 이랬어요.
계속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고 기쁨에 대한 말씀을 하셨죠. 이게 뭐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식어가잖아요. 그럼 우리 마음이, 계속 어떤 의무감과, 종교와, 무거움에 이렇게 묶여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거에요.
그런데 성령의 새역사가 시작되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기쁨과, 은혜와, 감동과... 그걸 위에서 디테일하게 16가지, 어느 미국 목사님이 설명했죠.
새부대는, 항상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감동되고, 감격스럽고, 은혜고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간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