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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

LNCK 2023. 6. 12. 09:26

달리다굼 [마가복음15] -  - YouTube

◈달리다굼            막15:21~43       

※본문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러 가는 상황에서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두 사건이 겹쳐 나옵니다. 그래서 아래 설교도, 두 사건을 다 다룹니다.

본문에 보시면 절박한 상황에 있었던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병으로 죽어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통받아온 이름 모를 여인 입니다. 

아버지들에게 딸이라는 존재는 특별합니다. 그렇죠. 
아버지들을 보면 '딸바보'라 그러죠. 

저는 참 불행하게도 아들 둘밖에 없어서, 
딸을 가진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는데 
제 주위에 딸 가지신 분들을 보면, 그 마음이 굉장히 특별하세요. 
막 딸만 보면 어쩔 줄을 모르세요. 

제가 일전에 큰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를 만나서 '기분이 어떠세요?' 
물어보면, 대부분 기분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서운해 하십니다.

아버지들에게 딸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고 
또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 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딸은 야이로 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보물이고, 소망이고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이, 이 미래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마 인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삶의 소망이 꺼져갑니다. 

(※그래서 '야이로의 딸'을, '소망'으로 이 설교에서 해석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삶의 소망이 꺼져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큰 두려움이고, 큰 공포죠. 

여러 종류의 '야이로의 딸들'(소망)을 만나게 됩니다. 
-건강에 위기가 오기도 하고 
-또 소중하게 생각했던 꿈이 깨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부르심을 받아 죽기도 하고 
-시험에 떨어지기도 하고 
-직장이나 사업에 위기가 오기도 합니다. 

이게 우리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야이로의 딸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예수님의 진가를 경험하게 되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행복할 때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의 진가를 경험하게 되는 때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때입니다. 
내 인생의 소망이 죽어가는 때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모든 것이 잘 나가고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일 때, 
그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도,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이 잘 나가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신 적이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발견하기로는 없었던 것 같아요.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찾아가셨던 사람들은 
병든 자, 세리, 죄인, 창기, 절박한 사람, 소망이 끊어진 사람, 손 마른 자, 
손가락질 받는 실패자, 딸이 죽어가는 야이로...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셨지 
완전하고 완벽하고 잘나가는 사람을 찾아가셨다는 기록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들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러분, 사람이 예수님의 진가를 경험하게 되는 때는 
삶의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고, 모든 것이 잘 나갈 때가 아니라는 거에요. 

예수님의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때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 바로 그때가 예수를 만날 때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 그때는 예수앞으로 나아가야 될 때입니다. 

물론 뭐 삶에 문제가 없고, 평안하고 그럴 때는 감사해야 될 때지요. 
그것이 저주는 아니니까 감사해야 될 때지만 

반대로 우리 삶 가운데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는 어떡할 거냐는 거에요. 
평온하고 뭐 잘될 때는 감사하면 되는데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 또는 야이로의 딸(인생의 소망)이 이미 죽었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할 거냐는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이 포인트 입니다. 
삶이 평안하고 행복할 때는 당연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넘어지고 실수할 때는 언제냐면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입니다.

이때는 여러분, 예수의 진가를 발견할 때인데 
이때 사람들이 해야 될 일은, 예수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뭐냐면, 예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가운데서, 예수의 진가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나에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겼고, 내가 얼마나 기도 했고, 
내가 얼마나 봉사했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만난 사람 중에, 절반 이상은 그렇게 반응해요. 
처음에는 잘 견디는 것 같아도,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그 마음에서 쓴뿌리들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니요! 여러분, 그렇게 해서는 예수의 진가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진짜 여러분 삶 가운데 복음의 진가, 예수님의 진가를 경험하게 원하신다면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 그때 원망하지 마시고, 
예수 앞에 나아가셔야 됩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위기가 있으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소망이 좌절되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은 원망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앞으로 나아가 있어야 될 때입니다. 
예수의 진가를 경험할 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한 명의 절박한 영혼이 예수께 찾아나옵니다. 
12 년을 혈루병으로 고생한 여인이었습니다. 

자 율법에 의하면, 혈루병은, 나병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병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부정한 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수가 없었고, 
몸이 닿으면 안 되고, 사람을 만지면 안 되고... 

그래서 눈치보고 살아야 되고, 또 숨어 다녀야 되는 그런 질병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았다는 영적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고 ()
-또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스트레스, 위축감, 긴장, 좌절... 
  이 편하지 못한 거죠. 
-거기다가 육체의 고통까지. 
이렇게 영,혼,육이 다 고통스러운 질병이 혈루병이었습니다. 부정한 병이죠. 
                                                                        (앞서 유출병과 현상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질병이 12년이 됐다는 거에요. 오래됐다는 거에요. 
이 여인이 별의별 짓을 다 해봤을 겁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봤을 것이고요.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을 것입니다. 

막5: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12년된 혈루병(피가 밖으로 흐르는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우리 인생의 해결 안 되는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 돼요. 
용하다는 사람을 다 만나봤는데 해결이 안 돼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12년 된 혈루병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요. 많은 의사들,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이 없는 것 뿐만이 아니라, 괴로움만 더합니다.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이렇게 하면 될거야, 저렇게 하면 될거야'  그래도 안 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쓸데없는 얘기만 합니다. 
'혹시 해결 안 된 문제(죄)가 있는 거 아니냐?'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까요, '봐라 네가 회개 안 한 죄가 있으니까 
12 년 동안 고생한 거다' 이렇게 말씀 안 하셨거든요. 
많은 문제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책임(죄)이 없는 문제들도 많단 말이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찾아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오히려 괴로움만 더하게 됐습니다. :26

이 여인은 12 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돈도 다 썼습니다. 
이제 지쳤습니다. 더 이상 해볼 것도 없어요. '이대로 끝인가?' 

그런데 이때, 이 절망의 순간에, 소망의 소문이 들립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신다는 거에요.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이 분에게 나가보자!'
'그런데 어떻게 나아가지?' 

예수님 주변에 보니까요. 사람들이 바글바글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떠밀려 다녔다'고 얘기하는 거 보니까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밀려 다니셨던 것 같아요. 

△20년 전에 제가, 아프리카의 유명한 치유사역자가 온다는 
그 사람이 사도행전 이후로 최고로 병자를 많이 고쳤다는 소문이 난 분이었어요. 

이 분이 한국에 오셨고, 스타디움을 빌려서 집회를 했는데,
그래서 제가 이제 궁금해가지고 가봤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인가?' 

거기서 밀려죽을 뻔했어요. 진짜 떠밀려 죽을 뻔했어요. 
불치병 걸린 사람들.. 어디 이제 소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그냥 메고, 업고, 들것에 실어서 왔는데요. 
'야 예수님 때 이랬겠구나' 
그냥 떠밀려서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고... 
그 커다란 스타디움이 꽉 찼어요. 

꽉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란 말이에요. 
그 당시에는 무슨 병원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어디가 봐야 고침 받을 데도 없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전혀 (고침의) 소망없는 사람들이 그냥 예수의 손길 한번 바라면서 
다 몰려와 있었어요. 

여인은 '내가 과연 거기를 어떻게 다가가지? 
어떻게 예수님 옆에 나아가지?' 
도무지 방법이 없어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여인이 다시 생각합니다. 
'그래 어차피 나 같은 거를 알아주실 리도 없고, 
몰래 다가가서 어떻게든지 옷에 손이라도 한번 대보자' 

그래서 이 여인이 몰래 예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지나가는 예수님의 옷을 만집니다. 

5:27~28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뭐에요? 병이 나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은 혈루병이 나았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진가는 뭐냐 하면 
예수께 나오면, 모든 불가능들이 가능으로 바뀐다는 거에요. 

예수께 나오면, 예수님의 진가는 뭐냐하면, 병을 고치신다는 거에요. 
12년 된 혈루병이 상징하는 게 뭐라 그랬어요? 
'우리 인생에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 
예수 앞에 나왔을 때 해결하신다'는 것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게 예수의 진가 인줄로 믿습니다. 

세상 무엇으로도 해결 못할 것 처럼 보였던 문제가, 예수께 나왔더니 해결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앞에 나오십시오! 

야이로 의 딸도, 혈루병 걸린 여인도 
예수께 나왔을 때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구원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로 나올 때, 꼭 기억하고 주의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앞에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이 태도가 중요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 앞으로 나오는 야이로 와 혈루병 여인에게는 
공통된 특징, 공통된 태도가 있었습니다. 

▲1. 첫번째 태도는 뭐냐면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경외하는 마음이란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예수 앞에 나올 때는, 그 앞에 두렵고 떨리는,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와야 됩니다.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발 아래 엎드렸고요. 
혈루병 여인도 두려워 떨며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 이들 안에는 뭐가 있었냐면, 경건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부정적인 두려움 말고요. 

예수님의 존재로 인해서 두렵고 떨리는.. 경건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거에요. 
'이분 앞에 내가 서도 괜찮을까? 예수님 앞에 내가 나가도 괜찮을까?' 
그런 경건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이시거든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 왕 앞에 나아갈 때도
왕 앞에 나간다고 해서 모든 상소가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경외함 없이 왕 앞에 나가서, 왕을 막 대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건 왕 앞에 나가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재난이 될 겁니다. 

그분은 창조주세요. 그분은 왕이세요. 
어떤 문제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그분 앞에 나갈 때는, 올바른 마음의 태도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왕으로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외함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필요한 태도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혈루병여인도 그렇고, 야이로도 그렇고요. 

예수께서 이들을 귀하게 보셨던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뭐냐하면 겸손이에요. 

'나는 하나님 앞에 자격이 없어' 하는 이 겸손.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 앞에 나올 때 교만한 태도로 나오지 않았어요. 

또 혈루병 여인은 어떻습니까? 
'나는 그냥 예수님 뒤로 가서 몰래 손만 대도 감지덕지야' 
자기 안에 '나는 예수님앞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어' 
라는 겸손함이 있었다는 거에요. 이 겸손함을 예수께서 귀하게 보셨습니다.

많은 경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태도가 너무 당당해요. 
마치 빚받으러 가는 사람 같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지지 않으셨다 

뭔가를 하나 요청합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셔야만 될 것처럼..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한 것뿐이고, 그냥 죽어 마땅한 존재란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은혜 때문에 들어주시죠.
은혜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권리는 아니라는 거에요. 
근데 마치 우리가 기도할 때, 마지 빚독촉 하는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은혜를 붙잡고 나가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겸손에서부터 나오는 거에요. 

'나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가 아니야, 나는 죄인이야,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자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 
내 권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야' 

이 인식이 있을 때, 우리는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겸손함이 있고, 이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그것은 은혜고, 
혹시 들어주지 않으셔도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거라고' 인식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반대로 인식해요. 
들어주셔야 당연한 것이고, 
들어주지 않으시면 하나님께 삐져요. 

이런 태도는 여러분 정말 적반하장이에요.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슨 뭐 빚진 거 있으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뭐 맡겨둔 것이 없잖아요. 

그냥 우리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고 
우리는 그냥 가만히 두면 지옥에 가야 되는 존재에요. 

지옥에 가기 위해서 뭐 특별한 일을 해야 됩니까? 아니요. 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태어난 그대로 가만히 계시면 돼요. 그럼 지옥에 갑니다. 

그게 원래 디폴트 란 말이에요.   *최초 설정 값
우리의 디폴트 는, 뭘 열심히 하고 잘못해야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 그냥 내 주제입니다.

이 주제 파악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경험하게 돼요. 
하나님께서, 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 적은 없어요. 
성경에 보니까,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은, 겸손한 자들에게 가 있고,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은. 비천한 자들에게 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정말 예수의 진가를 경험하게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높은 곳에 두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을 낮은 곳에 두세요. 
그럼 하나님의 마음도 그곳으로 따라 움직이세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안 해주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요, 해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겁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세 번째로 요구되는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예수께 나아갈때는 
그분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요구됩니다. 

5:34 '예수께서 (혈루병 여인에게)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 사람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믿음'이었어요.

위 세 가지 태도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입니다. 
자 그런데 이 태도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신데 
이 구원은, 단순히 병이 낫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본문 막5:30~3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자 여러분, 이 여자가 금방 혈루병이 나았어요. 문제는 방금 해결되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이 여인을 보시려고 찾으셨다'는 거에요. 

만약 병이 낫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목적은 이미 다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목적이 다 이루어졌다고 보지 않으셨어요. 

예수께서는 병이 낫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 말고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여인을 찾아서 보시려고 '무리를 둘러보셨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이 여인이 누군지 아시기 원하셨던 거에요. 
그것이 예수님의 더 깊은 목적이었다는 거에요. 

물론 병을 고쳐주시는것도, 예수님의 구원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게 예수님의 구원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거에요. 

예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이시고 
예수 앞에 나아갈 때 구원을 주시는 분이세요. 

그런데 이 구원은, 영과 혼과 육이 다 회복되는 것이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의 치료, 
단순히 밖으로 보이는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혼육의 전인적 구원을 의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찾아서 보셨다는 거에요. 
눈을 맞추어 보셨다는 거에요. 

그 긍휼의 눈빛을 이 여인이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셨다는 거에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기 원하셨다는 거에요. 

이 영적인 회복이, 구원의 진짜 본질이에요. 
이 구원의 본질 위에,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가 임하고, 
그 위에 육체의 질병이 해결되는 거에요. 

영혼육이 함께 구원받는, 전 인격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서 34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세가지를 동시에 얘기하십니다. 

1) '구원하였으니' .. 이것은 영에 대한 얘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다는 거에요. 
전혀 하나님을 모르던 자가,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됐다는 거에요. 
예수께서도 이 여인의 눈을 맞추셨다는 거에요. 영의 구원입니다.

우리 영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거에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평안이 가라!' 평안이 뭐에요? 우리 마음에 임하는 거에요. 

2) 이 여인의 마음가운데는 늘상 뭐가 있었어요? 긴장, 초조, 스트레스, 위축감..
왜냐하면 사람들한테 들키면 안 되거든요. 
'부정한 병'이라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께서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평강, 즉 우리 혼을 구원하세요. 

3) 그리고 나서 '건강할지어다' 
우리 육신의 병을 고치십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회복인 줄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 '야이로의 딸(소망)'이 죽어가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구원받아야 될 때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소망이 죽어가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회복돼야 될 때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문제의 회복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우리 인간의 고통에 가장 근원적인 문제, 
우리의 영이 죽어버린,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끊어져 버린 사람에게 
이 구원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할지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의 구원이 끊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것이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참된 구원인 줄 믿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영혼의 구원과 병의 치료를 둘 다 포함합니다)

◑혈루병 여인과 대화하는 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거에요. 이제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다 끝났습니다. 더이상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 

맞아요. 여러분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생각하셨어요. 

마지막으로 살펴볼 주제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시다'는 거에요. 
요11장에도 보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사흘을 더 유하세요. 사흘을 더 기다리세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좀 도와주시지, 왜 꼭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나?
왜 꼭 소망이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일 때까지 기다리시나?' 

왜 그러실까요? 우리가 자세히는 몰라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세요. 

그래서 어떤 것들은 정말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요구하시냐면, 믿음을 요구하세요.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을 요구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세요.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그분은 우주의 창조자 이시고,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시고,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세요. 

우리와 다르세요. 그래서 어떨때 보면 
예수께서는 우리 소망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또는 죽은 것처럼 보일 때까지 기다리세요. 

우리 삶에도 그런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부르짖고 그러는데 
중간에 사람들이 '야이로여,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경험한단 말이에요.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 상황가운데 있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라' 

혹시 여러분의 소망이 죽어가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야이로의 딸'(소망)이 죽어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을 들으셔야 될 때에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라!' 

보이는 현실, 그 절망이 실체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실체인가? 
이 믿음 앞에 대면해서 서야되는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어요. 
보이는 현실과 예수 그리스도, 무엇이 여러분에게 더 실체이십니까? 

보이는 현실과 예수 그리스도,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더 진짜 이십니까? 
이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거예요. 

결국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38~40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들어가서, 들어가사' 라는 단어를 잘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 들어가시고, 아이에게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이 떠들고 심히 통곡하고 웁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셨어요. 
얼마나 다르셨는지...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말도 안 돼! 야이로의 딸이 죽은 이 슬픔, 절망, 이 현실, 
이 슬픔과 절망의 현실속으로 지금 누가 들어오신 거에요? 
예수께서 들어오신 거에요. 

슬픔과 절망이 지배하고 있는 야이로의 집안으로 누가 들어오신 거에요?
예수께서 들어오신 거에요. 이 예수가 어떤 분이십니까?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라는 거에요. 
생명 그 자체 시라는 거에요. 

고후5:4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야이로의 집은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어요. 

죽음이 가져온 그 결과,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안으로 지금 누가 들어오시는 거에요? 생명이 들어오시는 거에요. 
그 안으로 지금 누가 들어오시는 거에요? 소망이 들어오시는 거에요. 

이 생명과 소망이 들어올 때,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다.' 소망을 선포하십니다. 
'슬퍼하지 마라'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선포하십니다. 

왜요? 절망을 삼키는 분, 죽음을 삼키는 분,
소망이신 분, 생명이신 분이 들어오셨다는 거에요. 
이분이 여러분의 인생가운데 들어오신다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수많은 '죽은 야이로의 딸' 앞에 서게 됩니다. 
즉 수많은 문제들을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직시하게 되고, 만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슬픔가운데 있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우리 인생가운데 누가 들어오시는지를 봐야 된다는 거에요.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왜 슬퍼했고, 예수께서는 왜 슬퍼하지 않으셨습니까? 
보는게 달랐어요. 보는게 달랐어요.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만 직시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계셨어요. 

그게 뭐죠?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을 보고 계시는 거에요.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을 보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가운데는, 끊임없는 슬픔과 절망을 일으키는 일들이 
매일 벌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매일 벌어집니다. 

그때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겁니까? 
그 현실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해답이 나옵니까? 

아니요, 혈루병 여인은 12 년을 바라봤지만 해답이 없었어요. 
거기를 바라봐서는 해답이 나오지 않아요. 

예수의 진가를 만나야 돼요. 예수의 진가를 만나야 돼요! 
절대 평강을 주시는 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생명으로 뒤엎으시는 분!
이분을 바라보셔야 돼요. 

야이로의 집안으로 지금 생명이 걸어들어와요. 
야이로 의 집안으로 지금 소망이 걸어들어와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둠과 절망으로 짓눌려있는 집이에요.
여러분 가장 사랑하는 딸이 죽었는데,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거기에 무슨 빛이 있겠어요?

깜깜한 어둠과 절망으로 완전히 완전히 짓이겨진, 완전히 짓눌려진 
완전히 사로잡힌 그 집 안으로 
지금 예수께서 한발 한발 걸어 들어오시는 거에요. 

생명이신 분, 소망이신 분,
그분이 한 발 한 발 그 안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거에요. 
그리고 선포하시는 거예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것이다!' 
이렇게 소망을 선포하시는 거에요. 생명을 선포하시는 거에요.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현실을 바라봤던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어요. 
그러나 믿음과 경외함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봤던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했어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현실을 바라보는 현실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41~42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드디어 예수께서 이 사망의 본질에, 어둠과 절망의 본질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이 소녀의 손을 붙잡고 위대한 선포를 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할렐루야 

죽어버린 야이로의 딸을 향해서, 죽어버린 소망을 향해서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의심하고 있는 우리 심령 가운데 
큰 소리로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나의 아들과 딸들아 일어나라!' 
'달리다굼, 교회여 일어나라!' 

이 달리다굼은 믿음이 실체가 되는 소리에요. 
여러분 맞아요. 믿음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듣게 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다굼 입니다. 

잘 기억하세요. 믿음으로 예수 앞에 나오게 되는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듣게 되는 소리가 있어요. 
그것은 '달리다굼' 이라는 예수님의 소리에요. *달리다(소녀야)+쿰(일어나라)

무슨 소리? 우리의 믿음이 실체가 되는 소리, 믿음이 실체가 되는 소리! 
이 소리를 듣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절망이 끝나는 소리,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소리,
'달리다굼!'

일어나라 나의 자녀들이여!
일어나라 교회여!
사망과 절망속에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 달리다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