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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삶에 십자가 적용하기

LNCK 2023. 6. 22. 10:43

실제 삶에 십자가 적용하기_ - YouTube

◈실제 삶에 십자가 적용하기             갈6:1~4          2014.01.13.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즉 율법주의적 생각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들어와서 
갈라디아 교회의 신앙에 혼선을 빚어서 
지금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지 않았습니까. 

이제 갈6장, 갈라디아서의 막바지에 달하면서 
이제까지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썼던 모든 그 권면과 나무람과 교훈들을 
총망라해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 갈라디아서가 마쳐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그 내용을 보면, 십자가를 구체적으로 삶의 적용하는 것에 관한 
권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6:1절 해석

갈6: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범죄한 일'은, 헬라어로 파라프토마티 입니다.   주1)
그 뜻은 '주위로 떨어지는' 거예요. 
있어야 하는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있어야만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떨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근무이탈, 신분이탈, 지위이탈,
공무원으로서 도저히 가서는 안 될 곳에 간다든지 
또 장관의 신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든지.. 이게 지위이탈 이죠.
이런 것들이 바로 본문의 '범죄한 것'입니다.

근데 결국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도출해내면
'범죄한 것'이란
즉 기독교인의 근무이탈, 기독교인의 신분이탈, 기독교인의 지위이탈인데
그게 뭐겠습니까? 한 마디로 이거죠. ↙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니까 "마음이 십자가에서 벗어난 상태"가 
바로 갈6:1의 '범죄한 일'인 거죠.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모든 행위와 상황들이 있잖아요. 
'내가 요번에 꼭 승진하고 싶다' 
'우리 자식을 잘 길러봐야 되겠다' 

이게 뭐 나쁜 생각이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근데 이런 모든 정상적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생각들이 
마음이 십자가를 벗어나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거라면 
다 있어야 될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고 
'범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6:1    

참 어려워요.
근데 사실은 여러분이 이 세상 일에 마음을 쓰는 일 보다, 
내가 십자가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훨씬 쉬워요. 

내 마음을 써서.. 내 마음을 쓰는 만큼 
일을 이루어내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예를 들면, '사업을 한 번 잘 해야 되겠다, 돈 한번 많이 벌어 봐야 되겠다'
그거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돈이 안 벌립니다. 그러면 미쳐 버려요. (어렵죠)

근데 그냥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겁니다. (쉬워요)
이게 신분 이탈, 지위 이탈 하지 않는 거고, 근무 이탈하지 않는 거고,

그러니까 직장을 가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라 이거에요. 한번 해 보세요. 
그냥 십자가를 마음에 기억하고 있으면서 '나는 죽었다' 생각하는 거예요. 갈2:20

죽은 자로 산다는 것을, 여러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 스스로 터득을 하세요. 십자가 만을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성과를 올려야 되겠다
-회장님께 인정 받아야 되겠다
이게 만약 십자가 근무지를 떠난 생각과 노력이라면
이게 다 '범죄한 일'이라는 거예요. 

모든 일에 십자가를 기억하라는 얘기죠. 
내가 십자가에 머물고 있지 않은 상태라면,
그게 무슨 일이든지.. 모든 악행을 다 저지를 수가 있고요, '범죄한 일'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6:8절에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라는 
말씀도 이해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그러면
꼭 무슨 계명을 어기고,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롬14:23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그랬어요. 

믿음이 뭐죠? 
'내 마음 심장을 꺼내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라틴어 '크레도' I believe

근데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내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릴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십자가에 내 마음이 매달려 있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게 
죄 라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을 따라 하지 않은 모든 게 죄' 라는 말과 일맥상통하죠. 


'성령을 위해 심는다'는 게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성령을 위해 심습니까? 

모든 삶의 순간에, 성령의 활동이 나타나야 돼요. 
이거 꼭 목회하는 목사님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에요.

장로님들이 맨날 기도하실 때 '우리 목사님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사'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어야 될 분들은, 꼭 목사님 뿐만이 아닙니다. 

직장인들도 마찬가지고, 장사하는 분들도 마찬가지고,
성령을 위해 심어야 되는 거에요.  갈6:8

돈을 위해 심지 마시고, 승진을 위해 심지 마시고, 
성과를 위해 심지 마시고, 회장님께 잘 보이려고 심지 마시고, 
성령을 위해 심으세요. 

성령을 위해 심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어요. 
그냥 내 마음이 십자가에 매 순간마다 매달려 있는 것이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이고 

내가 지금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왔는가? 
펄펄 살아 가지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가지고 
이 생각 저 생각, 이 계획 저 계획, 이 소원 저 소원을 갖고 있는가?
확인해 보시면 돼요.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지 않고) 내려오면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 내 소원을 갖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내가 주체적으로 염려 근심 하고 있습니다. 이거를 돌아보라는 얘기예요. 

그게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기억 하십시다. 인류 문명의 5대 발상지가 있잖아요. 
인류문명의 발상지에서 발생하고 번영을 이룬 모든 문명이 
하늘나라의 화폐로 시가 0원입니다. 

지금 뭐 과학이 발달하고 달나라에 왔다 갔다 하고 
엄청나게 발전했잖아요.. 천국의 화폐 가치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가짜예요. 
인류문명, 역사.. 다 가짜예요. 
세종대왕의 업적도 하늘나라에서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그게 모두 가치가 거의 제로 라는 사실이, 반드시 느껴질 날이 올 거예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게 다 가짜로 판명날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찬란한 문명이 발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계시느냐? 

왜 그렇습니까? 그게 바로 테스트예요. 
그럴듯하게 보이는 문명과 문화 속에서 
'그것 말고 하나님을 선택하겠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육체를 따라 살아 갈 때, 모두가 다 멋지고, 화려하고, 굉장하게 보입니다.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십시오! 
인류 문명에 대해 죽으시고 
인류 역사에 대해 죽으시고 
이 세상에서 발전하고 있는 문화에 대해서 죽으시고 
유행에 대해 죽으십시오.

인생에 기쁨을 제거하자는 겁니까? 
만족을 없애자는 겁니까? 
금욕하자는 겁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함에 있어서.. 절제하지 마세요. 
낭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 기뻐하세요. 

하나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는 것.. 그게 진짜이고, 
이 세상에 문명과 문화가 그럴듯하게 보이고 있는 거.. 다 가짜예요. 

TV를 한번 보세요. 거기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다 가짜의 삶을 사는 거에요. 

대통령, 장관, 재벌총수.. 하나님과 연결된 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만약 안 보이면.. 아무 의미 없는 자리인 거예요. 

본문 1절에, 십자가를 생활 속에 적용하는 것,
이게 적용되지 않을 때 범죄라 그랬어요. 
마음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게 범죄이에요. 

◑6:2절 해석

근데 2절에 '서로 짐을 지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라' 
'서로 짐을 지라'는 말씀을 우리가 많이 듣죠. 어떻게 하면 서로 짐을 집니까? 

'짐'이라는 게 생활의 짐, 삶의 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짐을 질까요?
이거 십자가가 아니면 못 져요. 

자, 십자가가 공통분모인 사람들끼리 
서로 짐을 지라는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갈3:1절을 꼭 기억하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의 눈에 밝히 보이거늘' 
항상 눈에 밝히 보여야 돼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서로 짐을 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기해요 여러분, 굉장히 신기해요. 
예를 들어서, 아빠 4명이 함께 등산을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각자 자기 차를 몰고 왔습니다. 

만남의 장소에서 만나서 
차 한 대에 트렁크를 열고 
네 명의 배낭을 다 그 차의 트렁크에 실어요. 
그리고 몸만 승용차 안에 타지요.

이 상태가 바로 '어떻게 남의 짐을 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 십자가를 공통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요. 
그러면 십자가 얘기를 하게 됩니다. 

뭐 저는 사람을 만나서, 십자가 얘기를 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 얘기를 하게 되면, 십자가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생활의 짐들을 다 트렁크 안에 집어 넣고 있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네 사람이 차 안에 타면서 등산하기 위해서 갈 때 
차 안에서 뒤에 있는 '짐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를 이야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가 공통적으로 생활화되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십자가 얘기를 먼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내 생활의 짐으로부터 내 마음이 빠져나오고 
왜냐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내가 죽으니까요. 

서로서로에게 십자가를 확인시켜 주면서 
각자 생활의 짐들이 다 떨어져 나옵니다. 각자의 마음에서부터. 

그래서 네 사람의 마음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네 사람에게 은혜가 충만하게 있네요. 하늘의 은혜가 임합니다. 
'아, 아버지만 계시면 된다' 라는 것을 
십자가 생활화를 조금 미흡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하늘 아버지만 계시면 돼지!' 라고 확신으로 다시 거듭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이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에 생활에 대한 안부를 서로 묻게 됩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김 집사님이 안고 있었던 생활의 짐이 얘기가 돼요. 
근데 그 짐에 대해서, 박집사님에게 생각이 떠오르면서 
박집사 님이 그 짐에 대한 성격 분석을 해줍니다. 

근데 그 얘기를 듣다 보니까, 김 집사님이 
그토록 무거웠던 생활의 짐이 전혀 무겁지 않게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내 짐, 네 짐이 없어져 버려요.
내 마음이 내 생활의 짐에서 다 빠져나오고 나니까 
김 집사, 박 집사, 최 집사, 장 집사님의 짐이 한데 묶이면서 
이 모든 짐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서 
그 삶의 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아무한테나 막 주어집니다. 
예측불허로 다 나눠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박집사는, 자기 생활의 짐에 대한 답은 못 얻어도
장집사의 짐에 대한 답은 떠오르는 거에요. 그 지혜가 떠오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거에요.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법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2
'형제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 집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박집사를 통해 알려 질 때.. 이게 형제사랑이 되어버리죠. 
이게 서로서로 나타나는 거죠.

네 명이 십자가를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게 될 때 
삶은 한 군데로 모아지고 
한 군데로 모아진 삶을 하나님께서 한 주먹으로 쥐시면서 
거기서 필요한대로 지혜를 주시는데 

이 지혜가 사방팔방에서 나한테 주어지고 
나를 통해서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가고, 
(피차 권면하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필요하다 그러면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아니면 함께 어디를 동행해 준다든지 하면서 
짐을 지는 일에 동참하는 거죠.


저는 그런 경험을 자주 해요. 
여러분들이, 제가 사는 강릉에 한번 가끔씩 내려 오잖아요. 
만나서 여러분과 대화를 하다 보면, 꼭 이 순서를 따르게 돼요.

근데 너무 힘들어 하시던 분들이 
제가 하는 말 아니면 
다른 분들이 하는 말들을 통해서 
그 무겁게 납덩이처럼 내리누르던 마음의 짐들이 
깃털처럼 가벼워 지는 걸 느낍니다.

정말 신기해요 여러분, 지옥이 한 순간에 천국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통이고, 모든 것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어쩌면 그렇게 신기하게도, 머리털 하나 만큼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형통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통하심과 은혜와 사랑이
오차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그동안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너무너무 지옥처럼 살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십자가를 생활화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모이는 자리에서 
모두가 다 함께 하나님께로 마음이 가요. 

그 다음에 모든 짐들이 하나님의 손에 한꺼번에 놓이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막 전달이 됩니다. (서로 가르치죠)

그러면서 형제사랑, 이웃사랑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형제사랑, 이웃사랑이 완성되는 겁니다.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6:6절, 이런 점에서 '말씀을 배우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말씀을 전하는 사도바울, 베드로 같은 사도들은 따로 직업이 없잖아요. 
말씀 전하러 돌아다니느라고. 

이분들과 공통점은 십자가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거예요. 

이럴 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삶의 형편과 
나의 삶의 형편을 한 손으로 쥐시면서 

내 삶의 형편에서 갈 수 있는 것 중에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쌀이나 고구마가 많이 있다면, *농사짓는 분들인 경우
고구마를 그냥 사도바울에게 먹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고구마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사도바울 간의 관계로 끝나잖아요. 

근데 김집사를 통해서 사도바울을 먹이면 
김집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고구마 먹고 살고, 
김집사도 이웃을 사랑한다는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고 
그러니까 하늘에서도 기뻐하고, 모두가 기뻐하게 되는 거죠.

이거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6: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이 구절 해석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아무 것'이 뭡니까?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 장가가고 시집만 가도 
벌써 남편 되고, 아내 되는 거 아닙니까? 뭔가 되는 거잖아요. 
근데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는 말을, 어떻게 누구한테 대놓고 할 수 있겠나요?

반대로 '아무 것이라도 된' 거는 뭐예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뭐가 된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서 
내게 유익하던 모든 걸 배설물로 버렸다는 사도 바울이 
'아무 것'이 된 거고요. 

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 서서 
자기는 이 세상적으로 정말 아무것도 이루거나, 갖고 있는 게 없으면서도
'여러분이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죠. 말하자면 이게 '아무 것'이 된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못 박힌 사람이.. '아무 것이 된 것'입니다. *something

반대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뭡니까?  *nothing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와도 
내가 계획하고, 내가 소원하고, 내가 행동해도 
여러분 얼마든지 부귀영화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게 다 '아무 것도 되지 않은 거'죠.

중국의 황제들의 부귀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도 
지금도 아마 중국의 주석은 예수님을 모를 거예요. 
그래도 그 사람에게 그럼 관직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겁니다. 

신천지가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가 주어질 수도 있어요.
근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반대로, 뭐가 '아무 것' 입니까?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임하셔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것, 
그것만이 아무 것입니다. somthing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홍해가 갈라진 것, 얼마나 굉장합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 얼마나 굉장합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런데 참새 한 마리가 살아 있는 걸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키우시는구나' 라고 느끼면서 
참새 한 마리에서 발견되는 하나님도,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세요. 

그러므로 누가 믿음이 큰 사람이냐? 
작은 일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내는 그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랑할 게 자기에게만 있다'는 게 무슨 얘기냐면 :4
사람들 눈에 내보일 만한 큰 일은 하나도 없어도 
참새 한 마리 먹이시는 것 같은 작은 일,
즉 내가 먹고 사는 일 것같은 작은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가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서 삶면서 활동 하고 계시는 것을 
확인할 때, '나 스스로 나에게 자랑하라' 이겁니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하는 일이 
그것이 바로 something 이고, 그것이 바로 '아무 것'이고 (대단한 일이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이 밖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의 삶에 들어와서 참여하시지 않고 
그와 하나가 되지 않으신 상태에서 

주님이 밖에 계시면서 허락하셔서 높은 자리에 오른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재벌 된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nothing 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3

이게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요?
그러면 신앙의 고수가 된 겁니다. 

미국에 큰 교회에 사람들이 성공주의를 추구하며 많이 모여드는 것,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보입니까? 그러면 당신은 대가가 되어가는 거에요.
일부 그런 교회는, 복음이 참으로 역사하지 않아도, 사람이 몇 만명 되는 거죠.
미국만 아니라, 전세계가 다 그렇죠.
우리나라도 신천지, 통일교.. 다 그렇게 된 거예요. 

교인 3명을 데리고 목회를 해도, 교인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 
그래서 그 세 사람 모두가 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사는, 
십자가를 생활화 하는 삶의 적용 단계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참 목회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룬 것입니다. 

◑6:4절 해석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고 살 때 
모든 작은 일에서, 하나님이 밝히 보이는 거예요.
그때 나 스스로에게 내가 자랑하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계시구나' 

남에게 보이면, 사람들이 우스워할 거예요.
'그까짓 일이 무슨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고 있다고 그러느냐?'
그래서 남에게 내보일 필요가 없죠. 그게 4절입니다.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근데 너무너무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발견하는 그 사람이 
진짜 복음을 내 것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핑계가 없는 바울 (tistory.com)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유혹하더냐?' 3:1 
기억하시고 생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실제 삶에 적용함으로서 
삶의 모든 순간에 신비한 경험들로 가득 찰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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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무슨 범죄한 일' 갈6:1 

'범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프토마티'는    *파라프토마
문자적으로 '넘어지다', '따로 떨어지다'등의 의미로 
'타락하다'라는 개념을포함한다.

위 설교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것'도, 광범위하게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죄가 아니라
본절의 '범죄'는 어떤 유혹에 의하여 부지중에 저질러진 '실수'나 '허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파라프토마티'가 무지와 연약함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이라 할지라도 
범죄에 대한 책임마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의 책임을 나누어 질 것을 권고한다. 6:2 

한편 바울이 본절에서 '범법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파라바테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취급하고자하는 범죄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이거나 육신의 약함을 인하여 범한 것임을 시사한다.

같은 단어가 쓰인 다른 구절을 찾아보면,

마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  trespasses 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의 죄  trespasses)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보통 죄를 하마르티아 sin 라고 하는데,
'이것은 과녁에 못 미친 것'을 뜻하며

그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잘못(마6:14) 허물(엡2:1)은  trespasses '더 멀리 나간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