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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기기 힘든 세 고비

LNCK 2023. 6. 25. 12:59


◈넘기기 힘든 세 고비         막7:24~30       스크랩, 정리

▲사람마다 견디기 힘든 고비가 종종 있습니다. 
보통 고비가 아니라, 매우 견디기 힘든 고비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님은 이 ‘넘기기 힘든 고비’를 겪게 함으로써, 우리 믿음을 단련해 주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넘기 어려운 세 고비를 통하여 딸도 고침받고 
믿음이 좋은 여인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의 세 고비는 무엇일가요? 우리가 당하는 고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여인을 끈질기게 괴롭히신 이유
조지 워싱턴의 예를 들어봅니다.

조지 워싱턴의 소명의식이 결국 일을 이루게 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해 
곧 죽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17세와 22세 때는 세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습니다.
19세 때 천연두, 20세 때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35세 때 급성 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또 넘겨야 했습니다.
43세 때에 치아가 거의 못 쓰게 되어 고통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여 주시고, 같이 하여 주시기에
자기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약함과 병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43세인 1775년에 미국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전투는 연전연패였습니다.
그러나 끈기 있게 싸워 1781년 결국 승리함으로써
그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 후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여 주셨다는 확신이 
버린돌에서 머릿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자기가 선택되었다는 확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소명 받은 자라는 확신은
결국 자기 인생을 성공하도록 이끌어갑니다.
참된 소명의식은, 성령충만을 받을 때, 하늘로부터 신비하게 주어집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인을 단 번에, 쉽게 고쳐주셨더라면,
여인은 ‘딸의 병고침’만 받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어렵게 여인이, 딸의 병고침을 받게 되었던 것은,
-단순히 병고침 만이 목적이 아니라
-병고침을 통해서, 그 여인이 사명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명자가 되었는지는, 성경에 안 나오지만
‘네 믿음이 크도다’하며 예수님이 인정해 주셨으니,
그는 남은 생애, 반드시 사명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1. 육신적 환란의 고비 (딸의 불치병) 

사람들이 넘기 어려운 고비는 불치병의 고비입니다. 
살아가면서 건강만 하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마다 가정마다 부모마다 불치병의 고비가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가벼운 병에 걸렸다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고비가 있습니다. 고비를 넘기면 살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흉악한 귀신(불치병)에 들렸습니다. 
귀신이 그 딸을 사로잡았습니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어찌나 동네를 떠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일으키는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 병이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앞에 와서 말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였습니다. 
딸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불쌍하였습니다. 

딸은 오히려 즐거운 지도 모릅니다. 
귀신들린 딸은 불쌍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니 차라리 편합니다. 

마찬가지로 아픈 병자는 차라리 편합니다. 
간호하는 사람이 지칠 정도입니다. 

이렇게 본인이거나 가족 중에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고비가 종종 있습니다. 
불치병의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2. 정신적 고통, 자존심의 고비 

사람들이 넘기 어려운 두 번째 고비는 자존심의 고비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지치거나 자존심이 상하여 포기하고 싶은 고비가 
종종 찾아 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제일 아플 때는 자존심을 건드릴 때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정말 아픕니다. 

하나님도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비둘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껍질을 까지 말고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소, 양 그리고 염소는 가죽을 벗겨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한 이가 그렇지 않아도 돈이 없어서 작은 예물을 드리는 데 
털까지 다 벗겨내면 너무나 송구스럽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털을 벗기지 말고 거냥 드리라고 한 것은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기시는데, 
우리가 남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외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기도하러 가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대표로 도시락을 등에 짊어졌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배가 고팠습니다. 

베드로는 살짝 손을 등뒤로 넣어서 닭다리 한 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살그머니 혼자 먹었습니다. 이를 가룟 유다가 눈치챘습니다. 

드디어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도시락을 펼치니 한 마리의 닭은 다리가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공개적으로 베드로가 훔쳐 먹었다고 공개하며 
베드로를 공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난처해 하는 베드로를 위로하기 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리가 한 개인 닭도 있느니라.’ 
가룟 유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습니다. 

배부른 그들이 다시 가고 있을 때 앵두나무 밑에 닭 한 마리가 
다리 한 개를 들고 서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소리질렀습니다. 

‘봐라! 유다야! 다리가 한 개인 닭이 저기 있지 않느냐?’ 

예수님은 화가 나셨습니다. 
양심이 있으면 가만히 있어야 할 베드로가 잘 난 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닭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닭을 건드렸습니다. 
닭은 들고 있던 다리를 빼고, 두 다리로 달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이유 (펀 글)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 때문에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아무 소유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위에서 상처 받고 화를 내는 것은
그로부터 좋은 대우, 특별 배려, 인정, 존경, 주목 등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다.

이 모두를 마치 자기 소유(↔하나님의 소유)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타인이나 자신에 대한 강한 주인의식(소유욕)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과 행동, 태도 등으로 나에게 존경을 표하고,
나의 내적, 외적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인격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기 가치를 몰라준다고 화를 내고 인격 손상이며 치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격적 모욕과 멸시를 잊어버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향해 공격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상처 받은 내 감정은,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두 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두 번 자존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에게 자존심을 상하였고, 
또 예수님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소리를 지르니까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보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꾹 참았습니다. 그리고 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조차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23절) 

침묵은 가장 크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말도 하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고비를 넘기려고 참고 매달리니까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개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 꾹 참고 
그 고비를 넘길 때 이를 악물고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개가 되어도 좋으니’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자존심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를 넘겨야 무슨 일이든지 됩니다. 


◑3. 인격적 인내심의 고비, 포기하고 싶은 고비 

사람들이 넘기 어려운 세 번째 고비는 인내심의 고비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다시 한 번 시도하며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몸부림쳐도 풀리지 않을 때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체념하게 됩니다. 자포자기 하거나 반항하게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도저히 약이나 의사로 고칠 수 없는 귀신들린 딸을 보면서 
한숨만 짓고 있었습니다. 
하여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여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딸을 쇠줄로 묶어 집안 어느 으슥한 곳에 가두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속으로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랐을 지도 모릅니다. 

몸부림쳐도 안 될 때 포기하고 싶은 고비가 찾아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 고치는 것을 하루에 10번도 더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뭐길레 포기하였다가는 다시 미련을 가지고 달려 들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병좀 고쳐 보려고 왔더니 제자들이 방해하고 
예수님조차 개라고 하였을 때에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의 하고 싶은 고비를 넘어야 성취가 있습니다. 
그 고비만 넘기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스포츠 기자 퓰러톤은 
한때 텍사스 산안토니오스 야구팀의 감독이었습니다. 
팀이 시합을 할 때마다 졌습니다. 
이제 야구팀을 해산하여야 하는 위기의 고비를 맞았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힘을 주셨습니다. 
그는 선수들의 배트를 다 모아 가지고 
교회 목사에게 찾아가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팀의 열렬한 팬이었던 목사는 그 야구방망이 위해 정성껏 기도했습니다. 

이튿날 그 배트를 들고 경기에 임한 팀은 한 게임에 37안타를 날렸습니다. 
물론 배트 자체에 기적이 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트를 든 선수들의 정신 자세가 변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기도를 받았으니 공을 잘 때릴 것이다” 

공과 배트가 맞을 때 맞는 시간이 0.1초만 틀려도 맞지 않을뿐더러 
맞는 장소가 5mm만 틀려도 안타는 못 치는 것이 야구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새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일명 ‘고통의 학교’에는 4학년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1학년 과정은, 고통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점점 더 괴로워집니다.
‘고통도 인생과 신앙생활의 한 면으로 여겨야지!’ 마음먹으면 훨씬 나아집니다.

2학년 과정은, ‘이 고통을 참고 견디리라’하는 단계입니다.
고통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품고 인내하는 과정입니다.

3학년 과정은, ‘나는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고통에 대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하는 단계입니다.

4학년 과정은, 마침내 ‘이 고통은 나에게, 우리(가정, 교회, 민족)에게 축복의 통로이다.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 고백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바르게 살려 하고,
신앙생활을 진실하게 해보려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과정인 인생에서, 고통의 학교에 입학해
차근차근 4학년 과정을 거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비를 넘어야 축복이 옵니다. 
그렇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1. 육신적 환란(불치병)의 고비 
2. 정신적 자존심의 고비 
3. 인격적 인내(포기)의 고비를 넘기자.. 축복의 동산을 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딸도 고침받고 자신도 칭찬받았습니다. 

축복받고 싶다고 다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비가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불치병의 고비, 자존심의 고비 
그리고 포기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고비를 넘고 났을 때 
축복의 동산으로 올라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