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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LNCK 2023. 7. 2. 05:32

나를 따르라 [마가복음30] -  - YouTube

◈나를 따르라             막10:21~31 

           
같은 막10장 본문 안에 
예수님의 초청에 불응하고 '집으로 돌아간 부자 청년'과   :22
예수님이 초대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라갔던 바디메오'가 대비됩니다.  :52
나는 예수님이 초청하실 때 '곧, 즉시' 따르고 있습니까?

▲지난 시간 복습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22절 말씀은 
아마 성경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내가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하는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던 이 청년을,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막10:21
굉장히 귀하게 보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초청하십니다. :21
이 표현은 그냥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라!' 하는 것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이죠.

성경에서 나오는 대부분 경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거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거나, 그러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셨지 
'너는 나를 따르라'고 표현하신 적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21

'그냥 가라' 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 
'가서 너무 많이 소문 내고 다니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보내셨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습니다. 

언제 '나를 따르라'는 표현이 나왔냐면, 복음서를 잘 살펴보시면 
제자들을 특별히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좇아다니라'는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최측근으로의 부르심, 어떻게 보면 '사도로의 부르심'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제자들을 부를 때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막1:1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낳는 어무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도 역시 똑같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어요. 
그 초청에도 보면, 이 부자 청년하고 똑같은 패턴이 보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네게 있는 것을 다 버려두고' 다를 따르라고 하셨죠. 
그랬더니 부자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한 거죠. 

그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는 '그물을 버려두고 나를 좇으라' 그러셨고요. 
이 부자 청년에게는 '네개 있는 것을 다 버리라'고 하신 것은 
이 사람에게 있어서 그러니까 돈이었습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 
이 초청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버려두고 곧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온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됐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예수님의 열두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놀랍고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 땅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광과 권위가 부어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계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오, 이 천국에서도 열두 기초석이 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뿐만이 아니라, 더욱더 엄청난 결과는 뭐였냐면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천국에서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광과 권위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참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에게 이런 특별한 기회, 찬스가 주어졌던 거예요. 

참 불행하게도 이 청년은, 베드로와 안드레와는 다르게 '근심하며 돌아섰습니다.' 
이 한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갈랐습니다. 

만약 이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서는 대신,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이 청년도, 열두 기초석에 그 이름이 새겨졌을지 몰라요. 
이것은 단순히 '이름이 새겨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그만한 영광과 권위가 주어졌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의 사람들을 초청하고 부르십니다. 부르실 때 똑같이 부르세요. 
'네게 있는 것을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예수께서 초청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이렇게 부르시는 거예요. 
버려둘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에게는 그물이었고, 
청년에게는 재물이었고, 
사도바울에게는 '자기 율법 지식, 자기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뭐라고 그러죠? 
지난주에 살펴본 거 복습하는 겁니다. 이것들이 뭐예요? 

'나는 어떤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 땅에서 받쳐주고 있는 받침목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받침목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하는,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을 규정해 주는 
받침목들이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에게는 그게 뭐였어요? 돈이었던 거죠. 
또는 그가 이루었던 여러 가지 성취들, 
'나는 세상에서 돈도 많이 벌었고, 부자도 됐고, 착한 사람이고, 
또 유명한 정치인이고 하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부르시는데 
뭐라고 부르시냐면 '너를 받쳐주고 있는 받침목들이 있지? 
이 땅에서 네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해 주는 것들, 
그것을 버려두고, 

즉 베드로에게는 그물을 버려두고, 
또 사도바울에게는 너의 확신과 생각을 내려놓고, 
또 부자 청년에게는 '네게 있는 것, 재물이든지, 사회적 성공이든지
그것을 버려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에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마 각 사람이 듣는 순간에 '이거' 그러고 마음에 떠오르는 게 있지요?
분명히 있으실 거예요. 

오늘 예수께서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초청하세요. 
'네게 있는 것을 버려두고.. 
너를 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 
네가 성취한 것일 수도 있고, 너의 학벌일 수도 있고, 너의 외모일 수도 있고, 
네가 지금 행하고 있는 어떤 일일 수도 있고, 
네가 누리는 관계일 수도 있고...' 

'그것을 내려두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똑같이 부르세요. 
곧 예수를 따랐던 베드로입니까? 
아니면 근심하고 돌아섰던 부자 청년입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이 땅의 것입니까? 
아니면 하늘의 것입니까? 
여기에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서 
내 삶에 하늘에 영광이 부어지는 선택들이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1. 자,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예수님의 초청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과 부자 청년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보면, 딱 눈에 띄는 반응이 있는데 
베드로와 안드로는,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곧 즉시" 반응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부자 천년은 근심하며 돌아섭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2

거부한 것은 아니었어요. No 라고 대답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심하며 근심하며 돌아섰죠. 

예수를 따르는 것에는,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있더라고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도전하시고 초청하실 때는 
"곧 즉시 따라야 된다"는 거예요. 

이 설교는 제가 여러 번 했을 거예요. 순종의 원리 얘기하면서 
이것은 "곧 즉시" 반응해야 된다는 거예요. 

'근심하며 미루는 것'은 
우리 생각에는 '조금만 생각해 볼게요. 조금만 고려해 볼게요'
이렇게 잠시 미룬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를 보면, '잠시 생각하며 미루다가'
Yes! 그러고 따라온 사람은 없어요. 

항상 잠시 미룬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면 
결국에는 거부하게 되지 
근심하고 미뤘던 사람이 나중에 돌아와서 Yes! 그러고 따라가는 기록은 
성경이나, 우리 현실에.. 어디에도 없다는 거죠. 

또 제가 목회를 하면서 봐도, 그렇게 따라가는 경우는 거의 못 봤어요. 
'근심하고 미루는 것'은 사실상 No! 하는 거예요. 

영적인 원리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여러분 근심하고 미루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생각이 강해지지 않습니다. 
근심은 우리의 혼을 강화시키는 거예요. 

이 부자 청년이 돌아가서 무슨 근심을 했을 것 같아요? 
'재물을 다 나눠줘 버리면 그다음에 나는 어떡하지?' 

이 생각이 계속 떠돌면서 혼이 강화됐지, 
'예수를 따를 때 무슨 영광이 주어지지?' 이런 고민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라갔을 때, 그 뒤에 어떤 하늘의 영광과 어떤 권위가 주어지는지는 
이 부자 청년이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맛본 적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왜? 영적인 거니까! 

베드로라고 달랐겠습니까? 평생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사람에게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래요. 
그러면 그가 근심했다면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내일부터는 뭘 해서 먹고 살지? 가족과 생활은 어떻게 부양하지?' 
이런 생각들이 점점 강해지죠. 

근심은, 하면 할수록, 예수를 따르지 말아야 될 수만 가지 이유들이 떠올라요. 
경험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근심하면 여러분, 나를 두렵게 하고 염려하게 만드는 수만 가지 이유들이 떠오르지 
예수를 따라야 되는 믿음이 막 올라오고 이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실 때는 
'즉시, 곧' 반응하는 것이지 
근심하고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은 신중하고 또 또 신중하게! 
그러나 행동(순종)은 즉시! 이게 여러분 영적인 원리예요. 

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담을 주시고, 도전을 주시고, 초청을 하시면 
'이게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야?'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야?' 
성경적인 원리도 찾아보고, 중보기도도 부탁하고, 충분히 검증하셔야 돼요. 

충분히 검증하시고, 영적인 리더랑 상의도 하고, 신중하게 분별하시고 
근데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러면 여러분 "곧 즉시" 움직이는 거예요. 
이 원리대로 살아가신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희가 다니엘 아카데미 건물 문제도 있고, 저희 교회 문제도 있고 
그래서 지금 새로운 땅과 건물이 필요합니다. 몇 년째 기도하고 있잖아요. 
몇 년째 기도해서 아마 좀 지치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몇 년째 계속 기도하는 제일 큰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이거 하라 그러시는지를 분별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옮겨야 되는 것까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거의 다. 동의를 하고 있는데... 
'정말 이 땅입니까? 정말 이 건물입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분별이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라면 
그다음에는 우리가 돈을 얼마 갖고 있든, 할 수 있든/ 없든 
이런 거 생각하는 거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이 주신 거라면 
그냥 믿음으로 가는 거예요. 그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분별은 신중하게, 그러나 행동은 빠르게! 
이 원리대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두 번째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28절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그 뒤에는 이런 질문이 숨어 있죠.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부자 청년이 돌아간 이후에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25 
그랬더니 베드로가 약간 긴장했어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우리는 그래도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이러고 지금 얘기하면서 예수님께 물어본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면 무엇을 얻게 될까요? 
베드로의 이 질문 덕분에, 예수께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막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 적어도 4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네 가지 결과가 주어질 거라는 거예요. 

1) 첫 번째는, '내세의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그랬어요. :30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주어집니다. 아멘!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약속 아닙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 첫 번째 약속이 주어집니다. 

2) 두 번째 약속은 뭐냐면, 단순히 내세의 영광을 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세에, 하늘에 상급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 때, 열두 보좌에 앉아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고 다스리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위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마19:28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기억하십시오 하늘의 영광과 권위가 주어집니다. 
성경의 원리는 명확합니다. 하늘의 영광과 권위는 어떻게 주어지냐면 
이 땅에서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포기하고 희생하고 버린 것만큼 주어져요. 
이게 하늘의 원리예요. 

성경의 원리는 여러분 명확합니다. 
하늘에서 어떤 영광과 하늘에서 어떤 권위를 우리가 누리게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냐? 
교회 내에서 목사냐, 선교사냐, 장로냐, 집사냐? 이런 것과 관계없이 
이 땅에서 여러분들이 포기하고 희생하고 버렸던 것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버렸던 것들 만큼 
하늘의 영광과 권위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아멘! 그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전9:4~6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성경이 여러분 명확히 얘기하잖아요. 바울이 뭐라 그랬습니까? 
'이 땅에서 나에게 권리가 없겠느냐? 
내가 고생하지 않고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 권리가 없겠느냐? 
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없겠느냐?' 

사도바울은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고 
로마시민권자였고, 하여간 수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어요.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고, 당대에 석학이었고, 
잘 먹고 잘 살려면 여러분 그런 권리가 충분히 있었죠.
충분히 명예와, 존경과, 칭찬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는 거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이런 권리를 누리지 않은 것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였다는 거예요. 

그것이 훨씬 더 존귀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모든 권리가 주어져 있었지만 
그 권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처럼 내려놓고 버렸을 때, 
그것이 사도바울에게 하늘에 상급이 됐다고 고린도전서가 얘기하고 있잖아요. 
이게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저는 여러분 이 땅에서도 그것이 그대로 반영돼야 된다.고 믿습니다. 
교회 안에 누가 존경받아야 됩니까? 교회 안에 누가 권위 있는 자가 돼야 됩니까? 
이 원리에 따라서 주어져야 돼요. 

하늘에서 권위가 주어지는 사람이 
교회 내에서도 권위가 주어지는 사람이 돼야 돼요. 

오늘 여러분 이 땅에 교회들이 겪고 있는 수많은 위기가 "세속화" 아닙니까? 
교회 내에 어떤 분들이 권위가 주어집니까? 세상에서 명망 있는 분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 밥 한 끼라도 쏠 수 있는 사람들! 

여러분 밥 쏘는 거 좋은 일입니다. 계속 쏘십시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 안에서 권위가 주어지면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유명하고 명망이 있는데, 교회 잘 나온다.고 
그 사람이 장로 임직 받고... 천만에 이것은 여러분 전혀 영적인 게 아니에요. 
세속적인 거죠. 그러니까 교회가 다 망가지는 거예요. 

교회에서는 여러분 누가 존경 받고, 누가 권위를 가져야 됩니까? 
하늘에서 영광과 권위가 주어진 사람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포기한 사람들, 
그 사람이 여러분 권위를 갖는 겁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그렇다고 여러분 교회 내에서 권위받으려고 희생하고 그러지 마요.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됩니다. 

◑3. 세 번째 복이 있는데, 내세에서의 상급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상급을 받습니다. 

29~30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자, 현세에서 받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 자매, 집, 전토를 100배나 받는다는 거예요. 
어떻게 이것을 100배나 받을까요.? 무슨 뜻일까요? 

형제, 자매는 모르겠는데, 어머니는 한 분인데 어떻게 100배를 받아요.? 
100명의 어머니를 어떻게 받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복음서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막3:33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 

결국 이것이 공동체의 축복에 대한 얘기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현세에서는 관계의 축복들을 누린다는 거에요. 

우리 주변에 정말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운 영적인 형제, 자매들, 어머니
들을 백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아버지'입니다. 
버릴 때는 '아버지'도 포함되는데, :29
받을 때는 '아버지'도 백배로 받는다는 말은 없어요.
'어머니'는 백배로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말이죠. :30

아마 분명히 마가가 의도했던 것은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를 생각했을 거예요. 
분명히 하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까 
그래서 이제 '아버지'라고 하는 상징은 뺀 거죠. 

그래서 영적인 공동체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풍성한 영적인 관계들을 누리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실제로 누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적어도 여기 100명 이상의 형제자매들이 있잖아요. 
100명 이상의 영적인 어미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한 분이시죠. 
할렐루야 이 복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집과 전토도 100배나 받게 된대요. 이건 뭘까? 
집을 100채를 주신다는 건가요? 요즘은 세금 때문에 달갑지 않은데요.

이것도 영적인 얘기입니다. 그런데 '현세에서 집'이라고 했어요. 무슨 얘기일까요? 
교회 얘기하는 겁니다.

실제로 여러분, 이 집이 여러분의 집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 집인데, 
여러분 이런 집에 살아보신 적 있으세요? 평수가 400평이 넘습니다. 
상상도 못할 대저택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에어컨도 빵빵하게 나오고요. 
심지어 집(교회) 안에 카페도 있고,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어요. 
이런 집 살아보신 적 있으세요? 

우리 안에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을, 잘 한번 정리하고 돌아보십시오. 
이것이 '확장된 내 집' 아닙니까? 
어차피 여러분들이 와서 누리시는 건물이잖아요. 
주중에 나와서 기도하시고, 사람들 만나서 커피도 마시시고, 
이게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이잖아요. 내 삶의 일부잖아요. 
그 집을 백배나 받게 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신 줄 믿습니다. 

◑4.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고 마지막 하나가 더 있어요. 
달갑지 않은 네 번째! 
이거 다. 받긴 받는데,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는 거예요. :30

현세에서 예수를 따르는 길은, 박해를 겸하여 받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내세에서는 맞아요. 
확실한 영광과 확실한 권위가 부어져요. 어려움 같은 거 없어요. 

그런데 현세에서는 두 가지가 공존해요. 
-하늘에서 주시는 축복이 있어요. 
공동체의 축복, 형제와 자매와 어미를 백배나 받고, 
집과 전토를 백배나 받는 공동체의 축복, 관계의 축복이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처음에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세상에서는 경험 못했던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하잖아요. 
'어? 이런 관계가 있었어? 이렇게 누리는 게 있었어? 와! 새 세상이네!' 

그러면서 거기서부터 우리가 새로운 것들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하죠. 
'아,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이런 관계 속에 지으셨구나! 
사랑하라고 하는 게 이런 거구나!' 
뒤에서 딴 생각하지 않고, 꿈꾸지 않고, 순수하게 그냥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그 관계들... 서로 아껴주고 서로 기도해주고 염려해주고 하는 이 안으로 
들어오면 너무 좋잖아요. 
오케이, 그 복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에요. 

The other half가 있어요. 이것을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30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길은, 여러분 단순히 복만 누리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따를 때는 거기에 함께 오는 분명한 박해가 있습니다. 
이거 여러분 알고 계셔야 되고, 준비하고 계셔야 돼요. 
이거 모르는 사람들은, 중간에 다 떨어져 나갈 겁니다. 

'아니 예수 믿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 
여러분 분명히 예수 믿는 길에는 박해가 있다.고 그랬어요. 
각오하고 계셔야 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는 박해가 있을 거고요. 핍박이 있을 거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사도바울이 겪었던 것 같은 그런 
수많은 위협과 위험들을 어쩌면 우리도 겪어야 될지 몰라요. 
그때는 그냥 할렐루야를 외치십시오. 
그게 예수를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박해'라는 단어를 쓰기에 조금 죄송합니다. *2020년 설교
그저 조금 불편하고 어려운 거죠. 

조금만 또 코로나가 일어나면요. 지금까지 있었던 규제보다 
더 심하게 규제가 내려올 거고요. 더 불합리한 얘기를 듣게 될 거고요... 
어쩔 수 없어요. 그런 억울함들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당했던 박해에 비하면, 박해라는 말을 쓰기가 죄송하죠.

인본주의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어요. 
'교회가 욕 먹는 것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빚과 소금의 역할을 못해서 그래!' 
그 면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복음의 본질이 있어요. 
교회가 아무리 잘해도, 아무리 퍼펙트하게 살고 
아무리 교회가 세상에서 좋은 일 많이 하고, 완벽하게 해도 
교회는 반드시 욕 먹고, 박해받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영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세상에서 존경받고, 우러러보는 메시아 상, 작은 예수상'
광야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사실 마귀가 시험한 내용이에요.
그거 성경적인 생각 아니에요. 인본주의자적인 생각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결국 성도들은 더 오해받을 거고 
교회는 더 욕 먹을 거고, 교회는 더 핍박받을 거고, 
현세에는 핍박을 피할 수 없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냥 각오를 하고 가세요. 
그래야 편안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뭐 한국교회가 이게 문제고, 한국 교회가 저게 문제고..' 
저는 그 얘기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불이 올라와요. 

본질적으로는 교회는요. 세상으로부터 칭찬받을 수가 없어요. 
최선을 다해서 해야겠지만 세상이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교회는 더욱 더 칭찬받을 수가 없어요. 교회는 '박해를 겸하여' 받는 거에요.

성도의 진짜 영광과 '어 저런 존재였어?' 하는 것은 
여러분 어디서 드러나는 거냐면 
박해 안 받는 것이 아니고 
박해속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보고,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본다는 거죠.

그 엄청난 밖에 가운데도, 쓴뿌리나 저주나 이런게 나오지 않고 
정말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저건 뭐지?' 그때 비로소 성도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빛과 소금 역할을 충실히 해도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거지요. 
그렇지만 핍박을 겸하여 받습니다!
지금 이 코로나 시국에 중요한 말씀이니까 제가 강조하는 거에요. 

▲고후11:23~27에서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
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딤후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다 마치고 예수님을 만날 때 
이런거 하나 정도 씩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예수님 앞에 갔는데, 사람들이 한명씩 한명씩 예수님 앞에 나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주님 얼굴을 뵈오니 내 마음에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복음과 예수를 위해서 당했던 
고난과 굶주림과 사람들의 멸시와 희생하고 포기하고 했던 것들을 
하나씩 내놓을 때 
예수께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안아 주시고, 함께 기뻐하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 포기했던 기회들, 
예수를 따름으로 인해 받았던 멸시와 모욕,
예수를 따름으로 인해 감옥에 들어갔던 일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주리고, 멸시받고, 모욕당하고, 갇히고 헤맸던 일들...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 앞에 내놓으면 
예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면류관 씌워주실건데... 

이때 뭐 꺼내놓으실 게 있으셔야 되지 않겠어요? 
고난 당한 게, 박해 받은 게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재미있는 게 중국 가정교회 에서도 비슷한 표현들을 쓰더라고요. 
중국 교회 지도자들은요 핍박 받아서 감옥들어갔다 나온 연수가
그분들의 영적 권위하고 그대로 비례해요. 

십구 년 살다 온 사람은, 이십 년 살다 온 사람 앞에 꿇어요.
20년 살다 온 사람은, 22년 살다 온 사람 앞에 꿇는다고 합니다. 

주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별 하나, 둘, 셋, 여럿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여러분 사이에 관계의 깊이는 
이것(박해)에 의해서 증명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땅을 살아가는 시간은, 여러분 진짜 가 아니에요. 
우리의 진짜 인생은 영원한 그분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거에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뭐 하는 거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사랑의 관계를 develop 하는 시간인 거예요. 
이 땅에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 이걸 여러분 만들어가는 시간이에요. 

여러분 '별' 다셔야 돼요. 
(*감옥에 갔다오면 '별 단다' 그러잖아요. 핍박의 증거를 뜻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면류관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부자 청년이 돌아가고나자,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 앞에 나옵니다. 

막10:35~3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
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이때가 언제냐면 
십자가를 지시러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이게 뭐 갓 제자들을 불러서 아무것도 모를 때 한 얘기가 아니고, 
3년 동안 제자훈련을 다 끝내시고, 이제 십자가지시로 올라가는 도중이에요. 
그리고 이 제자들이 나오기 직전에 무슨 말씀을 하시냐면 
'낙타와 부자' 얘기하시고 :25
이어서 십자가에 달리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세요. :33~34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런 얘기를 하는거에요. 예수님은 기가 찼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뒤에 '천국에서 큰 자가 어떤 자냐?' 하는 것을 
다시 쭉 풀어 설명하십니다. :38~40

(천국에서 누가 큰 자냐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며칠 전에 살펴봤으니까 넘어갑니다) 

◑계속 이어서 바디메오가 예수 앞에 나옵니다. 막10:46~52

도중에 여리고에 들리셨는데, 바디메오가 간절히 부르면서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예수님은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이 요청에 
참 마음이 약하세요. 
다르게 부르고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반응 안 하셔도 
꼭 이렇게 부르고 나오면 마음이 약하세요. 
Have mercy on me!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말만 하면요. 예수님의 마음이 녹으세요. 

교만하게 거만하게 나가면, 예수님은 거들떠도 안 보세요. 
그런데 이렇게 간절히 부르면서 나가면, 정말 예수님이 반응 안 하신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그를 꾸짖었대요. '아휴 시끄러워, 그만 좀 해!' 
사람들은 그렇게 반응할지 몰라도, 예수께서는 다르게 반응하세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막10장을 보면, 마가가 의도적으로 예수 앞에 나온 세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인 거에요. 비교해서 세 사람을 기록하고 있어요. 

-첫 번째는 부자 청년이 예수 앞에 나왔고요. 
-두 번째는 제자 요한과 야고보였죠. 
-세 번째는 바디메오가 예수 앞에 나왔어요. 

다 각자 다른 원함을 가지고 나옵니다. 
-부자 청년은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기 원함으로 예수 앞에 나왔고 
-제자들은 좌의정, 우의정을 원함므로 예수 앞에 나왔고 
-소경 바디메오는 보기를 원함으로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 중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고 칭찬받은 
사람은 소경 바디메오 밖에 없었어요. 무엇이 달랐을까요? 

사실 여러분 원함의 내용만 놓고 보면 
바디메오보다, 부자청년이 훨씬 더 깊이 있고 수준 있는 고민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바디메오도 간절함 가운데 나오긴 했지만 
그냥 육신의 질병 고쳐달라는 거였고, 

제자들같은 경우에는 언급할 가치도 없고 
세상에 복달라는 거잖아요. 

그에 비해서 부자 청년의 원함은, 수준이 달랐습니다. 
부자 청년은 '내가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적어도 부자청년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원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은, 그 부자청년이 아니라 바디메오였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어 냈는지 보이십니까? 

5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이 아니고, 바디매우를 픽하신 거에요. pick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따르니라'
지금 부자 청년부터 시작해서 계속 뭐에 대한 도전이에요? 
'나를 따르라'는 도전이잖아요. 

부자 청년은 여러분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바디메오는 '예수를 따랐다'는 거에요. 

사람들은 여러분 다양한 원함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옵니다. 
치유를 원해서 나오기도 하고 
성공을 원해서 나오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해서 나오기도 하고 
부모에 대한 상처 때문에 나오기도 하고 
친구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나오기도 하고 
와이프가 무서워서 나오기도 하고 
하여간 뭐 다양한 원함을 가지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나옵니다. 
성공한 부자관원의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고 
종교 지도자의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고 
아무 데도 갈 것 없는 거지 모습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어떤 원함으로 나왔느냐, 어떤 모습으로 나왔느냐에 상관없다는 거에요. 
예수께서는 그거 보시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중요한 것은, 결국 '예수를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에 있다는 거죠.

구원은 결국 이거(예수님을 따름)에 대한 이슈라는 거에요. 

아무리 고상한 원함을 가지고 예수께 나왔어도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고 

반대로 아무리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이슈를 가지고 나왔어도 
예수를 따르면.. 그게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나를 따르는 자'이지 
우리가 왜 예수 앞에 나왔는지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는, 아무 상관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랬거든요. 
예수를 따를 때, 과거에 있던건 다 변화되고 리셋 말이에요.
 
오늘 여러분은 왜 예수 앞에 나오셨습니까? 
다양한 원함을 가지고 나오셨을 것입니다. 

성공함 으로 나오기도 하고, 주부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거지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아무 상관없어요. 

결국 예수께서 물으시는 것은 '그래서 너는 나를 따를 것이냐?' 
이거 물어보시는 거에요. 여러분의 대답은 뭡니까?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 해도, :30
그래도 예수를 따르실 겁니까? 이거 물어보시는 거에요. 

그런데 왜 부자 청년은 근심에서 돌아가고.
바디메오는 예수를 따랐을까요?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한 가지 이유는 아닐텐데 
적어도 그 중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절박합니다. 
소경입니다. 이건 뭐 돈으로도 못 고치고, 세상에서 해결해 줄 이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거부하시면 갈 곳이 없어요. 
예수 외에는 소망을 둘 곳이 없었어요. 

제 자신을 봐도 그렇고,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있고요,
믿는 구석이 사람이 있더라고요. 
물질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과 영혼을 말하는 겁니다. 

'나는 예수 말고도 세상에서 이런 사람이에요'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고, 그래서 의사고 뭐 교수고, 
돈이 많고, 뭐 예쁘고... 이렇게 받침목들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따르기힘든 줄 아십니까? 다른 따라갈 대상들이 많은 거예요.
예수 따르는 거 말고도 세상에서 나를 의미 있게 해줄 것 같고 
세상에서 나를 떠받들어 주는 것들이 많단 말이에요. 

이런 사람은 예수 따라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받침목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그게 은혜죠!
그거 허물어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거죠.

그래서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던 것은 
그 버팀목들을 내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죠.

복음은 여러분 굉장히 래디컬 합니다. 
빠져나갈 구멍들을 다 무너뜨리라는 거에요.
돌아갈 퇴로를 차단하라는 거에요. 우리가 스스로 못 하니까,
주님은 환난을 통해서, 강제로 차단해 주시죠.

김용현 선교사님 만났더니 그 얘기하시더라고요. 
'선교사들이 돌아올 수 있는 퇴로를 차단하라!' 이러시더라고요.

부자 청년에게 왜 다 버리고 나눠주라고 했냐면 
퇴로를 끊으라는 거에요. 

퇴로를 다 끊으셨습니까? 
퇴로가 남아 있으면, 여러분 지금은 표가 잘 안 나요. 

그런데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했는데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퇴로가 있는 사람은
핍박 때, 환난 때 드러납니다. 쉬운 길을 택하는 거죠. 

지금 코로나 시국에, 왜 여러분 한국 교회들에게 
어려움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줄 아십니까? 알곡과 가라지 가르는 거에요. 

이게 왜 이렇게 점점 어려워지고, 교회 한테 불공평하고... 
불평할 때가 아니에요. 하나님 허락하셨으니까 (예배 중지) 오는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 가르는 거예요. 걸러내시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초청하십니다. 
'너 돌아갈 곳 있느냐?' 그러면 그 퇴로를 차단해라.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그 퇴로를 끊으라는 얘기죠.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수진을 친 사람들! 
예수께서 나를 받아주지 않았으면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바디메오를 보십시오. 
심지어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가라!' 그러셨어요. 

여러분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나를 따르라' 초청도 안 하셨어요. 
부자청년은 '너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는데,
바디메오는 '가라' 그러셨어요.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을 따랐어요.

'주께서 나를 가라 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는 자세였죠.

예수를 따르는 것의 본질이 여러분 여기서 명확해집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의 본질은 
나를 받치고 있는 받침목이 뭐냐는 거에요. 
그걸 버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받침목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었잖아요. 
당대의 석학이고, 최고 학버린 가말리엘 문하 사람이고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고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바울은 여러분 받침목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받침목은 이제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거에요.

바울에게는 수많은 세상에 받침목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하는 순간부터 바울의 고백은 이거에요.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뭐 다른 것은 없나요?'
'네 그거 말고는 없습니다.'
이거 밖에 없는 것, 이게 예수를 따르는 거예요. 

그게 고상한 게 아니고, 그게 진짜 나라는 거에요.
그래서 바울은 '내가 누군가를 만들어주던 신기루 같은, 
헛된 구름 같은 그런 이 땅의 밧침목들을 배설물로 싹 버리고 
진짜 그리스 안에서 내가 누군지를 발견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제 안에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정말 많은 받침목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나는 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집도 잘 살았고요. 
저희 아버님은 서울대 교수님이셨고, 저희 저희 어머님은 약사셨고 
그러니까 명예와 부가 다 있었어요. 

돈은 어머니가 벌고, 아버지는 그냥 쓰셨어요. 
전 서울대 나왔습니다. 서울대 내에서 잘 나갔습니다. 
소위 말하는 '인싸' 였어요.

미국 유학 갈 때도 가장 좋은 명문대학으로 갔습니다. 
근데 어느날 예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너는 나를 따르라' 

물론 그 앞에서 고민하고 기도 했습니다. 
제 안에는 여러분 명백한 게 보였어요. 
명백한 이 가치, 비교가 안 되는데 가치!
정말 세상 것들은 그냥 배설물이었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저는 여러분 정말 예수님 따르기로 했을 때, 그냥 다 끊어버렸습니다. 
저 안에는 예수 밖에 없어요. 정말 예수 밖에 없어요. 오직 예수!

이거 여러분 붙잡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핍박이 올 때, 또는 반대로 유혹이 올 때 
다 쓸려가 버릴거예요. 

왜? 받침목들이 아까워보일 거거든요. 
나를 떠받들고 있던 것들을 버리기가 아까운 거기든요. 

여러분 영혼을 팔아먹으면 안 되잖아요.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의 세계에서
영원히 영광 중에 성공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되잖아요!
이게 예수 따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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