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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위로의 하나님

LNCK 2023. 7. 3. 06:48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        고후1:1~11        *냉수한그릇창고 글

◑연약함을 통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   1:1~7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주제로 다룹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즉 십자가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십자가의 길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여도 
그 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주 동안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특히 고후1장에서 나눌 주제는 바로 ‘연약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주제는 우리가 매우 다루기 힘든 주제입니다. 
연약함이란 주제는 상당히 내면적이고 은밀한 주제이면서 개인적인 내용이기에 
설교를 통해 내 연약함이 공감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연약함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이 시대에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더 각박해집니다. 

제가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을 데리고 수련회나 집회를 가게 되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현대 젊은이들은 불평불만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호화스러운 수련회 장소를 데리고 가도 
시설이나 프로그램에 대한 불평이 꼭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평이 잠잠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 받는 순간입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화장실에 대한 불평, 음식에 대한 불평, 
잠자리에 대한 불평이 다 사라집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다툼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심한 다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다툼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합니다. 
목회자의 타락, 교회 시스템의 문제, 성도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등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다툼이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각박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몇 끼를 굶어 본적이 있습니까?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조급해집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지식적인 성경공부를 하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양육 받아도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하면 각박해지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은혜 없이 오랫동안 주의 일을 했던 경험... 
그 때의 우리의 심령이 어떻습니까? 
각박해지고, 메마르게 되며,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왜 이 은혜가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음을 열고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를 만져 주시는 그 위로의 손길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미국의 신앙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의 신앙의 특징은 승리의 신앙으로 규정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승리의 신앙은 쟁취하고, 승리하고,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은 나의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셨다” 
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약함 가운데서 진정한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전적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현대사회는 나의 연약함을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라도 더 얻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하는 현대의 경쟁체제는 
나의 연약함을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행동을 패배주의적이고 자기연민적인 행동으로 치부합니다. 

▲2. 왜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는가요? 
그러나 인간이 만약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죄로 끌려가고 있는 내 연약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연약함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죄는 이 연약함을 타고 들어옵니다. 
따라서 인간은 연약하기에 쉽게 죄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대신 연약함으로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에게 승리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열어준 연약함 가운데서의 
승리의 길도 들어서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온전히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 연약함을 예수 그리스도께 고백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3. 위로의 하나님   ←이 설교문의 핵심 

그렇다면 우리가 연약함과 고난 가운데 경험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입니까? 

이 은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고후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3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다른 의미를 가진 이 3가지는, 실상은 같은 의미입니다. 
①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이 분을, 아래에서 이렇게 설명하는데요.. 

②자비의 아버지 
자비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티클모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동정, 연민, 자비 등 
즉 고난당하는 사람을 보고 같이 마음 아파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매우 커다란 의미입니다. 
헬라시대에서는 절대적인 신이 인간으로 인해 영향을 받아서 마음 아파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이란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부동의 동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아픔에 민감히 반응하며 
그 연약함에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타락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시며 항상 연민과 동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 의해 
마음 아파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이해가 가십니까? 

고통 받지 않고 아픔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스스로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이해가 가십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③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분은 ‘위로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의 파라클레시스인데, 
이 말은 보혜사 성령을 의미하는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어원(파라칼레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대상이 아주 가까이서 상대방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아픔에 아주 가까이서 para (곁에서, 둘레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고후1:4~7절까지 
바울은 그가 당한 환난과 그 환난 가운데서의 ‘위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3절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나의 연약함에 같이 고통당하시는 그 분은 
나의 연약함을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도 나의 연약함에 가까이서 반응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식하는 순간에 내 옆에서 
나와 함께 그 연약함을 감당하시는 
하나님의 그 세미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나같이 연약한 존재에의 아픔에 같이 반응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그 분은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고 이김을 주시며 
그 연약함을 통해 승리를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각자 어떤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분은 오랜 지병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지나친 수줍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는 분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나 부모님의 구원의 문제로 
오랫동안 씨름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자녀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성도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내가 지금 내 옆에서 나를 세미하게 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지금 내 옆에서 나를 위로하시며 
나를 격려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1. 고통에 "집착"하면, 고통을 더 크게 느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작건 크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여러 가지 육체적 질병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더욱 난감해지는 것은,
왜 악인만이 아니라, 선인도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주위의 착한 사람들이 더 크고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신가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3년 전 태풍 루사가 제가 생활하던 기도원을 덮친 사건을 겪었습니다.
홍수와 산사태가 나서, 제가 아끼던 책들과 물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복구 작업 하나라 허리도 고장이 나고, 몸도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때는 제가 ‘왜 하나님은 기도원도 구별 못하시고, 주의 종도 못 알아보시는가?’
하고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저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집착하면 할수록 
더 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에 너무 집착하면
그가 겪는 고통은, 집착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크게 느낄 것입니다.

건강에 너무 집착하면,
조그마한 병에도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 혹은 고정관념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따라 
달라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태풍도 아니요, 
병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그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지나친 관심과 집착)이 어떠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2. ‘위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전도자의 “위로”에 거듭난 58세 여의사 이야기☞ 58세에 거듭난 여의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