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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앞에 나아가는 법도

LNCK 2023. 7. 9. 10:24

왕 앞에 나아가는 법도1 [마가복음34] - - YouTube

◈왕 앞에 나아가는 법도            막12:13~27
 
마가복음 11장부터는, 예수께서 마지막에 잡혀 죽으시기 직전 
그 일주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일주일이 흐르고 나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요. 
그 일주일 동안 있었던 사건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십자가 전후) 사건들을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거의 절반 가까운 분량이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돼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했던 사건이라는 거죠. 

그래서 막11장부터 12장 13장 쭉 이어지는 말씀들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달리시기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입니다. 

▲왕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막11:1~
그러자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옛 권위들, 옛 질서들과 
예수라고 하는 새로운 권위 그리고 그분이 세우시는 새로운 질서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이어지는 본문 12:13절부터 말씀을 보면 
왕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자 충돌이 계속됩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두 번째 패러그래프를 보면 사두개인들이 찾아와서 
예수께 묻습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묻습니다. 

나단아일도 찾아와서 물었고, 삭개오도 물었고 
또 밤에 찾아와 물은 니고데모도 있었고, 부자 청년도 찾아와서 물었죠. 
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이들이 예수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예수를 찾아와 물었던 사람들이 
다 똑같은 대답, 똑같은 결과를 얻고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맞아요. 이 사람들은 올바른 대상을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질문에, 그 질문이 어떤 내용이든지 간에 
우리 인생에서 겪게 되는 고통의 문제든 
아니면 삶의 지혜든 아니면 
뭐 심지어 자연에 돌아가는 원리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해서 대답해 주시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조주이시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대답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 그분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들은 맞아요. 올바른 대상을 찾아왔습니다. 
물어야 할 올바른 대상을 찾아왔습니다. 

이것만 해도 여러분 얼마나 큰 행운인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묻고 조언을 구하려고 할 때 
올바른 대상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유사권위들이 하도 많아서요. 
뭐 병원을 가더라도 정말 올바른 병원을 갔는지 
또는 학원을 다니더라도 올바른 학원을 갔는지 
이런 것들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죠. 

그런 면에서 지금 이 사람들은 아주 행운아들이었어요. 
정말 찾아가야 될 올바른 대상을 찾아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대상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 오신 것 아닙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질문들을 해결하시고 대답하실 수 있는 올바른 분, 
그래서 교회를 찾아옵니다. 맞아요. 올바른 대상을 찾아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물음에,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자 그러나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결과를 얻고 간 것은 아니었어요. 

어떤 사람은 예수 앞에 나온 그 사건으로 인하여 
자기 인생과 영원한 운명이 바뀌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간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예수님의 질타를 받고 돌아간 사람도 있었어요. 

올바른 대상을 찾아왔지만 그 결과가 모두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예수 앞에 나아가는 올바른 방법, 올바른 법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요하고 높은 사람 앞에 나갈 때는 법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에 왕 앞에 나가려면,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마음 끌리는 대로, 아무 때나 그렇게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왕 앞에 나가려면 그 나아가는 법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옷도 어떻게 차려 입어야 되고, 
나갈 때 태도는 어때야 되고, 시간은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아주 디테일한 법도들이 있었습니다. 

왕 앞에 나갈 때는,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 끌리는 대로 나가는 게 아니에요. 
그에 걸맞는 법도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여러분 마찬가지인 거 아십니까? 영적인 법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 앞에 나아갈 때 
또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의 영, 성령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대면할 때도 
거기에 걸맞는 법도가 있다는 거예요. 

이 법도에 맞게 나아갔을 때, 우리는 복된 결과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도에 맞지 않게 나아간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수 앞에 나아가는 그 사건이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될 수도 있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왕 앞에 나갔는데 
전혀 법도에 맞지 않게 막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막 껄렁하게 술 취해가지고 나갔어요. 그럼 죽는 거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어떤 법도를 가지고 
왕 앞에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건이 우리에게 운명을 바꾸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오히려 인생이 해가 되는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 앞에 나왔던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앞에 나가는, 왕 앞에 나가는 법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잘못된 예를 살펴보려고 하고요. 
다음 주에는 서기관과,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올바른 법도에 대해서 
이렇게 두 번에 걸쳐서 왕 앞에 나가는 올바른 법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왕이신 예수 앞에 나왔을 때 
이들의 법도에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질문하는 내용에 좀 문제가 있었고요. 
-두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태도의 문제가 있었어요. 
-세 번째는 (세 번째도 태도의 일부분이긴 한데)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의 문제가 있었어요. 

▲1. 첫 번째 문제는 질문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됩니까? 
부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부활 후에 부부로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12:14~23
이런 질문들을 했습니다. 

이 질문을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어 얘기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런 질문이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됩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질문이고, 

또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에 대한 질문입니다. 
부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부부로 살았던 사람들은, 부활 후에 천국에서 여전히 부부로 사는 겁니까? 

뭐 나쁜 질문은 아닙니다. 좋은 질문이고 또 어떻게 보면은 
꼭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우선순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질문 내용이 틀린 건 아니에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쩜 당연히 물어야 될 질문 중에 하나일 거예요. 
그러나 물어본 사람의 우선순위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질문 이전에, 이들이 마땅히 물어야 될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까?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걸 먼저 물어봤어야 됐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런 (영생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셨어요. 
우리 몇 주 전에 살펴봤던 부자 청년입니다. 
막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예수님은 굉장히 기뻐하셨죠. 

사실은 여러분 마땅히 우선순위로 먼저 물어야 될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니이까?' 
이것을 마땅히 먼저 물어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물어봐야 뭐 하겠어요.? 

천국에 들어갈 사람도 아닌데 
'천국에 들어가면 부부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물어봐야 뭐해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마땅히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물어볼 수 있는 것이고 
천국에 갈 사람이야야,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기는 그리스도인도 아닌데 (본문의 질문자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는지 알아봐야 무슨 유익이 있겠어요?

천국에 들어갈 것도 아닌데,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잘 알고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거 마치 뭐와 같냐면, 미국 비자도 없는데 
'미국에 가면 음식 주문 어떻게 해야 돼요?' 이런 거 알아보는 거와 같죠.

미국 비자가 없으면, 비자 받는 법부터 알아봐야 되는 것이지 
가서 음식 주문은 어떻게 하는지.. 거기 문화가 어떤지.. 
이런 거 잔뜩 알아봐야 뭐하겠어요?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 하나가 
저는 이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교회에 옵니다. 
뭐 아내 손에 끌려서 오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해서 오기도 하고 
지나가다 들리기도 하고, 태어날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라기도 하고... 

그래서 거듭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참 많은 거에요. 
그렇다면 여러분, 먼저 물어야 될 질문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거 먼저 물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천국 안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지?' 사실은 무의미한 질문들이라는 거예요. 

질문의 내용이 잘못되진 않았습니다. 좋은 질문들이에요. 
그렇지만 질문의 우선순위 면에서는 잘못된 거죠. 
지금 내가 그곳에 들어갈 것도 아닌데, 거기에 대해서 알아서 뭐 하겠어요? 

정말 시급한 질문은, '오늘 내가 이 땅의 삶을 다 마무리한다면 
나는 깨어났을 때 천국에 있을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질문 아닙니까? 

혹시 여러분 안에도 많은 질문들이 있으시다면 
이 질문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첫 번째 질문, 
이 질문이 해결돼야, 그 다음 질문들이 의미를 갖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여러분 안에 이 질문에 대해서 명확한 믿음이 없으신 분들이 있다면 
이 질문을 먼저 던지셔야 돼요. 

예수 앞에 나와서 다른 질문 던지는 것은, 순서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 질문을 먼저 던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이들의 문제는 태도였습니다. 태도! 

왕 앞에 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태도"라고 대답할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왕을 대적하는 태도로 왕 앞에 나간다면, 그건 죽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왕을 무시하는 태도로 나간다면, 그건 큰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왕이십니다. 
그분 앞에 나가는 올바른 법도는, 당연히 경외와 존경과 겸손과 정직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올바른 법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12: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 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까, 옳지 아니함이니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데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이들의 태도를 보면요. 
1) 책 잡으러 나왔다고 얘기합니다. 시비걸려고 나왔다는 거예요. 
이런 태도로는 여러분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에 이르시는 길이십니다. 
모든 것에 해답이시며 해결이시며 근본이십니다. 
아니, 진리 그 자체이시고, 길 그 자체이십니다. 요14:6

그래서 이런 예수 앞에 나온다는 것은 
만물의 진리이며 생명이신 존재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제 손을 뻗어서 만지기만 하면 
어디서도 우리가 볼 수 없고,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볼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자리에 지금 선 거예요. 
이런 존재 앞에 섰다고 하는 것 자체가 행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워런 버핏하고 식사 한 끼를 하기 위해서 
수백만 불을 지불합니다. 좀 놀랍지 않습니까? 

이 한 사람 앞에서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는데 
막 백만 불씩 지불해요. 왜 그럴까요? 
투자에 대한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워런 버핏이라는 사람은 투자하는 길을 알고 있어요. 
부자가 되는 길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길을 아는 사람한테 한 번이라도 좀 물어보고 싶어서 
그 기회를 잡고 싶어서 엄청난 돈을 지불하면서 그 앞에까지 나갑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여러분 예수 앞에 섰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행운 아닙니까? 
수백만물이 아니라, 수천만불을 지불하고라도 만나야 될 분이죠.

인생의 길을 알고 계신 분, 죽음과 부활의 길을 알고 계신 분,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고 계신 분.. 그런 분 앞에 나온다는 거예요. 

본문의 사람들은, 지금 어마어마한 기회를 잡은 거예요. 
그런데도 참 슬프고 불행하게도 
이 바리새인들과 또 뒤에 나오는 사두개인들은 
그 기회를 전혀 살려내지 못했어요. 
오히려 그것이 이들에게 큰 해가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네, 잘못된 태도! 
여러분 워런 버핏 한테 나가서 수백만불을 지불하고 나갔는데 
그럼 뭐를 물어보겠어요? 투자의 길을 물어봐야지요. 

워런 버핏 한테 나가서, 괜히 그를 책잡으러 나가느라고 
수백만불 투자했다면, 얼마나 바보 같고 어리석어요? 

예수님 앞에 나갔을 때, 책잡으러 나가는 건, 가장 바보 같은 짓 아닙니까? 
참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예수 앞에 책 잡으러, 시비걸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또 성경을 읽기도 합니다. 그런데 책잡으려고 해요. 
틀린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해요... 

예수께 나오는 올바른 태도는, 책잡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이에요.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 앞에 나와서 인생이 바뀌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간절한 뭔가가 있었어요. 
간절한 뭔가를 가지고 나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손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혈류병 여인 
또 죽어가는 종을 살리기 위해 나왔던 백부장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겠다고 했던 수로보니게 여인,
모두 예수 앞에 나와서 인생이 바뀌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들 중 누구도 책잡으러 나왔던 사람은 없었어요.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예수 앞에 나오십니까? 

책잡는 것에서 더 나가면, 악의적으로 발전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기적인 놈들이야, 종교는 아편이야!' 

여기에는 여러분, 아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태도는, 기대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갈망하는 마음이에요. 
그렇게 예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2) 또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교만한 태도입니다. 
14절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우리가 아노니' 자기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신은 이러 저런 사람입니다. 내가 압니다'

갈릴리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보고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자기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이런저런 종교야'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창조로는 종교의 영역이고,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이야'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고 어떻게 사람이 부활을 해? 
그냥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부활했다고 믿는 거지..'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책이지, 계시는 아니야' 
'예배는 이렇게 저렇게 드리는 거야'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며, 예수 앞에 나아갑니다. 

이 교만한 태도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많이 아시겠어요? 우리가 많이 알겠어요? 
상시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창조주가 많이 알겠어요? 
아니면 우리 피조물이 많이 알겠어요? 

뭐 비교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물으십니다. 
욥에게 물으시는 장면인데 좀 길지만 찾아서 읽어보세요.
저는 이 길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욥38장 전체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폭풍같은 질문들을 욥에게 쏟아내십니다. 
38장에만 질문이 약 40가지에 육박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39장 끝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욥40: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38~39장에 걸쳐 폭풍같은 질문을 욥에게 쏟아내신 이유는
이것이 욥기의 주제이지요.
욥을 겸손하게 만드시는 거에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올바른 태도는 '겸손하게 듣는' 거예요. 

욥은 자신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 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한탄도 있었습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교만하게 묻지 말고,
겸손하게 들으라는 거예요. 

교만하게 계속 말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들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말씀'이라고 얘기하셨어요. 
우리는 듣는 자지요. 

우리는 듣는 자지, 하나님을 시험하고 테스트하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말하는 자가 아니에요. 
손으로 입을 가리우는 자예요. 

이 올바른 태도로 그분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 큰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3)주님 앞에 나아가는 세 번째 잘못된 태도는,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15절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이 외식함으로, 즉 위선적인 태도로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나와서 질문을 하면서 교묘하게 자기들을 포장합니다. 
'뭐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리이까, 말리이까?'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는, 
'우리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야' 
이렇게 교묘하게 애국자처럼 자기를 포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속에는 뭐가 있는 거예요?
종교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에서 오는 질투, 미움, 시기.. 이런 게 가득했죠.

그래서 예수께서 이 외식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될 것은, 왕 앞에 나가는 올바른 태도는 정직 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세요.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 내면을 아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를 속일 수 없어요.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시51: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하나님은 내 중심을 보시는 분이세요.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이 항상 성령 충만하고 항상 거룩하고 그럴 수는 없지요. 
살다 보면 어떨 때는 피폐할 때도 있고, 또 영적으로 침체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죄를 지어서 넘어질 때도 있고 그렇죠. 

그러면 여러분, 왕 앞에 어떻게 나가야 됩니까? 
정직하게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냥 성령 충만하지 않고 피폐해 있으면, 
아닌 척하고 나가지 말고, (정직하게 회개하며 나아가야 하죠) 
이미 다 아신다는 거예요. 

죄 가운데 다 넘어져서 죄에서 뒹굴며 살다가
주일 날은 그냥 멋있게 정장 차려입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렇게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정직하게 나오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세요. 정직하게 나와서 구하라는 거예요. 
'하나님 내 영혼이 피폐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이번 주도 제가 죄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정직하게 나아갈 때, 이미 알고 계시지만 
그 정직한 태도를 하나님께서 예배로 받으시고, 그 위에 축복하시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설교 시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1960년대 히피운동이 
일어나서 젊은 층이 빠져나가고 교회가 어려워졌을 때, 갈보리채플과
척 스미스 목사님이 일어나서, 부흥의 바람을 일으켰는데요.
거기서 '주일 날 양복이나 정장을 입고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답니다.

왜냐면 다들 가정에 부부간에 문제가 있고, 
또 직장과 사회에서도 죄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주일날 아침에는 남자 여자가 다들 정장 깨끗하게 차려 입고
아이들까지 다 새 옷 입혀서 교회 나오면
외관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경건한 가정'으로 보인다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없는.. 신앙생활 잘 해서 아주 경건한 가정으로..
정장 옷이 그렇게 보이게 한다는 거죠. 사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 올 때, 정장 안 입어도 되고, 히피 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나와도 된다고... 교회에서 가이드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게 많이 대중화 되긴 했지만, 시초가 그 이유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드려야 될 예배는 여러분 정직한 제사예요. 
정직한 제사, 그것을 하나님 예배로 받으시는 거에요. 

우리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뭐냐면 위선이에요. 
'그런데 아닌 척 하는 거' 

죄 가운데 넘어져 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음은 지금 피폐해서 정말 탁 무너져 있는데 
마치 영적으로 충만한 것처럼 (설교, 찬양, 예배하는 거) 
이거 하나님이 너무너무 싫어하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크게 질타하셨던 것이 위선이었잖아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왜 그렇게 욕을 먹었어요? 
위선때문이었죠.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구나. 
너희 안에 보면 사망의 냄새, 시체 썩은 것이 우글우글하고 있는데 
겉에는 깨끗하게 칠해놓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회칠한 무덤 같구나!' 

다른 건 하나님께서 좀 이해, 용납하세요. 
그냥 죄가 좀 있어도, 능력이 좀 부족해도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정직하게 
'아이고 내가 또 죄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하면, 
하나님 얼마든지 용서하신다는 거예요.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내가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니세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분이세요. 
정직하게 나가십시다! 

매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까? 
말씀을 읽고, 또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 기도하고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이 태도들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태도로 나가냐에 따라서 
그 시간이 저와 여러분에게 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 마지막 큰 세 번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앞과 뒤를 읽어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며칠 뒤에 예수님을 죽이게 되죠.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앞에 나아갈 때 
꼭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듣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대답을 들을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부담되는 대답을 하시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내가 너무 하기 싫은데, 그거 하라 그러실 때도 있죠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갈라요. 

뭐 우리가 물리적으로 예수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역사상 많은 종교전쟁이 일어났었죠.
신앙문제로, 종교문제로.. 예수의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뭡니까? 
그거는 '아멘' 하는 거예요.

고후1:19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이게 번역이 약간 미묘한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그 뜻은 이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예라는 거예요. 
예, 아니오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왜요? 잘못 말씀하신 적이 없거든요. 실수하시는 적이 없거든요. 
토달지 말라는 거에요.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하기도 하고, 잘못 얘기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세요. 
그래서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예만 있고, 아니오는 없는 거에요. 
항상 예스만 있고 노는 없는 거에요. (항상 맞고, 틀리지 않으세요)

그래서 '아멘'으로 받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거예요. 아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항상 아멘입니다. 
그걸 가지고 이렇게 삐지고, 심지어 예수를 죽이고, 무시하고 
시험 들고... 이렇게 반응해서는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가 없어요. 

유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그분의 말씀 앞에 
우리가 아멘으로 반응하는 건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