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을 살다 보면 많은 경우에... 뭐 대부분 다 그렇죠. 사람들에게는 몇 번의 인생역전의 기회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기회는 이게 대박인 줄 알고 잡았다가 나중에 보니까 이게 쪽박이 되어버린 때도 있고요,
어떤 기회는 이건 뻔히 손해보고 어려운 일인 것은 알지만 도의상, 책임상 감당해야 되기 때문에 그냥 했던 되는데 알고 보니까 이것이 인생역전의 결과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가능한 정보, 기술, 인맥, 능력 이것들을 총동원해서 지금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 기회가 인생대박 인지 아니면 큰 어려움을 자초할 어떤 문제가 될 것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 난리 야단 법썩을 피웁니다.
근데 여러분, 성경은 의외로 이 원리를 아주 간단하게 풀어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실력, 능력, 인맥, 정보... 이게 사실은 하나님께는 별 의미가 없다고 거죠.
'오히려 그 인생의 기회 앞에서 그것을 붙잡고자 하는 나의 마음 중심의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
'그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 일을 진행하고 있는 나의 태도, 과연 그 과정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여기에 더 집중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회'라고 얘기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때'라고 얘기합니다. '기회'와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그 '때'를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 많은 경우 시험과, 고난과, 어떤 문제 라는 포장지로 하나님의 인생역전의 은혜를 이걸로 다 감싸서 주십니다. 그래서 눈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때'를 놓쳐 버리고요.
반대로 성경적으로 보면 굉장히 답답해 보이고, 좀 미련해 보이지만, 그 마음의 중심이 견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과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어떤 전문영역의 실력, 능력, 인맥들, 그런 경험들이 것이 다 무시된다..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실력과 능력이 많은 경험 노하우가 아무리 있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접근하는 마음에 중심의 동기와 태도가 잘못 되어 있으면 오히려 그런 실력과 경험이 없는 만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에 대한 나의 동기, 그 일을 진행하는 나의 태도,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것을 결정하려고 하고,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고, 이것을 행하려고 하는가? .. 그 근본 동기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본문에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성경적 원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기업무를 자, 유력한 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보아스가 결국 그 모든 일들을 온전히 이루어내는, 성취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쭈욱 읽어 보면, 마치 동화 책 한 권을 다 보는 거 같아요. 룻기와 비슷한 스토리가 또 성경에 나오죠.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한 에스더!
여기 보면 굉장히 아름다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동화책에 있는 멋있는 스토리를 읽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어요. 해피엔딩으로 결국은 다 끝납니다.
근데 해피 엔딩이 되기까지 결국은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에 중심과 동기, 또 믿음의 결단과 헌신을 어떻게 했는가? 이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요.
안타까운 것은, 다 해피엔딩 인데 그 가운데서도 해피엔딩으로 안 끝나는 인생들도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해피 엔딩 됐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돼요.
중간에 뭐 어떻게 됐다, 뭐 중간에 대박을 쳤다, 중간에 바닥을 쳤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내 인생이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된다는 거죠.
▲나오미 먼저 나오미라는 인물입니다. 나오미는 이제 흉년이라는 위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기업을 다 내려놓고 모압이라는 세상 방법을 좇아가서 결국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은 절망, 소망 제로의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라는 1:6 딱 그 말씀 하나 듣고, 결국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기업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 돌아오는 사건이 나오미를 비롯하여, 나오미와 함께 왔던 룻의 인생에도 인생역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얘기합니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떻든 간에 지금 나의 연령이 어떻든 간에 지금 내 주어진 상황과 환경이 어떻든 간에
누구에게 하나님의 인생역전의 기회가 여전히 주어지느냐? 아직이라도,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날개 품속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더 가까이 나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전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나오미가 놀라운 것은.. 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다 잃어버리고..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고, 빈털터리이고, 나이만 많고...
영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에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실패한 인생이에요.
그렇게 다 실패했다고 보이는데 그 실패하는 인생 한복판에서도 선한 영향력과 믿음의 덕을 통해서 며느리들의 마음을 삽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룻이 나오미를 향해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고백과 함께 1:16 어머니를 따라오는...
결국 룻이 하나님의 날개 품속인, 그 유업의 땅으로 들어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나오미 였어요.
나오미는 다 실패했는데.. 한 사람 인생을 건져낸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사람이 남습니다. 사람이 남아요! 사람을 남기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제
▲룻 룻은 노년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망 제로인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 땅으로 들어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직까지 자신에게 회복할 기회, 여지가 남아있는 자기의 친정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지만
결국 시모를 따르기로 결정한 거예요. 소망 재로인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결국 여러분, 룻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에요.
계산이 빠르고 이익을 챙기는 여인 같았으면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 마음 씀씀이, 그 마음의 중심이 달랐다는 거에요. 하나님은 그걸 보시고, 룻의 인생 가운데 개입하십니다.
그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차갑고 냉혹합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될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죠.
그냥 그렇게 믿음으로 따라왔다고 해서 갑자기 환경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게 아니에요. 현실을 늘 차갑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하거나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 역할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이삭 줍는 일을 시작하고, 주님은 그 룻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때가 되자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안식과, 그 복의 삶으로 그녀를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
근데 사실 룻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인가요? 룻은 자신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몰라요. 근데 나오미는 알았어요.
그래서 나오미가 룻에게 마땅히 룻이 안식과 복을 누릴 수 있는 계획을 얘기합니다.
그때 룻은, 나오미를 온전히 신뢰하여 그 시어머니의 말씀을 순복함으로써 하나님이 룻을 위하여 예비하신 기업무를 자, 유력한 자인 보아스를 결국 만나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음성, 우리를 유력한 자, 기업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 인생 가운데 놀라운 역전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그분의 섭리 가운데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보아스 먼저 보아스의 배경을 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놀랍게도 보아스의 어머니는 라합, 여리고 성 출신의 이방 여자입니다. 배경은 기생 이었어요. 아버지는 살몬이죠. 마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근데 우연히.. 뭐 하나님의 섭리 라고 볼 수 있죠.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유대인 남자(살몬)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이제 보아스가 태어난 겁니다.
그러면 그 보아스를 바라본 주변에 있는 유대인들의 시선은 어땠을까요? 만약에 보아스의 어머니의 배경을 몰랐다면 몰라도, 뭐 뻔히 다 알죠. 왜요? 여리고 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사람들이 봤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제 삼국에서 정말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여인이 있는데 알고 보니까 이 여인의 배경이 몸을 파는 여인이에요.
근데 한국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는데 우연한 기회에 주변에 동네 사람들이 다 그녀의 배경을 알게 된 거예요...
근데 그 가정을 통해서 이제 애가 태어났다고 봅시다. 그러면 그 애가 태어났을 때, 주변에 마을 사람들이 그 아이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요?
아마 자기 아이들을 불러놓고 그랬을 거에요. '쟤하고는 사귀지 말라. 가까이 하지 마!'
그리고 만약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키면 아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얘기할 거에요. '그거 뻔하지 뭐, 그 배경에 있었던 엄마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며 자랐겠냐?'
그래서 보아스는 아마 많은 눈물, 억울함, 아픔, 쓰라림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 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왜요? 아무도 쉽게 자기랑 같이 놀아 주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네 아버지가 누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아스가 결국은 나중에 유력한 자가 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덕과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에게는, 늘 자유 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건 어머니가 이방 여인의 출신, 이스라엘 순수혈통의 배경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가 늘 따라오는 거예요.
이런 거 많죠. 노력해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어요.
뭐 저 같은 경우는, 이것저것 노력해서 제가 몸도 가꾸고 하지만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머리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이거는 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에요.
몸을 팔던 이방 여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신! 이건 어떻게 바꿀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놀라운 것은, 이 보아스의 인생 가운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요. 평생을 살아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치욕적인 문제를 하나님은 정말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완전히 역전시켜 버립니다.
자기도 이방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방 출신 배경을 갖고 있는데 자기가 새로운 아내로 얻은 여인도 이방 여자예요. 모압 여인.
근데 놀라운 것은, 그 이방 여인을 통해서 낳은 그 후손이 결국은 다윗의 혈통이 되고 오실 메시아의 혈통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족보들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그런 족보로, 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통로로 쓰임 받는 가문이 돼 버립니다. 할렐루야!
자기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그 부분을 하나님은, 또 하나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보다도, 더 탁월한 유대인의 족보가 있겠습니까? 다윗의 혈통 만큼이나 더 탁월한 혈통과 족보가 있겠습니까? 없죠. 근데 하나님은 이 일을 완전히 이루어버리신 거예요.
저는 한 가지 믿는 게 있어요. 우리의 출신과 배경, 우리의 어떤 과거, 우리의 연약함 실수, 부족한 것들, 이것이 어떠하던 간에,
결국 '지금, 오늘' 이라는 현 시점에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신 그 말씀에 반응하여 순종할 때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반전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내 미래 가운데 예정되어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여전히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성경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여러분, 이 말씀을 가볍게 대하지 마세요.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무슨 뜻입니까?
'네 믿음의 분량만큼 네 인생이다' 라는 거에요.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이, 네 인생이라는 거예요.
이거는 굉장히 놀랍고도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하지만 결국은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실체, 분량 그거에 따라 결국은 내 인생이 결정된다는 거에요. 여러분은 어떤 믿음 갖고 계세요?
저는 지금도 믿음이 있어요. 내 인생의 놀라운 역전 반전, 내 인생의 베스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스스로 선포하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은 여전히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과정 가운데 몇 가지 좀 살펴 볼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기업 무를 자'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데요.
가령 한 가정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기에게 허락해준 하나님의 기업인 땅을 팔아버린 경우
친족들이 그 땅을 되사서, 원래 주인(친족)에게 돌려주거나 아니면 희년이 되면, 그 땅을 팔았던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허락해 주신 그 땅이 다른 사람의 소속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에요. 굉장히 탁월한 법이죠. *일종의 '토지 공개념'
나오미 같은 케이스는 뭐냐면, 모압 땅으로 떠날 때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그 하나님의 기업의 땅을 팔았을 것으로 봐요.
그리고 나오미만 돌아왔는데, 그 땅을 회복해야 되니까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사서 엘리멜렉 가정에 돌려주면.. 회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본인이 감당하고 싶지만 본인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기 때문에, 성문 앞에서, 동네 사람들의 보는 앞에서, 먼저 더 가까운 친족에게 묻습니다.
룻4: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그런데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은 왜 자기의 '기업무를 권한'을 포기했던 것일까요?
물론 자기 재산 상의 손해가 나니까 그랬겠죠. 그런데 그 보다도, 룻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죠.
한 여인이 마음 씀씀이와, 삶을 대하는 성실함과 성숙함, 이게 얼마나 귀한 인간의 가치인가 하는 것을.. 몰랐던 거죠.
사람의 인격, 가치, 마음 중심, 이게 얼마나 귀하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 가까운 친족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거죠.
그의 가치 기준은, 손해가 되느냐, 이익이 되느냐? 이것에 따라 결정을 하니까, 룻이 눈에 들어오지 않죠.
그리고 그 가까운 친족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업무를 권리'를 좀 더 심각하게 신앙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보아스가 받을 축복을, 자기가 받았을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기업무를 권리'를 신앙이 없으니까 그냥 무슨 밥그릇 차버리듯이,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는 거죠.
그 사람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에서 기억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죠.
그래서 많은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놓쳐 버려요.
사람마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몇 번의 반전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평가할 때, '이게 내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그것에 따라 결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의 때를 놓쳐버려요.
그리고, 그 친족처럼, 하나님의 정하신 규칙, 즉 성령의 원리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 원리대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반전의 기회'들을 정말 헌 밥그릇 차버리듯이, 제 발로 걷어차 버리고 만다는 거죠.
▲이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줬던 사건이 성경에 나옵니다. 저는 그래서 성경의 이 부분을 되게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폐위당하고 결국 죽죠. 그다음에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는 그 과도기, 어마어마한 격변기 시간이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격변기 가운데 어떻게 이 기회를 통해서 자기 한 몫 챙기고, 어떻게 출세하고 뭔가 하나 붙잡을까? 난리를 칩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 왕이 등극하는 그 정세가 불안하고 혼란스런 과정가운데 머리 빠르고 계산 빠른 수많은 사람들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떻게든지 이 기회에 가운데 자기가 그 밑에서 권력 잡고, 실권 잡으려고 어마어마하게 머리를 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기회주의자들이죠.
근데 여러분 이 사람들은 결국은 다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고 정말 미련하고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다윗은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로 쓰임받게 됩니다.
눈에 보이고 잡히는 거 챙기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은 아침 이슬처럼, 태양이 딱 떠오를때 결국은 다 사라지지만
다윗은 태양이 떠오를 때, 태양 빛을 받아서 역사의 무대로 딱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으로 쓰임을 받죠.
오늘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의 인생을 보면, *증조부 보아스-오벳-이새-다윗 정확하게 동일한 모습이 나와요.
그 가까운 친족이 포기해서, 기업 무를 권리가 보아스 차례가 됩니다. 그는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합니다.
돈 주고 땅 사야 돼요.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해서 자녀를 났습니다.
그러면 그 자녀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자기가 품는 게 아니라, 나오미에게 줘야 돼요. 즉 엘리멜렉 가문에게 줘야 돼요.
산 땅은, 그 아이가 장성에서 기업 무를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성인이 되면, 그 땅을 그 아들에게 줘야 돼요. 4: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가 이 일을 왜 했는가? 두 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1 첫 번째,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기업 무르기)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남의 기업 무를 땅을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요즘 시세로 집 한채 값이에요. 그거 다 지불해야 되는 거에요.
그걸 왜 했느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해서 그랬던 거예요.
여러분 제가 조심스럽지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정 가운데
이게 나한테 손해가 되고, 이 일로 인해서 내게 어려움이 올 것임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이 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여러분 대에 안 갚으면, 여러분 자녀 때 갚아 주세요.
여러분 자녀 대에 갚아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상급으로도 갚아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는 요행적인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과 법과 완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들어가는데는 늘 '희생'과 '대가 지불'이라는 포장지로 딱 덮어 놓으세요.
왜요? 하나님은 내 마음 중심을 보기 원하시는 거예요. '네가 나를 경외함으로 그 결정을 했는가, 안 했는가?' 그걸 보시는 거죠.
또 내가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나의 믿음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고 진실된 믿음이 있는 자는 오히려 그 믿음의 돌파를 통해서 더 높은 신앙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일종의 테스트를 하십니다.
아닌 자는 떨어져 버립니다.
이게 오늘 설교 제목 '인생역전의 기회'라는 거죠. 여러분, 이 돌파가 여러분 가운데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6: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려분, 이 말씀 한 구절만 제대로 이해하고 이 한 구절 따라서만 살아도, 우리 인생은 놀랍게 변화되고, 역전하는 인생이 될 거예요. 신앙생활은요 굉장히 단순합니다. 순종하느냐/못 하느냐.. 그 차이죠.
'목사님,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게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지 않습니까?'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의중, 거기에 먼저 순종 하세요.
'정직하라, 겸손해라, 나누라, 베풀라, 희생하라!' 그게 안 되는데 뭐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경륜과 뜻... 그게 다 허공에 메아리치는.. 아무 의미 없는 얘기예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이미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그 진리, 의중과, 뜻 앞에서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더 깊고 더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경륜에 쓰임 받게 해 주세요...' 다 의미 없는 기도입니다.
신앙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중이 있으면 그것이 비록 내게 손해가 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더라도 '나는 순종한다'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그분이 반드시 더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게 인생역전의 길이고, 이게 룻을 통해, 또한 보아스를 통해 나타났던 것입니다.
▲2 두 번째, 보아스의 가치 기준은 땅에 있는 소유물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가치 기준은, 하늘에 있었어요. 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사람'에 있었어요.
여러분 잘 들어 보세요. 많은 경우,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합니다. 이게 애매하지 않아요.
-땅의 것을 결정 하던지, -사람을 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거예요. 둘 중 하나에요.
사업을 하시던, 직장 생활을 하시던 어떤 전문 영역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삶을 사시는 분이던
여러분의 실질적인 삶의 현장 가운데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여러분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는 거예요.
-땅에 있는 재물, 땅에 있는 소유, 땅에 있는 것들을 취할 것인가? -사람을 얻을 것을, 사람을 살릴 것을, 사람을 세울 것을 결정할 것인가? 이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는 겁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마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자기 보물이 '땅'인 사람은, 자기 마음이 땅에 있고 자기 보물이 '사람'인 사람은, 자기 마음이 '사람'에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붙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하고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거에요.
마치는 말
마5장~7장, 팔복으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다른 차원의 삶으로의 초청, 다른 즉 천국 차원의 신앙에 대한 초청,
이 놀라운 반전(인생 역전)을 이루고자 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능력과 지혜로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요청할 때, 믿음으로 결단 할 때,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뒤딜 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그 신앙과 삶의 레벨들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 돌파 돼요.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예수의 피값으로 사신 그 목적과 뜻대로 신앙의 레벨과 믿음의 레벨이 땅에 있는 것들에 매여 끌려다니는 수준이 아니라 하늘의 가지를 취하여, 믿음으로 땅에 오히려 풀어내어
땅이 만들어 놓은 판단, 기준.. 거기에 끌려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판 자체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닦아 버리는... 판을 주도하는, 세상을 변혁하는, 사도행전에서 얘기한 초대 교인들이 세상을 어지럽혔다, 영어로 '업사이드 다운, 뒤집었다'는 뜻이에요. 그게 판을 바꾸는 거에요.
하늘의 가치와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 판 자체를 뒤집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할렐루야!
무엇을 좇아 가시겠어요? 무엇이 여러분의 가치 기준 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가치가 하늘 것으로 변화(돌파) 되지 않는 이상, 믿음의 레벨이 하늘의 것으로 업그레이드 되지 않는 이상, 우리 삶은 여전히 땅에 있는 것으로 매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목회자인 제 마음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안타까움은 과연 '우리 성도님들이 이 말씀을 정말 얼마나 신중하게, 얼마나 중요하게 과연 받아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알면, 삶이 바뀌어져 버릴 텐데요.
저는 여러분들이 할 수 있으면 큰 어려움과 위기 없이 주의 은혜와 보호하심 가운데 편안하게 사시길 정말 바래요.
어느 목회자가 자기 성도들이, 고생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나는 여러분이 잘 먹고 편안하고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여러분이 인생 끝날 때, 그 마침표를 찍을 때, '땅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살다가 그냥 끝났더라'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피값으로 사 주신 그 목적과 그 계획에 따라 우리 삶이 업그레이드 되고, 신앙이 업그레이드 되어서 정말 후회 없는, 영광스러운 삶으로 마쳐지기를 축복합니다.
'어휴 목사님, 지금 제 삶을 보세요. 지금 제 상황이... 뭐 그렇게 살라는데... 말도 안 됩니다.'
그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 답답하고, 루저 갖고, 찌질하고, 소망 없는 절망적인 인생이라도 룻이나 보아스처럼 복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와,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강권적인 역사가 여전히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그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라도 나오미와 룻처럼 신앙적 판단, 하나님의 뜻에 따른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공사 중인 우리, 공사가 완공할 때까지 동행하시고 끌고 가시고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