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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1

LNCK 2023. 7. 23. 01:01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1 [마가복음40] - - YouTube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1         막14:17~31              마가11~16장 설교모음

 

지난 시간(막39강)에는 가룟 유다와 마리아의 대비되는 점들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끝 부분에 다가가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아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저녁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게 목요일 저녁이었고, '최후의 만찬'으로 알려진 식탁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고, 몇 가지 가르침을 주시고,

그러고 나서 그 다음날 새벽에 이제 기도하시다 잡히셔서

그 다음 날 금요일 날 낮 9시에 이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러니까 아마 십자가에 달리시기 약 열 몇 시간 전의

그때 즈음에 발생한 사건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것들,

자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이 십자가가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오니까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사람들 안에 감춰졌던 민낯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어쩌면 십자가의 영적인 능력인 것 같아요.

 

십자가 앞에 누구든지 서게 되면, 또는 십자가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게 되면

우리 안에 감춰져 있던 것, 나도 모르고, 사람들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던 민낯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는 그런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막14장부터 15장까지, 이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의 사건들을

쭈욱 훑어가다 보면, 그 십자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 숨겨져 있던

뭐 대부분이 다 죄들이지요.

 

그 죄악들..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추악한 모습들, 그 비열한 모습들..

이런 모습들이 다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게 여러분, 십자가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영적인 파워입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때,

또는 십자가가 우리 앞으로 다가올 때

(십자가가 다가온다고 하는 것은, 위기가 다가온다는 뜻이죠)

 

그때는 우리 안에 감춰져 있던..

그래서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고 있던

그런 죄의 민낯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에요.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또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죄의 민낯 뿐만이 아니라,

그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또한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이 두 개를 동시에 드러내요.

-우리 안에 있는 추악하고 비열한 죄들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사하시고 덮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도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막14장과 15장을 읽어보면, 십자가앞에서 드러나고 있는 죄의 모습들은

아주 추악하고, 아주 비열합니다. 또 아주 다양합니다.

 

대충 살펴봐도 14~15장 사이에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감춰진 죄들이 드러나는데

대충 30~40 개 정도의 다양한 죄들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한번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 정말 한두 명이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숨겨졌던 죄들이, 십자가를 둘러싸고서 다 드러나게 됩니다.

 

무슨 얘기냐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어떤 (가룟유다나 빌라도 같은) 한 두 사람의 죄 때문 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감춰져 있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께서 처리하신 것은, 이 드러나는 수많은 죄악들..

십자가앞에 다가서게 되자, 십자가가 다가오게 되자

드러나게 되고, 또 표면으로 올라오게 되는 그 수많은 인간들의 죄악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가 그 죄들을 드러내는 이유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막 들춰내서 끄집어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고, 또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해서 처리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거에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처리하신 것이 무엇인가요?

그런데 그것은 어떤 한 두 사람의 죄가 아니라

십자가 주위에 있던.. 제자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감춰져 있던 죄들이 우후죽순 처럼 막 드러나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단지 그 그 현장에 없었을 뿐이지

만약 우리도 그 현장에 있었다면,

또는 우리도 지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아마 분명히 저와 여러분 안에 감춰져 있던 수많은 추악한 죄들이

드러나게 될 거에요.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한 것은, 바로 그 죄들이라는 거에요.

저와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우리 안에 나도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들도 인식하지 못하고..

보통때는 눌려있고 감춰져 있지만,

십자가앞에 가면 드러나게 되는..

그 비열하고, 추악하고, 아주 다양한 종류의 그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죠.

동시에 그 죄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처리하시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는지..

그 용서의 은혜가 십자가 가운데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서너 시간에 걸쳐서,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30~40가지 정도의 죄악들을 조목조목 살펴보려고 하는데..

참 인간의 죄가 창의적이에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불의와, 다양한 종류의 죄악들을.. 사람들이 행합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최후의 만찬~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뭐 길어야 한 20 시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수많은 죄악들이 드러나는데,

정말 창의적이고 정말 버라이어티한 죄약들이 드러납니다.

 

이게 여러분 타락한 우리의 현실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은, 바로 이 죄악들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 가운데, 십자가의 은혜가 다시 한번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그냥 죄악들이 드러나면서 수치스러워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을 처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죄악을 용서받고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것들이 더 충만하게 풀어지는 시간 되기를.. 축복하고 또 축원합니다.

 

◑자 십자가가 드러내고 있는 죄의 민낯과

또 그 죄를 덮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기를 시작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최후의 만찬입니다.

자 십자가를 바로 눈앞에 둔 이 이 만찬의 자리에서

죄와 긍휼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데요.

 

▲1. 가장 먼저 첫 번째로 드러나는 죄의 모습,

십자가가 드러내는 죄의 민낯은.. <배신>입니다.

 

막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십자가가 다가오자,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예수를 팔아먹습니다.

 

'배신'의 정의는 뭐냐면, 선의를 악의로 갚는 거예요.

유다는 돈궤를 맡았던 자입니다.

돈을 맡길 때는, 신뢰할만한 사람한테 맡깁니다.

그 사람은, 그 그룹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신뢰하고 믿으셨어요.

그런데 이 신뢰에 응답해서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습니다.

 

배신을 당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죄 중에 가장 가장 고통스러운 죄가 배신입니다.

 

다른 것들은.. 뭐 원수가 나한테 해코지 하거나,

또는 사이 안 좋은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은.. 괴롭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배신은 좀 달라요. 배신은 믿었던 사람한테 얻어 맞는 거라서요.

몸만 괴로운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이 다 상해요.

 

그래서 다른 죄악들은, 우리의 겉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면,

배신은 우리 겉사람과 속사람을 모두 다 고통스럽게 하고 무너뜨립니다.

 

자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배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영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면 죄의 시작인 선악과 사건을 생각해보세요.

선악과 사건의 본질은.. 배신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무런 악의도 행하신 게 없어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모든 선한 것을 주시고, 항상 축복하셨는데

이런 악의가 하나도 없는 선의에서부터, 갑자기 배신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 사건도, 그 시작점이 뭐냐면

유다의 배신입니다. *원죄처럼

 

예수께서 아무런 죄가 없으셨는데, 선의만 행하셨는데

갑자기 악의로 되갚는 거에요.

 

선악과 사건, 최초의 죄였던 원죄도

아무런 하나님의 악의가 없으셨어요. 제일 좋은 것들만 주셨는데

갑자기 아담과 하와가 배신하면서, 죄가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자 그래서 '배신'의 독특한 점이 뭐냐면, 죄의 시작점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죄들은, 대부분 죄가 죄를 낳습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미움이 미움을 낳고

전쟁이 전쟁을 낳죠.

이런 패턴을 가지는데.. 배신은 좀 달라요.

 

배신은 죄가 죄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악의가 없고, 아무런 죄가 없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죄가 배신이에요.

 

그래서 선악과도 배신으로 시작하고, 십자가도 배신으로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이

바로 선악과의 죄였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물론 선악과 사건이 있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과 (범죄의)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 선악과 사건과 십자가 사건이 바로 연결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제2의 아담이 되신 것처럼)

 

그러니까 선악과 사건에서

아무 악의가 없고, 아무런 불의가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환경 가운데

아담과 하와가 배신하면서 죄가 시작됐는데,

 

이 십자가 사건을 보면, 긴 역사를 뛰어넘어서 똑같은 일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잘못하신 게 하나도 없으셨어요. 예수님은 완벽하신 분이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이 툭 튀어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선악과 사건에 대자뷰가 일어나는 거에요.

 

그래서 영적으로는, 선악과에서 일어났던 이 원죄가

다시 가룟유다를 통해서 다시 리마인드 되면서

예수께서 이 사건을 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시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죄들도 있지만

인간의 원죄, 하나님을 배신하며 떠났던 이 모든 결과들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지시고 처리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배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났던..

그래서 겪고 있는 모든 죄의 결과들을

예수께서 다시 회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배신의 못이 박혀 있습니다.

 

▲2. 두번째 드러나는 죄의 민낯은 <억울한 희생>입니다.

 

막14:22~24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자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리십니다.

이 피는 억울한 피이고, 이 죽음은 억울한 죽음입니다.

 

자 이것이 십자가가 드러내는 죄의 모습입니다.

죄는 여러분, 억울함을 낳습니다.

 

나의 죄의 결과는, 억울한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가져옵니다.

죄는, 억울한 사람이 희생과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면에서 죄는, 하나님의 속성하고 대척점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걸 아주 싫어하시거든요.

불의 한 것을 아주 싫어하세요.

 

성경을 몇 구절 살펴보겠습니다.

 

신24: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잡지 말라'

 

시72:4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잠18:5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애3: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불공평함을 아주 싫어하는 분이세요.

그래서 그분의 호칭은 '공의'고, 그 분의 이름은 '공평'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죄의 모습은 '억울함'입니다.

죄를 짓는 자와, 그 결과를 치르는 자가 다른 것이죠.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있고, (억울하게) 도둑질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이 있고, (억울하게) 살인을 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또 음주운전하는 사람이 있고, 음주운전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이 억울함은 죄의 본질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안에 깊이 감추어 있던 이 죄의 민낯인 억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광기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분노로 인하여

예수께서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 죄의 민낯이고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용서, 치유)하신 것은

이 억울함이에요. 죄가 만들어내는 모든 종류의 억울함,

그 억울함이 저와 여러분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한' 이라 그러잖아요. 계속 억울한 일을 당하면, 뭔가 쌓이고 '한'이 생기죠.

 

이 억울함들을 예수께서 다 지시고, 십자가로 올라가셨다는 거에요.

그렇게 하심으로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억울함들을

주님께서 치유하시고, 그 억울함도 끌어내시는 거에요. 할렐루야!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를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3. 세번째 드러나는 죄의 모습은 <결핍, 부족함> 입니다.

 

14: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자 여기서 '예수께서 포도나무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는' 얘기를 하시는데

이 말씀은, '제자들과의 교제'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포도주 즐겨마시는데 못 마셔서 서운하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누리는 관계'에 대한 얘기죠.

 

자 십자가가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갈망, 원함이 있었어요.

그건 뭐에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이고,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원함이 있으셨는데,

십자가가 다가오자, 또 십자가상에서.. 이 모든 갈망들이 단절됩니다.

 

그래서 제자들과도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너희가 교제할 수 없을 거야'

또 십자가 위에서도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래서 가장 친밀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됐죠.

 

십자가가 다가오자 죄가 드러나는데, 어떤 죄의 모습이 드러나냐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내가 정말 소원하는 것을 누릴 수 없는..

내가 진짜 원하는 데 가지지 못하는.. 이 <부족함, 결핍함>이 드러나요.

 

죄는 여러분 '결핍함'입니다. 죄가 드러나는 모습 중에 하나는 '결핍'이에요.

정말 원하는 게 있는데, 할 수 없어요.

정말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돼요.

정말 배가 고픈데 먹지 못해요.

정말 목마른데, 마시지 못해요. 이것들이 죄가 가져오는 결과라는 거에요.

 

죄는 우리의 정말 원하는 것들, 정말 갈망하는 것들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결핍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의 '결핍함'을 경험하시죠.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십니다.

목이 마른데 채워지지가 않아요. 결핍함이죠.

 

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데, 누릴 수가 없어요. 결핍함이죠.

결핍은,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죄의 결과요, 속성입니다.

 

그래서 죄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하고,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결핍,

갈망하는 게 있는데 채워지지 못하는 결핍..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셔야 될 것은,

하나님이 원래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신 게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한 세상에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그냥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는데, 당연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데

결핍하게 해주는 부모가 어딨겠어요? 우유를 살 돈이 충분히 있는데

애가 응해 응해 배고프다고 우는데, 먹이지 않는 이런 부모가 어딨겠어요?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그러시겠냐고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실 때

우리가 원하는 게 있어도 누리지 못하고,

정말 우리가 갈망하는 게 있어도 소유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죠.

우리 하나님께는 모든 풍성함이 있고, 모든 풍요로움이 있어요.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의 풍성함을 다 누리도록..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런데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죠.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에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모든 풍요로움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공급선이

끊어져 버린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결핍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록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

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게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고

원래 저와 여러분이 지음받은 모습이에요.

저와 여러분은 풍성하도록 지음받았어요. 결핍하도록 지음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회복된 자는

'풍성함'을 누린다는 거에요.

 

물론 우리 삶가운데는 예수 믿고 나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는

타락한 세상이 있습니다. 아직 심판이 완전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안에도 죄의 영향력들이 남아있고

또 우리 주변에도 타락한 세상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결핍들을, 우리가 시시때때로 겪으면서 살지만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런 결핍들이 전혀 없을 것이고

그 이전에라도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때는

항상 풍요로움이 있다는 거에요.

우리의 결핍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생명수가 있다는 거에요.

 

그 다음에, 우리의 모든 피로를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분이시라는 거에요.

그래서 마6장에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러셨죠.

다 채우신다고요.

 

우리 하나님의 나라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결핍하도록 만들지 않았어요.

 

우리를 결핍과 가난으로 밀어 넣은 것은.. 죄예요.

배신하고 하나님을 떠난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풍성함을 빼앗기고, 결핍과 가난속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이 결핍과 가난함이 드러나는 것은..

그것을 치유하시겠다는 거에요. 그것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결핍함을 경험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셨다는 거에요. 이 십자가의 능력들이

다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죄가 드러내는 네 번째 모습은 <혼돈>입니다.

 

막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짐승들 중에 목자, 주인에게 가장 많이 의존하는 짐승이, 개와 양이에요.

개보다 양이 조금 더 심해요.

 

개는 사람 손에 키워줘야만 하지만, 그냥 두면 또 들개로 그냥 살아가요.

근데 양은 하여간 주인이 없으면 그냥 죽어요.

 

근데 얼마 전에 제가 인터넷에서 유기견을 한번 본 적이 있어요.

어떤 나쁜 주인이 자기 개를 이제 버리려고

이렇게 산책하는 척 끌고 나왔다가, 그냥 줄을 슬그머니 놓아 버리는 거에요.

그리고 주인이 도망가버리는 게 이게 CCTV에 찍혔어요.

 

근데 개가 조금 가다가 뭔가 싸한 거에요.

그래서 뒤를 돌아가보니까 주인이 없네요.

그러니까 이 개가 패닉이 되더라고요.

 

걔가 패닉이 돼서 막 사방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막 이리로 뛰고 저리로 뛰고, 주인이 여기 있나 저기 있나 주인을 찾고,

사람만 지나가면 주인인가 그래서 막 좇아가서 쳐다보고....

 

그 얘기를 하시는 거에요. 목자 잃은 양,

죄는 우리를 목자 잃은 양 같이 만든다는 거에요.

갈 곳을 알지 못해요. 무엇을 해야 될지를 알지 못해요.

모든 것이 혼돈이에요. 어디로 가야 될지, 무엇을 해야 될지 몰라서 혼란스럽습니다. 열심히 인생길을 가는데 불안합니다.

 

열심히 인생길을 갔는데 '이 길이 맞나?' 당황합니다.

열심히 뭔가 하하는데 '이게 뭐하는 거지?' 확신이 없어요.

열심히 어디로 가는데 '이 길이 맞나?' 온통 혼란스러워요.

한참을 열심히 간다고 갔는데.. 뒤돌아보면, 간 게 아니고 방황한 거에요.

 

이게 여러분 십자가가 드러내는 죄의 모습이에요.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막14:27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조금 있다가 진짜 양들이 이렇게 됐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는, 제자들이 다 흩어져 도망갑니다.

그러고는 이제 그 다음부터는 혼돈이에요. 우왕좌왕 갈팡질팡 했죠.

'이게 뭐하는 거지? 내 인생이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하고 방황했을 거에요.

이게 여러분 죄의 결과라는 거에요.

 

▲5. 십자가앞에서 드러나는 다섯 번째는 <실패와 그 실패로 인한 낙심>이에요.

 

3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에게는, 평생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평생 예수를 좇겠다고 하는 소원이 있었고, 결심이 있었어요.

예수를 배신한다고는 1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여러분, 베드로는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또 가난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었어요.

 

그런 베드로가 평생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가지고 있었던 자부심 중에

하나가 뭐였냐면 '나는 그래도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야' 이거였어요.

'나는 그래도 누구를 배신하고, 비겁하게 도망가는 그런 사람은 아니야!'

 

그게 베드로의 어떤 최후의 어떤 보루였고, 자존심이었어요.

31절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런데 그날 밤에, 베드로의 비겁하고 치졸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잡히실 때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도망가게 되죠.

자, 이 실패로 말미암아 아주 심하게 베드로가 낙심하게 됩니다.

뭐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아주 심하게 낙심하게 됩니다.

 

실패는 항상 낙심을 가져옵니다.

여러분들, 실패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어요?

그 다음에 뭐가 되죠? 위축이 됩니다. 낙심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과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제자들이 뭘하냐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는 모습이 나와요.

낙심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막 기분이 업 되고, 활기차야 정상이잖아요.

막 신나고 익사이팅해져야 되는데,

 

근데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여전히 낙심에 빠져 있어요. 왜죠?

사흘 전에, 예수께서 그 잡히시던 밤에,

비겁하고 치졸하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그 수치심과 그 실패감이

자기들을 아주 낙심하게 만들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나는 아니야.. 우리는 디스퀄리파이더 된 사람들이야..'

그래서 좀 낙심하고, 의기소침해진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가 드러내는 죄의 모습 중에 하나는 '실패와 낙심'입니다.

우리가 전혀 잘못한 게 없고, 최선을 다해도 실패하는 경우도 있어요.

왜요? 타락한 세상에 사니까.

 

그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또 그 죄가 모여서 만든 문화..

그런 세상때문에, 뭐 내가 최선을 다하고 선의로 해도..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그림에서 볼 때,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실패는.. 죄의 결과가 맞아요.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이 실패하도록 창조하신 게 아니죠.

반대로 항상 성공하고 풍성하도록 창조하셨죠. 창1:27~28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가, 이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 타락한 세상 가운데 사는 인간은

관계에 있어서도 실패를 맛보고, 자기가 소원하는 것도 실패하고,

사명에도 실패하고... 계속 실패 속에 삽니다.

 

그리고 이 실패는 또한 낙심을 낳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워낙 오래 살다보니까

이 실패와 낙심의 환경에, 그냥 익숙해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구원 받은 우리는, 이 환경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에 익숙해져야 돼요.

왜냐하면 그게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본질이니까요!

 

그래서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을 향해서, 주님은 뭐라 그러셨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도다!' 막9:23

 

그게 우리의 본질이에요.

죄에서 구원받은, 십자가를 통과한 저와 여러분의 본모습이에요.

절대로 여러분 실패에 익숙해지지 마세요.

실패 때문에 낙심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사실 여러분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게 낙심이에요.

실패는 살다 보면 어쩌다 한 두 번 할 수 있어요.

왜냐면 구원받은 성도도 타락한 세상에 사니까.

 

내가 꼭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도, 뭐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 때문에

내가 손해볼 수도 있고, 또 문화 자체가 워낙 타락한 문화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 꼭 승리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뭐 실패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낙심에는 사로잡히지 말아야 돼요.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게 낙심이에요.

실패는 한번 이지만, 낙심은 매일 계속되는 실패를 만들어냅니다.

낙심은 우리를 주저앉아 있게 하고, 장기간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낙심은 새로운 시도를 거부하고,

다시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함몰돼서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시간의 흐름 끝에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소망이나 축복이 아니죠.

더 큰 절망과 저주만 기다리는거에요.

절대로 여러분, 낙심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내어주지 마세요.

 

우리가 실패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기게 하실 거라는 소망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실패해도 다시 소망을 붙잡고 일어나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에요.

 

왜냐면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은 실패하도록 지음받은 게 아니고,

성공하도록 지음받았어요. 할렐루야!

 

▲6. 여섯 번째 드러내시는 모습은, 5번째 '실패와 낙심'과 깊게 연결된 것인데

그것은 <한계> 예요. 한계, 리미트가 있다는 거예요.

 

이런 실패와 낙심이 어디서부터 옵니까?

내가 한계가 있으니까 오는 거죠. 내 '한계'로부터 기인합니다.

 

능력이 부족하든, 의지가 부족하든,

하여간 내가 뭔가 한계 속에 있기 때문에

결국 성공을 못하는 거잖아요.

 

죄는 우리를 가두고 속박하는데, 그건 뭐냐하면 '한계'에요.

'너는 이 한계 안에 있는 존재야, 너의 의지는, 너의 능력은

네 작은 한계 안에 있는 거야!'

이렇게 죄는, 우리를 속박하고 한계 지으려고 해요.

 

아니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짓지 않으셨어요.

절대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를 제한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어요. 죄가 우리를 가둬버린 거에요.

의지도, 서원도, 원함도 실행할 능력이 없는..

그런 무기력하고 제한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왜요? 죄 때문에!

그래서 십자가앞으로 나아가니까

이 죄의 민낯들이 올라오고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의 한계들...

 

저와 여러분도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십자가가 우리 앞으로 다가올 때,

삶의 위기들이 다가올 때, 신앙에 도전들이 다가올 때...

우리가 한계를 드러내지 않습니까?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 .. 내 의지의 한계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람을 배신하고 그러잖아요 .. 내 의리의 한계죠.

또 내 능력의 한계도 드러나게 돼요...

(제자들이 의리의 한계를 드러내고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한계를 예수께서 처리하신 거에요.

그리고 결코 그 한계에 갇힌 모습에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믿는 자들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약속 속에 사는 것이지,

한계 속에 사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러나 죄악된, 타락한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아요.

 

아뇨. 여러분, 당연한 게 아니에요. 우린 이런 존재가 아니에요. 아멘!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그것을 다 처리하셨고, 그것을 뛰어넘게 하셨어요.

최초의 창조의 원형, 에덴동산의 원형으로 회복시켜 주셨어요.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죠.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십자가가 드러내는 우리의 죄의 모습들을 바라보면

참 암울하고 답답합니다.

 

막14~15장을 제가 쭉 이렇게 말씀을 준비하면서 묵상하면서 보니까

죄의 목록들이 끊임없이 나와요. 끊임없이!

 

아니 곧 짧은 두 장 chapter 가운데, 죄의 목록이 40 개 가까이 나옵니다.

거의 한 절 건너서 한 절 간격으로 나옵니다.

 

인간의 치졸하고 악하고 추악한 모습들이 계속 드러나고요.

그리고 더 괴로운 건 뭐냐면, 그게 우리 모습이라는 거지요.

 

사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서도

똑같은 게 나왔을 거에요. 저와 여러분이 특별하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안에 있는 것은 다 그런 거라는 거죠.

그래서 이걸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우울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에요.

십자가가 드러내는 더 강력하고, 더 영광되고, 더 파워풀한 게 있는데...

그건 뭐냐면, 이 모든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십자가에서 너희 죄가 드러나는게 끝이 아니라는 거에요.

너희의 실패와 너희의 좌절과 너희의 한계와

어찌할 수 없는 모습들이 드러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에요.

 

'내가 다시 살아날 거야'.

성공하고 승리할 거라는 약속이에요.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승리가 약속돼 있다는 거에요.

'내가 이 모든 죄악들을 꺾고 승리할 거야!'

 

그러면서 아주 중요하고도 애매한 말씀을 하십니다.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니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제자들의 입장에 좀 서 봐야 돼요.

그랬을 때 '갈릴리로 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조금 감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에게, 갈릴리가 어떤 곳이었을까요?

예수님에게 갈릴리가 어떤 곳이었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갈릴리로 갈거야' 일까요?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첫번째 의미는, 갈릴리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곳이에요.

 

그 전까지 제자들의 인생은, 그냥 평범하고 허무하고 의미 없는 인생이었어요.

평생을 그 조그만 호수 끼고 살면서

태어나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고기잡다가 먹고 사는 인생,

도대체 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딜 향해 가는 건지..

지루하고 허무하고 아무 의미 없던 그 삶 가운데로

예수께서 걸어 들어오셨던 곳이 갈릴리잖아요.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제자들이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아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구나, 아 내 인생이 의미가 있을 수 있구나,

아 내 인생을 향한 뭔가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있구나' 꿈을 꾸기 시작하고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예수님과의 동행이 시작됐던 곳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두 번째 갈릴리의 의미는 뭐냐면, 실패와 낙심의 장소에요.

자 이렇게 꿈꾸면서, 정말 잘되는 것처럼 시작됐던

그 예수를 따르는 삶 가운데 최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죠.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이들의 찬란하고 또 심장 뛰었던 꿈들은 산산조각 부서집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따라가면서 꿈꿨던 것들,

하나는 왕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예수님과 함께 꿈꿨던 그런 꿈들이 아주 산산이 부서집니다.

그리고 실패, 좌절, 정죄, 낙심... 그것이 자기들의 삶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자 이런 제자들이 돌아갔던 곳이 갈릴리에요.

사람들의 꿈도 다 깨졌어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요.

원래 그냥 먹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죠. 어디로 가겠어요?

그래서 이들이 돌아간 곳이 갈릴리입니다. 요21장

 

실패는 사실 예루살렘에서 결정적으로 실패하지만

그 실패로 낙심해서 주저앉았던 곳이 갈릴리 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실패와 낙심의 장소라는 거죠.

 

더이상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더 이상 꿈꿀 꿈도 없고, 또 예수를 따라갈 힘도 없고...

그걸 다 잃어버린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가자' 그리고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말씀하십니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낙심한 제자들에게 찾아가시겠다는 거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실 일은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가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살리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실패와 낙심으로 주저앉은 곳에서,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을 만나서 꿈꾸기 시작합니다.

 

그 갈릴리에서 여러분이 잘 아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열심히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어요. 근데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더니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어요.

 

영혼구원과 부요함에 대한 상징입니다.

십자가가 결핍의 환경을 극복했다는 거에요.

 

또 예수님은 고기를 구워서 아침을 먹이십니다.

부요함에 대한 상징입니다.

 

'내가 배고프다. 내가 목마르다..' 이렇게 십자가가 드러냈던

그 죄의 결과들을 뒤집으신 거예요.

 

풍성하게 고기를 잡게 하시고, 배고픔을 채우시고

그리고 그 유명한 질문을 하시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치라'

그 유명한 초대가 주어집니다.

 

낙심하고 절망한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께서, 다시 붙들어 일으키시는 거예요.

'너는 낙심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지금 본문 막14장은, 이런 회복의 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십자가가 실패와 낙심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메시지를 마칩니다. (여기서는 '회복'을 잠깐 맛만 보았습니다)

'반전과 회복은, 막16장에 가서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