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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엡1:1~2
지난 1강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은
에베소서를 기록하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 (아드리아 해 남쪽) 건너편은 마게도냐에요.
그 마게도냐 밑은 아가야 입니다. *현재의 그리스
또 (에게해) 바다를 건너 그 오른쪽에 소아시아(터키)가 있죠.
소아시아 지역의 굉장히 유명한 큰 도시들이 많이 있죠.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사데, 필라델피아 여러 도시들이 있지만
그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여러 도시들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고른다면 에베소 입니다.
지금 만일 에베소에 가 보면, 현재는 도시가 내륙으로 많이 들어와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는 에베소가 항구로 되어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에베소는 항구였지만, 2천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에
도시가 내륙지방으로 들어와 있어요.
그렇지만 2천 년 전에는 에베소가 항구였었고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전체 중에 유명한 도시들이 많았어요.
로마를 제외한 가장 유명한 세 도시는,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베소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에베소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오늘날의 뭐 뉴욕, 파리처럼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곳이 바로 에베소였죠.
지금은 터키에 속하죠.
마게도냐부터 유럽에 들어가게 되고,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편의 터키는 아시아 편에 속하게 되죠.
오늘도 터키는 국토의 90% 이상은 아시아에 있어요.
10%만 유럽 쪽에 조금 있죠.
그래서 지금도 터키(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에 굉장히 큰 여러 대도시들이 있었기 때문에
장사해서 큰 이익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배를 타고 에베소로 왔어요.
하루에도 수많은 배들이 오갔고,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오갔던 곳이 바로 에베소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1세기에 로마 라는 제국에, 얼마나 많은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있는지를
보고 싶으면 에베소로 가라'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로마제국 전체의 있는 대부분의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다 에베소에 모여 있었어요.
당시에 국제도시란 말이죠.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신을 꼭 갖고 다니죠.
그래서 이 에베소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신이 많았고
로마 제국 전체의 대부분 신들이, 이 에베소에 다 모여 있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이 당시 1세기에는 에베소 시장에
특별히 우상을 파는 큰 시장이 있었다고 해요.
그 우상을 파는 가게에 가면, 형형색색의 수많은 모양이 다양한 신들이
진열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 당시에 에베소 도시의 시장에 가면
우상을 파는 가게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일본에도, 수 백만의 신이 있다고들 하죠.
그 정도로 이 당시에 로마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들은, 다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이제 질문 드려볼게요. 누가 누구를 선택하나요?
사람이 신을 선택하나요, 신이 사람을 선택하나요?
에베소에서는 사람이 신을 선택해요. 신이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신을 선택합니다.
자기 소원에 따라서, 너무 보기에 흉측한 신을 선택하기도 하고,
색깔이나 모양이 너무 예쁜 신을 선택하기도 할 거예요.
그런데 바울은,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요. 잘 들어보세요.
당시는 시장에 나가서 사람이 신을 선택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에 편지하기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1:4
누가 누구를 선택했나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했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어요.
여러분 그 당시에 '신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은
어떤 경전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을 선택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 모든 상식을, 사도바울이 한 번에 뒤집어 엎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고 말한 것이에요. 1:4
여러분, 구원은 내 손에 있는 게 아닙니다. 내 결단이 아니에요.
내가 믿은 것 같죠?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신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신 것이에요.
여러분, 구원이 나의 결단에 의해 되어진다면
구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믿으실 수 있으세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게 마음이에요.
옛날에는, 어릴 때는 이게 좋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게 또 좋아져요. 변덕스러워요. 믿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나의 구원이, 그 변덕스러운 내 마음과 결단에 근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약속은, 새끼손가락 걸고, 싸인을 하고, 인감을 찍어도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에요.
그러나 구원은, 사람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 결단이 아닌 것이에요.
내 결정이 아닌 것이에요.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너를 선택했다!' 1:4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당시에 에베소 시장에 가시면 신들이이 진열돼 있다고 했습니다.
신이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신을 선택했습니다.
사람이 신을 선택하는데, 그 선택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기준이 있겠죠.
만일 사람이, 내가, A 신이 아니라, B 신을 선택했다면 이유는 뭐겠습니까?
내 필요를 따라서 선택하는 거예요.
'어떤 신이 내 소원을 잘 들어주겠나?'
'어떤 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겠나?'
'난 지금 아이를 빨리 낳고 싶은데, 옆집 사람이 C라는 신을 섬겨 재미를 봤대..'
그런 자기 이기적 목적에 의해서 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또 A 신을 선택했다가, 뭔가 여의치 않으면 가차 없이 버려버리고
다른 D신을 선택할 거예요. 그리고 더 용한 신을 찾을 겁니다.
사람들이 선택해서 재미봤다는.. 그런 정보를 듣고서, 그 신을 선택할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철저히 자기 필요에 의해서' 신을 선택합니다.
그러다가 효험이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다고 했습니다. 엡1:4
그러면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는, 기준은 뭐겠습니까?
우리가 1강에서 살펴봤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실 때 가지셨던 기대가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었다고 에베소서는 말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가졌던 그 기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설레임, 소망'
'너 불쌍하니까 옛다 구원받아라'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그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 가셨던
그 기대와 소망이 있으셨습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6
(여기에 대해선 3강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2강)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좋은 신과, 나쁜 신이 기준은 뭐겠습니까?
어떤 신이 좋은 신인가요?
어떤 신이 좋지 않은 신인가요?
그건 명확해요. '신의 뜻' 같은 것은 상관없어요.
내 소원을 빨리 들어주면 무조건 '좋은 신'입니다.
아무리 좋다 좋다 해도,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쁜 신이에요.
그게 그 당시 신의 기준입니다. *오늘날도 비슷한 심리죠.
저도 질문 해보고 싶어요. '하나님은 좋은 분이세요? 어떻게 좋은 분이세요?'
내 손 들어 줄 때, 내가 원하는 소원 들어주시면 좋은 분이세요?
그런데 내 소원이 거절 당하면, 하나님은 좋은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만약 그렇다면, 이게 우상 섬기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이름만 하나님, 이름만 여호와, 이름만 예수일 뿐이지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인지도 몰라요.
내가 하나님을 좌지우지 하려고 해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우상을 만들고 좋아할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세요. 십계명 두번째 계명에서
'절대로 나를 어떤 형상에 빗대여 만들지 말아라. 우상을 만들지 마라'
근데 사람들은 그렇게 우상 만드는 걸 좋아해요. 왜일까요?
여러분 신은, 내 눈에 보여야, 내가 편안해요.
시장에서 우상을 사 와서
그 우상이 있을 곳을 누가 결정하는지 아세요? 사람이 결정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기란.. 정말 어렵거든요.
전능하다는 신이, 그 있을 곳을 스스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에요. 사람이 신을 어디에다 놓아두잖아요.
결국 사람들은 우상을 사서, 자기가 원하는 곳에 놓고, 그 신을 섬기는데
그렇다면 누가 도대체 통제하고, 다스리는 겁니까? 우상이 아니라, 사람이죠.
그 우상을 마음대로 이리저리 옮기고, 하는 자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우상의 신인 게죠. 왜냐면 사오고, 전시하고, 마음대로 옮기고 하니까요.
우상은 참 신이 아니라는 얘기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참 신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못 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좌지우지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신과 나쁜 신의 기준은
내 소원이 얼마나 빨리 이루어지느냐로 결정하시면 안 되는 거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소원에 관계 없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소원과, 뜻대로, 기쁨대로.. 우리를 다스리시되
그것이 결국은 우리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다스린다'는 뜻
사도바울이 엡1:3~5절에 기록한 말씀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떻게보면 상식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2천 년 전에 에베소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자기들의 상식을 뒤집어 엎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람이 신을 선택하는 게 아니야, 신이 나를 선택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새로 바꿔버리는 신이.. 무슨 확실한 구원의 보장을 주겠습니까?
◑본론 /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먼 거리에요.
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 이 두 절의 인사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무려 2년 3개월 동안 두란노 라는 곳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했어요.
사도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입니다.
여러분 마게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서는
사도바울은 세 안식일, 즉 21일 동안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에베소에서는 2년 3개월이에요.
그러니까 가장 오래 머물면서 체계적으로 복음을 증거했던 그 에베소.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에베소가 어떤 곳인지 잘 알아요.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문화, 수많은 종교,
그곳 사람들의 상식들, 생각들,
그 음란함이 가득했던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사도바울은 1:1~2절의 짧은 인사말에서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요?
사도바울은 11~2절의 짧은 이 두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군지를 전치사 3가지로 명확히 설명합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1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1
3.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2
여러분, 이 세 단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요?
-예수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자기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사람입니다.
내 소속이 명확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 소속이 불안정할 때, 삶의 불안함을 느껴요. 두려움을 느껴요.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에요.
사도바울은 말해요.
1)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삶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그 예수께서 다 책임지는 것이다' 라고 명확히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내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명확히 기억하세요.
내 직장에서 내가 은퇴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삶은, 절대로 은퇴가 없는 것이에요.
벗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내가 누구한테 속해 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2)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3)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사람이에요.
소망이 필요하세요? 지금 절망가운데 계신 분이 있는가요?
어둠 가운데, 좌절가운데, 죽음의 위협가운데 있는 분이 계세요?
그런 분께는 생명이 필요하겠죠. 소망이 필요하겠죠. 기쁨이 필요하겠죠.
평안이 필요하겠죠.
내게 필요한 평안과, 기쁨과, 희락을.. 저 네온사인 있는 뒷골목에서 찾는 게 아닌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 내 모든 소망을 두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찾는 사람!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사람들이 찾아 헤메는 지식, 그 지혜..
유튜브에 없어요. 대학교 강의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명확히 말하는 것이에요. 예수 안에,
모든 사람들이 찾아헤매는, 그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느니라!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여러분 사람들이 그렇게 공허하게 살면서 찾아헤매는 기쁨과 그 쾌락,
그 행복, 평안함, 웃음은 오직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세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는데, 오직 예수께만 있습니다.
죽음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절망때문에 얼마나 우리가 괴로워합니까?
사람들이 찾아헤매는 그 소망, 생명은
성경은 명확히 말해요. 애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든지, 성경 찢어버리든지 둘 중 하나 라는 것이에요.
대충 믿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군가요?
나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로부터 가져오는 분이에요.
내 모든 공급의 근원을, 예수님 한 분으로 삼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성경에, 본문에 말씀하고 있어요.
멋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그리스도인 멋있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한테 속했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
누가 나를 다스리는지, 누가 내 주인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
나의 소망을.. 어떤 사람, 어떤 CEO 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는 사람!
그렇다면 제가 부탁드리고 싶어요.
아무데서나 무릎 꿇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만 무릎 꿇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만 머리를 숙이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렘33:3절을 암송하시죠.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런데 렘33:3절이 중요한 이유는 그 앞에 있는 2절 때문입니다.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세요? 일을 행하시는 분이세요.
일을 만들며 반드시 성취하세요. 그러니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하시는 거죠.
'다른 우상 찾지 말고, 사람에게 손 내밀지 말고, 너는 나에게 부르짖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 초까지 제주시에서 창세기 세미나 하다가 여기 미국에 왔어요.
지금 한국은 장마입니다.
저희 간사들이 서귀포에 살거든요.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넘어오는데, 안개가 자욱해서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고, 운전을 못할 정도로 심했어요.
평소에 시속 80킬로로 달리던 그 도로를, 시속 20~30킬로만 달려도
두려울 정도로 안개가 자욱해서, 1미터 앞이 안 보였다고 해요.
그렇다면 내 눈에 안 보이면, 길이 없는 겁니까?
아니죠. 내 눈에 안 보일 뿐이에요.
그 안개 따위는, 아침에 햇살만 뜨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안개가 힘을 바랄 수 있는 것은, 햇볕이 없을 때까지만 이에요.
그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열어서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시작해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1:1 멋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어떤 교회나 공동체나 개인에게 편지를 쓰든 기도를 하든
항상 하나님 으로부터 시작해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항상 변함없으신 그 하나님 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변화무쌍한..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그 세상에서
변하지 않을 수가 있지요.
그 한결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삶을 시작하니까
수많은 유혹과, 수많은 고난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결 같을 수가 있겠죠.
왜 우리의 삶은 한결 같지 않을까요?
왜 우리의 삶은 그렇게 요동치는 걸까요?
어쩌면 나는 하루의 시작을, 나의 소원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거죠.
나의 뜻으로, 내 감정으로...
여러분, 오늘 나의 삶을, 내 감정이 다스리지 않도록 하세요.
그 분노, 욕심, 음란함, 내 감정, 내 상처, 내 연민이
나를 다스리지 않도록 싸우십시오.
여러분, 진짜 무서운 감정이 자기 연민이에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
'너는 남편이 있지 않냐, 너는 자녀가 있지 않냐, 넌 집 있지 않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해!'
아니요. 여러분,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쏟아부으셔도 그대로 받지 못합니다.
목사로서의 경험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부으셔도,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 은혜를 고깝게 받아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사랑으로 말해도
'그래 넌 잘났다. 너는 그거 있으니까 날 위로하는 거겠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나의 삶이
나의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지배되도록 기도하십시오.
나의 연민, 특별히 과거의 나의 상처..
어떤 말만 들으면, 어떤 상황만 되면, 어떤 표정만 보면
과거에 대한 상처가 탁 떠올라요. 그래서 나를 한 순간에 무너뜨립니다.
여러분, 나의 뜻, 내 감정, 내 연민이 나를 다스리면.. 나는 한결같을 수 없어요.
늘 요동쳐요.
사도바울에게 상처가 없었겠습니까?
십일년 동안 아홉 번이나 두들겨 맞았어요.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다니는 동안.. 엄청난 고난과 학대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왜 사도바울에게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왜 사도바울에게 연민이 없겠습니까, 섭섭함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알았어요.
섭섭함이 나를 다스린다면..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이, 사람들의 말이 나의 하루를 다스린다면
나는 요동친다, 나는 무너진다, 나는 못 나아간다...
에베소서 뿐만 아니라 로마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시작하죠.
이렇게 예수로부터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도 '예수' 였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는 도중에
몇몇 사람들이 환상 가운데, 혹은 성령께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고, 고난받을 것이다'는 것을
미리 말해줍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성령님께서 그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사도바울이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고 고통, 고난 당한다는 것이에요.
'가지 말라'는 말은 어디도 없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붙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도바울 가지 마세요' 가지 말라는 것은 사람이 붙인 것이에요.
성령께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21:12
근데 사도 바울은 갑니다. 알면서도 갑니다. 이유가 뭔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서 사도바울은 밀레도에서 작별할 때도, 이렇게 말했죠.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그의 말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예요.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한, 사도바울의 답은 하나, 예수 그리스도 였어요.
그 모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 였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김준곤 목사님,
그 분의 유명한 설교가운데 하나가 제목이 "백문일답"입니다.
1백 개의 질문을 쏟아내요.
그 모였던 청년들이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내 삶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지금 내 소망은 어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질문이 1백 개가 이어지고,
답은 항상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서 이게 사라지기 시작해요.
예수보다 중요한 게 하나씩 생기기 시작해요...
여러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거죠.
'당신은 왜 이걸 해야 됩니까? 이거 하면 손해보고, 위험합니다'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면 순종해야죠.
◈그 다음 표현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1b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은
같은 사람입니다. 동격이죠.
골1:2도 마찬가지죠.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은 동격이죠.
본문으로 돌아가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전자가 '지상의 교회, 지역 교회'를 말한 다면
후자는 '천상의 교회, 우주적 교회'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정체성입니다.
우리 육체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이고,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 있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두 가지 정체성이에요.
어떤 사람은 이걸 무시합니다. 그리고 후자만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 강조하면, 안 됩니다.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영적인 것만 강조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체성은
우리의 두 발은, 우리의 육신은, 이 땅에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것이에요.
이 두 가지 균형이 깨어지면 안 됩니다.
에베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오가는 그런 곳이에요.
에베소에는 굉장히 커다란 신전이 있어요. 아데미 신전입니다.
지금 에베소에 가면 기둥이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만,
원래는 127개의 기둥이, 개당 19미터 높이로.. 어마어마한 신전입니다.
혹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가보셨나요? 그것의 4배 정도 크기입니다.
세계 7 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가 그 아데미 신전이에요.
그 아데미 신전 밑에는, 한 1.5미터 되는 조그마한 골방들이
70~80개가 있습니다. 그 골방에 여자 사제들이 들어가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신전 창녀들이에요.
그 신전 창녀들과 성관계를 갖는 게, 그 당시 신전 예배 방식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음란함 이에요.
그러니까 당시 에베소에서는 성욕은 식욕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했어요.
당시 문화가 그렇게 타락했다는 거죠.
여러분 혹시 점심 때 식당에 가셔서 '된장찌개, 김치찌개' 주문하실 때
부끄러운 분이 계세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 것처럼 당시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신전에 올라가서
밥먹듯이 그런 일을 했고, 그걸 누구도 죄악시 하지 않았다는 거죠.
심지어는 아버지가 올라가 보니, 아들도 거기 와 있는 거예요.
그냥 그러려니 했다는 거죠. 거기에 우상제사, 예배하러 온 것이에요.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에, 소아시아 지역에서 발굴된 1세기 동전인데
한 면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있고,
반대면에는, 남녀가 벌거벗고 관계하는 모습이 동전에 새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에베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릴적부터 그런 거 보며 자라는 거죠.
그게 하루도 죄스럽지 여기지 않았던 문화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그런 환경에서 30~40 년 자랐어요.
근데 어느 순간 복음을 듣고, 성령님을 모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면, 죄가 역겨워집니다. 더러워집니다.
그때 성도들은 '우리가 여기를 떠나자.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 공동체를 만들자'
그런 마음도 들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말하는 거예요.
'안 된다. 너희가 에베소를 지키라'고 말한 것이에요.
여러분의 에베소를 떠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에베소를 지키세요.
그리스도 인의 두 가지 정체성은
우리의 육신은 에베소에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실수를 범했을 때가 중세 시대입니다. '옛다 세상을 떠나자!'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도원으로 들어갔어요.
우리는 그 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어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주신, 나의 에베소가 있다면
여러분 그곳에 들어가세요. 그곳을 떠나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단 나의 에베소에서, 내가 살아야될 내 모습은 성도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사람, 구별된 사람을 뜻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이에요.
말하는 방식이, 생각하는 방식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에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세상은 하대하고, 폄하하고, 무시한다 할지라도.. 성도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다른 것이에요. 돈을 쓰는 이유도 다른 것이에요.
여러분의 에베소에서, 성도의 삶을 사세요. 그러나 기억하세요.
동시에 나의 영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