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6: 파괴적인 말들 [마가복음45] - - YouTube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6 파괴적인 말들 막15:16~32
우리 지난 1년 동안 마가복음을 쭉 살펴보고 있는데
이제 거의 마무리할 때가 됐습니다.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더 설교하고, 올해 2020년 말까지 살펴보게 될 텐데
오늘은 막 15장 뒷부분이고, 예수께서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죄를 드러내는 능력이 있다고 했죠.
지난 다섯 번(1~5회)에 걸쳐 살펴봤는데
오늘까지 한 번(6회) 더 십자가가 드러내는
마지막 죄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제 십자가가 구체적으로 행한 일에 대해서
그 다음 번에는 부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 마가복음이 마치게 됩니다.
십자가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누구든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는 자들은
또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민낯들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근데 그 민낯은 죄와 연약함의 그런 모습이죠.
자 이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무엇을 처리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서 처리하고 넘어가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십자가에서 누리는 능력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죠.
그래서 우리를 하여금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을, 정말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고, 무엇을 용서하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연약함의 모습들을 다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 가운데 이런 죄의 모습들, 또는 연약함의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때는, 우리는 십자가 아래로 가야 됩니다.
그 모습을 덮으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요,
또 감추려고 하는 것도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의 모습이 드러나고, 또 당황스러운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때는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 아래로 가셔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와 연약함들을 처리하신 그 은혜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그 죄를 어떻게 극복하고 나갈 수 있는지,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들을 다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오늘은 이제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여섯 번째 토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희롱
막15:20절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여섯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드러내는,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죄의 모습은
<희롱>이에요. 놀리는 말이죠.
예수님을 골고다 십자가로 끌고 가면서, 또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여러분 가장 많이 했던 적대적인 행위가 뭐였는지 아십니까?
놀리는 거였어요. 계속 놀리는 거였어요.
'유대인의 왕이여.. 너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면서, 너 자신은 구원 못 하느냐?'
그러면서 막 낄낄거리고 깔깔거리고...
'네가 메시아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고
계속 놀리고 희롱하는 거였습니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그러니까 마지막에 십자가에 딱 못 박아놓고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행했던 가장 많은 행동은.. 희롱하는 거였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그 아래서 히히덕거리면서 희롱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게 농담을 할 자리입니까? 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담할 자리가 아니에요.
만약 우리가 처음으로 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자리에 갔다면
농담이 아니고 패닉이 됐을 겁니다.
사람을.. 개나 돼지도 아니고, 사람을 산채로 십자가에다 못 박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니라 돼지나 그런 것도, 도살하는 장소에 가잖아요.
그러면 그 피 때문에, 그 잔인함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멘붕이 됩니다.
이게 지금 굉장히 잔인한 자리입니다. 개나 돼지같은 짐승도 아니고
사람을 산채로 십자가에 못 박아서, 살점이 다 찢기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막 고통스럽다고 고함 지르고.. 그런 자리잖아요.
예수님 한 분만 그런 것도 아니고, 두 명 더 십자가 형을 집행하면서
사람을 하여간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죽이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건 여러분, 사람이 아주 공포로 전율해야 되는 그런 자리인데
그런데 그 아래 앉아서 하는 게 뭐냐 하면, 낄낄대고 놀리는 거예요.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타락한 인간의 민낯입니다. 얼마나 잔인한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지금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살이 찢기고 피가 다 빠져가면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래에서 농담을 하며 희롱한다?
여러분, 얼마나 잔인한가요? 이게 여러분, 인간의 죄의 민낯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말이에요.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가 아파하든, 죽어가든,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내가 그러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고
오히려 그것을 재밌어하고, 놀리고, 깔깔대고, 희롱하는 거,
이게 여러분 인간의 죄이고, 그 죄가 가져오는 민낯입니다.
완전히 사람들의 모든 공감과 소통이 다 단절된 거에요.
한 사람은 그 위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밑에서 그걸 보면서 깔깔거리고 놀리고 있는,
재밌어하고 있는 사람의 죄의 민낯입니다.
▲자, '희롱'이라고 하는 이 단어의 헬라어를 보면 '엠파이조'라고 하는데요.
이 단어는 말 그대로 희롱하는 겁니다. 놀리다, 비웃다, 조롱하다, 냉소하다,
비아냥거리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하는 사람의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수치심은 모르겠고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재밌다고 낄낄대고 조롱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무서운 건 뭐냐 하면, 이 '희롱'이라는 단어가
오늘날 우리의 문화를 가장 잘 대표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세대는 여러분, 모든 것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세대입니다.
그리고 이 재미를 '희롱'에서 찾습니다. 뭐 희롱이란 말로 부르진 않죠.
유머라 그러기도 하고, 위트라 부르기도 하는데
하여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다른 사람을 놀리고, 다른 사람을 비아냥거리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그렇게 하면서 재미있어하는 문화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요즘 인터넷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아주 이 시대의 특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누가 한 명이 자기 생각이 담긴 글을 올렸어요.
그럼 조그만 틈만 있으면, 그 밑에다 댓글을 달면서, 그걸 꼬고, 비틀고,
그래서 재밌게 만들어가지고서 사람을 바보 쪼다를 만듭니다.
그게 요즘 문화 아니에요.
그럼 또 한 사람이 그렇게 올리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무슨 경쟁이라도 하듯이, 그걸 가지고 또 다르게 꼬고..
아주 창의적으로 희롱하는 말들을 계속 만들어가지고서
사람 하나를 완전히 병신을 만들어버리는..
이게 여러분 요즘 세대의 문화잖아요.
그러면서 그게 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깔깔 대고 웃고 재밌다고 하죠.
또 그 재미를 이어가고자 더 극단적으로 조롱하고,
더 극단적으로 병신을 만들고...
그러니까 여러분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그냥 그게 문화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그렇게 희롱하는 말들, 냉소적인 말들을 올리면서
'좋아요'를 누르면서 환호합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수치스러운 조롱과 냉소의 말을 재생산하고
그것에 더욱 열광합니다.
TV를 봐도 여러분 비슷하지 않습니까?
TV에 나오는 수많은 예능, 오락 프로그램들을 보면
그 주된 컨셉이 뭐냐면, 희롱하는 거에요. 냉소하는 거예요.
그냥 사람 하나에다가 어떤 프레임을 씌워가지고서
'그 사람은 이런 사람'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냥 계속 놀려요.
그냥 그 시간 동안에 내내 놀리다가, 깔깔깔깔 웃다가 그냥 끝나 버리죠.
그러니까 거기에 뭐 살리는 말, 격려하는 말.. 이런 거 나오는 거는 없어요.
모든 예능과 모든 TV가 뭐냐면 다 조롱하는 거에요.
다 희롱하고 조롱하고, 사람의 약점을 잡아가지고 바보로 만들고
놀리고 깔깔대고 막 그게 재밌다 그러죠.
가히 우리는 '희롱의 시대'를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자 이렇게 희롱하는 것들이, 여러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내려와 봐, 내려와 봐! 다른 사람을 구원하면서 너는 스스로 구원 못 하냐?'
이렇게 놀렸던 이 로마 군인들의 잔인함과 뭐가 달라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다른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면서
재미를 느낀다는 면에서는 똑같이 잔인한 거잖아요.
뭐 TV나 이런데 나와가지고,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놀림을 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그렇게 돈 벌자고.. 그렇게 밥 벌어 먹자고.. 그냥 당하는 거지요.
그 희롱은, 당할 때마다 마음이 상하고요, 당할 때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당할 때마다 우리 마음이 파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게 문화고,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그냥 그러고 노는 거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희롱의 시대입니다.
희롱의 문화로 점철된 희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희롱이라는 것의 본질은 어떤 걸까요?
희롱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나의 재미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
그래서 누군가 그 희생양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즐기는 거예요.
재밌어하는 거예요.
이것은 '야 이 곰탱아!' 이렇게 부르는 아주 별것 아닌 농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정말 죽을 정도로 괴롭고 수치스럽게 하는
아주 잔인한 그런 말까지.. 그 본질은 모두 다 동일합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누군가의 자아를 무너뜨리고,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내가 재미를 누리는 것!
나의 재미를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무너뜨리는 것,
이게 여러분 희롱입니다.
희롱은..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멀쩡한 사람을 쪼다로 만들고요.
멀쩡한 사람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멀쩡한 사람의 자아를 파괴하고,
심하면 죽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희롱 때문에,
사실 악플이라는 이름으로 달리는 희롱과 냉소이죠.
이 악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했나 한번 떠올려 보세요.
알려진 사람뿐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스스로 끊었어요.
요즘 뉴스에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아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자살이 뭐 역대급이래요.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자살하는 때가 없었대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매스컴에 보도되면 큰 사회적 문제가 될까봐 쉬쉬하면서
일부러 보도 안 하는 건데...
지금 하여간 자살이 막 행렬을 이루고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자 근데 이게 다 뭐예요? 여러분 이 자살에 큰 비율을 차지하는 원인이
희롱하는 말들, 냉소하고, 저주하는 말들을 통해서 그런 거잖아요.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과 얼마나 상반되는 건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조롱하거나 희롱하신 적이 없으세요.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존귀한 자라고 격려해 주시고요.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자존감을 건강하게 세워주는 분이세요.
'너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고, 너는 모든 축복을 다 받아야 되는 존재이고,
너는 내 생명을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그런 존재야!'
이게 하나님이신데, 타락한 인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거에요.
'너는 쓸데없는 존재이고, 너는 바보 같은 존재이고,
너는 놀림을 받을 만한 존재이고, 너는 다 무너져서 죽어야 되는 존재다..'
이게 여러분 죄가 아니고 뭡니까.
사실 여러분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대의 조롱의 문화를 거부해야 돼요.
여기에 휩쓸려가지고 그냥 똑같이 재밌다고 히히덕거리면
이건 정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이에요. 절대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세요.
▲이 희롱이 무서운 이유는, 사람이 자존감이 무너지면, 영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존감이 무너지면.. 영적인 삶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사람은 말이에요. 영적인 삶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아 그렇구나..'하고 반응할 때, 비로소 영이 움직이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사람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해서 움직인다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와 축복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자존감이 세워집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는 사랑받는 존재구나.
나는 가치 있는 존재고, 나는 존귀한 존재고...'
이렇게 자존감이 건강하게 (비정상적으로 세워지는 거 말고.. 그건 교만이고요)
건강하게 자존감이 세워질 때
비로소 내 영이 정상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희롱은, 이것을 정반대로 행해요.
그러면서 사람의 자존감을 산산조각으로 파괴합니다.
그래서 이거는 단순히 사람을 놀리는 것이 아니고, 영을 파괴하는 행위에요.
조롱은, 사람의 영을 파괴하는 저주에요.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왕따를 당하거나 기타 희롱을 통해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을 상담해 보잖아요.
그러면 정상적으로 신앙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왕따의 상처를 받거나, 아니면 뭐 희롱이나 악플 같은 걸로
심각하게 데미지를 입은 사람들을 만나서 상담을 해보면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다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격려를 해도.. 영이 그냥 움직이지 않아요.
정말 인간 좀비 같은 상태가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의 영이 그냥 스톱 돼 버린 거에요.
자기 자존감이 다 무너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먹어야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아 내가 사랑받는 존재고.. 내가 존귀한 존재고..'
그래야만 우리 영이 정상적으로 풍성하게 작동을 하는데
그걸 다 그냥 씨를 말려버린 거에요.
'너는 쓸데없는 존재고.. 너는 저주받은 존재고..'
어쩌고저쩌고 막 놀리면서 사람의 영을 그냥 스톱시켜버리는 거예요.
자존감이 다 무너지면서, 영이 그냥 죽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이 희롱과 조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놀리고 재밌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멈춰버리는, 영적인 저주라는 거예요.
말이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얘기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내 영이 완전히 스톱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심각하게 놀리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상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
기도가 잘 되고 말씀이 잘 읽히든가요? 안 돼요.
누군가 나를 심각하게 모욕하고 놀리고 이러잖아요.
그러면 그냥 그 안에서 분노, 자괴감, 억울함.. 막 이런 게 돌아가면서
영적인 액티비티는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도 잘 안 되고요. 말씀에 뭐 손도 가지 않아요.
속에서부터 막 그냥 확 불만 올라오고 이러죠.
이게 여러분 영적인 일이 안 일어나요.
그게 이제 데미지로 자꾸 쌓이는 거예요.
자꾸 데미지로 쌓이고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영적인 것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이게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마귀가 이거(희롱)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이게 아주 정말 기가 막힌 마귀의 비장의 무기에요. 왜요?
무슨 말로 놀렸다고 해서, 벌받는 것도 아니거든요.
뭐 때리거나 찌르거나 그러면, 물리적인 벌이라도 받는데
말로 놀린 거 가지고 누가 무슨 벌을 받겠어요?
아주 심하게 하면 무슨 명예훼손죄 이런 게 될 수도 있지만
그냥 뭐 적당히 놀리는 거 가지고... 법의 저촉도 안 받죠.
사람들도 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무슨 문제가 생겨도 '에이, 말 좀 한 거 가지고 뭘 그래?
농담한 거 가지고 뭘 그래?' 그렇게 넘어가죠.
그 희롱을 듣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한테는 별로 책임을 묻지 않아요.
여러분, 마귀 입장에서 이렇게 좋은 무기가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그런데 그 희롱이, 우리의 영은 완전히 파괴시켜 버릴 수 있어요.
이게 여러분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안성맞춤 도구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희롱하는 말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엡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2. 자, 희롱과 비슷한 죄로는 <모욕과 욕함>이 있습니다.
29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서 모욕하고 욕하기 시작합니다.
모욕과 욕은, 희롱과 비슷하게,
비슷한 작용을 하는 파괴적인 말이에요.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동기가 조금 달라요.
희롱은.. 재미를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라면
모욕과 욕은.. 내 안에 있는 분노를 보상받고자 쏟아내는 말이에요.
결과적으로는 똑같아요.
결과적으로는 결국 저주가 되고, 그 사람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내면을 파괴하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하고
결국 영을 멈추게 하는.. 이런 작용은 똑같은데
동기가 좀 달라요.
희롱은.. 재미를 위해서 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모욕과 욕은.. 내 안에 분노가 있고, 뭔가 화나는 게 있는데,
그 분노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또는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거예요. 그게 모욕과 욕입니다.
모욕과 욕도 똑같은 작용을 해요.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이게 저주예요.
그래요 여러분, 모욕과 욕은 저주입니다.
'너는 쓸모없는 존재야, 너는 나쁜 놈이야, 너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도 없어'
그 메시지를 계속 주는 거거든요.
정확히 이렇게 말을 하진 않지만
그런 메시지를 계속 주는 거거든요, 모욕과 욕은...
◑3. <죄패>
자, 오늘 보면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서
말로 짓는 죄의 세 번째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게 사실은, 말로 짓는 죄의 끝판왕이에요.
26절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는 죄패를 붙였습니다.
십자가가 드러내는, 말로 짓는 죄의 끝판왕은 뭐냐면, 죄패를 붙이는 거에요.
낙인을 찍는 거에요. '주홍글씨'라고 그러죠.
요즘 용어로 하면 프레임을 그냥 씌우는 거죠.
'너는 그냥 이런 놈이야' 딱 그렇게 규정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거죠.
'아니야 아니야 나 그런 사람 아니야'
프레임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잔인한지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안 돼요.
그냥 그렇게 찍어버리면 못 빠져나와요.
좌우 이념으로 나뉘어서 서로를 낙인찍기도 하고,
그 외도 여러 가지로 '낙인을 찍으면'
찍힌 사람은,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찍혀본 적이 있으세요?
죄패 한 번 달아본 적이 있으세요?
이게 한 번 달리면 여러분 사람 미치고 환장합니다.
내가 아무리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 아니고 그런 존재가 아니야' 해도
이게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어요.
이게 아주 여러분 정말 잔인한 죄입니다.
말로 사람에 죄패를 붙여버리는 거예요.
죄패를 붙여서 프레임을 씌워버리는 거예요. '너는 그냥 이런 존재야!'
그러면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남에게 죄패를 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쉽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삶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계속 누군가를 향해서 '너는 이런 존재야' 죄패를 계속 붙입니다.
말로 쉽게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참 재밌는 게, 인터넷을 보니까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가?' 이걸 설문조사를 했어요.
'직장 상사한테 또는 배우자한테 또는 친구들한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가?'
해서 설문조사 했는데, 1등이 뭐였는지 아세요?
'너 또 그런다.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이게 1등이었어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설마 그게 1등일까?'
그런데 너무 재밌는 건 뭐냐면, 똑같은 말인데
'또' 나 '항상'을 빼면, 별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별로 거부감을 안 느낀대요.
이런 거예요. '에이 너 과장한다' 그러면은 별로 기분 안 나쁘다는 거죠.
그런데 '에이 너 또 과장한다' 이러면 돌아버린다.
'에이 넌 항상 과장해' 이러면 사람들이 돌아버린다는 거죠.
그러니까 제일 듣기 싫은 게 뭐냐면
똑같은 말인데 딱 한 단어가 더 들어간 거예요. '또' 와 '항상'
그게 가장 사람들이 괴롭고 듣기 싫은 말이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죄패를 다는 거라서 그래요.
그래서 크리스천은, 여러분 웬만하면 진짜 필요한 때가 아니면
'또' 나 '항상'이라는 말을 쓰면 안 돼요.
'너 또 그런다. 너 항상 그런다' 이런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가 드러내는.. 말로 짓는 파괴적인 행동 중에
대표적인 게 이거라는 거예요. 끝판왕이 이거라는 거예요.
희롱하고 조롱하고 그러다가 마지막 끝판 왕이 '죄패를 달아버리는' 거에요.
크리스천은 이런 거 하시면 안 돼요. 죄패를 다시면 안 되고요.
그냥 그 행동에 대해서만 얘기하세요.
자, 희롱, 모욕, 죄패 달기.. 이 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뭘까요?
'말로 짓는 죄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말로 짓는 죄들'이에요.
조롱하고 모욕하고 죄패 달고... 다 말로 짓는 죄들입니다.
▲성경은 우리 말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약3:5~7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야고보 사도가 말의 파괴적인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쭉 이렇게 설명합니다.
희롱, 비아냥거림, 악플, 모욕, 욕, 프레임 만들기
그런 말로 짓는 죄들에 대해서 중요한 권면들을 하고 있습니다.
1) 말의 첫 번째 특징은.. 이 말, 혀라고 하는 것은 몸의 작은 지체라는 거예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작은 지체라는 건 뭐냐 하면, 사람들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에이, 뭐 그까짓 거 말로 한 건데,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뭘 그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이게 문제예요. 말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저 농담으로 한 건데..
그런데 성경, 이 작은 것, 작은 지체가 (혀가)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지 보라는 거예요.
산불이 나서 온 산을 다 태울 때 보면, 조그만 불로 시작한다는 거죠.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말 한마디, 재미있으라고 던졌던 비아냥거리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무서운지..
'삶의 수레바퀴를 불살라버린대요.'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는 거죠.
우리 삶에 여러 영역들이 있고, 수레바퀴가 돌아가듯이 인생이 돌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다 불태워버린다는 거예요. 자아를 파괴하고 영혼을 무너뜨리고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인생이라고 하는 수레바퀴를 아예 불살라버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댓글을 쓰는 사람은 별 생각 없이
재미로 던진 악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의 수레바퀴를 태워버렸는지...
이게 여러분, 말의 능력이에요.
2) 그래서 이어지는 약3:6절에 보면 이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불'이라는 말은 삶을 불태워버리는 파괴적인 죄라는 뜻인데
'불의의 세계'는 무슨 뜻인 것인가요?
'불의의 세계'는 원어로 보면 '악한 세계다' 이런 뜻이에요.
무슨 의미냐면.. 악한 것들이 있어요.
도둑질, 살인, 강도, 간음, 거짓말, 전쟁, 분열, 시기 등 악한 것들이 있는데
이 악한 것들이 만드는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말(로 시작)이라는 거예요.
'불의의 세계'는 거짓말로 나타나기도 하고, 살인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간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뿌리에 가보면 다 '말'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불의의 세계라.. 모든 불의들을 모아 놓은 총체적 세계가 있는데
말이 그 '불의의 세계'를 만든다는 거예요.
이 '말'이라는 것은, 여러분 결국 이 모든 악과 죄의
가장 뿌리에 있는 어떤 악이라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파괴하고
영을 무너뜨리고 결국 삶의 수레바퀴를 불태웁니다.
이런 파괴적인 죄는, 주먹으로 치는 것도 아니고, 칼로 찌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라는 거예요.
희롱하는 말, 모욕하는 말, 죄패를 다는 말, 그저 재미로 한 말
그래서 여러분 이 말은 가볍게 취급하면 안 돼요.
특별히 크리스천은 절대로 가볍게 취급하면 안 돼요.
말은 불의의 세계를 이루는 본질이 되는 거에요.
약3:8~10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3) 자, 여기 보면 '말'은 길들일 수 없고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단이고요.
말은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통로래요.
무슨 뜻이냐면, '말'은 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에요. 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도구가 되는 거죠.
또 찬송과 저주.. 찬송도 그렇고 저주도 그렇고
다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들이잖아요.
말은 그 통로라는 거예요.
말은 여러분, 영을 움직이는 통로라는 거에요.
말은 여러분 영이라는 거예요.
말은, 이 땅에 속한 단순한 소통, 소리가 아니라.. 영에 속한 것입니다.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땅의 것으로 핸들할 수가 없어요. 길들여지지 않아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은 말씀이라' 그랬고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계속 말, 말씀은
'영'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말, 말씀'은 여러분 그냥 단순히 이 세계에서 떠돌아다니는 소리가 아니라는 거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하나님 자체가 말씀이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얼마나 다른지요.
하나님이 곧 말씀이시라는 거에요.
우리의 말이 얼마나 파워풀하고, 얼마나 어마어마한 이런 존재인가 하면
하나님이 그 말씀이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말을 그냥 가볍게 아무것도 아닌 듯이 던지지만
그 말이 태초에 우주를 창조했고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이렇게 말은 영에 속한 거예요.,
말이 왜 영에 속한 건가 잘 보세요. 영적인 존재만 말을 해요.
말을 하는 존재가 뭐뭐 있나 한번 카운트해 보세요.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요.
둘째 천사나 마귀들이 말씀하고요. 말하고요.
셋째, 사람이 말하고요. 그다음에 없어요.
다 영적인 존재잖아요. 영적인 존재 말고는 말하는 존재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이라는 것은 영에 속한 거예요.
이걸 우리가 인식할 때, 우리가 말을 조심할 수 있게 돼요.
말을 적절하게 사용하게 돼요.
함부로 말을 뱉지 마세요. 이건 여러분 영에 속한 거라는 거예요.
자 그래서 여러분 말이 중요합니다.
주먹으로 치고 칼로 찌르고 도둑질하는 물리적인 행동은
그것도 물론 악한 거긴 하지만, 이 땅에 속한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 몸만 괴롭게 합니다.
그런데 말은.. 희롱하고, 모욕하고, 죄패를 씌우고 하는 말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영을 파괴해요.
자아를 무너뜨리게 하고, 영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획, 데스티니를 망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말을 뭐라고 했냐면..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거라고 했어요.
말을 여러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리적인 죄보다 훨씬 치명적인 것이, 말로 짓는 죄입니다.
물리적인 죄는, 물리적인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돼요.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돼요.
몸이 좀 멍이 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되잖아요.
근데 영혼에 입은 상처들이 있잖아요.
말로 영혼이 망가진 것들은, 시간하고 관계가 없더라고요.
시간이 지난다고 회복이 되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면 악화가 돼요.
이게 영에 상처가 난 거기 때문에 그래요. 평생 회복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말은..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불이며,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독이 가득한 악입니다.
◑4. 자, 그렇다면 이 악을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요?
거기에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두고 사람들에게서,
말의 불과 말의 독이 터져 나옵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태우는 불이고, 죽이는 독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를 향해서 희롱하고, 비아냥거리고, 욕하고, 모욕하고, 죄패를 달고...
그냥 말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악한 말의 삼중주..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로 쏟아지는 저주들을 받으시는데
한 마디도 대꾸를 안 하시는 거예요.
막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성경은 예수 십자가의 특징 중 하나로
침묵, 입을 열지 않았다.. 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행8: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사람의 말이 능력이 있겠어요? 예수님의 말이 능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죠.
사람이 말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모욕하고 죽이려고 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 있는 말로, 이것을 누르실 수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당연히 누르실 수 있지요.
더 큰 권위의 말로써, 그것을 무력화시키고 누르실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시고, 침묵하셨다는 거예요. 왜 침묵하셨을까요?
십자가에서 처리하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신 거거든요.
모든 죄와 저주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시려고, 짊어지고 올라가신 거거든요.
그래서 말에 모든 저주가 예수님에게 쏟아질 때
그것을 말로 되받아쳐서 무효화시키지 않으시고, 다 받으신 거예요.
다 받으셔서 그 악독의 힘, 삶의 수레바퀴를 불태우는 그 뜨거운 불,
삶을 다 무너뜨리는 악독한 독, 그거를 그냥 다 받으신 거예요.
다 받으시고 어떻게 하신 거예요.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거예요.
이게 십자가예요.
자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말은 길들여지지 않아요.
말로 상처받은 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복구될 수 없고, 회복될 수 없어요.
영이 상했기 때문에 그래요.
단순히 몸이 상한 것은, 병원에 가면 회복할 수 있지만
영이 상한 것은, 그렇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게 여러분, 평생 따라다닐 수도 있어요.
이 말로 인한 그 파괴는,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그게 십자가에요.
▲우리의 영이 상하게 되면, 세상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돼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이 모든 저주를 처리하심으로써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나오는 자들은
말로 인한 저주들이.. 독이 빠지듯이 다 빠진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이게 여러분 십자가의 진짜 능력인 줄 믿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대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요?
이 희롱의 시대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예, 물론 크리스천들은 희롱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로 저주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 말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보다, 조금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뭐냐면, 우리가 말로 상대를 파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에 의해서 내가 파괴되지 않는 게 더 중요해요.
이게 되지 않으면.. 결국 나도 말로 다른 사람을 파괴하게 될 거거든요.
그렇죠. 여러분, 우리 안에 분노가 있고, 억울함이 있고,
그 모욕당한 것에 대해서 상처가 있으면.. 나도 그런 게 나오게 돼요.
그래서 이 희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말에 의해서 우리의 영이 파괴되지 않는' 거예요.
말 때문에 내가 상처받지 않는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십자가에서 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말로 인해서 우리 안에 억울함이 생기고, 상처가 생기잖아요.
그러면 원망을 하게 되는데, 이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 말로 인해서 상처를 받게 되면, 나도 똑같이 말로 복수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복수한다고 해서, 내 안에 있는 파괴와 고통이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어떨 땐 더 심해져요.
해결책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가야 돼요.
십자가 앞에 나가면, 또 다른 말이 들려와요.
사람들의 저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들려오는 거에요.
'너에게 쏟아진 모든 저주들은 내가 지고 갔다.
너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너에 대해서 뭐라고 욕을 하고, 비난하고, 힐란하고,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해도
그 비난과 저주는 다 나를 향한 것이고, 너를 향한 게 아니야!
내가 이미 십자가에서 그 모욕과 저주를 다 처리했어.
넌 어떤 존재인 줄 알아?
하나님 그 자신이신 예수께서, 생명을 주시고 구원하실 정도로 가치 있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완전한 존재야!' 그게 십자가예요.
모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처리하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말씀하신 하나님의 진리는
'너는.. 사람들이 너에게 저주하는
사람들이 너에게 죄패를 다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그게 정말이었다면, 내 Jesus 가 너를 위해서 생명을 줬겠냐?'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거잖아요.
그게 여러분의 십자가예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상처받지 않으려면
사람의 말을 계속 취하면 안 돼요. 사람의 말을 계속 믿으면 안 돼요.
사람이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좋은 권면의 말씀은 받아들여야 되겠지만
저주하고, 욕하고, 희롱하고, 죄패를 달고...
사람이 무엇이라 말하든지 간에, 그 저주의 말에 귀를 두면 안 돼요.
그건 이미 다 십자가로 쓸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음성을 들어야 돼요.
십자가에서 울려 나오는 말을 들어야 돼요.
이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들을 계속 들어야 돼요.
계속 하나님의 축복과, 축복과, 축복과
우리를 격려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취하고, 거기에 우리 마음을 둘 때.. 우리 영이 살아나는 거예요.
▲이거는 여러분 우리의 선택이에요.
'어느 말을 들을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에요.
세상은 여러분, 어쩔 수 없어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곳인데,
당연히 희롱의 말이 왔다 갔다 합니다.
서로 죄패 달고 저주하고 이러잖아요.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고, 희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차피 모욕과 저주의 말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요? 선택해야 되는 거예요.
-이 저주의 소리들을 계속 내 마음가운데 담아둘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십자가로 다 쏟아내고
십자가가 나에게 하는 얘기를 들을 것인가? 우리가 선택하셔야 돼요.
십자가의 소리들을 들으셔야 돼요.
축복의 소리, 격려의 소리, 사랑의 소리,
이 하나님의 소리를, 즉 말씀을 계속 들을 때,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되고,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우리 인생을 끌고 가게 될 거예요.
이 십자가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누구의 말로 인한 상처가
자기 마음속에 아직 남아있다 하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십자가에서 처리하십시다. 그냥 단순하게 고백하세요.
'주님 내 안에, 말 때문에 이러이러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올려놓고 못 박습니다.
다시는 이런 상처들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처리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주님 내가 세상의 희롱의 소리에 휩쓸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만 듣겠습니다.
십자가의 축복의 음성만 듣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