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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유산

LNCK 2023. 8. 22. 15:38

 

◈믿음의 유산 창26:24~25 인터넷설교 정리

 

믿음의 3대가 되고,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

저희 교회가 가지고 있는 표어입니다.

"성경적인 믿음을 다음 세대에게 성실하게 물려주는 순례자 공동체가 되자"

는 게 저희 비전이에요.

 

원천교회는 우리 세대의 '믿음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잘 물려주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18개 교회가 동역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 질문이 계속 있는 거예요.

'믿음의 유산을 물려준다는 게 뭐를 뜻하지?'

 

여러분 신학생들은 담임 목사님이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거의 다 지금 교육부서에서 일하고 계실 거예요.

 

근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다음 세대를 위해서 사역하고 계시다면

'어떻게 믿음을 물려줄 수 있을까?' 한 번 정도는 고민해 보시지 않으셨나요?

근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제게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의 한 실올타리를 풀어주는, 그런 사건이 되는 스토리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이삭의 이야기는, 전체 50장 중에서

25장 후반, 26장, 27장 전장에 걸쳐 나오지만 아주 짧아요.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은 12~25장까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죠,

그 가운데 이삭 자신은

20장에도 모리아 산에 올라갈 때에 나무 지고 올라간 것,

또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은 것, 이렇게 잠시 나오고,

20장도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주제죠.

이삭은 거기서 조연이었어요.

 

또 이삭 자기 <아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부터 거의 끝까지 계속 나옵니다.

27장에도 이삭 이야기가 잠시 나오는데, 눈 어두워 보지도 못하는데

야곱을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근데 그 27장도 주인공은 '아버지를 속인 야곱'이고, 이삭은 조연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50장 중에,

이삭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곳은, 26장 딱 한 장이에요.

 

이삭 입장에서 보면, 섭섭할 수도 있어요.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이렇게 이어지는 믿음의 가문 중에서

자기만 어떻게 보면 소외되었어요. 성경 저자는 이삭에게 관심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삭 입장'에서 볼 때, 창26장이 너무너무 중요한데,

자기가 온전히 주인공으로 나오는 장은, 26장 딱 한 장밖에 없는데,

 

그 짧은 지면에 소개되는 이삭 자기 이야기가..

참 멋지게 소개되면 좋겠는데, 길지 않은 이삭 자기 이야기가

'비겁한 사람'으로 창26장 서두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어요.

 

26: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은 180세에 소천하십니다. 창36:28

그렇게 긴긴 세월을 살았는데, 성경에 그의 일생을 설명한다면

그 동안 좋은 얘기들, 선행, 미담, 덕담 거리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물론 그 뒤로는, 이삭의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이삭이 농사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백 배의 소출, 거부가 된 얘기 26:12

-이삭이 우물을 두 번이나 양보하고도, 새 우물을 팠던 얘기 :14~22

-하나님이 밤에 이삭에게 나타나 복 주신 내용 :24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비골이 찾아와서 이삭의 믿음을 인정한 얘기 :26~31

 

▲근데 이삭의 이야기의 시작이 뭐냐고요?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왜 이삭의 흑역사, 까발리지 말고

얼마든지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에피소드를.. 성경은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봐요..

 

26:1절에, 아버지 아브라함 때처럼 이삭의 때도 흉년이 들었더니

이삭이 그랄로 가서...

 

여러분, 본문을 한 번 천천히, 자세히 읽어보세요.

그냥 이삭 이야기를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한 던 것처럼 똑같이 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그 증거가 26:1절이에요.

'아버지 아브라함 때처럼 이삭의 때도 흉년이 들었더니..' 라는 식으로 기록했고,

 

또한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이삭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거죠. 26:7~10

 

아니 26:1에서 그냥 이삭 얘기만 하면 안 돼요?

왜 죽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름을 소환해서 거론하면서,

이삭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까?

 

그 성경 저자, 성령님의 의도는

"믿음은 대를 이어간다"는 것이죠.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그대로.. 아들 이삭도 본받아 했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그대로

본받아 따라 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런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창12장과 20장

이삭은 한 번만 속인 것으로 끝났다는 것이죠. *본문26장

 

▲저희 교회 표어가

"성경적인 믿음을, 다음 세대에게 성실하게 물려주는 순례자 공동체가 되자"

이렇게 다음 세대에 신경을 쓰는 저로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긍정적인 면만 물려줬으면 좋겠는데,

부정적인 면까지.. 자녀 대에 물려줬다는 본문의 얘기는.. 꽤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꼭 우리 가정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 기독교를 보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세대, 즉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선배 세대들이 있으세요.

그 믿음의 유산을.. 우리가 음으로 양으로 물려받아서.. 지금 우리 세대가 된 것이고,

 

또한 우리 세대는.. 음으로 양으로 다음 세대에게

우리 믿음의 유산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 거대한 흐름속에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양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김요셉 목사)가 어렸을 때부터 늘 들었던 이야기가 뭐냐면

'아버지 김장환 목사님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어라'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꿈을 어렸을 때부터 꿨는데,

그런 아버지의 굉장한 모습이 어릴적 제 기억속에 새겨진 것은,

저희 아버님이 1973년도에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통역했던 그 광경입니다. 저는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고요.

 

일주일 내내 여의도 광장에서, 아버님께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설교를 통역

했는데, 제가 거기에 아버지따라 매일 갔어요.

 

제 동생들은 아직 어려서, 아빠가 큰아들인 저를 데리고 매일 같이

여의도 광장에 가서, 아버지가 통역하는 모습을 보게 했어요.

 

얼마나 제가 아버님을 존경하고, 아버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게 제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32년이 지나서, 2006년도에, 제 그 꿈이 이뤄졌어요.

제가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릭 워렌 목사님 설교를 통역했거든요.

근데 그때 제 아들이 중학교 2학년 즈음이었어요... *2006.07.13.

*당시 릭워렌 사랑의교회 설교 https://rfcdrfcd.tistory.com/15978119

 

어제 밤에 사진첩을 둘러보다가,

저희 아들이 제게 말했어요. '아빠, 아빠가 그 말한 거 기억나요?'

'무슨 말?'

 

'아빠가 2006년 상암경기장 갈 때, 그 얘기 했거든요.

아빠가 1973년도에 중2학년 때, 빌리 그레이엄 집회 갔는데,

아빠는 그때 감동 받았다고 그랬는데,

나는 2006년도에 상암경기장에 데려갔는데, 나는 감동 별로 안 받았어요!'

 

지금 제 설교의 주제는 '그 아버지의 그 아들' 입니다.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일이, 신기하게 아들에게도 비슷하게 일어난다는 거예요.

 

가정의 범주를 뛰어넘어서,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아버지 세대에 일어났던 일이.. 우리 세대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게 되고,

또한 우리 자녀 세대에도 일어날 것이라는 거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그런 밝은 면이 있었지만,

우리 장로교가 잘 가르치는 전적 타락한 죄인의 모습도 가지고 있죠.

우리 성경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위인으로만 그려내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장 치부, 가장 중심적인 죄성은

자기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아내를 희생하며 자기를 보호했던 쫀쫀한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어요...

오늘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서, 긴장해서 신앙생활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이 등 뒤로, 우리 부모 모습을 다 배우고 있어요.

세대 적으로도 마찬가지이고요.     피의 공명현상 #1

 

◑2009년도에 저희 교회에서 안식년을 줘서

저희 내외가 자녀 4명을 데리고 독일로 갔었어요.

 

자녀가 4명이나 되게 된 사연은, 20년 전에 그때 제가 목회하던 교회는

그렇게 성도 숫자가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회 부흥을 위해서, 아내와 같이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자연 증가'를 축복해 주셔가지고, 자녀를 넷이나 두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독일에 있는 <선교사 자녀학교>에 1년 가서,

제가 성경교사를 하고, 아내는 미술교사를 하려고 같이 갔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왜 그런지 모르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아내와 이런 저런 얘기 나누다가,

 

제가 뭣에 홀렸는지, 아내한테, 제 가슴 깊숙한 이야기를 하나 꺼냈어요.

제가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아버지한테 받은 상처 때문에 아픈 거 하나를

아내한테 얘기했어요. 아내는 교포라서, 우리는 영어로 대화할 때도 있거든요.

 

'Honey, there is only one thing I want to hear from my dad'

'우리 아버지한테 딱 한 가지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나하고 엄마 앞에서, 아버지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거 딱 한 번만 듣고 싶어!'

 

그리고 독일에 가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4명인데, 큰아들은 고3, 둘째가 고2, 8학년, 2학년

이렇게 자녀 넷이 열심히 <선교사 자녀학교>에 잘 다니고 있었는데,

첫째는 아들이고, 나머지 셋은 딸, 딸, 딸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주셨어요.

 

그런데 첫째인 아들이, 18살이고 머리가 큰데

한국에 있을 때는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한국에서는 아들은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느라 바빴고,

나는 내 일 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독일에 가니까, 함께 살면서, 하루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니까

같이 부딪힐 일이 많아지는 거예요.

 

아들이 매일 아빠인 제게 대드는 거에요.

마치 TV '동물의 왕국'에 보면

젊은 숫사자가 이 나이 든 늙은 사자를 막 으르렁거리며 대드는 거 있잖아요.

우리 아들이 꼭 그런 모습으로, 나한테 대드는 거에요.

 

제가 질 것 같습니까? 저는요 윽박지르고, 권위를 부리고,

우리 아들을 이렇게 막 누르고 그랬어요.

 

두 달, 세 달이 지났는데 계속 그러니까

집에서 아내하고 여동생들은 무서워서 막 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밤 늦게 컴퓨터 앞에서 내일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 아들이 제 방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아빠한테 할 얘기가 있대요.

 

아들은 나한테 영어로 말하거든요.

전에 나도 우리 아버지한테 영어로 말했어요.

왜냐하면 영어는 반말 써도 되잖아요. 존댓말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어로 하면 무슨 말하기가 편해요.

 

그래서 '뭐냐, 말해 봐' 그랬더니

'제가 아버지한테 듣고 싶은 말 딱 하나가 있어요.

엄마하고 자기 앞에서, 내(아빠)가 잘못한 거 인정하는 거

그거 딱 한 번만 듣고 싶어요.'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런 말이었어요.

 

근데 그 말을, 아들이 막 울면서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단 아들을 위로하고 달래줬죠. '남자가 왜 울어?'

 

이게 무서운 거죠.

제가 청소년기에 저희 아버지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불만, 바램, 아쉬움을

 

우리 아들이, 이제 아빠가 된 제게, 똑같이 가지고 있더라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일부러 기획한 것은 아닌데,

아브라함-이삭-야곱의 가정처럼, 음으로 양으로 대물림 되고 있더라는 거죠.

 

근데 제가 그때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쿨하게 대처를 하지 못한 거예요,

아들이 제게 하소연할 때,

'그래, 아들아 네 말이 맞다. 아빠가 잘못했어!'

이렇게 인정하고 사과했으면 됐는데,

 

거기서 제가 아들한테, 막 변명하고, 또 훈계하는 거죠.

'나는 항상 네 엄마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아빠야!'

 

아들은 울면서 그냥 나가더라고요.

속으로 '역시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 벽이구나' 라고 생각했겠죠.

 

▲우리가 믿음을 물려받아서, 그 믿음을 우리 자녀들한테 물려주려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어쩌면 믿음보다 죄성이 더 쉽게 물려지는 것 같아요.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지는 것은, 나의 믿음 이전에

우선적으로 나의 죄성이 물려지는 것을 봅니다.

본문 창세기 26장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또 우리 한국교회, 한국 부모님들이

제일 먼저 회복해야 되는 게 뭐냐면

내 자녀에게, 우리 다음 세대에게

나의 죄성이 유전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을, 하나님이 내 아들의 거울을 통해서,

저한테 보여주시기 시작하셨어요.

 

▲안식년이 다 끝나기까지, 거의 1년이 지나도록 저는 아들한테 사과를 못했어요.

그리고 안식년 마치고 이제 한국에 돌아오려고 준비하던 시기였어요.

 

사실 독일에 가서, 제가 굉장히 제 개인적으로 많이 깎임을 당했는데,

왜 그러냐면, 거기 가서 제 존재감이 없어지는 걸 체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설교를 1년 동안 한 번도 못했어요. 초청받지 못한 거죠.

뭐 한인교회는 없고, 선교사학교 채플에서 저를 강단에 세워줘야 되는데,

무슨 이유인지, 저를 한 번도 설교 초대해 주지 않는 거에요.

 

오직 집에서만, 가정 예배드리면서, 우리 아이들 모아놓고만 설교 했죠.

그러다가 제가 마지막으로 설교할 기회를 딱 한 번 얻은 거예요.

 

제가 성경은 수업시간에 많이 가르쳤는데, 학교에 매일 채플 드리거든요.

그런데 그 학교 교장이, 다른 선생님들이나, 다른 선교사님들은 많이 초청해서

설교를 시키는데, 나는 안 시키는 거에요... 제 속이 좀 상했지요.

 

제가 그래도 한국에서는 큰 학교, 1400명 넘는 국제학교의 교장이고요.

우리 학교 채플시간에 제가 얼마나 설교를 많이 했겠어요?

또 목회도 하면서 매주일마다 설교를 했는데,

그 교장은, 그걸 알면서도, 날 설교를 안 시켰던 거예요.

 

'혹시 교장이 한국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나?'

한국에서는, 제가 한국 사람처럼 안 보이지만 (*어머니가 미국인)

외국에 나가면 제가 되게 한국 사람이에요. 다 한국사람으로 봐요..

 

'백인들은 다 설교 시키면서, 왜 나만 안 시킬까?' 막 그러고 있었는데

그 교장이 하루는 날 찾더라고요.

그러면서 '혹시 졸업식 때 설교할 생각 있냐고?'

 

저는 집에 돌아와서 너무 기뻤어요.

1년 만에 처음 설교하는데, 그것도 가장 중요한 졸업식 설교를 나한테 맡겼으니..

그때부터 바로 제가 설교 준비를 시작했어요. 졸업식 한 달 전이었어요.

 

원래 저는 설교준비를 일찍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그 졸업식 설교는 제가 아주 일찍부터 많이 준비했어요.

 

그래서 제가 교육학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고,

거기에다 제가 ppt를 만들었는데, 졸업생들의 사진을 다 모아가지고 편집했어요.

또 그걸 한국에 보내서, 제일 ppt 잘 만드는 우리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그것을 재편집을 하게 해가지고, 멋있는 기능들 다 달아가지고

제가 설교할 때 음악에다 맞춰서 보여주려고 준비했어요.

 

이윽고 졸업식 전 날이 됐는데, 말씀이 정리가 안 되는 거예요.

이유는, 멋있는 예화에, 멋있는 ppt에.. 그러다보니 메시지가 약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밤1시, 2시가 됐는데, 여전히 설교가 제 마음에 안 들어요.

 

몇 번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다시 지웠는지 몰라요.

그러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이 막 몰려오는데,

그때 성령의 음성이 제 귀에 들리는 거예요.

 

성령님이 9개월 전, 처음 독일 왔을 때를 생각나게 하셨어요.

그러고 '오늘 누구 졸업식이니?'

그래서 제가 '우리 선교사학교 3학년 졸업식이고, 우리 아들 졸업식이에요'

 

'근데 너는 지금 누굴 위해서 설교하려고 하는 거니?'

제가 대답을 즉시 못하겠어요.

왜냐면 제 존재감 때문에, 저는 저를 위해서, 설교를 잘 하고 싶었어요.

 

우리 아들이나 다른 거는 생각을 많이 안 했어요.

그때 하나님이, 제가 잊고 있었던 장면을 보여주시더라고요.

 

'네 아들이 네게 딱 하나만 원했다(*아버지가 잘못 인정하는 것)

근데 원하는 그 한 가지가, 네가 십대 때 제일 원했던 거 아니었니?'

 

제가 몸은 너무 피곤했지만,

그 깊은 밤에, 성령의 정죄하심과 성령님의 찌르심을 통해서

제가 그날 밤에 아들한테 편지를 썼어요. 그리고 쓰자마자 잠들어 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졸업식 30분 전이에요. 아내가 저를 막 깨우는 거예요.

근데 설교가 준비가 안 됐어요.

 

어젯 밤에 쓴 편지 한 장 달랑 들고, 아들이랑 같이 졸업식장에 가는데

제가 아들한테 편지를 보여줬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OO아 미안해! 아빠가 진작 너한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러진 못했는데.. 아빠가 너한테 말하기도 힘드니까

여기 편지에 썼어!' 하고 아들한테 편지를 줬어요.

 

아들이 차 안에서 편지를 읽어보더니 막 울더라고요.

'야야, 졸업식에 가야 되니까, 우리 눈물 닦고 들어가자'

아들이 '아빠, 고마워!' 그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을 때, 저는 '오늘 이제 내가 졸업식에 설교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제야 비로소 생각이 났어요.

제가 설교준비를 마치지 못했다는 것을요.

 

그러면서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어요.

성령님이 그 시간에 설교할 주제를, 제게 주신 거예요.

 

'근데 아들아, 설교 준비가 안 됐다. 혹시 그 편지 내게 빌려줄 수 있겠니?'

그래서 졸업식장에서, 설교시간에,

아들이 나한테 한 이야기와,

제가 아들에게 쓴 편지를 읽는 것으로

그날 제 설교를 대신 했어요.

 

그날 저는 다 세지는 못했지만

그 졸업식장에 왔던 아버지들 중에

눈물 안 흘리는 아버지가 없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그거를 제가 영어로 쓴 편지였거든요.

그래서 그거를 나중에 제가 한국말로 번역했는데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의 특새에 갔다가, 거기서 한번 그걸 읽어드렸어요.

 

「OO야, 아빠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후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하느라고

정작 제일 중요.한 너와의 관계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야.

 

나는 너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한 집에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

네게 필요한 아빠의 역할을 다 한 것이라고 착각했어.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는 이 시점에서

이걸 깨달은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르겠어.

 

너는 그런 아빠의 불찰을, 그리고 아빠를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이건 너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잘 수용해 주었는데

 

나는 너의 그런 깊은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아빠였다.

머리로는 아들이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너의 성숙함을 잘 인정하지 않는 아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그리고 아들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가는 영적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을 이 아빠가 삶으로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막아버렸던 나의 모습이 아닌가? .. 하고 후회해.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너무 특별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도록 축복하셨는데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흘려버리지 말고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더 큰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너와 내가 되기를 기도할게!

너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눠서 죄송합니다만

집에서 자녀들과 가족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면

그 믿음은 외식이고, 그리고 교만이고, 가식입니다.

 

하나님이,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인 제게,

아버지의 못난 점을 보게 하신 것과 똑같이

제 부족하고 못난 모습을

제가 저의 아들에게 보여주고 말았어요.

 

'내가 물려받은 것은, 우리 아버지의 믿음을 정말 받고 싶은데

그게 아니라, 내 안에는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죄성의 모습이 더 먼저 있구나... 그걸 물려받고, 아들에게 물려주는 구나..'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그냥 잘 따르는 순종적인 아들인 것처럼 우리한테 보여지지만

아닙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그 제단 위에 자기 몸을 바친 이삭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인 그 이삭조차도

'아버지의 죄성을 가진 아들이구나'

 

▲물론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물려받은 것은,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26: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은 이 3가지 일을 했습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더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그대로 본받아 한 것이에요.

 

아브라함의 행적이 기록된 창12~25장을 함축하고 함축하면,

위 3가지 일이에요. 그는 가는 곳마다

세겜, 베델, 아이. 브엘세바 등 아브라함은 6군데를 유목민으로 옮겨다녔는데요,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예배했고)'

그 다음에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더라'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그대로 합니다. 26:25

 

여러분이 오늘날 신앙생활,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집에서도 성실히 가정예배 드릴 때,

우리 자녀들도, 언젠가는 부모의 신앙을 따라서 그대로 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아브라함의 우물파기 인생"을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제가 그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았는데요.. 이런 얘기였어요.

 

아브라함이 한평생을 영향을 받았던 세속 문화는 뭔지 아세요?

갈대야 우르 지방에서 나올 때, 당시 거기는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 였습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 고고학 유적들이 남아있는데,

'지구라트'라는 아주 높은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이 당시에 있었어요.

 

성경에 창11장에 바벨탑이 나오는데, 지구라트 중에 하나로 봅니다.

그러니까 그 중 가장 높은 것은 바벨탑이었겠지만, 그런 게 하나가 아니었고요.

흙벽돌로 높이 쌓아올린 지구라트('높은 곳'을 뜻함)가 여러 개였다는 거죠.

 

왜냐면 지금도 이라크 그 지역에 가 보면, 지구라트 들이 여럿 남아 있어요.

EBS에서 특집으로 한번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인터넷에도 자료가 많습니다.

 

어쨌든 이 갈대아 우르의 지구라트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똑같이

높은 건축물들이었죠. 세상 성공을 상징하고,

그 지역의 가장 강대국을 상징하고,

문화와 문명의 이기를 상징하는 그런 건축물들이었죠.

 

어떻게 BC 2천년 경에, 그런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었는지 놀랍죠.

다 흙벽돌 덕분입니다. 벽돌을 만들어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거죠.

 

그 웅장한 지구라트 들을, 아브라함은 75년 동안 보고 자라나요.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 비옥한 초생달 지대 Fertile Crescent 가

끝나는 반대편 지역인 가나안 광야에 와서 살다가,

 

또 흉년을 맞아 애굽에까지 내려가는데

애굽에 가서 보니까 또 뭐가 보여요? 바로들이 세워놓은 피라미드가 보여요.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강화됐던 메시지가 뭔지 아세요?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성공하려면

피라미드를 쌓고, 지구라트를 쌓아 올려야 돼!

높은 탑을 세워야 돼, 자기의 뭔가를 드러내고 나타내야 돼!'

 

▲지금 여러분들이 신학교에서 준비하고 있는데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어떤 문명에 영향을 받고 계신가요?

 

하나님의 가치로 목회를 준비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바벨탑과 지구라트처럼

큰 교회, 큰 건물 이런 거 세우는 것이

내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큰 교회와 큰 사역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고, 추구하며 목회를 하느냐.. 는 것이죠.

 

저는 어릴 적부터 귀따갑게 들었던 얘기가

사람들이 저에게 '너는 커서 아버지처럼 큰 목사가 되어야지!'라고 말했을 때,

그분들이 제게 주었던 강화된 메시지는, 성경적인 메시지였을까요?

아니면 그냥 세상이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에다, 목회를 대입시킨 것이었을까요?

 

그분들이 혹시 목회사역의 성공의 기준을,

지구라트나 피라미드를 쌓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그 세상적 가치를

오버랩(겹치기)해서 저에게 강화시켰던 건 아닐까요?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서, 그가 어릴적부터 영향받고 살아왔던

당시 문명도시 우르 에서의 영향은... 다 높은 탑쌓기 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창26장에 보면, 처음에는 이삭이 자기 아버지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거짓말을 했지만,

그 26장 후반부에, 이삭의 성숙된 신앙의 모습을

창세기 저자인 모세가, 뭐라고 기록하고 있는지 보실까요?

 

그건 바로 "우물 파는" 거였어요.

그래서 창26:15절 이하에는, 5번씩이나 우물을 파면서

그가 거했던 그랄 지역에서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 지역) 옮겨다닌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어요.

 

1) 18절에,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2) 19~20절에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그래서 그 우물을 양보했어요. '에섹'이란 이름을 붙혔죠.

 

3) 21절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원래 그 지방 사람들이 텃세를 부리니, 이삭이 우물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4) 22절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5) 32~33절 '(브엘세바에서)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이삭은 이렇게 그 지역에서, 다섯 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이사 가고 우물 파고, 이사 가고 우물 파고...

마치 바보처럼 끊임없이 우물 파기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왜요?

 

▲여러분 지금도 그렇지만, 중동 땅에서 우물 파기는요.

세상적 가치를 가장 역행하는 행위에요.

 

왜 그러냐면 우물을 파면 바보 짓이에요.

물이 너무 귀한 곳이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돌아다니면서

오아시스를 찾든지, 우물이나 샘물을 찾든지...

물을 찾으면, 그 중동의 문화적 특성 때문에, 물은 다 공유할 수밖에 없었어요.

 

자기 물이 아니에요. 그게 합리적이에요. 물 못마시면 사람이 죽으니까요.

그래서 엄청난 돈과 재원을 들여서 우물을 파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함께 마실 수밖에 없는 우물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물 파기는요.. 남 좋은 일 하는 거예요.

물론 자기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우물을 파는 것이지만,

그게 결국은 남 좋은 일 시켜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삭은 다섯 번씩이나, 그 남 좋은 일하고,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또 양보했어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삭은

우르나 애굽의 선진 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무조건 높이 쌓는 문화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서, 우물 파는 인생으로 살았다고요!

 

▲지금 우리는 '다음 세대에 어떻게 믿음의 유산을 남기며 살아가야 될까?'

다들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가, 자기 것부터 챙기고, 자기 권리 따지고,

자기 거 손해 안 보려고 발악하고,

어딘가 부동산이 오르면 거기 투자하려고 좇아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장로고, 집사이고, 교회 헌금 많이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살아서 축복받는 것이 훌륭한 신앙이라고 설교하고 있는 우리들이

성경적인 문화인가요,

아니면 바보처럼 우물파는 이삭의 인생이 성경적인 문화인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것을 희생할 줄 알고, 버릴 줄 알고,

자기 자녀가 공부해서 의사가 되면, 남을 섬기고 살리는 의료선교 하라고

그렇게 자녀를 기를 수 있는 크리스천 부모님들이 어디 있습니까?

 

진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삭은, 우물파기를 했습니다.

 

▲근데 어느 날 제가 성경을 읽다가

요4장을 보는데, 제 안에 작지 않은 감동이 왔어요.

 

구약 창세기에는, 야곱이 우물 팠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근데 요4:6절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길로 가다가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셔서, 우물가의 여인을 전도하시죠.

 

'야곱의 우물?' 구약에는 야곱이 우물 팠다는 얘기가 없지만,

그 우물이 '야곱의 우물'이란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야곱이 팠던 우물이라는.. 개연성을 가지게 되죠. probablity

 

이 설교의 주제가 '믿음의 유산이 전해진다'인데,

이삭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서 우물을 팠던 것처럼,

야곱도 아버지 이삭의 유산을 물려받아서, 우물을 팠다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도 살렸겠지만, 그 지역과 공동체를 살리는 일을 했다는 거죠!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여기서 '우물 물'을, 신약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고 계시죠.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바로 신약적인 우물물이요,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영적인 생수를 구하는 일이

바로 '신약의 우물파기'인 것입니다.

 

후배 사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부모님의 믿음을 물려받았고

또한 자녀에게 믿음을 물려주시길 원하신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먼저 나의 죄성이 있음을 인정하시고,

여러분들이 자녀들의 죄성을 직시하시고

 

그 죄성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나와 우리 자녀들에게 허락하셔서

우리도 이삭처럼

제단 쌓고, 장막 세우고, 우물 파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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