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방주와 무지개 그리고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창9:1~29) (tistory.com)
◈방주와 무지개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1 창9:1~29 ☞ 창세기 설교모음
김성수 목사 창35강 전반부 스크랩
우리는 이제 노아의 홍수 사건 중에서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심판 속에서 꽃 피는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의 은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 6:1~8 '그러나'의 은혜
그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백성들의 참된 안식(죄가 없는 세상)을 위해
더러운 죄들과 그 죄의 세력들을 모두 깨끗이 홍수로 청소를 하시고
오직 당신의 은혜로 창세 전에 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하실 것임을
우리는 노아의 홍수 사건 속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청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는
그 은혜의 수여 방법이
하나님 자신의 투신, 즉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의 익사라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방주를 홍수 속에 빠뜨렸는데, 그 나무 방주는 십자가를 의미)
그리고 성경은 그 노아의 홍수 심판의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막무가내의 혼인’을 한 것으로 제시를 한 것은 6:2
성경에서 혼인 관계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언약을 배신하고, 자기가 좋은 대로 사람의 딸들을 취한 것은
곧 은혜에서의 유기(버려짐)가 되는 것이므로 .. 홍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혼인 관계나 혼인 언약이 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독수리가 날개로 자신의 새끼를 덮어 인도하는 것 같은,
신랑이 신부를 옷자락으로 덮어 자신의 신부를 정결케 하여 혼인 관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셔서,
다른 말로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늘의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게 되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그 하나님의 덮으시는 은혜, (*방주가 일종의 덮개)
불가항력적 은혜가 무엇인지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방주 문을 하나님이 닫으심, 인간이 못함)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는, 혼인관계의 배신의 죄로 심판이 시작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구원되는, 장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그림으로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9장의 내용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과 더러운 세상과 함께 죽어야 마땅했으나
은혜로 정결함을 입게 된 노아와의 혼인잔치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방주에 넣어 심판에서 건져내신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축복을 하십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언약을 주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혼인언약이 체결이 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노아의 만취(滿醉)사건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중 ‘함’이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고
자기의 두 형제에게 고함으로 아비에게 저주를 받는 것으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끝이 납니다.
도대체 이 만취 사건 이야기가 왜 노아의 홍수 사건의 결론 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냥 하나님과 노아와의 혼인언약으로 끝이 나는 것이 더 깔끔할 것 같지 않으세요?
왜 심판 속에 꽃피는 은혜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노아의 홍수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포도주’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습니다.
그 전에도 계속 마셔왔던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노아가 이미 포도주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노아는 홍수 이전의 패역한 세대와 방불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종 술 취함을 패역한 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기록을 합니다. 엡5:8, 눅17:27~28
성경은 이렇게 패역한 세대의 특징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를 경험하고도 다시 이전의 패역한 세대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만취(滿醉)사건은 홍수 이전 세대와 홍수 이후 세대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는 한 예시(例示)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협박이나 경고에도 절대 스스로 변화될 수 없이
완전한 타락을 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노아의 아들 함이 본 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노아는 함과 함의 자식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아비가 자기 자식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고
그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에게 종의 종이 될 것이라는 무서운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결과 함의 후손인 가나안 사람들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 노예로 살았고,
역사적으로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노예로 살았으며
그 후손인 아프리카 흑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종의 종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잘못은 자기가 저지른 것이잖아요? 그런데 왜 자기 자식을 저주합니까?
그 구절에서 함이 노아의 벗은 몸, 즉 아담의 벌거벗은 부끄러움과 같은
그 노아의 벌거벗은 죄를 ‘보았다’는 데에 쓰인 단어가 ‘라아’입니다.
그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히 쳐다보는 것을 넘어서 즐기며 조롱하며 보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어 ‘고하매’라는 단어는 와우 계속 형으로 노아의 아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즐기며 보고 바로 이어서 형제들에게
그 아비의 부끄러움을 누설하고 설명해 준 것입니다.
여기에 이 에피소드의 해석의 키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덮으심’의 은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담고 있는 중심 메시지가 뭐라고 했지요?
심판 속에 꽃 피는 은혜의 구원입니다. 모두가 다 심판의 홍수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몇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 속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고 성실하고 열심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그들의 더러움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6:8절의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구절이 가진 메시지였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그러한 ‘덮어줌의 은혜’라는 것을
노아와 세 아들이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통해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함과는 반대로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비의 부끄러운 죄를 뒷걸음질 쳐 들어가 덮어준 것밖에 없습니다.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함과 같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9:23절의 ‘덮다’라는 단어 ‘카싸’는 단순히 ‘덮어서 가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죄를 가리워서 용서하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시32:1) 1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가리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싸’입니다.
셈과 야벳은 바로 인간의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모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덮어줌의 은혜는 창세기 초반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장 처음 나타난 곳이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무죄한 짐승의 가죽으로 가려주신 치마 사건입니다.
(창3:21에 '카싸'는 안 나오지만, 의미적으로 일맥상통 하죠)
벌거벗은 노아와 벌거벗은 아담, 이 둘은 모두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그 부끄러움을 그냥 덮어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 덮어줌의 은혜는 출애굽 당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다시 나타납니다.
죽음의 사자가 장자들을 모두 죽이며 행진을 하고 있는데
무죄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덮인 집은 그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유월(越逾)절인 것입니다.
그 모습은 출애굽기 33장에 또 다른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출33:18‐23)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9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20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21 주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22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23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죄인은 절대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도 죄인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손으로 덮으시고 지나가심으로 그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구절을 읽어 드렸느냐 하면
이렇게 죄인의 부끄러움을 덮는 덮개는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함입니다.
※'덮으심'은 히브리어 '카싸' 말고도 '라하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덮으심
'카싸' 와 '라하프' 비슷한 말이죠. 같은 의미입니다.
▲그 덮개가 성막 안에서는 시은(施恩) 좌(座) 위의 제물의 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실수와 실패를 상징하는 십계명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를 법궤 뚜껑이 덮어 버리고 *라하프
그 위에 무죄하고 무흠한 제물의 피가 부어져 그 전체를 가리는 것을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 ‘시은(施恩) 좌(座)’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덮개는 다시 골고다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가 가려지고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그 분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시고 노아의 방주를 한번 떠 올려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그들을 저주의 비로부터 덮어주는 방주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려져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덮어줌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덮어줌의 은혜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롬4:6‐8) 그와 같이 다윗도, 한 일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인정하여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8 주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게 바로 노아의 방주가 상징하고 있던 그림이며
노아와 세 아들의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열심으로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참선(參禪)이나 고행(苦行)이나 수도(修道)로도 이를 수 없는 곳이 구원의 문입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내어 놓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열심과 노력도
성경은 ‘더러운 옷’이라 합니다. (사64:6)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의(義)’라고 내놓는 것조차도 모두 다 ‘더러운 옷’이라 합니다.
(사59:5‐6)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은 전부 거미줄 같은 옷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옷으로는 자기를 가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로 지으신 의의 흰옷을 입어야만
우리를 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덮어줌의 은혜에서 유기된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계6:15‐17)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하나님께서 덮어줌의 은혜로 덮지 않은 자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산과 바위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눈으로부터
우리를 좀 가려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덮으심으로 우리가 그 진노의 멸망에서 건져지게 된 것입니다.
◑무지개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이 전체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보여주신
구름 속의 무지개에 모두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지개라는 단어 ‘케쉐트’는 원래 ‘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활이 하늘을 겨누고 있는 모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에도 인간의 죄가 여전히 악하기에
다시는 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 무지개는 구름과 빛의 합작품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났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지요?
그 하나님은 죄를 절대 묵과하실 수 없는 순결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는 홍수 심판의 무서운 하나님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광야에서 보여 졌던 것처럼 구름기둥은 항상 불기둥을 그 안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 구름과 빛의 합작품이 바로 무지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뜨는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어떤 한 무리를 구원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로 당신 백성의 더러움을 다 가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그 구름 속의 무지개를 통해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13절로 가볼까요?
(창9:13‐16)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잘 보시면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시지만
그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두시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무지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악한 세상을 보실 때에는 노아 때와 마찬가지로
저주와 심판의 구름으로 다 쓸어 버리셔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무지개를 보시고
어떤 무리들에게서 그 저주와 심판의 물을 거두시겠다는 언약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지개는 하나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지개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과 함께 모두 다 멸망시켜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를 믿는 우리를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홍수 자체의 목적은 인간들의 개선(改善)이나 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의 목적은 하나님의 투신과 자해로 거저 가리움을 받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신을 죽이고 비워 원수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투신(投身)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개가 하늘나라, 하나님 보좌에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계4:2‐3) ‘나는 곧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좌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3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모습이 벽옥이나 홍옥과 같았습니다.
그 보좌의 둘레에는 비취옥과 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겔1:28)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하나님의 현현(겔1:28)이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계4:3)에 이렇게 무지개가 등장하는 것은
노아 홍수 사건에서의 하나님의 무지개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시면서까지 원수들을 사랑해 주시는 온유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나라에서는 모든 존재가
바로 그 십자가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아 살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지개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무지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살아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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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덮어주는 삶의 행복
교회 가족찬송 경연대회에서 한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로 이어 목사님 가정이 찬송을 불렀다.
그런데 목사님도 어떤 부분에 이르러 가사를 틀리게 불렀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지셨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를 죽 읽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7월 14일, 교회 가족찬송 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일제히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쳐다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그 일기를 읽고 장로님들이 모두 한 바탕 울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은, 남의 수치를 가려주려고
나의 수치를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남의 허물을 보기 즐거워하고 오래 기억하고 들춰내려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고,
남의 허물을 안 보려고 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덮어주려는 마음은
행복한 마음이다. (펀 글)
♣은혜는 주위 사람을 통해서 주어질 때도 있다. 그걸 보는 눈이 있어야!
제가 얼마 전에 방송을 들으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65세가 된 대학 교수님이 은퇴를 하십니다.
대학의 정년이 65세기 때문에.
평생 교단에서 살다가 이제 교수생활을 바로 끝내는 그 시간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했고, 또 그렇게 글을 썼다고 해요.
그건 뭐냐 하면 "내가 오늘 나 된 것은
그 동안에 내가 노력해서 내가 수고해서, 혹은 내가 인기가 있어서
그래서 이 만큼 신분을 지키고 또 교수생활을 나름대로 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은퇴하는 오늘 생각하니까, 그게 아니고
이 모든 일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를 돕는 그 사람들로부터 되어진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내가 있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나 된다고 할 때 내 혼자 되는가요?
생각하고 보면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를 생각하며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그 분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만, 깨달음(은혜)을 주는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내 마음속에만, 감동을 주는 것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깨달음(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직통으로 받는 은혜만 생각하고
그저 언제나 직통으로 달라고만 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닙니다.
벌써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내가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걸 의식하고 또 이걸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이 위로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생활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