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사건의 4가지 교훈 창11:1~9 설교두편정리
◑개요
창11장 본문의 바벨탑 사건은 4가지를 상기시켜줍니다.
1. 반역 Rebellion
모든 타워나 고층 건축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거슬러서, 즉 교만한 목적으로 건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자부심과 자존심의 기념비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바벨탑을 조심하십시오.
직책, 부, 가족, 학력, 외모, 사역, 교회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본주의적 반역과, 교만의 상징(바벨탑)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기억 Reminiscence
본문의 바벨탑은,
창4장에 나오는 가인이 건설한 도시(에녹성)와,
계시록에 나오는 큰 바벨론의 도시와 매우 유사하며, 그 두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이는 인류의 패역과 교만이 어느 한 세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반에 걸친 모든 세대에 나타나는 현상 임을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의 심판 Judgment
망대 건축이 무산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반항도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할 것입니다.
4. 구속 Redemption
하나님께서는 탑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정당하게 멸망시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얼마나 큰가요.
그분은 여전히 창3:15절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 일은, ‘남은 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언어를 혼잡케하사 흩어신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11:31, 12:1~3
◑1. 반역 Rebellion
이제 우리는 창11:1~9절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11:1절에서 "온 땅에는 오직 하나의 언어와 같은 말만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벨탑 이전에는, 오직 세상에 한 가지 언어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언어인지 모르지만, 교부 오리겐은 ‘그게 히브리어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언어가 하나인 것은 자명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모두 노아의 후손들이니까요.
그리고 아직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기 전이니까요. 11:9
사람들이 바벨탑에서 왜 반역했습니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죠.
아담에게도 그 명령을 주셨고, 창1:28
홍수 이후에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 된 노아에게도 같은 명령을 주셨습니다.
9: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충만하라’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들은 이렇게 반역했습니다.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 이름을 내고’ :4
필로(phillo)에 의하면 실제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쌓아 올린 벽돌에다가
자기의 이름을 써서 쌓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늘에 닿으려는 바벨탑은 단순히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영웅주의와 거대주의,
그리고 거인 숭배 사상에 빠진 인간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바벨탑을 심판하러 내려오셔서
인간들을 흩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단어가 3절의 ‘벽돌과 역청’ 입니다.
당시는 고대시대입니다. 고대시대의 건축물은 대부분 돌과 진흙으로 지어진 건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벽돌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벽돌은 인간이 자기들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문명과 문화의 상징입니다.
벽돌은, 진흙을 불에 구운 것입니다.
그들은 그 벽돌을 사용하여 벽을 올리고, 그 벽돌의 연결을 진흙 대신 역청,
즉 아스팔트를 사용하는 데까지 그들의 지혜를 뽐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인간의 망령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를 위해서 승전비를 세웠습니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삼상15;12
압살롬도 자기를 위해서 비석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삼하18:18
그러다가 대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참한 죽음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죠.
‘흩어짐을 면하자, 탑을 하늘에 닿게 하자’ :4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 fill the earth’라고 명령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명령에 정면으로 반역한 것입니다.
그렇게 땅에 흩어지는 대신에, 사람들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다. :4
이것은 단순한 명령 불복종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자기들 힘으로 도달해 보겠다는 것이죠.
과학이 발전되지 않았던 당시에,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니까,
조금 더 탑을 높이 쌓으면, 거기에 하늘이 있는 줄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사단이 하와에게 ‘이 실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했는데,
마찬가지 심리인 것입니다.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마귀가 그런 심리를 넣어줬겠죠.
‘너희가 탑을 높이 쌓고서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처럼 되어보아라’
▲그렇다면 오늘날 높은 빌딩을 짓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일까요?
높은 건축물을 짓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동기가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나쁜 죄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높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이, 꼭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2001년, 911이라는 비극적 테러가 일어났고,
뉴욕 맨허튼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두 빌딩(세계무역센터 WTC)이 안타깝게도 무너졌습니다.
그때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그렇다면 우리가 더 높은 빌딩을 세우자. 그 자리에 더 튼튼한 건물을 세우자’ 라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이사야서 9:10절을 인용하면서
그런 여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설교했습니다. 주1)
그분의 설교 때문인지, 미국은 그 자리에 WTC보다 더 높은 빌딩은 세우지 않았고,
지금 추모관만 세워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하고 싶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마음 속에 ‘각자의 바벨탑’을 세우는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좋은 경력 good career 을 쌓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기회가 되면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 motivation 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죠.
‘나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경력 쌓기에 몰두하고 매달린다면...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가정도 팽개치고,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서라도 내가 높이 서기만 원한다면,
그건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고,
하나님은 그것을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물론 대놓고 우리는 ‘나는 훌륭한 경력을 쌓기 원합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미묘하게, 남들이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우리는 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내 야망)을 그려놓고, 그 목표를 향해 오늘도 꾸준히
한 걸음씩 바벨탑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잘 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오늘도 바벨탑 쌓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오직 승진, 오직 출세, 오직 영전, 올라가 올라가!
그러면서 자기 앞길에 방해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잘라버립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요!
성경은 재물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부자가 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죄,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저축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부자가 됨으로써, 부자로 보여지고, 인생에서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오늘도 쌓아지고 있는 ‘나의 바벨탑’들입니다.
△더 나아가 "가족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부모님과 자녀들, 배우자, 형제 자매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가족은 작은 우상(바벨탑)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도 ‘하나님 다음’이어야지, 가족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 섬기는 것이, 가족 사랑 때문에 늘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도 ‘바벨탑’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역자들이, 개인적인 기도시간, 개인적인 깊은 주님과 교제시간을 못 냅니다.
왜냐면 그들의 개인시간은.. 언제나 가족과 함께 보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우리에게 ‘안정감, 편안함’을 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정감, 편안함’이 지나쳐서, 하나님과 깊은 개인적 교제를 방해하게 된다면,
그 사랑스런 ‘가족’ 역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쌓는 ‘바벨탑’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위해, 사역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죠)
△교회 건물도 바벨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죠.
아름다운 교회 건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특별히 교회가 부동산이 아주 비싼 대도시의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면,
"오, 우리는 넓직한 교회 건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소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도 바벨의 작은 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과시하기 위해, 오만하기 위해, 자랑스러워하기 위해 건물을 짓는다면
그것은 바벨탑 쌓기가 될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늘 우리의 동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사는 경쟁사회 라는 환경은
언제나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직장에서는 실적으로, 업무 능력으로 ‘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라!’고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이런 현대 사조에 휩쓸리다보면, 교회에서도, 사역자들도
‘나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거야, 내 존재감을 사역을 통해서 증명할 거야!’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자아’라는 바벨탑을 쌓기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 (그걸 보여줄 거야)’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대사인데, 요즘 유행하는 말이죠.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직장에서 자기 능력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승전결의 결국은 ‘자기 부인, 자아의 죽음’으로 매듭지워져야 하고,
모든 영광은,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이.. 크리스천의 본분입니다.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
국내 목회 현장에서나, 해외 선교지에서 대부분 유능한 사역자들은
자신의 능력 있는 모습, 유능한 사역자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회는 끊임없는 영웅의 출현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배트맨, 원더우먼, 닌자토틀, 알렉산더 등 대부분의 대중의 인기몰이 영화들은
모두 ‘영웅주의’가 그 주제입니다. 한 명이나 소수의 영웅이 나라를 구한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승전결이.. 주인공이 ‘사라지고, 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땅에서 ‘사라지고 쇠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진정한 영웅으로 대우받을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사역으로 자기를 자꾸 증명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아의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됩니다. 그런 바벨탑은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미국 등 외국에서, 아주 하나님 앞에 헌신되고 신실한 사역자이지만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많은 숨겨진 하나님의 종들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세례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같은 의인들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조용히 살다가,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종들의 특징은 ‘그분은 흥하지만, 자기는 쇠하는’ 것이니까요!
◑2. 기억나게 합니다 Reminiscence
본문 창11장에서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창4장에서 일어난 다른 일이 생각납니다. 거의 데자뷰와 같습니다.
창4장에서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4:16-17
성이나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지만
가인의 경우에는 악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너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가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4:12
"이것이 네 운명이다. 이것은 아벨을 죽인 네가 받을 정당한 처벌이다”
그런데 가인은, 그 처벌에 불복하고.. 에녹 성을 건축하고,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도시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실제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은 에녹"입니다. 4:17
에녹의 이름 뜻은 ‘새로운 시작 initiation’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마도 "나는 방랑 생활을 선고받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착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난 상관없어!"
그 후손에서 라멕이 나왔죠.
"아다야, 씰라야, 내 목소리를 들으라, 너희 라멕의 아내들아..."
"내 노래를 듣고 내가 얼마나 힘있고 위대한지 보여 주겠다.
가인의 복수가 일곱 배라면... 라멕은 일흔 일곱 배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만한가요! 얼마나 자랑스러운가요! 하나님을 거스르는 교만이 얼마나 대단한가요!
그래서 가인이 놋 땅에 정착하여 도시를 세웠을 때 그 도시는 중립적인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반항과 반항심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창11장의 바벨탑을 읽으면, 창4장의 가인과 그 후손의 데자뷰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본문 성경이 가르치는 요점은,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항적인 마음은
어느 한 세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시대든, 바벨탑을 쌓던 시대든, 오늘날 이 시대든,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께 반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바벨탑 사건은
앞으로 계시록에서 읽게 될 내용을 또한 생각나게 합니다.
계시록에는 바벨탑을 본뜬 것과 같거나, 바벨탑에 비유된 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큰 바벨론 BABYLON THE GREAT’ 이라고 불립니다. 계17:5등
"큰 바빌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시 입니다. 반항적인 도시입니다.
그것은 매우 죄 많은 도시입니다. (또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 도시는 너무나 영향력 있고 강력하며 너무나 사악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파괴될 도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오늘날 현실 세계로 적용할 때, (계시록은 모든 세대에 적용된다고 볼 때)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이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며 (우리의 이름을 내자 하고)
그 성과 대를 하늘에 쌓는 바벨탑이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과학계는 ‘인간 복제’를 시도하고 있고,
인문학은 ‘동성애를 타고난 성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방송이나 학계는 ‘진화론’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헤지 펀드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더욱더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바벨탑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계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계18: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오늘도 우리는 ‘바벨론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 하나님이 결국 무너뜨리실 바벨론!
우리는 바벨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다니엘, 에스더,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성도는, 바벨론이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바벨론 강가에 수금을 걸어놓고 노래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시137:1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방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서 자유케 되었지만, 환경은 여전히 바벨론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 경력을 쌓으며, 자기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만.. 큰 배경은 바벨론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바벨론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내십니다’.
바벨론 세상에 대처하는 하나님의 방식은 ‘아브라함을 불러냄을 통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남은 자들을 선택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게 하십니다. (아래 4대지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우리는 종말적 시각을 잊어버리고,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나치가 득세할 때는, 나치당과 SS 친위대가 유럽에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패배하자, 나치당과 친위대는.. 모두 잡혀서 형을 살든지, 처형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니엘, 에스더, 느헤미야처럼 바벨론 세상에서도 승승장구 할 수 있지만,
결국 여기는 우리의 본향이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에, 너무 집착하고 올인해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세상이 바뀌자, 숨어다니고, 자기 신분을 감추어야 사는
악덕 나치당원, 악덕 친위대, 야비한 수용소 관리인 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영원한 나라에서는.. 다들 크게 심판 받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심판 Judgment
본문에 약간 유머가 나옵니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탑을 쌓아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4
그리고 바벨탑을 지으면서, 얼마나 서로 뿌듯해 했을까요?
‘우리는 대단한 업적과 성취를 이루고 있어! 세계 최고의 업적과 성취야!’
그런데 하나님의 유머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5
하나님이 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는지 압니까?
그게 하늘에서 보니까, 하나님 눈에 뵈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작아서)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이, 그걸 보려고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5
사람들은 스스로 ‘세계 최고’라고 가슴 뿌듯해 했겠지만, 하나님 눈에는 조그만해서 뵈지도 않았다는 거죠!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2:4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해버렸습니다.
언어를 혼잡케 한 것 자체가 심판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그들이 온 지면에 흩어진 것’입니다. :9
왜냐면 바벨탑을 건축한 그들의 동기가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죠. :4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서.. 흩어지게 한 것입니다.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은, 그들을 흩어지게 하는 수단이 된 거고요.
△세상 사람들은 모이면 ‘안 좋게’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소위 말하는 ‘군중 심리’ 또는 ‘소영웅주의’가 그 속에서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십대 청소년들이 비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소영웅주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친구나 또래 집단들 앞에서, 자기가 우월적으로 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패거리 문화’라고 한답니다.
혼자 하기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지만, 패거리로 어울리면
어떤 하기 힘든 일들도, 죄 짓는 일도.. 쉽게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바벨탑을 쌓은 거죠.
이런 부정적 의미에서의 ‘단결과 협동심’이 가장 잘 발휘되는 민족이 독일이라 합니다. 주2)
▲하나님은 ‘왜 흩어지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래서 바벨탑 쌓던 사람들이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던 것이, 왜 죄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흩어지라’고 하신 것은, 쉽게 말하면
-선교적 명령이고,
-문화명령(개척, 개간의 의미)이고,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의미입니다.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라는 의미죠.
그런데 사람들이 ‘흩어짐을 면하자’고 한 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 위주로 모이고,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 교육부에 우선 투자하고, 해외선교는 뒤로 미루자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함도, 복음전파도 내부에 먼저 신경 쓰고, 외부는 그 다음에 하자.
-우리 가정에 먼저 신경 쓰고, 외부는 남는 자원이 있으면..
△그런데 외부로 나누어주고도, 더 잘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남부의 한 지역에서는 매년 호박 우수 품종 경진 대회를 개최합니다.
이 대회에서는 매년 우승을 독차지하는 농부가 있었는데요, 그에게는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웃들에게 호박 종자를 아낌없이 나눠 준다는 것입니다.
농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이웃사람이 물었지요.
“당신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품질 개량을 한 결과로 상을 타는 것인데
왜 우리들에게 그 종자를 나눠 주시죠?
우리야 좋은 종자를 얻으니까 좋기는 하지만,
좋은 종자를 나눠줌으로 인해서 우리가 기른 호박이
당신 밭에서 난 호박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이에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가 종자를 이웃에게 주는 것은 사실 내 자신을 돕는 것이랍니다.”
이 농부가 사는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으로 밭들이 서로 이웃하고 있었지요.
농부가 경진 대회에서 상을 받은 좋은 종자를 나눠 주면
이웃들은 호박의 품종을 개량할 수가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농부가 좋은 씨를 감추면, 벌들이 꽃가루를 옮길 때
이웃의 열등한 종자를, 자신의 밭에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웃들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협력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매년 호박 우수 품종 경진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지요.
◑4. 구원의 희망 Hope of Redemption
바벨탑의 심판으로, 세계로 흩어버리신 하나님은.. 이제 대안을 준비하셨나요?
물론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람을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참고로, ‘설교는 항상 긍정적으로 끝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도 바벨탑으로 인한 사람들의 타락과 흩어짐의 심판이.. 그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걸(심판)로 끝나면 안 됩니다. 거기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발견해 내고,
그 구원 스토리로 설교가 끝나야 합니다.
다른 본문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리 죄와 회개를 다루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회복의 메시지로 끝나야 한다는 거죠.
집에서 아이를 훈계할 때도, 야단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되듯이요!
▲흥미로운 주장이 있는데, 바벨탑으로 언어가 나뉠 즈음에
세상이 5대양 6대륙으로 갈라졌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창10:25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대상1:19 ‘벨렉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때에 땅이 나뉘었음이요’
위 구절에 벨렉 때 ‘세상이 나뉘었다, 땅이 나뉘었다’ .. 라고 했습니다.
혹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원래는 세상이 한 대륙, 한 땅덩어리였으나
이때 지진 등이 이유로, 지금의 5대양 6대주로 분리되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래서 뭐 아프리카와 남미 지도를 맞춰보면, 드러맞는다는 주장도 하잖아요.
그러니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나뉜 후에, 원래 한 대륙이었던 땅이 지금의 모습으로 갈라져서
사람들이 나라와 열방으로 더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지요. (가설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보게 되는데,
언제나 그것은 ‘남은 자’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서, 다수를 구원해 내십니다. 하나님의 사역 패턴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때, 노아만 구원하지 않으시고, 노아의 식구까지 8명을 구원하신 것은
노아(남은 자)를 통해, 다수(노아 식구)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사역 패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시는 구원사역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저 노아의 가족이 불쌍해서, 노아가 외로울까봐.. 가족까지 구해내신 것은 일차적 이유가 아니었죠.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내신 것도,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당시에도 욥같은 훌륭한 의인도 있었고, (욥은 족장시대나 그 이전의 인물로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왕 멜기세덱도 있었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들 다 제쳐놓으시고, 하나님은
우상장사 데라의 아들인 아브람을 불러내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전적인 은혜’임을 다시 한 번 잘 보여줍니다. 아브람의 공로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죠. 내 공로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온 세계 열방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남겨두신 ‘남은 자’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남겨두신 자는 ‘아브라함 – 모세 – 여호수아 – 사사
- 사무엘 – 다윗 – 선왕들 – 선지자들’ 이었습니다.
매 시대마다 ‘남은 자’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남겨두시는 일에 실패하셨던 적은 한 번도 없으십니다.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남은 자’를 통하여 .
오늘날 우리는 우리 교회, 우리 사회에서
'남은 자'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감격과 노래 (일화, 펀 글)
2010년에, 칠레 북부 광산에서 33명이 살아 구조되었던 기적이 있었다.
칠레 광부들, 오랜 날들이 지나고, 마침내 구조되어, 한 사람씩 밖으로 나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구조되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는, 과거에 제가 칠레 선교사시절에, 그 지역에 가서 설교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남다른 감회를 갖고서, 그 구조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보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성경을 들고, 구출되어 올라왔는데, 그가 그 그룹의 영적 지도자였다.
그들이 모두 지상으로 올라왔다. 다 구출되었다.
제가 거기 가 봐서 아는데, 그곳은 모두 사막 지역이다.
보통 사람을 거기에 데려다 놓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황량한 곳이다.
그런데 지하 갱도에 오래 동안 갇혀 있다가,
그들이 올라와서 밟은 그 사막 땅은.. 그들에게 절대로 사막이 아니었다.
소망의 땅이었다.
그들은 그 땅을 밟으면서 ‘야~ 드디어 살았구나!’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전에 가졌던 불평과 근심은 하나도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기쁨과 감격이 그들에게 충만했다.
집으로 가서 그들은 잔치하고, 가족들과 얼싸안고 즐거워했다.
여러분,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감격'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구원의 감격이다. 살아남은 감격이다. 노아의 감격이다.
우리는 사망가운데 구원받은, 보혈의 공로로 살아남은 자이다.
옛날에만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지금도/오늘도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상황가운데 우리를 지키시고, 건져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될 줄 믿는다.
노아가 홍수 후에 살아남은 그 감격,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그 우상의 소굴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은혜,
칠레 광부들이 (다 죽을 뻔 했던 가운데서) 구출된 그 감격,
그 감격보다 더 큰 감격이.. 영벌에서 구출된 나의 구원의 감격이다.
이 감격이 날마다 우리에게, 감사와 감격으로 흘러 넘치게 되시기 바란다.
▲이렇게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서, 다수를 구원하시는 방식은 성경 곳곳에 나타나므로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시대에, 또한 성경 66권에 다 나타납니다.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원래는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구절이지만, 우리 각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함을 통해서, 그들을 흩어버리시는 심판을 단행하셨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언어가 다양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에서 서로 다른 민족, 언어적 배경을 가진 남녀들이 한 목소리로 연합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7:9~10
그래서 위 구절에 의거, 천국에 가면 자기 민족성과 언어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천국 언어를 또 알게 되어서, 서로 의사소통 하는 것이죠.
천국에 가면, 우리가 완전 별종이 되어서, 세상에서의 언어, 혈통, 가족 이런 것들을
모조리 다 잊어버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가 봐야 알겠지만요)
바벨탑은, 창4장에서 11장까지의 여정에서, 인간의 부패에 대한 일종의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는 바벨탑에서, 암과 같은 죄가 어떻게 성장하고 번성하고 절정에 이르는지 보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자비로우시며 구원의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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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사야9:10절에서 '벽돌이 무너져 내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사9:10
벽돌을 모아서 견고한 돌을 가지고 다시 지을 거야.
값싼 재료로 지어진 건물이 무너진 곳에
뽕나무보다 좋은 재료 백향목을 가지고 다시 지을 거야.
*설교전문보기 https://rfcdrfcd.tistory.com/15972713
주2)
그래서 독일은 2차대전 때, 단결심과 협동심으로.. 초기에 모든 전선에서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 민족(아리안 족)이 지배하는 세계 통일이란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것이죠.
그래서 독일은, 2차대전 후에 반성하는 마음에서
독일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제창’ 등을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워낙 단결이 잘 되는 국민성을 지닌 민족이라서, 그걸 의도적으로 막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단결심이 음성으로 발휘되면.. 또 나쁜 짓을 하게 되니까요.
주3) 바벨탑의 흔적을 보여주는 지구라트
실제로 당시 바벨탑을 지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지구라트 라는 탑들이
지금 메소포타미아 지방 유프라테스 강변에 30여 개가 남아있는데
4각형으로 되어 있는 그 탑들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00미터 정도입니다.
밑변이 100미터인 탑이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남아 있는 지구라트 중에 가장 높은 탑이 50미터 정도입니다. (13층 높이)
그리고 그 탑들은 사각형 계단식으로 되어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탑들의 꼭대기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과 제단이 있었습니다.
바벨탑이 아무리 대형 탑이었다 할지라도
당시의 건축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그러한 지구라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존재를 멸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 탑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벨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했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어구 속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 홍수를 겪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홍수)을 스스로 피해보겠다는 의도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높은 탑을 쌓아 그 진노의 홍수에서 벗어나 보자는 의도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에 닿자는 말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맞장 한번 떠 보자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현존하는 지구라트는 바벨탑과는 시대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벨탑은 지구라트와 비슷한 형태이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