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 통해서 본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창22장 ☞ 창세기 설교모음
김성수 목사 창세기 61강
우리는 지난 시간(60강)에, 모리아 산 사건을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의 측면에서 바라보며 해석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히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격발케 하는 성도의 책임과 의무의 관점에서
모리아 산 사건을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모리아 산의 이야기는 창3:15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정녕 죽으리라)죄인들을 살리시는 방법으로
‘여인의 후손의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가 상함으로(십자가)
뱀의 머리가 박살이 나는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건을 미리 예시 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죄한 짐승의 희생으로 벌거벗어 부끄러운
아담과 하와의 죄가 가려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창3:21)
다시 죽어야 할 자들을 품에 안고, 저주와 심판의 물을 맞고 그 홍수 속에 빠져 죽어 버리는
노아의 방주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며,
창6장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창15장의 쪼개진 제물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그림으로 이어집니다.
거기에서 죄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죽게 되는, 무죄한 제물의 정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희생(십자가)으로 말미암아
당신 백성들의 구원(새 창조)을 이루실 것임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과 자격을 하나님 앞에 제시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롯과 엘리에셀과 이스마엘로 나타났었지요?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기각시켜 버리시고
하나님 자손들의 탄생은 오로지 당신의 쪼개짐, 다른 말로 할례 받으심에 의해서만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17장에서 확인시키십니다.
그 창17장의 할례 이야기가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진 곳이, 바로 본문 모리아 산 사건이죠.
죽어야 할 죄인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준비하신 어린양으로 오셔서(여호와 이레)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이들은
모리아 산에서 자기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난 아들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린 아브라함처럼
그들의 신앙 여정을 통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자로 성숙되어져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성숙의 여정으로, 창12~25장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성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은, 반드시 성도의 책임 완수와 의무 수행을 이끌어낸다는 것이지요.
(*성령과 관련해서 얘기하자면, ‘성령의 인도’로 그렇게 성숙한 믿음으로 이끌어가십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쪼개신 것은
그 분을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즉 단순한 영혼구원, 지옥에서의 건짐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섬기는 백성’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인간 편에서는 주와 그리스도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이 된 우리 성도는
이제 주인 되신 예수님께 오롯이 항복하고 복종하여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에는 구원의 복(생명, 바라크)과
인간의 책임과 순종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입니다. *유기적 결합
여러분, 동전을 한 면만 가질 수 있나요? 동전은 아무리 얇게 잘라도 여전히 양면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바로 그 절반(인간편)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만 받아들이지, 결코 자신의 주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눅17:7~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 이라 할지니라
이게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종으로서의 성도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양을 치고 밭을 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주인이 식사하실 동안 그 곁에서 수종을 들고 나서 겨우 밥 한술 뜨고도
아무런 사례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종의 신분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우리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고
우리의 문제해결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의 주도권은, 나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진 것입니다.
(눅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주님께서 당신을 좇겠다고 하는 이들에게 아주 매몰찬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당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당신을 믿고 좇는 것이 이 세상 것으로 보상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엉뚱한 것 기대하고 좇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기대하는 것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지요.
브라질 리오에 가면 꼬르꼬바도라는 곳에 천 톤이 넘는 예수상이 있습니다.
리오 시를 향해 양쪽 손바닥을 펴서 축복을 하는 그런 모양의 예수상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애들아 나 돈 없다’라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요구하는 세상의 힘을 채워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영생을 선물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직접 쪼개지신 이야기이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성도의 쪼개짐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의 쪼개짐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자신의 쪼개짐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16:24
이렇게 하나님 언약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가 그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도 아브라함처럼 시험 받는다
본문 2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어구가 나옵니다.
거기서 ‘시험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닛싸’는
상대방을 잘못되게 하는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알아보다(test), 입증하다(prove)’라는 의미로 쓰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성숙되어져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 또한 하나님의 시험으로 점철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시험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공히 주어지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시험인 것입니다.
(롬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입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간 그 믿음의 여정을 모든 믿는 자들이 공히 가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또한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나의 가장 소중한 것,
이삭을 바쳐내는 모리아 산의 시험대 위에 반드시 서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시험대 위에서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창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자
하나님께서 창12장과 15장, 그리고 17장에서 약속하셨던 복의 선언을 동일하게 하십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그 축복의 선언은 유보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선언은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부터 반복하여 주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그 날부터 창22장의 모리아 산에서의
성숙한 신앙인 아브라함으로의 완성을 이미 계획하고 계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해야만 주어지게 될 하나님의 복을
미리부터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아브라함처럼 수시로 실수하고 넘어지는 삶을 살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모리아 산에 세우시고 그 시험에 넉넉히 합격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22:17절에는, 그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복의 구체적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복을 요약하여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여기서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의 관용구로서
대적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적의 성문을 정복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하다’라고 번역이 된 그 히브리어 ‘야라쉬’의 상이 미완료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구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당신의 쪼개짐으로
대적이 정복되고 승리가 주어지게 된 것처럼
그와 같은 방법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는
아주 깊은 메시지가 담긴 어구입니다.
약속의 자손인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가족들이 리브가를 축복하는 말 중에도
그 어구가 그대로 쓰입니다.
(창24: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 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 지어다
여기서도 축복의 내용이 ‘원수의 성문을 얻는다.’입니다.
▲그 어구는 그대로 신약으로 가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라고 번역의 직역이 ‘음부의 대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손해와 상함(모리아 산에서의 어린양의 대신 쪼개짐)에 의해
음부의 대문을 정복해 버리신 예수님처럼
교회(성도) 또한 십자가의 삶으로 음부의 대문을 부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바로 그 음부의 대문을 정복하는 삶이,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도 없고,
너 스스로 너의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라는 대적의 속삭임에 속지 않고
‘하나님께 오롯이 순종하며 사는 것이 피조물 된 자의 행복이며 만족이다’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까지 내어놓는 삶이 바로 대적의 성문을 얻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연합된 교회)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이라’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복은 뭡니까? 소원이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아 숭배 교에서 빠져나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나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자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창3장 15절의 원시복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승리의 예언이
모리아 산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성취되는 것이고
아울러 거기서 탄생한 교회의 삶 속에서 그 대적의 문을 부수는
정복의 삶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적의 문을 부수는 정복의 삶은
원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아야 하는 사랑의 삶이요 섬김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어야 할 이삭을 대신해서 죽어주는 어린양의 모습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 자신보다 더 귀한 백세에 난 이삭을 드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정확하게 같은 그림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삶은 이 역사 속에서 연합되어진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하나님 자신의 자해(십자가)는
반드시 하나님 백성들의 순종의 행위를 도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4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반면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모순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
(약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우리의 구원은, 로마서의 진술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서는 야고보서의 진술과 같이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자신을 드리는 예배의 삶이 행함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 원수의 대문을 정복하는 삶을 내어놓아야 하는 시험대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존 스토트의 말처럼 ‘복음의 가시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자주하는 말이 ‘무슬림들의 삶을 보고 이슬람을 판단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자신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천박하거나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는 변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가끔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변명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을보고 기독교를 평가하지 말라’
여러분, 신자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종교가 무슨 존재가치가 있습니까?
성도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절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복을 선언해 주신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도 반드시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를 완전히 비워내는 시험 말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아브라함이 겪어낸 시험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세요.
아브라함의 시험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마엘을 취할 것인가 이삭을 기다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둘째는 이스마엘을 이삭과 함께 용납할 것인가
아니면 쫓아내고 이삭만을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셋째는 이삭을 취할 때 이삭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그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이삭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이스마엘은 육에 속한 사람, 곧 아담(옛사람)을 나타냅니다.
그 옛 사람은 율법을 가리키고
율법은 곧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 왕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의 힘을 쌓아 행복과 구원에 이르겠다는 생각과 시도를 얼른 접어야 합니다.
육적 자아인 이스마엘과 영적 자아인 이삭을 함께 붙들고 싶어 하는
두 번째 시험은 첫 번째 시험보다 조금 더 힘이 듭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죄의 뿌리인 인본주의의 망령은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우리를 쉽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거듭난 후에도 자꾸 자기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에게 이러한 권고를 했습니다.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떠세요? 물론 힘이 들지만 우리는 성경이 이토록 명확하게 육체의 소욕을 좇지 말라고 명하시기에
이를 악물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내 안에서 공존하며 싸울 때 우리는 자꾸 이삭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공감하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시험은 정말 힘이 드는 시험입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탄생되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 약속의 자손을 죽이라는 시험을 하실까요?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여러 가지 분투들이 우리 안에서 발견될 때 때로 우리는 뿌듯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그 뿌듯한 마음이 자기의 자랑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격발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되는 때가 종종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 욕심을 자제하고,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다른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그러한 삶을 가지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비록 그 당사자가 손해와 상함과 비움을 감수하고 있더라도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 적인 힘의 축적과 성공과 번영의 힘의 원리에서 벗어나
영적 강건함과 평안함, 가정의 화목, 직장에서의 성실함,
교회 형제들과의 교제와 선한 일에 동참하는 것, 구제와 선교, 봉사,
성경을 공부하고 거룩한 삶을 경주하는 것, 범사에 신자답게 규모 있고 검소하게 사는 것
등등을 추구하며 분투하고 있다고 해 보자고요. 참 훌륭한 삶이지요?
분명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에 맺혀지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은 아닙니다.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기에 그렇게 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발산되는 모든 경건한 삶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피조물로서의 내가
그 분 앞에 오롯이 엎드려 항복하는 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그러한 선한 일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더란 것입니다.
심지어 그러한 선한 일 조차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추구하는 이들이 참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것마저 죽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이삭까지 드리는 시험입니다.
혹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선행과 봉사, 자기의 자랑을 위한 성경공부와 기도,
일주일간의 형편없었던 삶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한 헌금,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위장된 행복의 모습 등등 이런 지저분한 것들로
여러분이 예배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즐기며 사랑하고 있지는 않으세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22:2절의 ‘사랑하는 독자’에 쓰인 ‘예히드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집중하여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 이삭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렇게 선뜻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너무나 사랑하는 이삭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마10:37)’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이 주신 어떤 것에 매여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아니면 그것을 선물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분께 감사하고 계십니까?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50마일이 넘는 거리입니다.
나귀를 타고도 사흘 이상을 가야하는 곳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에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나의 자랑과
나의 증명을 위한 그 어떤 선한 것도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창12장부터 22장까지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모든 시험은
한 마디로 옛 사람 아브라함의 철저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비워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지혜와 힘으로는 절대로 참 행복에 도달할 수 없으니(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나에게 순종하고 나에게 항복하여 나의 말을 들으라’
그게 아브라함의 삶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셨던 하나님의 유일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쪼개짐으로 영생을 소유하게 된 복된 이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쪼개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나처럼 원수를 위해 쪼개지는 삶을 살라고,
너희 자신을 통째로 내 앞에 내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페르소나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페르소나는 무대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그 말이 요즘은 영화 용어로 쓰입니다. 영화감독의 의중과 사상과 인품까지도
그대로 그려내는 특별한 배우를 가리켜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임권택‐오정해, 이준익‐정진영, 장진‐정재영, 장예모‐공리
여러분,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페르소나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의중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 원수를 위해 내가 쪼개지는 삶, 그 삶을 잘 살아내십시다.
하와가 다스려야 할 뱀에게 오히려 유혹을 당함으로
질서가 깨지고 예배의 삶이 금이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이 세상 것들에게, 우리가 명령을 받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첫 번째 아담 속에 들어 있는 자일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의 대표 격인 돈을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돈 때문에 예배를 거르는 것은 돈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