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1 - 여러분은 벧엘이 있습니까? - YouTube
◈여러분은 벧엘이 있습니까 창28:10~22 ☞창세기 설교모음
◑도입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데스티니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특별히 지난 시간에는 믿음의 DNA 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rfcdrfcd.tistory.com/1598125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서 그의 믿음의 DNA 를 어떻게 형성하셨는지,
그리고 그 믿음의 DNA 가 어떻게 후손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는지.. 함께 살펴봤습니다.
특별히 모리아산 사건은, 아브라함의 DNA 가 완성되는 순간이고
그 DNA 가 비로소 정말 DNA 가 되는,
즉 DNA 가 자기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대물림 하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사건을 통해서, 이삭 한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 딱 심어지게 돼요.
그래서 이것이 이삭이 상속받은 믿음의 유업이 됩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단 받았고, 훈련받으면서 형성됐던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수가
이삭에게 전수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삭은 그것을 물려받아서 출발점이 다르게 됩니다. 어드밴티지를 얻고 출발하죠.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물려받은 DNA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부터 하나씩 둘씩 가르치시면서
믿음의 연단을 시키시고
뭐 실수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올라가면서 교훈을 배우고
이런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 믿음은 이런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평생 하나씩 배워갔어야 했어요.
그런데 이삭은 출발점이 달라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DNA 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또 성장하면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곁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래서 이삭의 일생을 보면, 믿음의 시작점이 달랐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차원이 다른, 아주 평온한 삶과 자기 믿음의 길들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이 실패했던 것이 있습니다. 실패했던 건 뭐냐 하면
이 믿음의 DNA를 그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데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교해 보면, 이삭은 훨씬 더 평안한 삶을 삽니다.
훨씬 더 믿음의 굴곡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에 가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세웠듯이
자기 아들 야곱을 세우는 것은 실패합니다. 믿음의 가정교육이 부족했어요.
야곱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믿음의 DNA는 있었겠지만
후천적으로 물려받은 믿음의 DNA는 별로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스스로 개척하듯이 자기 믿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고생 고생하다가 돌아오게 되죠.
이 두 사람(아브라함과 이삭)의 비교는,
우리가 우리 자녀들, 우리 다음 세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경종을 올립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자손으로 이삭을 세울 것인지,
아니면 이삭 처럼 자기는 평안하게 신앙 생활을 유지 하지만
그 다음 세대를 세우는 것에 있어서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할 것인지...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야 돼요.
그리고 이 결정에 따라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믿음 생활을 할 것인지가 결정될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믿음의 유업을 물려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유업을 어떻게 물려 받아야 되는가요?
믿음의 유업은 반드시 전달되어 지는 것이고, 유업으로 물려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각 개인 개인의 특별한 데스티니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일생을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대에서 대를 이어가면서 generation to generation
계속 완성되어져 내려갑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역사가 완성되는.. 이 그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
각 사람 각 사람이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 일들은
우리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열방에게로
계속 흘러가고 전수, 전달 돼야 되는 것이지.. 우리 당대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곱의 이야기를 살펴볼 건데요.
(제가 이삭의 데스티니는 그냥 건너 뛰었어요.
왜냐하면 이삭은 그냥 자기 삶을 평안하게 유지한 것 빼고는, 많은 경우 좀 실패했어요.
그래서 성경에 이삭 스토리가 좀 짧게 기록되었는지도 몰라요.
많은 경우 실패해서, 야곱에게 신앙을 물려주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었어요.
그렇지만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야곱으로 계속 이어져 가죠.)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믿음의 유업들을 전수 하고
그 데스티니를 이어 갈지를 2회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두 개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벧엘 사건과 브니엘(얍복강) 사건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벧엘 사건에 대한 걸 살펴보고요.
다음 번에는 브니엘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창28장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죠.
야곱에게는 쌍둥이 형이 있었습니다. 에서입니다.
근데 이 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치열하게 싸우면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누가 먼저 나갈 거냐'로 다투었죠.
이게 아주 간발의 차이죠. 쌍둥이가 아니면, 1~2년 차이가 나니까 별로 억울할 게 없는데..
야곱이 뒷심이 좀 부족했어요. 조금만 더 힘을 썼으면 되는데 밀렸어요.
그래서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따라 나왔죠.
너무 억울한 거에요. 그래서 야곱의 평생의 한이 뭐였냐면, 장자권이었어요.
유대인들에게 '장자' 라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유업을 물려받는 특권이 장자에게 있었어요.
그래서 이 야곱 안에 억울함이 있었던 거죠.
자기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고 싶은데,
자기가 아버지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이어가고 싶은데
그거에 실패한 거예요. 그래서 평생 한이 생겼어요.
근데 야곱 안에는 뭐가 있었냐면, 하나님의 그 약속,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우리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분들을 통해서 이어지는 이 데스티니를, 자기 삶 가운데 이어가고 싶은 열망과 욕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야곱은 어떻게해서든지 장자권을 차지하려고 했죠. 그래서 어떻게 하죠?
늘 기회를 노리는 데, 어느날 기회가 오지요.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너무 배가 고픈 거예요.
그때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좀 맛있게 쒀 놓고
이 팥죽과 장자의 권리를 바꾸자..
야곱이 에서를 파악을 한 거죠.
왜냐면 에서는 거기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에서는 어떻게 보면 이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는 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리브가의 판단이 올랐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갈 사람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라는 것을 알았어요.
왜냐면 엄마들이 자녀들에 대해서 훨씬 더 이 분별력이 있고, 잘 봐요.
근데 아빠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래서 이삭은 분별력이 좀 없어요. 그래서 에서에게 물려 주려고 했던 거에요.
근데 리브가가 보니까 에서가 아니에요. 태어나긴 에서가 먼저 태어났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는 데 관심이 없어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면
믿음의 여인을 아내로 얻는 거예요.
왜냐면 자녀들에게 전달되어야 될 하나님의 가치들은, 엄마를 통해서 전달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믿음의 여인을 얻지 않으면, 하나님의 유업은 여기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에서는 믿음의 여인을 얻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예쁜 여자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에서는 그래서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얻습니다.
그리고 뒤에 가보면, 이삭과 리브가에게 이것이 큰 근심 거리 였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는 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의 반해 야곱은 성격은 좀 음흉하고, 성격은 좀 문제가 있는 사기꾼이었지만
야곱에게는 관심이 있었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고 싶은 그 관심,
그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리브가가 야곱에게서 이것을 본 거예요.
그래서 '아~ 이 유업은 야곱을 통해서 이어져야 되는데...'
여러분, 자녀 문제에 있어서는 웬만하면 아내 말을 들으세요. 그게 맞아요.
아버지가 분별력 없이 개입하면 자녀들 교육 다 망칩니다.
그래서 야곱은 팥죽으로 장자권을 삽니다.
두 번째 문제가 남아있어요. 두 번째 문제는 뭐냐하면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회를 또 노립니다. 근데 여기에는 리브가가 협조를 해줘요.
그래서 리브가와 야곱이 공모를 해서 아버지와 형을 속이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제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졌어요. 앞을 잘 못 봐요.
여차여차해서
야곱은 그렇게도 원하던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되죠.
그래서 이 야곱이 드디어 원하던 장자의 권리를 다 얻었어요.
형으로부터 팥죽을 통해서 합법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샀고요.
아버지로부터 합법적으로 장자에게 주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자 그런데 그 결과, 에서가 이를 갈기 시작합니다.
'이 놈이 나를 두 번이나 속였구나'
'그래서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내가 이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27:41~45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결국 이 일로 인해서 야곱이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에서의 노가 풀리면 불러 오리라' 그랬지만
이게 실제로 이삭과 리브가가 다 죽을 때까지 노가 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야곱이 이때가 그 부모를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때가 그 부모를 본 마지막이었어요. 다시는 부모를 보지 못했어요.
뭐 그때는 미래가 이렇게 풀릴지 몰랐겠지요. 하여간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거예요.
그렇게도 아버지의 유업을 잇고 싶어 했는데, 유업을 잇는 것은 고사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먼 유배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당시 여행은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대단히 미친 짓이었듯이
또 여행 길이 안전 하지도 않았어요. 광야의 위험과 들짐승과 도적들...
하여간 미친 사람이 아니면 혼자 길을 떠나는 때가 아니에요.
하란에서 가나안 땅까지 아브라함이 왔던 여정이 미친 길이었는데
반대로 가나안에서 하란으로 돌아가는 게, 똑같은 길이라는 거예요.
야곱은, 사람들이 전혀 하지 않는, 아주 위험한,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그런 길을 떠나게 되는 거예요. 왜냐면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자 이것이 이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그리고 삼촌 라반과 연락이 안 된 지가 벌써 오래인데,
라반이 거기에 살고 있을지, 다른 곳으로 이주 했을지, 혹은 죽었을지... 전혀 모르는 거예요.
또 라반이 자기를 믿어 줄지, 환영해 줄지도 전혀 알 수 없는 가운데서,
하루하루가 정말 생명의 위협가운데 있었죠. '내가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괜히 뭐 하나님의 유업이나 축복에 욕심 냈다가 이게 뭐냐?'
뭐 이런 생각이 들 만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앙의 욕심 때문에,
'내가 정말 제대로 한 번 신앙 생활을 해봐야지, 진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그랬다가 쫄딱 망하게 된 이런 상황이라는 거예요.
사업을 하는데 '내가 진짜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업해 봐야지..'
그랬다가 다 망해 가지고서, 빚더미에 올라앉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뭐 이렇게 된 상황이라는 거예요. 지금 원망이 나올 법한 상황이라는 거예요.
▲야곱이 어느 정도로 궁지에 몰랐냐 하면, 잘 집이 없었어요. 그래서 노숙을 하는 겁니다.
베개가 없어서 돌멩이 갖다 놓고 베고 자는데,
여러분 이스라엘 광야의 밤은 굉장히 춥습니다. 사막기후 이기 때문에요.
그 추운 곳에서 돌 베개를 베고, 이렇게 정말 비참하고 막막하게 자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막막함 가운데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이 벧엘 사건이에요.
어느 날 에 차가운 길가에서 돌을 베개 삼아 차가운 땅바닥에서 노숙하고 있는데
이 비참한 야곱 위에 하늘이 열리는 거예요.
그리고 사닥다리가 보였고, 그 위로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야곱이 꿈속에서 보게 됩니다.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나요?
(물론 은혜, 선택의 요인이 있지만) 야곱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야곱 안에 있던 신앙의 열정을 하나님이 보신 거에요. 무슨 열정?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가야겠다는 야곱의 그 열정,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그 분들의 데스티니의 유업을 내가 이어가고 싶다는 그 열정,
이걸 하나님이 보신 거예요.
그래서 그 광야 가운데 돌베개 베고 자고 있던 이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 됩니다. *소위 '야곱 언약'
그런데 이 언약의 내용(28:13~15)이 뭐냐 하면, 어디서 많이 들었던 언약입니다.
벧엘에서 야곱에게 하나님께 처음으로 그와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과 거의 비슷해요. 워딩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아요.
아브라함과 맺었던 똑같은 언약을, 야곱과 다시 맺으신 거예요.
여러분 이때 바로 이때, 야곱이 그렇게도 원했던 언약의 데스티니가
자기에게로 계승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야곱이, 조상의 유업을 물려받기 원했던 것은,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거나, 속여서 축복을 받거나 해서 계승 되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야곱이 다 했어요.
그렇지만 언약의 계승자가 되고, 조부, 부친의 데스티니의 유업을 이어가기 시작한 것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일어난 거예요.
그분이 다시 한 번 이 (아브라함, 이삭) 언약을 갱신 하실 때
그래서 '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고,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이 아니고, 이삭과 맺었던 언약이 아니고
내용은 비록 같을 지라도, 내가 너와 맺은 언약은 이것이다!'
이것이 확인되는 순간, 야곱이 비로소 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업을 이어가는 자로 서게 됐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도 이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모태신앙에 대한 생각들이 참 많이 났어요.
모태신앙을 '못된 신앙, 못해 신앙' 이렇게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여러분, 모태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모태 신앙이 나쁜 거겠어요?
부모가 믿음으로 살았는데, 왜 자녀가 축복을 안 받겠어요?
모태신앙은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출발점부터가 어드밴티지를 받고 출발하는 거예요.
부모의 데스티니의 유업을 이어갈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자들 이고요.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는 자들이고, 그 축복을 계승할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벧엘의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냥 '아빠의 하나님, 엄마의 하나님'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어요.
모태신앙인은, 벧엘 체험이 있어야 되요.
그래야 믿음의 유업이 계승 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고, 아무리 내가 믿음의 환경 가운데서 자랐어도
그것이 곧 내가 믿음의 계승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인이 부모의 믿음의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벧엘 체험'이 꼭 필요합니다.
'저희 집은 지금 4대째 믿고 있는데요..' 뭐 4대가 아니라 100대째라도
벧엘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되는 거에요.
벧엘 사건은, 모태신앙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내가 개인적으로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야곱의 데스티니는 이삭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을 경험하는 환경이 있었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관심이 생겼을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야곱의 진짜 데스티니는 벧엘에서 나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삭이 하나님이 아니에요.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정말 신비하게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셨대요.
또 제물을 갈라 놨더니 그 가운데로 불로 나타나셔서 그렇게 지나가서다더라...'
전에 들은 그 하나님, 전설처럼 들리는 그 이야기가
어느 날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아 그게 전설 같은 얘기가 아니었구나!'
'그때 우리 할아버지께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내게 나타나셨구나!'
이것이 경험 되어지는 순간, 거기서부터 믿음의 계승자로서의 야곱의 인생이 시작되는 겁니다.
여러분 모태신앙이든/ 아니면 여러분이 처음 믿음의 1세대 이든지 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벧엘의 하나님'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좋은 교회, 유명한 교회, 전통 있는, 유서 깊은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여러분, 그런 '견고한 진'이 부서져야 합니다.
정말 좋은 교회라 하더라도, 정말 유서 깊은 아브라함의 전통이 내려오는 가문이라 하더라도
'나의 벧엘 체험'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거 없으면 '유서 깊은 교회, 가문' 다 소용없어요.
내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내가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야곱은 사기꾼일 뿐이에요.
여러분, '나의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셔야 됩니다. 물론 은혜로 만나죠.
그렇지만, 그걸 사모하는 마음 또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벧엘이 그 이후로, 야곱에게 엄청난 힘이 됐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아무 소망도 없고, 아무 비전도 없고,
도대체 내가 살 건지 죽을 건지도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이것이, 야곱이 그 후에 그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진짜 힘이 됐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살펴 보겠지만 야곱은 인생의 위기의 순간마다 벧엘로 돌아가요.
벧엘로 돌아갈 때마다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주셨던 언약을 리마인드 해주세요.
'내가 너에게 뭐라고 약속 했느냐? 내가 너에게 뭐라고 언약 했느냐?'
이걸 리마인드 해주시고,
그것이 야곱이 모든 위기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진짜 능력이 되었어요.
여러분에게 벧엘이 있으세요? 이 벧엘이 없다면, 그것은 기초가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버팀목이 없는 거예요.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뚫고 나가시겠어요?
나와 약속 하셨던 하나님, 나와 만나셨던 그 하나님,
내 인생에 가장 비참한 순간에, 아무 희망도 안 보이고, 아무 소망도 안 보이고
나는 그냥 사기꾼 야곱이고...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만나주셨고,
나를 어떻게 구원 하셨고, 내 인생을 어떻게 펼쳐오셨는지를 경험한.. 그 체험이 있어야 돼요.
그 간증이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벧엘의 체험'이라는 것은, 꼭 초자연적인 경험이 아니라도 돼요.
내 인생 가운데 임재하시고, 개입하셨다는 증거가 있느냐는 거에요.
간증이 있느냐는 거에요.
기독교는 여러분, 체험의 종교입니다. 이런 벧엘의 체험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연약한 거예요.
인생의 위기 때, 어디로 돌아가시겠어요. 야곱은 벧엘로 돌아갔죠.
모태신앙이 아니라, 벧엘 신앙이 있어야 됩니다.
벧엘의 체험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벧엘의 체험은 이후 야곱의 인생에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이어지는 야곱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중요한 거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돼요.
벧엘의 체험에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두움과 막막함 가운데 있던
아무 빛이 보이지 않던 야곱의 인생에 초자연적으로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책임지겠고, 내가 너를 복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개입하심 이에요.
근데 두 번째 파트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이 사건을 경험 하고요. 야곱이 뭔가를 합니다.
돌을 가져다가 쌓아서 제단을 만들어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서원을 합니다.
여러분 언약은, 항상 쌍방이 맺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단독으로 맺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려고 해도, 언약을 맺는 당사자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약은 성립되지 않아요. 이것이 언약(쉬운 말로 '계약')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교리 중에, 아주 심각한 교리적 오해가 있는데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셨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고, 성경 전체는 언약 위에 기록돼 있어요.
언약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셔서
우리가 아무 공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먼저 오퍼 offer 를 하세요.
맞아요. 그래서 은혜 예요.
그렇지만 여기에 사람이 반응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반응한 사람만 언약을 맺는다는 거에요.
여러분, 약속을 하려면, 쌍방이 다 합의를 해야 약속이 되는 거지,
한 쪽이 일방적으로 해도, 한 쪽이 안 받아들이면, 약속이 맺어지지 않죠.
그래서 야곱이 서원을 하고, 돌제단을 쌓습니다.
이것은,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 언약(약속)하신 것에 대한,
야곱의 반응이에요. 이 반응이 있을 때, 비로소 언약이 성립되는 거예요. 아멘!
야곱이 돌로 제단을 쌓았고요, 그리고 서원을 해요.
▲먼저, '돌을 쌓는다'는 건 뭐냐면
먼저는 예배한다, 경배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노력한다는 거예요.
계속 오래 기억하겠다는 것이죠. 돌제단을 쌓아놓으면, 그게 누가 허물지 않는한 계속 보존돼죠.
돌제단이 나중에 성막에서 번제단이 되는데.. 거기서 제물을 바치며 계속 예배하죠.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그 구원의 은혜를 계속 기억하는 거예요.
야곱이 지금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자기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예배하며, 계속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예배'에 매치됩니다.
제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니까, 이 세상은 은혜를 기억하는 문화가 아니더라고요.
문화 자체가 배신과 배반의 문화에요. 등에 칼을 꽂는 것이 아주 일반화 돼 있어요.
제가 이번에도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그런 걸 너무 많이 봤어요.
진짜 은혜로 자기를 살려 줬는데, 진짜 은혜로 자기를 키워 줬는데,
그 등에다 칼을 꽂는 것... 와~ 너무 쉽게 일어나더라고요.
우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성품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 하는 것은 똑같아요. 왜냐면 그게 성품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그 사람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사람에게 배신하는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께도 등 돌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일하는 철칙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배신한 사람하고는 절대 일을 같이 안 한다는 거예요. (또 배신하기 쉽다는 거죠)
왜냐면 배신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에요.
배신자는, 그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거죠.
물론 동의가 안 돼서 떠날 수는 있어요. 그건 얼마인지 가능합니다.
그럴 땐 배신하는 게 아니고, 그냥 조용히 떠나는 거죠...
우리도 벧엘의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돌제단을 쌓을 줄 알아야 돼요.
여러분 은혜의 순간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은, 자기 집 거실 책장에 '유동식 캔'을 하나 올려놓았다 하더라고요.
목회하다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소화불량에 걸렸습니다.
밥이나 죽이 한 숟가락도 소화가 안 되니까, 중풍환자들이 먹는 유동식(물처럼 된 음식)을
몇 년 동안을 그것만 드셨다고 해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는데
그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랍고, 또한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 집 거실 선반위에, 자기가 몇 년 동안 마셨던 '유동식 캔'을 올려놓았다 하더라고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단락 펀글)
여러분도, 핸드폰 배경사진에다 '돌제단' 사진이라도 깔아놓으세요.
그럼 사람들이 물어볼 거 아니에요? '이게 무슨 사진이냐?'
그러면 그걸 설명할 때마다, 자기 스스로 '벧엘의 돌제단'이 리마인드 될 게 아닙니까?
▲둘째, 서원이 있어야 됩니다. 그 서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하겠습니다..
라는 결단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십분의 일을 주님께 드릴 것이고,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고 서원을 해요.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서원)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돼요.
'주님이 나를 이렇게 구원 하셨다면
내가 하나님과 당신의 집을 위해서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내 인생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서원이 있어야 언약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제게도 이런 벧엘이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원하는 대학만 들어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대학에 갔어요.
근데 명문대 대학생이 되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요.
대학교에 들어간지 한 6개월이 지났는데요. 제 인생에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됐어요.
내적인 위기였어요. 소망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아니 가장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이런 거라면,
내가 앞으로 또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고 열심히 산다고 한들,
그게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 소망이 없어졌을 때, 무기력 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뭘 한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야 여기서 밥을 몇 공기 더 먹고 죽으나, 그냥 죽으나.. 뭐가 다르냐?'
모르긴 해도 아마 그때 제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 인생은 굉장히 달라졌을 거예요. 짙은 어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그때 하나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냥 어느 선배의 전도를 통해서요.
제가 모태신앙 이었는데, 제가 벧엘의 경험을 했어요.
전도를 받고 그 시간에 바로 제가 영접하진 않았습니다.
근데 밤에 집으로 돌아가서, 제 방에서 혼자 잠을 자는데
문득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기도 때 하늘이 열렸어요.
제가 그 전까지 평생 5분 이상 기도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그날은 밤새도록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아침까지 기도했어요. 그 날 밤, 제게 하늘이 열렸어요.
제가 울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걸, 그 밤에 실감했어요.
밤새도 록 울며 기도했고, 새벽에 제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됐어요.
'아 하나님, 살아 계시군요. 내 인생은 하나님 겁니다!'
그리고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어둠 가운데 있었던 적이 없어요.
내가 뭘 위해 살아야 되는지도 알게 됐어요. 새로운 생명이 됐어요.
이게 벧엘이에요.
이 벧엘의 경험이, 모태 신앙으로 평생 살았던 신자들에게는 꼭 필요해요.
물론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내 소원도 있으면 좋습니다.
이 벧엘의 경험이 있을 때 비로소 거기서부터 믿음의 유업이 계승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벧엘의 경험이 있는 순간, 거기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리뉴 renew 하시는 그 순간
거기서부터 우리 인생의 데스티니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것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다시 야곱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후 벧엘의 체험은, 야곱 인생의 위기 때마다 그의 인생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됐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란에 무사히 도착하고
그곳에서 라반의 환대를 받고, 뭐 그러면서 이제 그 인생이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시작해요.
그래서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얻게 되고
그곳에서 많은 이제 양과 소도 생기게 되고, 재산도 불리게 됩니다.
근데 어느 날 또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야곱의 양들이 점점점 많아지고, 라반의 양들이 점점점 적어지니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야곱을 시기하고 핍박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는 그런 형편이 됐습니다.
아마 이것이 야곱에게는 굉장한 내적 고통이었을 거예요.
이때 다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31: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벧엘의 약속을 야곱에게 리마인드 하신 거예요.
'네가 그때 나에게 기름 붓고 서원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것을, 네 서원을 약속으로 취했다 accept'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매우 중요해요.
우리 주님의 언약의 말씀 앞에 반응하는 서원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내가 주님 앞에서 주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습니다'
이런 서원이 있을 때, 하나님이 것을 취하시는 거예요. 약속으로!
그리고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세요.
믿음의 초석, 언약의 초석으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벧엘이 있으십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벧엘이 있으십니까?'입니다.
'아~ 그때, 그 위기의 때, 정말 머리 붙일 곳도 없고, 정말 베개도 없어 돌 베고 자던 그때,
내일이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던 그때,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셨지.. 거기서 하나님이 내게 약속 하셨지..
맞어, 그것이 내가 오늘까지 살아 올 수 있는 힘이었지!'
이 벧엘의 약속, 언약!
'맞아 내가 거기서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집으로 삼았지,
그리고 서원했지!'
여러분에게는, 이 벧엘이 있으세요? 돌아갈 벧엘이 있으세요.
신앙의 위기 때마다 돌아갈 영적인 고향 starting point 이 있으세요?
벧엘이 중요한 이유는, 내 인생의 위기 때마다, 그것이 내 버팀목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이 벧엘의 은혜를 다시 경험 해요.
에서가 환대를 해 줍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지요.
라반이 환대해 준 것도 불가능 했지만
에서가 환대해 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자기를 죽이겠다고 했던 그 형이, 자기를 환대해 주고, 살 땅을 주고...
어쨌거나 그렇게 돌아와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아비의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가요. 또 위기가 생겼습니다. 딸 디나 사건이 터집니다. 34장
가나안 땅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사랑해서 그를 취해 갔습니다.
납치해 간 거예요.
그것에 화가 나서, 디나의 오라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속이죠.
여차여차... 세겜 성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어요.
근데 여러분 이것이 보통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원래부터 살던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손님으로 와 있는 거거든요.
가나안 땅의 원래 정착민들이 배려해 줘서, 그냥 살게 해준 손님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발 붙일 땅이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자기 묘지 구할 때, 자기 소유의 땅을 처음으로 얻어요.
그런데 지금 세겜 족속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모든 가나안 사람들의 적이 된 거예요.
이제는 전쟁이에요. 왜냐하면 가나안 족속들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얘네가 그냥 살게 해줬더니, 조금 세력이 커지니까 마음에 안 든다고 세겜사람들을 죽였네..
그럼 우리도 죽일 수 있잖아?' 그래서 전운이 감도는 상황이 된 거예요.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의 집이 위기에 처한 거예요.
자 이 절체절 명의 위기의 순간에, 다시 하나님이 찾아 오십니다.
35:1~3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
디나 사건으로 다시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이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위기 때마다 돌아갈 곳이 어디라는 거예요? 벧엘이라는 거예요.
우리 신앙의 벧엘의 체험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 벧엘의 체험을 '중생 born again 의 체험'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 전에는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
한 번도 회개한 적도 없고, 제대로 기도를 집중해서 해 본 적도 없고...
그냥 명목상 신자로 살았던 야곱이, 일생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죠.
이렇게 볼 때, 아직 벧엘의 체험이 없는 신자는,
'아직 본 어겐의 체험이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론은 논란이 많은 분야 중 한 가지입니다./주.)
여러분들은 이 벧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없다면, 지금이라도 벧엘을 가지셔야 돼요.
▲창35장에서, 야곱이 벧엘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35:10~15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맺었던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리마인드 해주세요.
'네가 과거에 수 십년 전에 나와 맺었던 언약을 기억 하느냐?' *창28장의 때에
그때 야곱이 약 77세 경이었는데, 하란에서 20년을 지냈고,
가나안에 돌아와서도, 몇 년을 더 지난 때였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이미 나이가 많은 1백세 경, 노년의 때를 맞이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컴퓨터를 쓰다가, 문제가 많이 생기면 리셑 버튼을 누릅니다.
그게 바로 벧엘로 돌아가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돌아갈 벧엘이 있어야 돌아가지요.
벧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돌아갈 데가 없는 거예요.
야곱은 벧엘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언약)을 받습니다.
28:13~15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벧엘의 체험을 할 때 (본 어겐의 체험을 할 때)
보통의 경우는, 언약을, 비전을, 약속을, 사명을 함께 받는 거예요.
또한 자기가 그 비전과 사명에 대해 헌신하게 되기도 하고요. 28:16~18
그러므로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 소명이 모호하다,
그게 확실하지 않다는 사람은.. 아직 벧엘의 체험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인생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는 거죠.
야곱은, 벧엘의 체험 이후로, 28:13~15절이 자기 인생의 비전, 방향, 목적, 사명이 된 거죠!
남은 인생은,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길을 가는 거죠...
혹시 가는 길에, 세겜과 같은 난관을 만나더라도.. 다시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죠!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죠!
여러분께는, '벧엘'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변치 않는 영원한 언약, 비전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