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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9장, 레아와 라헬

LNCK 2023. 10. 7. 21:38

79 라헬과 레아 그리고 야곱 (29:21-35)

 

◈창28장, 레아와 라헬       창29:21~35        ☞창세기 설교모음

 

*김성수 목사 창세기 79강에서

 

오늘은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항상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라헬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그 두 여인의 이야기를 보고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레아의 이야기 속에 더 많은 복음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는 질투심 많은 두 자매의 자식 낳기 경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으로부터 말미암게 되는 교회의 이야기를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헬과 레아는 무언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지금 야곱의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라헬이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

그 다음에 레아가 그의 인생 속에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2:17-18)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에 갑자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헬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 등과 동시대에 일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남 유다에서 활동을 하면서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남 유다를 향해 ‘항복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라고 오해를 받고 동족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이방의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권면을 했으니

당연히 매국노라는 핍박을 받지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그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울고 다녔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기 민족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본래의 뜻은 정치적, 군사적 항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바벨론을 들어서 매를 대시는 것이니까

얼른 너희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꾸지람과 매를 순순히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항복하고 불순종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0장에서 33장까지를 죽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 앞에 매를 맞기는 하지만, 멸망당하지 않고 회복 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2장에서 인용된 렘31:15절은 그 전체의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징계와 회복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31:15~17절은 각자 찾아서 보겠습니다.

애곡하는 라헬에게 ‘울지 말라, 그들이 돌아온다.’하고 회복의 메시지를 함께 주시고 계십니다.

 

15절을 보시면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슬퍼하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남 유대의 처지를

유대인의 전형적인 어머니로 여겨지는 라헬이

그녀의 무덤 속에서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라헬은 아들을 딱 두 명 낳았는데 그 중 하나가 요셉입니다.

그 요셉의 두 아들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이지요?

북이스라엘의 중추가 된 지파가 어떤 지파입니까? 에브라임입니다.

그리고 라헬의 두 번째 아들은 베냐민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남 유대의 중추 지파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라헬하면,

북이스라엘과 남 유대의 어머니, 즉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통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막내아들 베냐민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에 애굽에 볼모로 잡힐 뻔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베냐민 두 아들은 멀쩡하게 살아서 야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야기가 유다의 바벨론 포로 사건을 미리 힌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라헬이 요셉과 베냐민이 애굽으로 팔려간 사실을 생전에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중적 상징을 담아서

마치 라헬이 두 아들이 부모의 품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을 경험이라도 한 것처럼

묘사를 하는 것이고, 그 이야기를 유다의 바벨론 포로와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서 묻힌 곳입니다.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자식들,

유다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여 애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다가 라헬의 무덤이 있는 라마에서 풀려납니다. 렘40:1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징계와 회복을 미리 삶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바로 이 상황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오심에 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는데, 그 땅에 두 살짜리 미만의 아이들이 모두 살육을 당하는

처참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마태가 뜬금없이 라헬이 라마에서
자식들로 인하여 애곡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인용해다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지금 그 유아살해 사건을

유다의 바벨론 포로 사건과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이방인인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된 것처럼

에돔 사람인 이방인 왕 헤롯에 의해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살육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죄로 인한 죽음과, 바벨론 포로 사건이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런데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 속에서 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로 인한 죽음과 바벨론 포로는,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살아나게 될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태가 렘31장의 이야기를 인용해서 쓴 것입니다.

 

라헬이 두 아들이 잡혀가서 울고 있지만

그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죽어야 할 이스라엘, 즉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게 그 복음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기 위해

별이 동방박사들을 헤롯의 궁으로 인도한 것이고

이방 사람 헤롯이 죄의 권세가 되어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야 할 자들 중에,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나님께 대우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위로를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야 할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지고

결정되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예수로만 위로를 받습니다.

 

라헬은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식이 죽은 것을 위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힘든 시험이 닥치면,

하나님, 빨리 이 문제 해결해서 나를 위로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 문제 해결이 정말 우리를 위로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위로는 오직 죽은 자를 살려내신 그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돈으로 여러분의 위로를 삼으시겠습니까? 명예로 여러분의 위로를 삼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로 말미암아 슬피 우는 라헬에게 자식들을 살려 보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자녀들이 화목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여러분,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이나 현상 속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된 자신의 존재와 신분 확인에서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지며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라헬이 담고 있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제 레아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1, 33절을 보면 레아에게 총(寵)이 없었다는 말이 두 번 반복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은총)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반해서 그녀를 얻기 위해 외삼촌 집에서 7년간을 종처럼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야곱의 나이가 여든넷이었는데   *77+7

라헬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 노구를 이끌고 7년을 하루같이 보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 옆에 누운 여자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뒤늦게 외삼촌에게 속은 것을 알고 7년을 더 일해서

라헬을 얻고야 맙니다. 라헬은 그렇게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여인입니다.

 

반면에 레아는 곱고 아리따운 라헬에 비해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저 눈매가 선한(안력이 부족) 평범한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레아의 등장은, 바로 버림받은 여자, 즉 교회에게서 탄생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레아의 아들 유다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싫어 버린바 된 여인에게서 약속의 후손인 메시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 역시, 레아처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는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사53:2-3, 표준새번역)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레아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마침내 약속의 후손인 ‘교회’를 탄생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창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의 후손을 탄생케 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전부 총(寵)이 없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마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가 몇 명 등장합니다.

원래 히브리 사람들의 족보에는 여자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조상들을 기록하면서 여자들을 몇 명 끼워 넣습니다.

 

1) 그 첫 번째 여자가 다말입니다. 다말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죽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형사취수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동생이 취해서 자손을 이어가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에게 자기 씨를 주기가 싫어서 땅에다 설정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습니다. 그렇게 되니 유다가 막내아들을 다말에게 주고 싶었겠습니까?

아들 둘을 잡아먹은 며느리에게 막내아들마저 맡겼다간 집안의 대가 끊길 판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며느리 다말을 방치했습니다.

 

그 때 다말이 창녀로 변장을 하고 시 아버지를 유혹합니다.

그리고는 임심을 해서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 후손에서 다윗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음탕한 며느리 다말에 의한 유다의 봉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인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라인이 이어지는 작은 십자가의 그림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버려지고 구겨진 한 여인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그녀에게서 약속의 후손의 조상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레아의 또 다른 그림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두 번째 여자는 라합입니다. 라합은 기생입니다.

당시의 기생은 몸을 파는 여인들이었으므로 창녀 라합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구한 운명의 이방여인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자

그녀가 조국을 배반하고 소문으로만 들은 여호와를 택합니다.

 

그리고는 여리고가 진멸될 때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 창녀 라합이 보아스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그 보아스에게서 오벳과 이새와 다윗이 나지 않았습니까?

역시 레아의 또 다른 그림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세 번째 여인은 입니다. 룻도 역시 이방 여자입니다.

그녀는 모압 사람으로 베들레헴에서 이민을 온 나오미의 며느리가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어서 그 남편의 동생까지도 죽었고 시아버지마저 잃었습니다.

 

그렇게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시 어머니 나오미를 좇아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베들레헴으로 들어와 거기에서 보아스를 만나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 한 여인이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의 후손을 잉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남편 요셉이 마리아를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 말은 남편인 요셉이 마리아의 불륜을 의심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간음을 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요셉이 조용히 관계를 끊어 여자를 살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서 약속의 후손인 예수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레아의 그림은 이렇게 다말과 룻과 라합을 거쳐 마리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약속의 후손인 예수가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네 여자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전부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천대받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레아는 바로 그 여인들의 원시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총을 받지 못한 여인이 하나님의 총을 받아 약속의 후손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레아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겪는 기구한 운명이나, 불쌍한 처지나,

이해 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상황 등이

복이나 저주의 내용이 아님을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예수의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끊어진 상태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값진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것은 저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우리가 가진 소유나 인기나 명예 등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기죽을 것도 없고 망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못 배웠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도 없고 약하다고 해서 숨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예수와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삭이 받은 진정한 복은? https://rfcdrfcd.tistory.com/15981248 (페이지 하단)

 

내가 지금은 비록 레아처럼, 다말처럼, 기생 라합처럼, 이방 여인 룻처럼, 기구한 마리아처럼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낳으셨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게 바로 복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낳으셨다는 말은 나로 인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므로

내가 예수를 낳았다는 말과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계12장에 보면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예수를 상징하는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그 그림이 바로 (은)총이 없던 레아가, 약속의 후손의 라인인 유다를 낳는 그림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총을 받지 못한 레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열조의 무덤에 묻힙니다.

열조의 무덤에 묻힌 것은 사람의 사랑을 받던 라헬이 아니라, 총이 없던 레아입니다. 49:31

그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한 무덤에 장사됩니다.

 

그리고 야곱도 마지막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아닌,

레아와 함께 부여조의 무덤에 묻힙니다.

 

그렇지요? 성경은 지금 하나님의 복은

인간적인 사랑과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나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고

가난하고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성공신학, 번영의 신학에 속으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런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는 그러한 세상의 힘을 조롱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께 하소연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레아가 시력이 약하고, 총이 부족한 것을 하소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 워싱턴 주 휘트워스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인 제럴드 L. 싯처 역시

인생에서 엄청난 아픔의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저자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그 지역에 있는 인디언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럴드 싯처는 무사히 집에 도착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 차를 운전해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에는 제럴드 싯처와 아내,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런 자녀 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트럭이 싯처의 차를 덮쳤습니다.

 

그 사고로 제럴드 싯처의 어머니와 아내와 큰 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이 엄청난 삶의 경험을 하고난 후에 이 일을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내가 일평생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저질러서 이런 사고가 내게 생긴 것인가?

내가 아내와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는가?

 

하나님께서 내 자녀를 그렇게 거두어 가실 것이라면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었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의 품안을 떠난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은 왜 내게 이렇게 대우하시는가?’

 

우리도 삶에서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왜인가요? 도대체 왜인가요? 하나님 잘 믿어 보려고 했는데,

하나님 잘 믿어 왔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제럴드 싯처는, 세 명의 가족의 장례식을 마친 후에

그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그의 묵상은 그로 하여금 더 깊은 생각을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하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고, 지금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또 우리는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우리 현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성경에서 거의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함부로 넘겨짚어 염려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해 주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성경의 계명들)을 지금 행하라고 명령한다.”

 

때로 인생길에 우리는 크고 작은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럴드 싯처처럼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자녀를 갑자기 잃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일구어 온 사업이 무너지기도 하고 가정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갇혀 지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일이 옳다 그르다, 하나님이 옳다 그르다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리를 못살게 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언니

 

이런 소리를 해도 좋을는지 모르지만 이해하시고 들어 주세요.

서울 중구 신당 동에 살 때, 우리 집(이 글의 저자) 바로 위에는

종로 3가에서 어느 한식집(요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요정 사장이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기네 가게에는 많은 여 종업원들이 있었답니다.

외모가 예쁜 언니도 있고, 똑똑한 언니도 있고, 그저 그런 언니도 있었답니다.

 

손님들이란 보통은 예쁜 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월 말에 월급을 주려고 계산을 해 보면,

예쁜 언니들 보다, 똑똑한 언니들보다,

그저 그렇고 그런 언니들의 월급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훨씬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참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외모는 신통치 않은데도 많은 월급을 받아 가는 그 언니들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그 언니들은 손님들이 하는 말을 정성껏 잘 듣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할 소리, 안 할 소리, 별별 소리를 다 해도

그 언니들은 한결 같이 그 소리를 잘 듣고, 맞장구도 잘 치고,

상황에 맞게 착- 착- 응대를 잘 하더라는 것입니다.

 

손님들이 처음에는 잘 생긴 언니나 똑똑한 언니를 찾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 예쁜 언니, 똑똑한 언니보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언니들을 더 찾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외모는 별로지만, 찾는 손님이 많은

<말을 잘 들어주는 언니>들이 월급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외모를 안 보고 판단하기에는... 맹인이 정확하다

 

우리는 외모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가급적 그의 깊숙한 내면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 수도원 근처에 늘 앉아있던 한 소경(시각장애우)은

수도사 뱅카이 Bankei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래 전에 소경이 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음성을 듣고서 대략 판단하게 됩니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이 상대방의 성공을 축하해주는 말을 들을 때면

제 귀에는 그 음성의 톤에서 은근한 질투심이 배여 있음이 들립니다.

 

반대로 상대의 불행을 애도하는 대화를 들을 때면,

어째서인지 제 귀에는, 그 음성에 즐거움과 만족의 톤이 배여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얼굴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뱅카이 수도사님의 음성에는 그런 것이 없이 늘 진지했습니다.

 

그 분이 행복한 얘기를 하실 때는, 제 귀에 정말 행복하게 들렸습니다.

그 분이 슬픈 말씀을 하실 때는, 제 귀에 정말 슬프게 들렸습니다.

 

사람의 진심은 쉽게 속일 수 없는 모양입니다.

.....

차를 타고 가다가 어디 라디오에서 들은 것 같은데,

저 사람이 많이 배웠는지, 적게 배웠는지...

그의 음성을 들어보면 대략 안다고 합니다.

 

그 음성의 톤에서, 그의 배움의 깊이가 배여나온다고 합니다.

인격의 깊이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요.

 

그 후부터 저는, 사람들의 음성의 톤을

제 혼자 나름대로 음미하는 묘한 습관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