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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장, 여러분은 브니엘이 있습니까?

LNCK 2023. 10. 9. 07:20

◈여러분은 브니엘이 있습니까?             창32:22~31                ☞창세기

◑도입 '벧엘의 하나님'

야곱의 데스티니를 이루는 큰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가 벧엘의 하나님이고, 또 하나가 브니엘의 하나님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뭐냐 하면, 
야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던 조상의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직접 찾아오셔서 
'아, 그분이 나를 만나시고 나를 아시는 나의 하나님이구나' 
이걸 (개인적 인격적 만남을)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순간이 벧엘이었습니다. 

그래서 벧엘은, 야곱이 가장 어려웠던 청장년의 때였죠.  *약77세
그래서 미래도 알 수 없고, 그다음에 집에서 쫓겨나서 유배 가는 그 길에 
돌베개 베고 자는 그 비참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나를 지금도 지켜보고 계시고, 나를 찾아오셔서 함께하시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와 맺었던 언약을 
나에게도 다시 한 번 리마인드해 주시는... 

그래서 그 언약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맺었던 언약이 아니라 
이제는 나와 언약을 맺은 그 하나님, 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사건이 벧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벧엘은, 야곱의 데스티니가 시작되는 사건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 전설처럼 알고 있던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 인생 가운데 찾아오시는 분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 분이시고, 나와 말씀하시고, 
나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벧엘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특별히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시고 자라신 분들은 
'모태신앙'이 중요한 게 아니라, 벧엘신앙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태신앙인들은 벧엘의 경험이 있지 않으면 
야곱처럼 계속 사기꾼의 생활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 가운데 벧엘의 하나님이 만나져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내가 살아가는 가운데 만난 하나님, 내 인생의 위기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그래서 나를 지켜주시고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야곱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데스티니가 시작되는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데스티니는 '벧엘의 하나님'으로 시작됐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없으면, 나의 데스티니는 시작 조차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벧엘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 앞에서 나의 삶을 드리는 헌신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돌제단을 쌓죠. 돌을 쌓고 서원을 합니다. 
'내가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내가 아버지의 집을 세우겠다고 하는 서원, 
그래서 쌓은 돌제단에 기름을 붓고, 서원하는 곳이 벧엘이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도전했죠. '여러분에게 벧엘이 있으십니까?'     ☞ 클릭 
벧엘이 없다면,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셔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종교 행위일 뿐이고요. 그냥 우리 살아가면서 퍼포먼스하는 거지, 
진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 벧엘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론

오늘은 야곱의 일생에 중대한 두 번째 사건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두 번째 사건은, 브니엘 또는 얍복강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서 밧단 아람에 살던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긴 세월을 보내죠. 
그래서 거기서 라반의 딸인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얻게 되고 
또 거기서 많은 재산을 불리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과 갈등이 생기죠. 
그들이 야곱의 재산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겨서, 야곱은 결국 라반을 떠나게 됩니다. 

하란은 성읍 이름이고, 밧단 아람은 그 지역을 광범위하게 일컫는 말이죠. (서울 코리아처럼)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야곱은 밧단 아람의 라반을 떠나서 
원래 살았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오려고 보니까 문제가 하나 있어요. 에서지요. 
20년 전에, 고향 집을 떠나게 된 이유가 에서 때문이었잖아요. 
에서가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봐라, 그럼 내가 야곱을 죽이리라' 하고 이를 갈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에서하고는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습니다. 
에서가 살아있는지.. 화가 풀렸는지.. 여전히 나를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는지 
전혀 예측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에서를 봤을 때는 
자기를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불안합니다. 

불안해서 자기 앞에 전령을 보내서, 에서에게 미리 사람을 보냅니다. 
'내가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라고 소식을 그랬더니 
전령이 와서 보고하는 것이, 에서가 동생 야곱을 맞으러 400명을 데리고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도 이제 분별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자기를 환영하는 거면, 그냥 혼자 나와서 환영하면 되는데 
왜 400명을 데리고 나올까요? 
이게 단순한 환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한 거예요. 
'이거는 나를 죽이러 오는 거고 전쟁하러 오는 거지..' 그래서 이제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려운 거죠. 잠이 안 옵니다. 잠을 못 자고 뒤척뒤척하다가 
이제 요단강 지류인 얍복강까지 왔습니다. 얍복강만 건너가면 바로 에서의 땅이에요. 

얍복강의 건너기 그 전날 밤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아내와 모든 사람들은 미리 건너보내고 
야곱은 강을 건너기 전 이 편에서, 뒤척뒤척하며 밤을 지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누가 찾아오시죠? 다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기록되어 있기는 '어떤 사람'이라고 했지만 
마지막에 야곱이 고백하는 걸 보면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을 하죠. 

하나님께서 (벧엘에 이어)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십니다. 
이 씨름이 바로 브니엘의 씨름이에요. 

야곱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했을까요? 
그 내용은 오늘 본문 바로 전에 나오는 야곱의 기도를 보면 대충 알 수 있어요. 

32:9~12절까지 보면 야곱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브니엘의 씨름의 내용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살려달라는 거예요. 
'전에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거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후손으로 바다에 모래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살려주십시오!' 
이것이 브니엘의 씨름이었습니다. 

에서 앞에 서있다 보니까, 자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땅으로 돌아가긴 해야 되겠는데 
'나를 죽일지, 살릴지, 해코지할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는..' 
'아마 분명히 나를 죽이려고 오는 것 같은데, 하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이것이 브니엘의 씨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이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갈 거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통해서 열방이 복을 누릴 거라고 말씀하셨고 
내 후손이 바다에 모래 같이 많을 거라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이 약속을 다시 하나님한테 주장하는 거예요. 

'그렇게 약속하셨으면, 그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나를 살려주십시오!' 
이것이 브니엘의 씨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데스티니는, 단순히 '벧엘 사건'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벧엘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아, 맞아, 하나님이 살아계셨구나. 아, 내가 창조주가 없는 줄 알았더니 
창조주가 계셨구나. 나를 구원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시구나. 
그분이 내 인생을 이렇게 축복하시고, 내 인생을 이렇게 위로하시고, 이렇게 회복하시고..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새롭게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우리의 데스티니가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진짜 데스티니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두 번째 사건이 있는데 
그건 뭐냐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씨름하는 

씨름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브니엘의 씨름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도 
그의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 데스티니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 삶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진짜 이유가 뭐냐면 
브니엘의 밤이 없는 거에요. 벧엘의 밤은 있어요. 
분명히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내가 알아요. 믿어요. 
그런데 브니엘의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밤새도록 씨름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분이시라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주십시오. 
나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주십시오.' 
이 씨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 씨름이 있을 때, 우리의 데스티니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야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교훈은 뭐냐면 
-첫째,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야 돼요. 그건 뭐예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간섭이 있다는 걸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이 출발과 동시에, 그 약속들을 신실하게 이루어달라고 하는 
브니엘의 씨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야곱이 그의 데스티니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이 브니엘의 씨름의 본질이 뭔가? 
무엇을 가지고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했는가? 
이 씨름을 통해서 야곱에게 일어난 변화가 뭔가?
 
이렇게 브니엘의 씨름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벧엘의 하나님 뿐만이 아니라, 
브니엘의 씨름, 이 브니엘의 밤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브니엘의 씨름의 첫 번째 본질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영에 속한 싸움이라는 거예요. 엡6:12
이 말씀처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라는 거예요. 

지금 눈에 보이는 야곱의 싸움은 뭐예요? 에서와의 전쟁입니다. 
에서가 바로 자기 코앞에까지 와 있어요. 

눈에 보이는, 현실로 나타나는 야곱의 문제는 에서의 군대였지만 
진짜 싸움은 브니엘에서, 얍복강 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브니엘의 전쟁, 브니엘의 씨름에서 승리했을 때 
에서와의 전쟁은 그냥 저절로 해결이 됐어요. 
이건 하나님께 해결하신 문제였어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씨름에서 이겼을 때 
보이는 전쟁, 에서와의 전쟁은 이미 결판이 났다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전쟁도 치르지 않고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데스티니를 이루어가는 방법이고 
우리의 장벽들을 제거하는 방법이라는 거예요. 

우리 눈앞에 보이는 장벽들이, 진짜 장벽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그 문제들이, 진짜 싸워야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진짜 싸워야 될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라는 거죠.

브니엘의 밤에 밤새도록 씨름해서.. 거기서 승패가 결정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승패가 결정나면, 눈에 보이는 환경들은 
하늘에서 풀렸으면, 그냥 저절로 풀리는 거예요. 

사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그림자라는 거예요. 
왜 '그림자'라고 표현하냐면, 하나님께서 뭔가 결정하셨으면 
땅에선 그대로 집행될 수밖에 없거든요. 

하나님이 결정하셨는데, 땅에서 그 결정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 땅의 일들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정확히 그림자예요. 

진짜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우리의 그림자로 나타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랑 싸워가지는 안 된다는 거예요. 거기서는 아무 해답이 안 나와요. 
결국 하나님과 씨름해야 되는 문제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면, 그림자는 없어지는 거고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지 않으시면, 그냥 남아있는 거예요. 
이것이 브니엘의 씨름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문제는, 그 이면에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싸움의 승패는 어디서 결정이 돼요? 브니엘에서 결정이 되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에게 이 브니엘의 밤이 없다면..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진 거예요. 

브니엘에서 여러분들이 쇼부(승부)를 보지 못했으면, 이미 진 거라는 거에요. 
눈에 보이는 문제들과 맞닥뜨렸다면, 죄송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전에 이미 승패가 나 있는 거예요.

얍복강 나루에서 그 전날 밤에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거기서 승패를 봐야 돼요. 
기도의 장소에서, 골방의 장소에서, 하나님과 독대해서 밤새도록 
'예 하나님, 내가 내일 이 강을 건너 가야 되는데, 그 앞에 에서의 군대가 있는 거 아시죠?
이거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씨름을 통해서, 에서의 군대와 맞닥뜨리기 전에, 이미 승리가 결정나 있어야 돼요. 
그렇게 된 사람은, 에서의 군대와 맞닥뜨렸을 때, 평강이 있습니다.

왜요? 결과를 미리 아니까요. 
이미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평강이 있어요. 

그런데 이 브니엘의 밤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에서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면 당황합니다. '이거 어떡하지?' 

여러분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싸움은 에서와의 전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에서와의 전쟁이 아니라, 브니엘의 밤이에요. 
'브니엘에서 어떻게 씨름할 건가? 거기서 어떻게 승리할 건가?'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승패가 결정되는 브니엘의 밤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에서의 군대 앞에서 당황하게 될 겁니다. 
인생의 위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요. 

그래서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을 시작하게 됐을 때, 여러분 첫 번째로 하게 되는 일이 뭐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뭔가를 점검해요. 
'내가 총력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인생 살다보면, 나보다. 강한 사람을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돼요. 

야곱도 에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매니저 했어요. 
다 속여먹고, 다 사기치고.. 어떻게든 매니지를 했어요. 
그런데 더 이상 매니지 할 수 없는 순간이 오잖아요.

더 이상 사기도 안 통해요. 군사력도 모자라요. 뇌물을 보냈는데도 안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날을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는 거예요. (브니엘의 승리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또 다른 반응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가진 자원과, 에서의 군대를 비교해 봤더니 턱도 안 되는 거에요. 

뇌물을 보냈는데 뇌물도 안 받는 것 같아요. 
야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 두 번째 상황에 딱 맞닥뜨리게 되면, 사람이 외부로 도움을 구하기 시작하는데 
꾀를 찾습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나?' 

그래서 우리들도 그러잖아요.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을 찾거나, 그래서 뇌물과 접대가 난무하지요.
은행 대출에 의지를 하거나, (담보물을 빌리러 다니죠)
인터넷 지식 검색 찾아보거나... 
 
그 결과 불의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지금 수단과 방법이 문제가 아니에요. 불의라도 상관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닌, 성경적 해결 방식이 아닌,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급한 불을 끄려고 합니다.
이게 모두 브니엘의 밤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우리의 싸움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이미 끝나 있어야 돼요. 
그것 없이 에서를 만나면 It'S too late 너무 늦은 거예요.

브니엘에서 승리한 다음에, 에서를 만나는 사람은, 자기 마음가운데 평강이 있어요. 
왜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아니까요. 
하나님께서 이 평강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브니엘 씨름의 두 번째 본질은, 이 씨름은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져야 
또는 야곱의 환도뼈가 탈골되어야 끝난다는 거예요. 

이 환도뼈가 뭐냐면, 정강이뼈와 골반뼈를 연결하는 고관절 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는 우리 골반을 둘러싸서, 골반 내부의 장기를 보호하는 골반뼈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게 부러지거나 탈골이 되면, 사람이 걸을 수가 없어요. 
쩔뚝거리거나 한발로 걷거나 이래야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환도뼈는 어떤 의미가 있냐면 
'사람을 지탱해 주는 뼈'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자아가 꺾였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의 야곱은, 자기의 지혜로 살아온 사람이에요. 
비록 벧엘의 하나님을 경험하긴 했지만, 야곱이 살아왔던 여정을 쭉 보세요. 
다 자기 꾀와 자기 지혜로 살아왔잖아요. 

이 성경을 너무 거룩하게 읽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반에게 사기치는 것도, '정말 야곱은 거룩해' 이러고 읽으면 안 돼요. 
이건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 (라반과 야곱이 서로 사기 쳤죠)
그래서 라반의 가축을 많이 자기 것으로 만들었죠. 정상적인 방식은 아니었어요.

앞서 에서에게도 사기쳤죠. 하옇든 야곱은 사기 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 야곱이 더 이상 매니지할 수 없는 상황에 딱 맞닥뜨린 거예요. 

에서는 벌써 몇 번을 야곱에게 속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야곱에게 속지 않아요.
그래서 400명이 군대를 이끌고 자기 앞에 나아오고 있어요. 
이 앞에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거예요. 갈 곳도 없고... 뒤로도 못 가잖아요. 라반 때문에.

그래서 비로소 야곱에게 브니엘의 씨름이 시작이 됩니다. 
브니엘의 씨름의 본질은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있던 삶의 가치들, 삶의 습관들, 자기가 의지했던 것들,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그 자신감... 이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꺾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브니엘의 사건은, 처음으로 야곱이 
자기의 꾀와 자기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시작합니다. 
에서의 마음을 하나님이 그냥 강권적으로 바꿔버리시는 거잖아요. 

이 브니엘의 씨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씨름이에요. 
다시 말해서 영적 전쟁인데, 영적 전쟁의 본질이 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영적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을 강권하고 설득해서,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아닙니다. 
또는 마귀를 막 꾸짖어서 쫓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할 수 있어요. 
왜냐면 야고보 사도가 마귀를 꾸짖으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도들 중에, 마귀하고 대화하는 건 10 %도 안 되는 거 아세요?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지, 마귀랑 대화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진짜 필요.할 때 그냥 잠깐씩 명령하라, 내쫓으라고 물론 야고보사도 얘기하긴 했지만 
성경에 나온 기도를 쭉 한번 리뷰해 보세요. 

대부분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게 기도지 
마귀랑 얘기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영적전쟁이 조금 오해가 되면 
계속 마귀한테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뜻을 정하시면, 그건 그냥 물러가는 거에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굳이 (명령)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많은 경우 영적전쟁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마귀하고 싸우는 걸 영적전쟁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영적전쟁의 본질은 마귀랑 싸우는 게 아닙니다. 
영적전쟁의 진짜 본질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도 아니에요. 
영적전쟁의 진짜 본질은 뭐냐 하면 내 환도뼈가 부러지는 거에요. 이게 영적전쟁이에요. 
영적전쟁은 죄하고 싸우는 거잖아요. 
그런데 죄가 어디 있는 거예요? 결국 내 안에 죄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기 자아 하고 싸우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의 자아와 싸워서 승리하시는 게 영적 전쟁이에요.

오늘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영적 전쟁의 본질은 뭐냐면 
이 전쟁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건데 
결국 내 환도뼈가 부러져야 끝난다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것이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나야 돼요. 
'내가 지금까지 내 인생 잘 살아왔어, 나는 착한 사람이고, 난 능력도 있고, 
내가 다 매니지 할 수 있어...' 이게 어느 날 뚝 소리가 나야 돼요. 

'아이고 안 되는 거구나!' 뚝 부러지는 소리를 여러분, 들으셨어요? 
이 브니엘의 밤이 있으세요? 

'아,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구나. 
아, 나는 죄인이구나 
아,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구나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지 않으시면 난 아무 소망이 없구나!' 
이 자아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나셨어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드리는 것 외에는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없구나!' 
이걸 깨닫는 순간이 있어야 돼요. 이것이 여러분, 브니엘의 씨름입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 이르기 전까지, '브니엘의 사람'이 아니었어요. 
자기의 힘과, 자기의 꾀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을 끊임없이 싸웠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브니엘의 씨름을 통해서, 야곱의 환도뼈를 꺾으세요. 
그의 자아를 뚝 부러뜨리셨어요. 
이 자아를 꺾는 싸움은 여러분 쉽지 않습니다. (신약적으로 자기 십자가에서의 죽음)

웨슬리가 뭐라고 그랬냐면요. 그 유명한 말이 있죠. 
'누가 자아와의 싸움을 쉽다고 했는가? (이 사기꾼아!)'
절대 쉽지 않다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일면 쉽습니다.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데스티니를 이루어가는 성숙의 과정은 
그렇게 쉽지 않아요. 

환도뼈가 부러지는 건데, 여러분 아프고 고통스럽고... 
우리 죄성이 여러분 얼마나 지독한데, 이게 뚝 부러지지 않으면 
부러져도 또 붙고, 부러져도 또 붙고... 이런 게 이거잖아요. 내 자아! 

또 부러지고 또 부러지고 이래도 잘 안 되는... 
어떻게 보면 평생 가야 되는...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자아의 문제인데... 

내 생각, 내 계획, 또 내 판단, 내 능력, 나를 의지하는 마음, 이것들... 
그런데 이게 여러분 선악과의 본질이거든요. 
이것이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나야 브니엘의 밤이 끝나는 거예요. 
그래야 거기서 영적 전쟁의 승리가 선포되고, 따라서 에서의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브니엘이래 밤이 있으셨습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벧엘의 하나님은 좋아해요.
(벧엘의 하나님은) 청년의 때, 위기의 때, 가장 비참할 때 나를 찾아와줘서 위로하신 하나님, 
나를 회복하신 하나님, '내가 너와 함께하마 약속하신 하나님' 
이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 유행하는 게 뭐냐 하면 '내적 치유, 하나님의 위로, 격려'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브니엘의 하나님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자아를 꺾으신 하나님, 나와 밤새도록 씨름하신 하나님!

'나를 그냥 벧엘에 살게 내버려 둬, 나는 브니엘은 안 갈래!' 
이게 여러분 우리 대부분의 반응이잖아요. 

그 결과 이 땅이에요. 여러분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고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그러나 나를 다루시고, 내 자아를 꺾으시고, 나로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이 없는.. 아주 이상한, 기형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바글바글하게 된 거 아니에요. 

 

여러분 이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대면해야 될 진짜 위기예요.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교계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브니엘의 하나님이 여러분 있으세요? 
나와 밤새도록 씨름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굴복해 본 적이 있으세요? 

이 브니엘의 하나님은, 내 자아를 꺾고, 하나님께 동의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내가 이해가 잘 안 되고, 
네 하나님이 맞습니다. 내가 그거 하기 정말 싫지만, 
그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내가 따르겠습니다.' 
내 자아가 뚝 부러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을 가는 거예요. 
이게 브니엘의 하나님인데, 이 브니엘의 밤이 여러분 있으세요? 

그런데 여러분 이 브니엘의 밤이 없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말씀을 안 읽어서 그래요. 

말씀은 안 읽고, 밤낮 기도만 하면 무슨 기도가 나오겠어요?
'그냥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하나님 복 주세요. 뭐 해주세요. 뭐 해주세요..' 
이거 하는 한, 브니엘의 밤은 없어요. 브니엘의 밤은 언제 시작되는 거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괴롭게 해야 시작되는 거예요. 

'내가 이거 정말 하고 싶은데, 말씀 읽어보니까 이게 안 돼요.
내가 정말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씀 읽어보니까 이게 아니에요..' 

이렇게 말씀이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있어야, 거기서 씨름이 일어나는 거지, 
에서가 나를 괴롭게 해야 거기서 씨름이 일어나는 거지, 
괴롭게 하는 게 없는데, 왜 씨름이 일어나겠어요? 

왜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이 브니엘의 밤을 가지지 않느냐 하면,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찌르기 시작해야 돼요. 

'내가 정말 하고 싶고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말씀을 읽으니까 이게 아니야..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너무 가고 싶어...' 

이거 가지고 여러분 씨름해야 되는.. 그래서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내가 진짜 이거 하고 싶고, 이거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말씀을 읽어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은데.. 주님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거 가지고 밤새도록 씨름하면서, 새벽이 됐을 때 
'오케이 하나님, 제가 제 뜻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러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래서 내 자아가 꺾어지는.. 
그러니까 이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러면서 
우리 안에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져 가는.. 
이게 있는 것이 우리의 데스티니를 이루는 건데,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데스티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겁니다.

모양은 다양할 수 있어도,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꺾어지고 다듬어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맨날 벧엘에만 살아서 그래요. 

그런데 브니엘의 밤이 있냐고요? 
말씀이 나를 괴롭게 한 적이 있냐고요? 
이거 내가 너무 하고 싶은데, 말씀 때문에 스탑해 본 적이 있냐고요? 

여러분 그 경험 있으세요? 
이건 놓치면 절대 안 될 것 같아요. 내가 이 기회를 놓치면 난 끝장 날 것 같아요. 
그런데 말씀 때문에 스탑해 본 적이 있냐고요? 

이 브니엘의 밤이 없으면, 요원해요. 
그냥 계속 벧엘에만 살다가, 사기꾼으로 인생 끝내는 거예요. 

여러분의 운명은 사기꾼으로 인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의 얼굴을 뵌 자, 또는 하나님과 씨름한 자,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브니엘의 밤을 통과하셨습니까? 여러분의 환도뼈가 부러지셨습니까?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에서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서를 통과하지 못하는 한, 야곱의 데스티니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에서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요. 
브니엘의 씨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에서와 전쟁을 끝내는 것은, 에서보다 강한 군대를 갖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겁니다. 
내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여러분의 환도뼈는 부러지셨습니까? 
지금 자신을 살펴 보세요. 다리를 절고 계세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환도뼈가 부러진 자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까?)
브니엘의 밤을 통과하신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본질이 있는데 
세 번째 본질은 이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다>는 거예요. 
너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부르시고 
사래를 사라라 부르시고 
로암미를 암미라 부르시고 
또 황폐한 자를 헵시바, 뿔라 라고 부르시고 
계속 하나님은 새로운 이름을 주세요. 

그런데 새로운 이름을 주신다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주신다는 거예요. 

'네가 누군지를 알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면 여러분, 결국 우리의 싸움은 이름의 싸움이에요. 이름의 싸움! 
아이덴티티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요즘 보면 우리 젊은 간사들이, 애기 아빠들이 됐어요. 
애기 아빠들이 되니까 재밌더라고요. 안 잡던 무게들을 잡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몸을 좀 사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라크 대사관에서 직원을 한 명 뽑는다' 공고가 났어요. 
'야 이거 좋은 기회다. 네가 가라' 그랬더니 
옛날에는 막 불 속에라도 뛰어들 것 같은 사람들이, 슬슬 뒤로 빼더라고요. 
'나는 어린 아들도 있고...' 

왜 달라졌나 봤더니, 아빠가 된 거에요. 새로운 이름이 생긴 거죠. 
옛날에는 그냥 싱글 이 모군, 정 모군.. 이러던 것이 
이제는 '누구 아빠' 라는 새 이름이 생긴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깨닫는 것은, 여러분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런 거 해왔으니까, 오늘부터는 하지 말아야지' 이게 아니에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의 성숙이라는 게 뭐냐면, 
'내가 어저까지는 거짓말을 했는데, 오늘 거짓말을 안 해야지..' 
이거 아무리 노력해 봐야 거기서 절대로 승부가 안 나요. 

내가 누군지에 대한 본질이 바뀌어야 되는 거에요. 
'아, 내가 원래 하나님 앞에 이런 존재였구나! 
아, 내가 평생 사기꾼으로 살 야곱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구나! 
아, 나는 하나님의 헵시바구나,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고, 하나님의 자녀구나!' 
이게 깨달아지는 순간, 거기서부터 나의 행동은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어도 결국 따라오게 돼 있어요. 
왜냐면 그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게 돼 있어요. 

사람은 자기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게 돼 있어요. 
아이를 낳아서 아빠가 되면, 처음에는 조금 미숙해도 
한 5년, 10년 아이 키우다 보면, 결국 아빠의 포스가 나와요. 그렇잖아요. 
사람은 그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브니엘의 씨름을 통해서 환도뼈를 꺾으셨을 때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주시는 거예요. 

'네가 누구인 줄 아느냐? 야곱아, 네 이름이 뭔 줄 아느냐? 
너는 더 이상 야곱이라고 부를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거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 하나님께 속한 자..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너는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야곱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브니엘을 통과해서 하나님께 새 이름을 받은 자는, 
결국 그 새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행동의 변화가 이어지게 되죠!

그런데 여러분 이게 쉽지 않아요. 내 아이덴티티가 바뀌는 게 쉽지 않죠.
그래서 충격 요법 같은 씨름이 필요합니다.
밤새도록 하는 씨름에서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세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세요. 

우리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주십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왜냐면 환도뼈가 부러졌다고 하는 건, 내 자아가 꺾였다는 거거든요. 
그럼 새로운 자아가 주어져야 될 거 아니에요. 

내 옛 자아의 이름이 야곱이었다면, 
꺾이고 나서 새로 부여받은 그 새로운 자아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자아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결국 우리의 전쟁은요. 두 이름의 전쟁이더라고요.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전쟁이고요.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뭐로 알고 있냐는 거에요. 
예수의 이름을 뭐로 알고 있냐는 거에요. 

예수의 이름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고 있냐는 거예요. 
예수의 이름을 구원자 하나님으로 알고 있냐는 거에요. 
예수의 이름을 영원히 통치하실 왕으로 알고 있냐는 거에요. 

둘째는 내 이름의 전쟁이에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냐는 거에요. 
그분이 영원한 창조주시라면, 나는 피조물이고 
그분이 영원한 나의 구원자시라면, 나는 구원 받은 자고 
그분이 나의 목자시라면, 나는 그분의 양이고 
그분이 나의 왕이시라면, 나는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이 나의 신랑이시라면, 나는 그분의 신부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시라면, 나는 그분의 아들이고... 내 이름이 뭐냐는 거예요. 

내 자아가 꺾여졌을 때, 거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뭐라고 부르시는지 들으라는 거에요.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라는 거에요. 

'아, 내가 에서의 위협 하나 가지고 벌벌 떨 존재가 아니었구나, 
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이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고, 
나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이고, 
에서 하나에 벌벌 떨 존재가 아니구나...' 라는 걸 깨닫는 순간, 
 
'아, 이건(에서는) 하나님이 그냥 지나가게 하시는 거구나. 
그냥 믿음으로 통과하는 거구나' 이걸 알게 되는 거 아니겠어요? 

벧엘이 언약이 시작되는 장소였다면, 
브니엘은 그 언약을 쟁취하는 장소입니다. 클레임(주장, 요구) 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의 데스티니는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고요. 브니엘의 씨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전쟁은 에서와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건 그림자예요. 
모르겠어요. 여러분 앞에 아마 수많은 에서의 군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 사람의 문제, 재정의 문제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그림자에요.
진짜 전쟁은 어디서 일어나는 거예요? 브니엘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브니엘의 씨름, 거기서 이미 전쟁은 성패가 끝나는 겁니다. 거기서 이미 다 끝난 거예요.  

거기서 전쟁이 끝난 사람은, 에서 앞에 나갔을 때 별로 두려워할 거 없어요. 
이미 하나님이 뭘 하실줄 알기 때문이죠.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브니엘의 밤이 있으십니까? 
브니엘을 통과하지 않고 에서를 맞닥뜨리는 것은 비극입니다. 저주예요. 
브니엘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에서가 축복이 됐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을 통과하지 않고 에서를 맞닥뜨리는 사람은 저주받습니다. 

혹시 매일매일 나타나는 에서에 대해서, 
브니엘의 밤 없이 바로 에서에게로 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결과, 교만해지든지, 망하든지, 불의의 사람이 되든지 하는 거죠. 

브니엘에서 여러분의 환도뼈가 꺾어진 적이 있습니까? 
브니엘에서 여러분의 새로운 아이덴티티 이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이름을 들었습니까? 

브니엘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가장 큰 위기인 에서의 군대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이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