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경건의 실제적 능력

LNCK 2023. 10. 17. 11:24

◈경건의 실제적 능력      딤전6:3-~10       2006.03.05. 펀 글 정리    <경건 관련글>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까 경건의 비밀과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경건에 착념(6:3)해야 합니다. 말씀과 경건에 착념하는 것,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고 말씀 주도적으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말씀이 감화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말씀을 들어야하고 말씀에 감동을 받아야하고

말씀의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 뿌리로부터 줄기로부터

진액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이 말씀의 능력에서 이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건하려면>

 

◑1.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4~5

 

딤전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말씀이 나를 지배할 때만 내가 바른 자리에 설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이 떠나면 어느 순간에 교만해집니다. 여러분 스스로 진단해보세요.

몇 번이나 물어보세요. 내가 교만하지 않나? 교만하지 않나?

 

제가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까 젊은 후배 목사님들이 많은 질문을 합니다.

"목회하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목사님은 어떻게 그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그 많은 그 어려운 문제 속에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했습니까?"

"어떻게 평온을 지켜서 오늘까지 이렇게 역사할 수 있었습니까?"

"그 많은 시험과 어려움과 억울함을 이겨내고 참을 수 있었던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묻곤 합니다. "비결이요? 아니 당신들 성경 66권을 항상 읽으면서

아직도 그것도 몰랐나? 간단합니다. 겸손하면 됩니다.

누가 뭐래도 겸손하면, 시험하는 자는 있지만, 시험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겸손해야하는 것,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논법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에 가장 큰 복이 겸손의 복입니다.

 

나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말하며,

그것을 감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삐딱하면 또 교만해지고

그 아무것도 아닌데 또 교만해져요. 그저 낮추고, 낮추고, 낮추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면 교만해집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교만해지면

그 결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4) 됩니다. 무식하게 됩니다.

 

딤전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 체하지만, 교만한 사람이 똑똑한 경우는 없습니다.

똑똑한 척 하면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미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왜입니까?

교만한 자에게 들려질 지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돼버리고

 

또 그 다음에는 변론과 언쟁이 생기고(4) 마는 것입니다. 말이 많아져요.

교만한 사람이 말이 많아요. 또 투기와 분쟁(4)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고 분쟁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교만의 결과입니다.

 

말씀이 떠난 자에게 생겨나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래서 좀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는 경건까지도 수단화합니다.

 

5절에 보면 경건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모양을 가지고 속은 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경건을 수단화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그의 경건이 깨지고, 그 영혼은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경건의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오늘 성경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 지족(=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딤전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즉 풍요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감사할뿐더러 넉넉하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아, 이 얼마나 큰 복이냐?'

지족하는 마음입니다.

 

미하엘 짐 페를 이라고 하는 분이 쓴 「1%만 가져도 99% 행복하다」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 100%를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1%만 가져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건강하면 행복합니다.

1%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세상 사람들은 보통 ‘빌딩 청소하시는 분’을

제일 하찮은 직업으로 봅니다.

지하철 첫차를 타 보면, 그 지하철에 사람들이 붐빕니다.

빌딩 청소하시는 분들은, 일찍 출근해서 청소를 시작해서, 오후3시 정도에 퇴근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 같은, 빌딩 청소하시는 분을 무척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명문대를 나오고, 한때 상당한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인데도, 그 청소 용역직원을 부러워합니다.

‘나도 차라리 저랬으면 좋았겠다...’

 

왜냐면 자기는 지금 중병에 걸려 병원에 꼼짝없이 누워있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못 써서 거동을 못 한다든지,

몸을 못 움직여 누가 밥을 떠먹여 주지 않으면, 스스로 식사도 못하시는 분들..

 

이렇게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청소 용역직원들을 보면, 연세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여 힘차게 대걸레질을 하는 것을 보면.. 그가 너무 부럽습니다.

그리고 새삼 ‘세상 공평하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창조하셨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건강하면 행복합니다.

1%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잉으로 인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과잉을 생각해 보세요.

 

속도과잉 - 그렇게 빨리 갈 필요 없는데 빨리 갈려다 죽습니다.

과잉소비 - 또 그렇게 소비해서는 안 되는데 과잉소비가 자기 스스로를 해하고 있고요.

과잉노동 - 그렇게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뛸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고로 소박한 것을 즐길 줄 아는 지혜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하고 소박한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합리적 소비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정말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있느냐고 한번 물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일이 목적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가?’하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닌데,

일이 목적이 되는 순간, 내 자신은 증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딤전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 수도회에는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원장과 관련한 얘기입니다.

원장이 너무 똑똑해서는 안 된다.

원장이 너무 건강해서도 안 된다.

원장이 너무 거룩해서도 안 된다.

 

‘너무’가 들어가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아무튼 수호자가 너무 똑똑하고, 건강하고, 거룩하면

자신 형제들의 바보스러움과 약함과 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오랜 경험이 배어있는 얘기입니다.

 

바보짓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형제가 바보짓을 해도 이해하고

아픈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의 그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죄에 떨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혹 앞에 허약한 인간의 죄를 이해하고 용서하리라는 얘기이지요.

 

자신을 쳐다볼 때나, 남들을 바라볼 때나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도 알아야 됩니다.

 

 

◑3. ‘임시 관리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한참 번성한 전성기에 보석을 만드는 한 기술자를 불러놓고

"좋은 반지를 하나 만들어보라. 보석 반지를 만들어서 그 반지에 글을 써라.

내가 전쟁에 승리했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내가 어려운 일 당할 때

낙심하지 않도록 언제나 읽어볼 수 있는 그런 좌우명을 그 반지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석을 만드는 기술자가 반지는 만들 수 있더라고

좌우명을 만들 수는 없어서 고민하다가, 어린아이지만 솔로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아주 딱 한마디의 좌우명을 말하더랍니다.

"잠시 후면 죽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러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부자도 지나가고, 명예도 지나가고, 아름다움도 지나갑니다.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런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돈이 내 손에 그냥 있는 겁니까?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이 돈을 그냥 두고 죽는 게 너무 아까 와서

관속이라도 넣어가지고 가고 싶은데...

죽은 다음에 누구를 믿고 돈을 관에 넣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변호사, 의사, 목사 그렇게 세 사람을 불렀어요.

늘 친하게 지내던 분들을 불러놓고 10만 불씩 주면서

자기가 죽은 다음에 장례식에 와서 시체 앞에 인사할 때, 그걸 관속에 넣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약속하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세 사람이 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같은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그 돈을 넣었냐고 서로 묻고는 서로 넣었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얘기했습니다. "그래도 십일조는 떼어야 하지 않나? 십일조는 뗐지."

의사는 말하기를 "그분이 병원에 오래 입원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병원 수리도 해야 하기 때문에 50%를 떼었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변호사가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야? 어떤 약속인데 그걸 어겼나?

나는 다 넣었지." "자네는 어떻게 넣었나?" "수표로 넣었지." 변호사가 한 수 위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못 가지고 갑니다. 그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못 가지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임시 관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부하려 하는 그 마음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부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임대인생 (강추) https://rfcdrfcd.tistory.com/15976245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볼만한 책입니다. 「부자의 황금률」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정말로 부자인가? 사람이 정말로 부자인지를 진단할 수 있는

진단 바로미터가 있다고 합니다.

 

1) 첫째, 정말 부자인지를 알려면, 해피 테스트 Happy Test 를 통과해야 합니다.

즐거움 테스트를 통과해야 합니다.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근심이 있다면 부자가 아닙니다.

밤에 잠을 못 잔다면 그것은 더욱더 부자가 아닙니다. 고민이 없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행복해야 합니다.

자신도 행복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해야 합니다.

 

물건을 산다고 해봅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다 같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약탈 감을 느껴서는 안 되고, 사기당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빼앗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윈- 윈, 다 같이 이기고 다 같이 얻었다고 해야 합니다.

산 사람도 행복하고, 판 사람도 행복한지를 평가하는 해피 테스트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의 척도입니다.

 

2) 두 번째는 창의력 테스트입니다.

남의 뒤나 따라가면서 살았는가? 남을 모방하느라고 살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과 달리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다 한 것,

나만의 창의력으로 내게 주신 특권을 다 발휘했을 때, 내게만 주신 기회요

내게만 주신 지혜요 그것을 다했을 때, 그것을 다 발휘했을 때 거기에 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자기 소명(부르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의식주가 유족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당신이 만약 행복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소명, 사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당신이 혹시 의식주가 좀 부족해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소명, 사명)을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삶의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의식주가 유족한 것.. 그게 편리는 하겠지만, 삶에 의미,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 사명에는 관심이 없고,

입신양명하는 것으로, 자녀 잘 키우는 것으로,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것으로..

삶의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만, 그것은 사탄이 주는 ‘가짜 만족, 짝퉁 행복’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갖는 축복 :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이 함께 하심

 

창39: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여호바 에트-요셉)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의 고난이 시작되는 장 맨 앞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이라는 어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트 אֶת’라는 전치사는, 영어로 with 인데, ‘동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에녹의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녹 에트-하엘로힘)

 

여기에서 동행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에트 with’ 입니다.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을 했나요?

 

창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니’ (에트-하엘로힘)

 

여기서도 역시 ‘에트 with’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렇게 아담, 에녹, 노아, 요셉 등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창39장 요셉에게는 그것을 ‘동행’ 대신에 ‘함께 하시니’라는 번역을 했는데,

히브리어로 같은 말 ‘에트 with’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은 많은데, 주일날 특히 교회에 가면 많습니다.

그 중에 권세있는, 권위있는, 경건한 (다 비슷한 말) 크리스천은 찾기가 쉽지 않죠.

 

마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만약 나의 가르침에 권세, 권위가 떨어졌다면, 수치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필히 나의 ‘경건’의 수치가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의외로 깊은 데 있지 않고, 평범한 데 있다’는 말이 있지요.

능력 있는 설교자는, 성경을 깊이 후벼 파서, 기가 막히게 구절구절을

연결시켜서 심오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사실 아닙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한 번 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매 번 그렇게 하겠습니까.

 

능력 있는 설교자는, 평범한 진리를.. 신적인 권세와 능력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평소에 에녹과 같이, 노아와 같이 ‘에트-하엘로힘’ with God

이 있어야 됩니다. 요셉에게는 그게 ‘여호바 에트-요셉’ God with Joseph입니다.

 

▲한 자매의 간증 (펀 글)

어떤 자매는, 옛날에는 신앙생활을 뜨겁고 열심히 했었는데,

그것을 다시 되찾으려고 아무리 기도하고 몸부림쳐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기도조차 오래 지속하기 힘들었다.

 

교회도 일주일에 두 번 꼬박꼬박 나오고,

헌금 생활도 다 하고,

비교적 성실히 교회 생활을 하는 데도... ‘미지근함’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뭔가 자기 신앙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겠는데,

그 근본 원인과 치료책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네가 TV를 너무 많이 보느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가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시간보다

TV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자매는 그 내적 음성을 무시하고, 예전처럼 계속 일상생활을 해 나갔다.

애들도 키워야 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밤에는 연속극을 꼭 봐야 하고...

 

그렇게 2~3년이 또 지나갔다. 여전히 미지근한 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네가 TV를 너무 많이 보느니라...’

 

그 날은 아예 작심을 했다.

그래서 아까운 TV를 다락에 넣어버리고,

평소에 앉아서 TV를 보던 밤 시간에, 이제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 자매는 ‘항상 밤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데’

성경을 읽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밤이 그렇게 긴 줄,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TV를 안 보니까, 저녁 식사 후 밤 시간이 그렇게 길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에 두 시간씩... 3주간을 밤에 성경 읽으며 경건의 시간을 가졌는데,

자신이 그렇게 갈구했던, ‘과거와 같은 뜨거움’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음이 움직여지고, 감동이 생기고, 눈물도 생기고, 주님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그래서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