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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0장, 창세기의 결말

LNCK 2023. 10. 29. 16:04

103. 반용부봉(攀龍附鳳) (창50:20~21) (tistory.com)

 

◈창50장, 창세기의 결말              ▣김성수 목사 설교 모음           ☞ 창세기 설교모음

 

*김성수 목사 창103강 ‘반용부봉’에서 스크랩

 

반용부봉(攀龍附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이 승천을 할 때, 용의 등에 착 달라붙어 어부지리로 승천을 하는 봉황의 모습을 가리켜

반용부봉이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권세 자에게 아첨을 하여

떡고물을 챙기는 아부 꾼의 모습을 빗대어 자주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우리 성도의 구원의 현실이 바로 반용부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업적도 없는 무력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등에 착 달라붙어

예수님의 승천에 어부지리로 동행하여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니까요.

 

성도는 그렇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반용부봉의 모습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창50장에는 바로 그 반용부봉의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조금 허탈하고, 모자라고,

어중간하게 보입니다. 마무리가 뭔가 좀 부족하게 보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멋지게 시작한 창세기가

허무하게 어떤 결론도 없이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창세기 50장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시게 되면

이보다 더 소망 있고, 확실하며, 명쾌하고, 명료한 결론이 없음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창세기 50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이 1~14절까지로 <야곱의 죽음과 장레>에 관한 내용이고,

두 번째 부분이 15~21절까지의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의 장면입니다.

세 번째 부분이 22~끝26절까지의 <요셉의 죽음> 장면입니다.

 

이렇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희망찬 선포로 시작된 창세기가

하나님 백성들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의 불순종과 교만이라는 죄로 말미암아 사망으로 결론이 나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망 속에서 복음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야곱과 요셉의 사망 사건 중간에

예수를 상징하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화해 사건이 끼어 들어가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다 사망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택하여, 당신의 아들의 중재로

그들과 화해를 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도 똑같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적인 은혜와 주권과 권능으로 그들의 죄와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그들을 살려내시는 일이 있을 것임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전체가 신약 복음의 ‘그림’입니다. ‘그림자’라고도 하죠.)

 

(창50:20~21)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웅덩이로 밀어 넣었다가 결국 이방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요셉에게 해꼬지를 당할까 하여

요셉을 찾아가 ‘아버지가 당신한테 전하라 하시기를

당신의 형제들이 당신에게 악을 행했다 할지라도 다 잊고 용서하라’고 하셨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 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만민의 생명을 구하는 사건으로 선용하셨다, 그러니 걱정마시라’ 하면서

심지어 자신이 그 악한 형들과 그 형들의 후손까지 책임지고 보호하며 기르겠다는 약속합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인물이라 했지요?

따라서 그 장면은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하늘의 장자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망에 던져져 죽어야 할 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걱정마라, 내가 너희의 죄와 악을 선으로 바꾸어

너희를 살려 내었으니 이제부터 걱정마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 성도들에게 선포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 사망과 화해의 사건 가운데 무엇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죄와 악과 타락,

그리고 거기에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창50장의 복음의 메시지는, 창1장에서부터 이미 계시가 되어 있던 것이었지요?

창세기 50장의 결론과 창세기 1장의 서론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세 번째 날까지의 창조 기사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지요?

거기에는 어떤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인가요?

내가 반드시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만 충만한 내 나라를 완성할 것이다라는

언약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날은, 궁창을 가운데에 두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갈라졌습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궁창(휘장)으로 갈라진 하늘과 땅이 궁창의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연합이 되는 날이 분명이 올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날은 물과 뭍을 나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주의 바다, 물을 모두 몰아내심으로

마침내 마른 땅으로 상징이 되는,

뭍만 남은 하나님 나라를 반드시 당신의 열심으로 완성해 내실 것임을

언약으로 담고 있는 사건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셋째 날까지의 틀 속에

넷째 날과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내용물로 채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득 채울 새로운 피조물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완성이 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

창세기 1장의 첫 창조 기사가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완성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 나라를 당신의 새로운 창조물들로 풍성하게 채워서

마침내 안식의 현실을 성취해 내실 것임을 첫 창조 속에서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둠이 물러가고,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지고,

저주의 바다가 물러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제 육시부터 구시까지 깔려 있던 깜깜한 어둠이 단번에 물러가고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때 저주의 바다가 물러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 1장부터 예시가 되었던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당신 백성들의 구원의 현실이

오늘 본문인 창세기 50장에서 조금 더 선명한 그림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는, 인간들은 그렇게 모두 사망으로 죽어야 할 처지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즉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 중 얼마를 살려 내시겠다는

그 은혜의 메시지로 일관성 있게 서론과 결론을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서 사망으로 모두 멸해져야 하는데

그 중 어떤 이들에게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참으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이 창세기만 보더라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보시면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인 야곱의 죽음과 장사의 내용과

세 번째 부분인 요셉의 죽음의 내용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야곱의 죽음과 장사의 내용을 잘 보면

그 곳에는 애곡과 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창50:10~11) 그들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가로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그렇지요? 애곡과 애통,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의 결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세 번째 부분에는 애통과 애곡이 없습니다.

심지어 요셉의 죽음은 입관으로 끝이 나 버립니다.

창세기 전체의 마지막 절인 50:26절을 보겠습니다.

 

(창50:26) 요셉이 일백 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이게 창세기의 끝입니다. 왜 창세기가 요셉의 장사를 끝까지 묘사를 하지 않고

이렇게 입관에서 어정쩡하게 끝내고 있는 것일까요?

관에 넣었으면 어디에 매장을 했다든지 장사를 지냈다든지 등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입관에서 끝이 납니다. 그것은 창세기는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죽음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가 입관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사망으로 끝이 나야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꺼내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내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에

 

창세기는 사망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 24절과 25절을 보시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창50:24-25)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성경은 지금 요셉의 장사를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요셉의 장사는 가나안 땅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통해 이르시기를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430년 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입성을 하게 될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을 하셨으므로

 

그 가나안 땅은 반드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것이고,

자신은 해골이 되어서라도 그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고

자기 해골을 반드시 가나안으로 가지고 올라가라고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죽는 순간에도 그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바로 그 요셉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실제로 요셉의 장사가 어디에서 치러집니까?

 

(수24:3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그 약속의 땅에서 요셉의 장사가 치러집니다.

 

그러니까 창50장의 요셉의 입관은, 수24장의 장사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사망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며

그들의 장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서 잔치로 치러지게 될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다 나누어 가진 뒤

기쁨과 찬송과 희열 속에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요셉의 장사가 치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인 야곱의 장사에서는 애곡과 애통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장사에는 기쁨과 찬송과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고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의 화해 사건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닙니까? 그게 창세기 50장입니다.

역시 창세기 50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경은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히

그렇게 사망으로 끝이 나야할 애곡과 애통의 우리의 장례식을

기쁨과 찬송이 있는 천국잔치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을

이렇게 창세기부터 반복하여 계시하고 계십니다.

 

시록으로 가면 우리의 장사가 어떻게 결론이 나게 될 것인지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기가 어디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바로 이 결론을 향하여 창세기가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권능이 가시화 되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십자가 앞에서 애곡과 애통의 ‘사망’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의 책 중에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라는 제목의 책이 있지요.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애곡과 애통의 사망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나라를 소망하고 기대하며 오늘을 밟고 서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무시무시한 사망까지도 이기고 감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사망을 조롱하며 살 수 있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사시는 분들이 아니라

사망을 밟고 이기며 사실 수 있는 분들이 된 것입니다.

사망이 여러분을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난이나, 질병이나, 멸시, 천대, 억지, 슬픔, 고통, 눈물, 천재지변 등의

사망의 증상들이 여러분을 절망케 하고, 분노케 하게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망이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망을 소유한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창세기 마지막 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고전3:21~23)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 이니라

 

사망이 누구 것이라고요? 바로 우리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망의 증상들인 가난이나, 질병이나, 비천이나, 슬픔, 고통, 억지 등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러한 것들이 모두 사라진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잠시 겪는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겪으면서

오히려 그러한 것들로부터 영원히 자유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는 우리가 영원히 겪어야 할 사망과 그 증상들을

우리 인생 속에서 조금씩 겪어내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배워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거기에 짓눌려 자포자기하고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가 영원한 안식의 땅에 들어가게 될 때,

그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 사망에게 삼켜져 그 사망과 함께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기에

사망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육신의 사망을 통과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기에

그 사망에게 ‘어서 문 열어라’하고 호통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육신의 사망은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나오는 것처럼

사망은 죄의 대가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작 와츠(Isaac Watts)도 사망을 가리켜

‘불멸하는 성도들이 영원히 왕 노릇하는 땅으로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주는 종’이라 한 것입니다.

무디도 그의 임종 순간에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rfcdrfcd.tistory.com/15973687

 

 

면역법을 개척한 제너 (종두법 발명자)

이 세상에서,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살린 의사는

종두법을 발명한 에드워드 제너 Jenner 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처음 길을 개척하는 사람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일단 길을 개척해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의학은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지만 질병과의 전쟁에서 인간은 여전히 열세입니다.

그러나 천연두는 인간이 완전히 정복했다고

1980년 세계보건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18세기 유럽 사람들의 주요 사망 원인은 천연두였답니다.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20~40퍼센트가 사망하였고

고열, 두통, 요통, 구토 등에 시달리다 치료 된다고 해도

얼굴에 흉터(곰보)가 남아 평생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 무서운 천연두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사람은 제너입니다.

그는 5세 때 성직자였던 아버지를 잃고

역시 성직자였던 큰형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13세에 가까운 곳의 외과의사 밑에서 견습했다고 합니다.

 

그 후 8년 동안 제너는 의학과 외과술에 관한 지식을 철저히 배웠는데

그가 견습생시절 때, (가축이 옮기며 비교적 위험성이 적은 질환인)

우두에 걸렸던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들이 천연두에 우연히 또는 고의로 접해도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이 현상을 깊이 생각한 결과, 그는 우두가 천연두를 막아낼 뿐만 아니라

우두를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계획적으로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았고 비웃음만 샀다고 합니다.

아마도 병균(우두)에서 천연두의 예방약을 뽑는다는 것이,

상식과 맞지 않았나 봅니다.

 

17965월 제너는 손가락에 우두를 금방 앓은 상처가 있는 세어러 네머스를

발견했고, 그녀의 상처에서 뽑은 물질을

제임스 핍스라는 8세 소년에게 접종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열이 나고 약간의 병변이 나타났고

시간이 지난 후 천연두 물질을 이 소년에게 다시 접종했는데

아무런 병도 생기지 않았으며 완전히 병에 대한 면역이 생겼다고 합니다.

 

1797년 그는 왕립학회에 그의 실험결과를 설명한 짧은 논문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그 후 1798년 그는 사례를 더 첨부하여 소책자인

우두 백신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연구를 개인적으로 출판했지만

세상의 반응은 호의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격과 중상, 비방 등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종두법의 가치는 빠르게 증명되어

유럽 대륙과 미국, 그리고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결국 제너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큰 존경을 받았지만

자신의 발견을 이용해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길을 열어 놓으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수한 고난과 시련 가운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펼쳐 놓았습니다.

천연두보다 백배로 더 무서운 죄와 사망으로 부터 우리를 영원히 면역시켜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에는, 제너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의로운 선구자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에 따르는 저항과 반대를 능히 이기는 신념의 사람입니다. (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