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다메섹으로의 길

LNCK 2023. 11. 2. 11:35

◈다메섹으로의 길           행22:9~10              2023.10.15.             ▣거듭남, 회심 관련글 모음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주여 제가 무엇을 하오리이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만약 그런 헌신과 결단의 질문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한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5~10년 계속한다면
자신의 회심을 한 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 설교 중에서

..................................

◑도입 / 베트남 단기선교             2023년 10월

여러분들의 사랑과 후원에 힘입어서 4박 6일간 베트남 비전트립을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비전트립에는 청소년 네 명이 함께 했습니다. 

현지 선교사님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1시간 타고서 
베트남 중부지방에 있는 당락 이라는 지역으로 갔습니다. 

메대 족이라는 소수민족의 마을에, 좀 오지와 같은 마을에  
그곳에 있는 다섯 교회를 쭈욱 다녔습니다. (*아마 19~20세기 초에 전도 받은 듯)

그러니까 완성된 교회, 또 지금 만들어져 가는 교회, 
또 그리고 거기서 복음이 어떻게 펼쳐져가는지 
그런 것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에 현지 목사님, 현지 교회 집사님들과 만나서 같이 기도하고 
또 저희가 준비해 갔던 선교헌금도 드리고 
또 저희를 위해서 또 식사를 준비해주셔서, 
현지식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죠.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생활하는 소수민족들이 차별받고 
또 자기들이 생산하는 물품들이 제대로 정당한 가격을 받지 못하는... 
그것 일들을 위해서 선교사님이 '노엘팜'이라는 그런 단체를 만들어서 
거기서 판매 망을 만들어주고 하면서 
그들의 어떤 믿음생활을 계속 격려하면서 사역하고 있는 그런 모습들을 봤습니다. 

거기서 주로 보이는 것은 커피 나무들과 후추 나무가 있더라고요.
커피와 후추가 거기 주생산품이예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커피를 마시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원두를 가져왔는데, 여러분이 여기서도 마시게 될 거예요. 

그리고는 아침 저녁으로는 선교사님들의 강의를 세 번에 걸쳐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했던 두 선교사를 통해서 
그분들의 교회개척 사역 소식을 쭉 듣고  *케노시스 교회

또 중국에서 (추방되어) 나오셔서 
베트남의 그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의 사역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호치민으로 돌아와서, 거기 가면 전쟁기념관 있습니다. 
거기 앞에 보면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미군탱크, 미군폭격기 이런 것들을 
거기에 전시해 놨더라고요. 

그리고 사진 자료와 여러 폭탄 덩어리들, 피해 입은 것들을 전시해 놨는데 
정말 끔찍한 것들도 많이 있었어요. 

고엽제로 인해서 태어난 기형아들,
고엽제로 인해서 거기에 파병된 한국 군인들도, 돌아와서 휴유증을 앓고 있죠.
그 곳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들도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어 놨는데 
보기에 좀 끔찍했습니다. 

1억 명이 넘는 베트남의 인구, 그런데 그들의 기독교 인구는 2%가 안 되는1.5%
불교는 25%, 천주교인들이 6% 랍니다. 

기독교 인구의 대다수는 제가 보기에는 소수민족들 같아요.
그들이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들은 복음을 가지고 
그들의 믿음생활을 계속 유지해 온 것 때문에, 그들이 더 핍박을 많이 받은거죠. 

핍박을 받을수록 그들의 믿음생활은 더욱더 그 안에서 생명력을 지닌 것 같아요. 
교회를 나오려면 그 진흙 길을  40분~ 1시간 와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토바이 타고 와서 예배를 드리고, 또 그리고 모임을 하고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와서 그렇게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이전에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사실 우리 눈으로는 다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역사 하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그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입 / 핍박하는 자에서 복음전도자로, 핍박 받는 자로 변화된 사울

우리가 지금 계속 읽어 가고 있는 이 사도행전, 
초대교회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그리스도인을 선정한다면 사도바울이죠.

사울은  누구보다도 유대교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고 
당시 신흥 종교로 여겨졌던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누구보다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 특심한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못 믿게 하는 데 
아주 앞장섰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자신도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 가지고, 그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그런 역할을 했던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근데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또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는가요? 
그로 인해서 기독교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오늘의 본문, 다메섹 도상의 사건입니다. 

갑작스런 삶의 전환, 또 믿음이 없었던 분에게 믿음이 생겨나는 것, 
삶의 관심이 세상에 있다가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기독교에서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처럼 일순간에 이렇게 바뀌는 사람도 있고요. 
또 삶의 방향은 바뀌었지만,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사도행전은 누가가 썼잖아요. 
그가 이 <바울의 회심 사건>을 보도하면서 
아주 자세하게 바울의 체험을 지금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인 사건, 
또 그가 땅에 엎드려졌을 때,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던 그 음성을 들었던 사건,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그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서 다메섹 성으로 이동했던 이 모든 일들.. 

성경은 이런 사건이 일어났던 곳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부터 200 몇 십 킬로가 떨어진 그 다메섹,
그 여행길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지금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던 다메섹 (다마스커스)에 가 보면,
<바울 회심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다메섹 체험에서 
그의 회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

◑본론 / 바울의 회심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 그거예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사건들, 빛을 비췸받고, 또한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 그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됐고, 
뭐 그 자체가 회심의 내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비체험이 꼭 회심은 아닙니다.

바울에게서 다메섹으로의 그 길, 그것은 바로 회심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가 사울이었다가 바울로, 하나님의 사역자로 그의 삶이 바뀌잖아요.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을까요? 다메섹으로의 그 길이 어떤 길이었을까요? 

▲1. 첫 번째로 그 길은 예수님과 만나는 길이었다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사건,  회심 사건의 본질, 그건 뭐예요?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거잖아요. 예수님을 만나는 것! 

누구도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구원받았다, 회심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죠!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회심했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회심했습니다. 

본문에 바울도, 예수님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 오셨잖아요. 빛을 동반하고 오셨잖아요. 
그 빛 가운데 엎드려져서 그가 소리를 들었죠.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행9장

사실 바울이 박해한 대상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의 백성들이 박해받는 것이, 주님을 박해하신 것으로 여겼어요.

그 순간 그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둘 중에 하나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든지, 우리가 예수님께 가든지... 둘 중 하나죠.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주 예수님, 나는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를 만나 주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구하면 주시겠다고 했고, 찾으면 찾게(만나게) 해주시겠다고 그랬죠. 

△한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유대인의 철학자 중에 마틴 부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와 너>라는 책을 썼어요. 
내용은 뭐냐면 '인생은 만남이 소중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바르게 만난 사람은, 그 관계를 바르게 맺어 살 수 있지만, 
잘못된 만남을 한 사람은, 잘못된 만남으로 그 인생이 바르게 살 수 없다는 거죠. 

말하자면, 예수님을 바르게 만나야 한다는 거죠. 
그거 없이는 그 이후 관계도 바르게 맺어질 수 없다는 거죠.

나와 너, 어떤 인격과 인격의 만남,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도
인격과 인격체로서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거죠.

근데 만약 '나와 그것과의 만남'이 된다면, 
상대방을 어떤 이용 대상으로 만나고,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그건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없다... 그런 얘기의 책이에요.

결국 바른 인생으로 살아가려면,
진정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거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거잖아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렇게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거예요. 

일본의 성자라고 하는 가가와 도요히꼬 
그가 열다섯 살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내무대신 이었어요.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기생이었어요. 
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는 고아원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이 바뀐 거예요.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삶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만남은 어떠하십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 282장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 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 께로 거저 갑니다」

이 찬송의 영어 제목은 Just as I am '내 모습 그대로' 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전도 집회 때마다, 마지막에 결신 초청시간에 불렀던 찬송이죠. 

그 찬송을 부를 때 사람들이 결단하고 강단 앞으로 나왔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다는 거에요.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나를 받아주십시오' 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 회심에 이르는 첫 단계입니다. 
성령님이 자기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주셔서, 
자기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뜨겁게 만나야 돼요.

어떤 분들은 이 때 '자기가 죽을 죄를 지은 죄인'됨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때 평소에 식기도 중심으로 하던 기도를, 아주 깊은 대화식 기도를 오래 하게 돼죠.

▲2. 두 번째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주 Lord 로 고백하는 거예요. 
회심의 절대적인 요소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나누어 고백합니다만, 
초대교회에서는,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이 구주와 주님 되신 것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시는 그분이라는 거죠.

사울은 땅에 엎드려졌을 때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렇게 말했죠. 9:5
그때 그 시각에는 '당신은 누구시니이까?' 이렇게 말했다가,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주'로 바뀌었겠지만, 

사울이 제일 처음 만난 크리스천은 다메섹에 살던 아나니아 였어요.
아나니아를 보면, 그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9:14~15

그래서 사울은, 워낙 다메섹 도상의 체험도 있었거니와
아나니아를 통해서 그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신앙의 길에서 제일 처음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제 사건 후에 기록된 사도행전에서 '주여 누구시니이까?' :5
이렇게 '주'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은, 자신을 '주'라고 소개하진 않으셨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죠. :5 
 
그러니까 본문에 바울이 거룩한 빛에 둘러싸여서 땅에 엎드려졌을 때 
사울은 즉시로, 자기를 찾아오신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분을 아나니아를 통해 자세히 전도 받았는데, 그 분은 '주 (퀴리오스)'라는 거죠. 9:14~15

그래서 사울은, 회심한 처음부터 자기가 만난 분이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라는 것을 배운 거에요. 다른 말로 왕이죠!

이제는 그 주, 그 왕께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회심이고, 예수 믿는 도리예요.

그래서 이후에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전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가는 곳마다 전파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세주 (그리스도) 일뿐만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서 따르며, 자기 삶을 모두 드리고, 그 분의 백성으로 철저히 통제받으며 살겠다는 거죠.

그게 초대교회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날은 다들 예수를 '그리스도'로만 믿고 있죠.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그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 주인, 왕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그럼 자기 삶의 주인은 누구냐?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거죠. 그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죠.
그러나 바울이 만났던 예수는, 
그 분을 '구세주'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그런 구분이 아예 없었다는 거죠.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별 의미가 없지만,
당시에는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는 거죠. 자기 삶을 다 드리고,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당시 로마제국에서, 사람들이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그렇게 했죠.
'가이사가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인사하면, 
상대방도 역시 똑같이 '나의 주님은 가이사이십니다.' 

그런데 신실한 크리스천은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했다는 거죠.

그러면 자기 신분이 드러나는 거잖아요. 
그 고백과 함께 그는 체포가 돼서, 원형경기장으로 가서 보내졌다는 거예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인해서!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시느냐는 거예요. 
정말 예수님이 참으로 여러분들의 주 Lord 가 되셨나요? 

이것이 바로 회심의 두 번째 요소라는 거죠.  *첫번째는 예수와 만남
예수님을 구세주 Savior 로만 고백하지, 자기 삶의 주 Lord 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정확하게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거죠!

▲3. 세 번째로 회심은, 앞으로 <주님을 위해 살기로 헌신한다>는 거죠.

그 회심후로 그 길은, 변화된 삶으로 걷는 길이었다는 거예요. 
이제 다메섹으로 가기 전과, 그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 길이 된 거예요.

그것을 행2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을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22:9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22:10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즉 회심한 사람에게 있어서
꼭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제가 이제 변화된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 
또는 '제가 순종해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회심한 자는, 남은 인생을 주를 위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질문이 자기에게 없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회심자라고 할 수 없어요. 
정말 우리 인생에 주인이 달라졌다고 한다면, 
결국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결과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붙잡으러 왔다가,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이 됐다는 거예요. 

그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헛소문을 잠재우러 왔다가, 
반대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을 전하는 메신저가 됐다는 거예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였는데 
이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박해받는 자가 됐다는 거죠. 

이것이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한 변화이겠습니까. 
이 한 사람 바울을 통해서 이제 복음이 로마제국으로 널리 퍼져 나가잖아요. 

다메섹에서, 안디옥에서, 마게도냐에서부터 로마로 그렇게 퍼져가잖아요. 
과연 바울 사도는 고후5:17절 말씀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거예요.

우리도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고 예수님을 참으로 주로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처럼 변화의 흔적, 변화의 열매가 있다는 거예요. 

삶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그 인생이 바뀌지 않겠냐는 거죠. 
나의 속사람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나의 삶의 행태와 방식이 바뀌지 않겠냐는 거예요.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내 회심의 진정성을 한번 의심해 봐야 돼요. 

'난 진짜 회심했나? 난 진짜 변화되고 있는 거야?'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어지는 거예요. 달라지는 거예요.
가치관이 달라지는 거예요. 삶의 스타일이 달라지는 거예요. 

사울처럼 단 번에 래디컬하게는 바뀌는 사람도 있고, 
또 서서히 바뀌어가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주인이 바뀌었는데,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내가 옛날 방식, 옛날 모습, 옛날 스타일로 그냥 유지되겠습니까? 

회심이 한순간에 이루어져서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바울처럼 그런 radical conversion 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더딘 변화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그런 변화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틀림 없습니다.
  ☞폴 워셔/ 자신을 (회심했는지) 점검하십시오  rfcdrfcd.tistory.com/15977804

 

▲한 선교사의 이야기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는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 해서 방황하는 가운데, 대학을 갔어요. 
미국에서 브라운 대학이라면 아이비 대학에 속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무신론자인 친구의 영향을 받아서 그도 무신론자가 된거에요. 
그렇지만 공부는 잘 해서, 4년짜리의 과정을 3년에 마쳤습니다. 

그러고서 시골로 여행을 떠났어요. 
그런데 한 여인숙에서 머물게 됐는데, 거기에서 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잠을 자려고 하는데, 옆방에서 끙끙대는 신음소리가 계속 들리는 거예요.
무슨 소린지 그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이튿날 경찰이 온 거에요. 그 옆방에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거죠. 
그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바로 그 사람은 자기가 대학 신입생 때 무신론자가 되는데 기여했던 
바로 그 친구였다는 거예요. 

그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기 실존, 자기의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금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놀랍게 회심한 거예요. 

그는 사울처럼  즉각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거죠. 
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복음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복음을 이제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가서 복음을 전하리라' 하고 
신학교를 갔고요. 신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그는 갓 결혼한 신부와 함께 선교사로 나갑니다. 

그가 미국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입니다. 
버마로 파송되었죠. 지금은 미얀마죠.  아도니람 저드슨 1788~1850

잊지 마세요. 그는 인생의 변화를 그렇게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가 죽은 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도 없었던 그 미얀마 땅에, 
지금도 사회주의 나라죠. 거기에 지금은 21 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는 거예요.

한 사람의 회심으로 인해서, 그의 사후에 그런 역사 일어났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하면, 한 가정이 한 공동체만 변화되는 게 아니라
그 사회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다메섹의 길을 어떻게 걸어야 되겠습니까?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냥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사울의 선택이었어요. 인간적인 선택이었어요. 
자기 의를 이루고, 자기 자신 만만한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우리도 처음에는 인생길을 그렇게 걷잖아요. 
그러면서 실패도 하고, 자기 만족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렇게 걸어요. 

그런데 주님이 사울이 바울되게 이끄신 길이 또 있었잖아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 다메섹으로의 길이 또 있었어요. 

그 길에서 사울은 주님을 만나, 시각장애인처럼 잘 걸을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길에서 생명의 길, 빛을 찾는 그 길이 된 거예요. 

바울은 그 길에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앞으로의 그의 인생 길은, 신이 나서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었어요. 

이미 다메섹 길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날마다 예수가 자신의 구주 라는 사실을 고백하지며 걸어 가시길 바랍니다. 

주, 곧 왕이신 그 분의 뜻대로, 
내가 예수님을 닮아 가야 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