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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하나님의 계획 P2

LNCK 2023. 11. 7. 11:24

◈데스티니, 하나님의 계획 P2      행17:26, 26:24         P1

 

◑4장 데스티니에는 돌파의 능력이 있다

 

데스티니의 세 번째 특징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가장 좋아한다.

데스티니에는 장벽을 돌파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장벽을 만나게 된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데스티니에는 이런 인생의 장벽들을 돌파하는 능력이 있다.

왜냐면 데스티니는, 나의 비전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일을 누가 막겠는가?

인생의 어떤 장벽도, 하나님 앞에서는 장벽일 수 없다.

누구든지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서면, 장벽은 무너진다.

 

나는 목사가 될 것이라고는,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어려서부터 말을 심하게 더듬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내게, 나이가 들면 나아질 거라고 하셨지만,

나이가 들어도 말 더듬는 장애는 나아지지 않았다. *34세까지

 

나는 학창 시절부터, 남들 앞에 나가서 말한다는 것이 내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발표를 해야 하는 전날에는, 긴장과 불안에 잠을 설치곤 했다.

 

말더듬이라는 장벽은, 내 인생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까지 모든 것을 고통으로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불안했다.

 

교수가 되면 매일 교단에 서서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기에 교수가 되고 싶다는 소원과,

교수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모순된 두 감정이

내 속에 기괴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학을 전공으로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말을 안 하고 살 수 있는 직업이, 수학자가 아닌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는 하루 만에 마음을 접었다.

'말더듬이가 목사는 무슨 목사? 이놈의 말!

나도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 좀 다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더듬이 치료는 아주 어려서부터 나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이었다.

내 미래에 모든 소망들은, 말더듬이라는 장애가 다 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넘기 힘든 큰 장벽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이상하게 아무리 기도해도 이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35세때 목회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하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우리 부부는 선교사로 헌신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내려놓고

선교지에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서원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선교지로 나가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국비 장학금이었다.

국비 유학생은 학위를 마치면, 한국에서 3년간 일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아니면 지원받은 돈을 다시 갚아야 했다.

 

학위를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귀국한 나는, 대학에서 일할 곳을 찾았다.

3년 후 선교지에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나는 정규직이 아닌, 1년짜리 계약직을 찾았다.

 

그런데 아들이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다는 소식에

아버지께서는 벌써 이곳저곳 교수 채용 정보를 알아보고, 내게 전달해 주셨다.

 

정규직에 지원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차마 아버지께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공고문을 받았다.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들이었는데, 내 전공 분야와도 맞는 곳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한 곳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막상 대학의 채용공고를 보고 나니,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공을 버리고 주의 일에 헌신하려는) 내 결정이 정말 맞는 것일까?

혹시 잘못된 것이면 어떡하지?

지금 내 결정을, 나이가 들어 후회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온갖 두려움과 잡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모르니까..' 하는 생각에 대학의 교수임용 지원서류를 받아왔다.

지원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혹시 모르니까..'

 

지원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첨부해야 하는 서류들이 있었다.

역시, 혹시 모르니까 하는 생각에 서류들을 모두 구비했다.

지원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혹시 모르니까!

 

서류들을 다 갖추어서 봉투에 정성스럽게 담았다. 지원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서류 마감 전날이 되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었다. 잠자기는 틀린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일어나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혹시 제 선택이 틀린 것이면 어떻게 하죠?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비전을 받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시작(순종)하는 것은, 다른 일인 것이 분명하다.

고백을 헌신으로 생각했다면 틀렸다.

 

약속의 땅에 대한 비전을 받는 것과

실제로 요단강을 도하해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요단강을 앞두고 도하 전야를 보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잠 못 이루는 밤,

나는 그 밤, 거기에 서 있었다.

 

기도 중에 문득 '내가 혹시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미친 것이 맞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그런데 세상 기준으로는, 규격을 벗어난 베드로도, 바울도 미친 사람이었단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그분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규격을 벗어난 길을 선택하는 미친 사람들에게 의해 이루어진단다.'

 

사도행전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나는 일어나서 곱게 봉인해둔 서류 봉투를 열고, 지원 서류를 꺼내서 모두 찢었다.

그날 나는 강을 건넜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강을!

성령의 위로와 격려 속에, 새로운 내 삶의 스토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다.

때마침 미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목사님이, 수원에 교회를 개척하셨다.

워낙 좋아하고 따르던 목사님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개척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후에 내가 그 교회 담임목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선교지에 가면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데,

미리 개척에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3년간 개척교회를 섬기다가, 파송을 받아 선교지로 나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신 것이다.

개척한 지 1년도 안 되는 교회가, 목사님은 사임하시고

성도들은 절반 가까이 교회를 떠났다.

 

우리 가족도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집사님 몇 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국비유학 규정 때문에 3년 동안은 한국에 계셔야 하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목사나 선교사나 그게 그건데, 3년간 교회를 섬겨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게는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신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평신도 집사에게 교회를 맡아달라니..

 

더군다나 나는 목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무서워하는 말더듬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여간 기도는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기도하러 기도원에 오르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분명히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냥 대충 감동이 있다... 이런 것으로는 안 됩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순종하여 목회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원래 계획대로 저는 3년 후에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는 그런 음성이 들릴 리 없다는 믿음 아닌 믿음이 있었다.

나는 보수적인 학생 선교단체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장로교에서 신앙에 성장하여,

미국에서는 침례교에서 성경공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든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믿음이 깨졌다. 3일째 되는 날,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 주신 말씀은

'나는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기 원한다.

새로운 세대는 광야에서 죽어 없어진 모세의 세대와는 다르게

요단강을 건너 땅을 정복할 세대다.

 

너를 향한 나의 계획은 네가 선교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남아 새로운 세대인 다음 세대의 청년들을 준비시켜

선교지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귀로 들었는지 마음으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귀로 듣는 것보다 더 선명하고 분명한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감사한 것은, 이제 16년이 흘러 뒤돌아보니

교회에서 훈련되고 파송된 많은 청년들이

이스라엘과 아랍지역을 오가며

실제로 요단강을 넘나들며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틀림이 없다.

데스티니에는 돌파의 능력이 있다.

 

나는 교회를 맡기로 결정하고 기도원을 내려왔다.

급하게 (침례교) 신학교에 입학하고, 전도사로 개척교회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3년간의 복무 의무 때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까지 병행하면서 말이다.

 

▲얼떨결에 목회를 시작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정신이 없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목사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던 사람이

당장 강단에서 설교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설교 훈련.. 물론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설교 훈련이 문제가 아니라, 말더듬이로 남 앞에 서는 일에 공포를 가진 사람이

설교를 해야 하다니...

 

기도원에서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목사가 되겠다는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고 강력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안 하면 못 알아들었을 테니 말이다.

 

첫 설교를 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토요일에 일찌감치 설교 원고를 만들어 놓았지만,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이니, 하긴 하겠지만,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지, 강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밤새 씨름하며 기도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와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하나님, 왜 저만 미워하십니까? 말 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저같은 사람을 데려다 놓고 이러십니까? 왜 저만 못살게 구십니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아침이 되었고, 기도는 살려달라는 애원으로 바뀌었다.

'주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살려달라는 애원 속에 주일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로 갔다.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섰는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말을 더듬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 더듬던 장벽을, 그 첫날에 완전히 허물어버리셨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지난 35년간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던 오랜 기도가.. 한순간에 응답되었다.

언제?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섰을 때!

 

그 이후 지금까지 16년 동안, 수없이 나는 강단에 서면서

한 번도 말 더듬는 것 때문에 방해를 받아본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치유하신 것이다.

 

▲데스티니의 진짜 장벽은 믿음 없음!

데스티니에는 돌파의 능력이 있다.

인생의 장벽들을 돌파하는 능력이 있다.

 

왜냐면 데스티니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을 때, 홍해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었고, 앞에는 거대한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데스티니가 무엇인가?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데스티니를 좇아 홍해에 발을 디뎠을 때, 홍해가 갈라져버렸다.

 

여호수아가 약속을 좇아 요단강을 건넜다.

그 앞에 떡 버티고 기다리고 있던 것은, 거대한 성 여리고였다.

 

여리고는 작은 성이 아니었다. 성벽 위에 기생 라합이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을 보면

거대한 성이었다. 당시의 최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진격했을 때

이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그저 성을 몇 바퀴 돈 것이 전부였다.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여리고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신 것이다.

이것이 데스티니에 들어서는 능력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데스티니와 연관이 있다.

데스티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 자신 외에는 없다.

 

우리가 무지하고 우리가 불순종해서, 데스티니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환경이나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존재가 이것을 막을 수는 없다. 결코 막을 수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서 보라.

물론 믿음이 필요한 길이다.

 

그러나 한 발만, 딱 한 발만 앞으로 내디뎌 보라.

당신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데스티니에는 돌파의 능력이 있다.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 앞에 누가 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인생의 진짜 장벽은, 환경이나 나의 부족함이 아니다.

우리 인생의 진짜 장벽은

데스티니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막는 진짜 장벽이다.

 

이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

순종함으로 한 발을 내디리라. 믿음의 발, 딱 한 발이면 된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이고, 또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이야기다.

 

▲약점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꼭 우리의 장점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장점을 통해서만 일하신다면, 나는 설교자로서 가장 부적합한 사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설교는 절대로 내 은사가 아니었다.

학창시절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다 힘들어했고,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장점이 아니라

내가 가장 자신 없어하고, 가장 못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약한 점,

내 약점을 통해 일하기 원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고린도전서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능력이 많고 은사가 많으면, 하나님이 그 능력을 사용하셔서 일하실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많은 능력과 은사는 위험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 연약함을 통해 일하신다.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 섰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외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들은 능력이 많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자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했던 사람들이며,

자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신에게 연약함이 있는가? 할렐루야!

당신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신령한 은사라고는 없는가?

기뻐하시라, 당신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완벽한 조건의 사람이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시라!

그 연약함으로 인하여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시라!

얍복강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는 그 자리에 나아가시라!

하나님은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데스티니의 길을 막고 있는 장벽을 부술 것이다.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설 때

당신 앞에 홍해가 갈라지고, 당신 앞에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박국 3: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5장, 우리를 만드신 분을 만나라

 

▲성경 속 나의 인생 설계도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디자인하신 분에게서, 그 계획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계시라고 할 때,

데스티니는 분명 계시의 영역이다.

 

내 취미 중 하나는 목공이다.

나는 나무를 재단하여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참 좋아한다.

 

유학생 때 일이다. 미국에 가보니 공구점에 신기한 공구들이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전기톱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개인이 사용할 만한 전기톱을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미국 공구점에는 개인용 전기톱들이 즐비했다. 흥분된 마음에 하나를 구입했다.

'전기톱을 구입했으니 뭔가 해야지...' 목재를 사서 간단한 가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기톱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전원 플로그를 꽂고 스위치만 켜면 끝이었다.

가장 단순한 모델이었기에, 다른 기능은 없었다.

달려있는 스위치라고는 온/오프 스위치가 전부였다.

 

설명서가 딸려오기는 했지만, 기계에 남다른 감각이 있다고 자부하던 나는

스위치 하나짜리 기계의 설명서를 읽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했다.

 

바로 전기톱의 스위치를 켜고, 나무를 치수에 맞춰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톱날이 목재와의 마찰로 심하게 흔들려서, 목재를 똑바로 자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즉시 겸손해졌다. 설명서를 펼쳐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기톱은 심하게 흔들리기 때문에

직선으로 자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팀목을 사용해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생각해 보라. 하찮은 기계도, 만든 사람의 설명이 없으면 작업을 망치게 되는데

전기톱과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한 사람은 어떨까?

 

뇌세포의 숫자만 1천억 개가 넘는 인간은

부품 몇 개로 이루어진 전기톱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한 존재가 아닌가?

 

인간을 디자인하신 분의 설명을 듣지 않고,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을 넘어 어리석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목재야 망치면 다시 사면 되지만, 소중한 내 인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망치면 다시 살 수도 없는 인생인데,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을 디자인하신 분이 계신다.

창조주가 계신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인생을 디자인하신 분을 만나시라. 그분의 말씀을 들으시라!

이것이 내가 성경을 읽고, 성경에 집착하는 이유다.

 

기억하시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내 나름대로 화려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디자인하신 분의 설계도 대로 사는 것이다.

그분이 건네주신 성경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실로암 맹인 걸인의 팔자

성경을 펼쳐보자. 요9:1~3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즘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가 쉽지 않지만, 그 당시는 더욱 어려웠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농사나 목축을 하여 돈을 벌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길에서 다른 사람들의 자선을 구하는 것밖에 없었으리라.

 

다른 사람들 역시, 이것이 그의 팔자라고 이야기했다.

'그게 네 팔자야.. 소경으로 태어난 게 네 팔자인데, 그런 걸 어떻게 하겠니?'

 

맹인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의 팔자를, 자기 데스티니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말해준 팔자대로 걸인이 되었다.

 

우리말에는 '팔자'라는 개념이 있다.

팔자는 삶의 부정적인 면들, 또는 실패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거짓 짝퉁 데스티니다.

 

팔자는 하늘로부터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선포된다.

'그게 네 팔자야, 그러니 포기하고 그냥 살아!'

 

우리가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정한 거짓 데스티니인 팔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너는 어쩔 수 없는 존재야. 너 같은 게 뭐 대단한 삶을 살겠어?

넌 머리가 나빠서 어쩔 수 없어, 너는 못 생겼잖아!

너는 건강이 그래가지고... 네 학벌 가지고 무슨..?'

 

'너는 소경이야, 그게 네 팔자야!'

거짓 데스티니인 팔자는 끊임없이 우리를 낙심케 한다.

 

하나님이 주신 데스티니가 축복이라면, 이 거짓 데스티니는 저주다.

만약 당신이 거짓 데스티니의 영향 속에 살고 있다면, 빨리 벗어나시라.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을 놀랍고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당신의 삶 속에 심어 놓으셨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나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놀라운 음악적 재능이 있을 수 있다.

 

머리가 나쁘고, 음악도 못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림을 잘 그리지는 않는가?

머리도 나쁘고, 음악도 못하고, 그림도 못 그릴 수 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을 아무도 복제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다.

 

팔자, 이 거짓 데스티니에서 벗어나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길, 당신만을 위해 주신 그 고유한 길로 들어서라!

 

▲창조주를 만나다.

거짓 데스티니인 자기 팔자를 따라, 거리에서 구걸하던 걸인에게,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다. 그의 창조주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 그날 걸인이 만난 분은, 그를 디자인하신 창조주였다.

그리고 창조주가 이렇게 이야기하신다.

 

요9: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그의 주위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너를 저주받은 사람이라 하고, 실패자라고 하지만

너의 진짜 데스티니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너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이 소경의 진짜 데스티니였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진짜 데스티니다.

원치 않는 부모 밑에 태어나서, 내 팔자라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원망했던 것들..

아니다. 팔자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며 포기하고 한탄했던 일들,

아니다. 팔자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여자로 태어난 것도, 남자로 태어난 것도,

키가 크게 태어난 것도, 키가 작게 태어난 것도,

재주가 많게 태어난 것도, 재주가 부족하게 태어난 것도,

금수저로 태어난 것도, 흙수저로 태어난 것도,

그 어떤 것도 팔자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당신의 데스티니가 무엇이냐고? 사람마다 그 디자인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 영광을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것이다.

 

맹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진짜 데스티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언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의 데스티니도 마찬가지다. 창조주 되신 그분을 만날 때

우리 인생의 진짜 데스티니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진짜 데스티니 말이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놀라운 축복의 비밀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팔자'(운명)라는 단어 속에 불평과 원망과 고통이 쌓여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이 비밀의 장벽이 걷혀지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저주하던 그 약점조차,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축복된 데스티니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앞서 나누었던 '나의 말더듬 팔자'처럼 말이다.

말더듬은 정말 내게 34년간 저주였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친구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괴로웠고,

내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괴로웠다.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신 어머니는 나를 웅변학원에 보내셨다.

초등학교 때 일이다.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남들 앞에서 호소력 있게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웅변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말더듬을 고쳐보려고 1년 이상 웅변학원을 다녔지만

불행하게도 내게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목회를 하게 되었다.

요즘 설교를 할 때면, 발음이 정확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목사님의 말은, 속도가 빠른데도 불구하고 듣기에 아주 편해요.

발음이 뭉개지지도 않고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또렷해요.

 

웅변학원.. 그렇다. 초등학교 때 흔하지 않은 웅변 훈련을 받지 않았던가.

그것도 1년 이상이나 말이다. (그것이 지금 설교 스피치에 도움이 되었다)

 

과거의 원망과 한탄은.. 내가 데스티니의 길에 들었었을 때 오히려 놀라운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시라. 팔자라고 생각했던 당신의 저주도 축복으로 바뀔 것이다.

 

요9장의 맹인 걸인 뿐만이 아니라

모세도, 기드온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하박국도, 요나도

모두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의 데스티니 여정이 시작되었다.

 

당신도 다르지 않다. 데스티니의 여정에 들어서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시라.

 

그날 실로암의 걸인처럼 하나님을 만나시라.

당신을 창조하시고 설계하신 그분을 개인적으로 만나시라.

저주와 원망이 축복으로 바뀔 것이다.

 

데스티니는 계시의 영역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태초부터의 계획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에 데스티니를 발견하는 길은

성령과 말씀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그러나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데스티니를 발견하는 공식이나, 데스티니를 발견하는 질문지 따위는 없다.

데스티니는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며,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기에

그분을 만나, 그 음성을 듣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다.

 

기도와 말씀의 자리, 성령님을 깊이 만나는 자리, 이 자리로 나아가시라!

요9장의 맹인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셨듯이

오늘 당신의 삶에 성령께서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의 데스티니가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께 듣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좀 더 인내를 가지고 이 책을 끝까지 읽기 바란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 당신의 데스티니가 조명되는 일을 돕는 것이

이 책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6장 순종, 장벽을 부수다.

 

데스티니를 이루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순종 이다.

나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데스티니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의 데스티니를 가로 막는 진짜 장벽을 부수어야 한다.

그것을 부수는 것이 순종이다.

 

실로암 맹인의 보이지 않는 눈은,

이 맹인 인생의 모든 가능성들을 막아버리는 강력한 장벽이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항상 이 장벽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명령하신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9:7

 

맹인이 이 말씀에 순종 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맹인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던 오랜 장벽,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일평생 막아 버리고 있던 괴물 같은 장벽,

이 장벽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맹인이 눈을 떴다. 이것이 데스티니의 능력 이며, 이것이 순종의 비밀이다.

당신은 실로암 연못의 경험이 있는가?

 

장벽이 무너진 장소, 그 위대한 감격이 있는가?

나는 있다. 내 말더듬 이라는 거대한 인생의 장벽이 무너진 실로암이 있다!

 

▲나라와 민족의 데스티니

이것은 개인의 이야기 뿐 아니라, 공동체,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와 민족이 데스티니에 들어서면

하나님께서 그 앞에 장벽 들을 부수신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 강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이 발걸음은 단순히 강을 건너는 발걸음이 아니었다.

 

이것은 데스티니로 들어가는 발걸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종을 통해, 여리고를 무너뜨리시고, 그들의 데스티니를 이루셨다.

이들은 40년 전 모세의 세대 와는 달랐다.

모세의 세대가 가데스바네아 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 때

슬프게도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멈추어 버렸다.

 

이들이 광야에서 다 죽어 없어질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순종은 데스티니의 장벽을 허물지만,

반대로 불순종은 데스티니를 멈추게 하거나 왜곡시킨다.

 

아니,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되거나 막힐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나의 데스티니를 막을 수는 없다.

데스티니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선택(자유 의지)을 존중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그렇다.

 

다른 어떤 것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막거나 변경할 수 없지만

나 자신만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은 데스티니를 이루어 가는 중요한 열쇠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인간의 데스티니를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상기해 보라.

성경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령님을 따라갈 때 데스티니가 이루어진다.

 

▲나라와 민족의 데스티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자.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개인 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에도 데스티니가 있다.

생각해 보라.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이가

나라와 민족을 아무 계획 없이 만드셨겠는가?

 

나라와 민족 뿐 아니라, 돌멩이 하나도 하나님의 계획 없이 놓여 있는 것은 없다.

출19:6절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제사장은 개인의 직분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제사장 나라'라고 칭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의 데스티니를 말씀하신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직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해 성경이 주어지고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데스티니 이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의 데스티니가 있고

이집트는 이집트의 데스티니가 있고, 일본은 일본의 데스티니가 있다.

 

나라와 민족의 데스티니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각 개인의 데스티니는, 그가 속한 나라와 민족의 데스티니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국 사람으로 태어 났다면,

한국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당신의 데스티니가 퍼즐 조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민족의 데스티니와 별개로 당신의 데스티니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보라.

그 땅에 속한 각 사람의 데스티니는, 전쟁이라고 하는 배경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지,

날고 기어도 이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동체의 데스티니와 개인의 데스티니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당신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기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라. 그 속에 당신의 데스티니도 있다.

 

선교가 위대한 것은, 선교는 그 민족의 데스티니를 일깨워 주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데스티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교다.

 

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동역하는 것이 선교라면,

너무나 놀랍고 영광된 일이 아닌가?

 

한 나라와 민족의 죽고 사는 문제,

한 나라와 민족의 흥하고 쇠하는 열쇠가 모두 데스티니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어떤 민족이든지, 자기 민족의 데스티니를 깨닫고 그 길에 들어설 때

그들 앞에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질 것이다.

 

한국의 데스티니, 이것을 증언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의 데스티니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데스티니가 꼭 한 가지 만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한국의 데스티니가 있다. 그것은 기도다.

한국처럼 기도하는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여 삼창'하는 민족도 한국 뿐이고, 산기도 하는 민족도 한국 뿐이다.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기도는 뭔가 독특함이 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 산 기도, 철야기도, 통성기도, 수요기도 등

수많은 기도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통성기도를 '코리안 스타일 플레이어' 라고 부르겠는가.

분명 기도는 한국교회의 데스티니 중 하나다.

 

나는 한국전쟁이 끝난 1960 년대에 태어났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은 참 가난했다.

불과 한 세대 전이지만, 달걀 먹기가 쉽지 않았다.

 

집에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계란말이를 만들어 대접 했는데

우리 삼남매는, 손님이 혹시 계란말이를 남기고 가지 않을까 싶어

접시만 쳐다 보곤 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의례껏 아이들 먹으라고, 계란말이를 몇 개 남겨 주셨다.

그런데 어떤 손님은 눈치 없이 계란말이를 다 드셨다.

마지막 계란말이 조각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삼남매가 소리 높여 함께 울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계란 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쟁 직후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조차 원조를 받던 나라였다.

 

과연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보냈을 지 궁금하다. 그것이 불과 60년 전 이야기다.

그런데 60년이 흐르며,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이 세계 10권을 바라보는 경제대국이 된 것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 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적이었다.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 K팝과 한류문화, 올림픽까지..

나는 아직도 한류가 실감 나지 않는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국사람이라고 하면

마치 연예인 바라보듯이 하는 그 시선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거기에는 우리 부모 세대의 대해 기도가 있었다고 믿는다.

 

가난했던 60년대, 70년대.. 한국의 놀라운 기도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회 마다 새벽을 깨우면 기도하기 시작했고, 산 마다 기도원이 세워 졌다.

가정제단 이라 부르며, 집마다 기도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 기도! 한국이 그 데스티니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가난했던 이 시대의 기도는, 민족 복음화와 더불어

우리 자식들은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원초적인 기도였다.

오늘날의 잣대로 그 기도를, 너무 쉽게 기복신앙 이라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것은

전후 끔찍했던 가난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생존을 위한 기도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그 데스티니에 들어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라?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가난의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절망의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데스티니의 능력이다.

 

당신의 인생에 어떤 여리고가 버티고 서 있는지,

어떤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당신이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설 때, 여리고는 무너질 것이고

홍해 바다는 갈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