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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전쟁, 소망 믿음 사랑 골1:1~8 2023.02.08.
줄거리 :
골로새교회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이단으로 인해, 복음과 신앙이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골로새서를 기록하십니다.
그래서 편지의 서두에 벌써 이러한 혼합주의와 이단 사상에 대해
복음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지키기 위한 경계를 그어주십니다.
그 경계가 바로 소망과 믿음과 사랑의 생각입니다. 키워드는 ‘생각’입니다.
◑도입
골로새서를 쓰게 된 정황 주1)
우리는 흔히 믿음, 소망, 사랑을 하나로 묶어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은 본문과 연관하여 소망, 믿음, 사랑에 대해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당시 골로새교회는 이단사상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바브라에게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고,
이것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기에 <골로새서 내용 전체는, 이단과 혼합주의로부터
복음과 신앙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골자를 이룹니다.
▲우리가 ‘이단’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혼합주의’라는 말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는 순수한 복음의 진리인 십자가 복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앙체계에
다른 요소를 혼합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성향은 2,000년 교회사를 관통해서 지금까지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꼭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인본주의, 실용주의, 도덕주의 같은 철학적 사상이나 문화적 경향을 결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문화적 경향이라 함은,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무속신앙, 기복주의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불교의 수련과 고행 같은 것들이 로마 가톨릭의 수도원주의와 비슷하게 여겨지면서
교회 안에서 명상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신비주의, 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으로 혼합이 일어났고, 계속해서 이단이 발생해왔습니다.
이러한 혼합주의는, 이단이 생기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는 특정한 사상이나 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합 상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갈 때, 이단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합주의가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세상이 깊이 침투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마음이 허전해서, 거기에 뭔가 채움꺼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세상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거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깊이 침투하여 장악해 버립니다.
쉽게 말해, 그는 세상에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세상의 가치관이 혼합된 상태에서 복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정통 교단에 속한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그 누구도 이단이라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 개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세상이 침투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복음을 상대하고 다루고 전할 때에는
표면적으로는 이단이 아닐지라도,
혼합주의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혼합주의적 상태의 문제점은
복음이 열어주는 영적 세계에 대한 사실들에 대해
우리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정확하게 상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였을 때 열리는 영적 세계의 사실들이
제외되고, 망각되고, 왜곡되기에
결과적으로 복음에 대해 멋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나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함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고후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해서
‘나는 죽은 자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자, 하나님의 쟈녀됨 입니다.
이것(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구원받은 성도의 생각의 기본 틀입니다.
이 기본 틀에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이어져 나갑니다.
지금 여기서 ‘생각 mind’을 강조하는 이유는,
골로새교회가 당면한 이단사설의 문제들,
즉 혼합주의, 영지주의, 천사숭배.. 이 모든 것들이 ‘생각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사상의 전쟁’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또한 성경교사들은
영지주의 나 천사숭배에는 빠지지 않더라도
세속과 성공과 기복의 ‘혼합주의’에는 얼마든지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성도의 자의식, 자아정체성,
이것이 만약 자기 생각 속에서 결여 되면,
신자가 예수님을 믿지만,
세속주의와 혼합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거죠.
생각의 전쟁에서 이미 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이단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결국 이단도 혼합주의도 일종의 사상(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골로새교회에 퍼지고 있던 이단 사상들 중에는
유대 율법주의, 영지주의, 금욕주의, 천사숭배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혼합을 막고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골로새 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골로새서를 시작하는 첫머리에서부터
이것에 관심을 두고, 우리 생각을 지켜내야 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단적 생각으로부터, 복음적으로 생각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의 울타리는 소망, 믿음, 사랑으로 칩시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것을 해나가기 위한 일종의 경계이자 기준을 제시합니다.
울타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경계 안에서 생각이 움직일 때
복음에 합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이 경계 밖으로 이탈한다면 혼합주의적 위험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방치된 혼합주의는 결국 이단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단이라는 단체에 속해야만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정통교단에 속해있을지라도 얼마든지 이단적 사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솔직하게 느끼는 바대로 말씀드리자면
오늘날 신자들 중에 상당수가, 혼합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복음적 생각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단과 구분될 수 있는 복음적 생각의 경계이자 울타리로
본문인 골로새서의 서두에서 *1:1~8
바로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제시합니다.
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믿음과 사랑이 언급됩니다.
이어지는 5절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4~5절을 연결시켜 보면 믿음과 사랑은 소망으로부터 생기고, *말미암음이니
소망은 바로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 소망이 생기고
그 소망으로부터 → 믿음과 사랑이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전13:1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곧 십자가의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현재 내 마음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망이 실제로 채워지는 과정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익숙하게 여겨왔던 믿음, 소망, 사랑의 내용입니다.
▲1. 소망 '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5
그런데 본문에서는 소망에 이어서, 믿음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나열 순서가 좀 달라도, 큰 문제 없습니다.
본문에서 소망이 특히 강조된 이유는
소망이 복음적인 생각을 지켜나가며,
이단으로부터 구분되고 극복하기 위한 생각의 경계이고,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단은 잘못된 믿음의 확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들은 예수를 올바로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살펴볼 골3:1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했습니다.
‘살리심을 받았다’는 표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골로새서를 기록하던 사도바울의 생각의 위치가
어떤 지점에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예수를 바르게 믿었으면 나타나야 하는
소망의 단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믿는 믿음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어도,
내 마음과 영혼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뵙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이 온전하다면
성도의 소망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갈망, 예배, 교제하게 됩니다.
절대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을 향한 소망(갈망, 갈증, 바램)이 존재하는 상태라면
애초에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모든 생각과 사상은.. 혼합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하늘에 대한 소망을 품지 않고,
이 세상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싶고, 세상 것들을 소망으로 삼는다면,
그 ‘생각’이 원천적으로 성도의 생각이 아닙니다. 혼합주의가 뒤섞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게 되면, 이 세상 것을 바라는 소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세상에 대해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소망, 미련이 남아있다면.. 혼합주의요,
골로새교회와 동일한 문제에 빠진 겁니다.
▲2. 믿음
사도바울은 이렇게 소망을 강조한 이후에, 믿음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1:4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빈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목표를 본능적으로 가집니다.
예를 들어 돈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돈은 이 사람의 믿음의 대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건강이나 자녀의 형통이.. 믿음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바라는 모든 대상에게는, 그게 좋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게 좋다는 믿음을 가질 때,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돈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돈을 가지면 내 마음이 채워진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건강하면 내가 만족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고,
승진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승진하면 내가 만족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 것들에 좋다고 하는 확신이 믿음의 이유입니다.
한편 하늘에 소망을 둔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만을 좋음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로부터 내 모든 생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비가 내려도 하나님이 내리게 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녀가 말썽을 부려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가운데 일어난 일로 여겨집니다.
모든 생각의 출발점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좋다고 믿고, 미래 천국을 오늘 현실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확고한 소망과 믿음을 가질 때, ‘생각의 전쟁’에서 당연히 승리하는 거죠.
그럴 때 혼합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내 생각 속에 들어올 틈이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예배당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가정도 편안하고, 사업도 잘 되고,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라는 말씀을 전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얼핏 이러한 말씀은 잘못된 점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망하는 대상이 하나님 자신이 아닌,
가정의 평안이고, 사업의 형통이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혼합주의에 빠진 믿음의 상태입니다.
일례로, 돈이 많아야 평안할까요, 돈이 없어야 평안할까요?
참 성도는, 돈이 많아도 평안하고, 돈이 없어도 평안합니다.
그러나 혼합주의자는, 돈이 많아도 나름 불안하고, 돈이 없으면 없어서 불안해하죠.
여러분, 몸이 건강해야 평안할까요, 몸이 아파야 평안할까요?
참 성도는, 몸이 건강해도 평안하고, 몸이 아파도 평안합니다.
그러나 혼합주의자는, 몸이 건강해도 나름 불안하고, 몸아 아프면 아파서 불안해하죠.
하나님을 소망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믿음이 있는 성도는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현재 천국을 살아가기 때문에, 늘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만족해서 살기 때문에, 세상의 혼합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는 거죠.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은, 손톱자국 같은 작은 틈만 있어도, 그것 붙들고 올라간다는데,
하나님을 소망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믿음이 있는 성도는
마귀에게 틈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거죠.
예수 안에서 늘 만족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갈망해서
세상을 마음에 초청하지 않습니다. 원천적으로 혼합되지 않는다는 거죠.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3. 사랑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성도에 대한 사랑을 언급합니다.
하늘과 천국과 하나님을 갈망하는 소망으로부터
하늘의 하나님만이 좋다는 믿음이 생겼다면,
그 하나님을 반드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따라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1:4
은혜가 넘쳐서 성도를 사랑할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성도)을, 나도 사랑하게 되어 있는 거죠.
믿음으로부터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사람에게 뭘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자기를 만족시켜 주리라 믿고, 하나님께 기대하고,
그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이 (물질이, 사람이, 명예가) 나를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세상을 (물질을, 사람을, 명예를) 사랑하게 되어 있죠.
내가 믿는 대상을.. 나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망, 믿음,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골로새 교인들의 생각이 머물기를 바라며
바울은 기도합니다.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1:9~12
마치는 말
골로새교회에 침투했던 이단은,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혼합주의’입니다.
참 믿음과 십자가 복음에 ‘세속주의, 성공주의, 기복주의’를 섞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의 전쟁’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생각 상태에서
천국과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천국과 하나님이 정말 좋다는 ‘믿음’을 가지면,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상을 ‘사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생각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단 사설과 혼합주의의 침투를 막고 승리하는 길입니다.
이단 사설과 혼합주의가 뭡니까?
천국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세상 것들을
자꾸 소망하고,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소망하고, 믿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세상이 침투되어 들어온 나 자신이 죽었다는 고백을
견고히 유지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그로부터 이어지는 소망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의 생각이 머리털만큼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울타리 삼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든지 조금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돼지몰이꾼의 비결 ‘생각을 즐기면 안 돼요!’
부흥사이신 T. L. 오스본 목사님은 하루는 항구에 서서 배를 기다리다가
매우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원래 돼지란 동물은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도망가는 습관이 있는데,
그 날 보니 돼지 여러 마리가 몰이꾼을 따라 마치 순한 양떼처럼 졸졸 따라갔다.
그래서 그들은 도살장에 철커덕 갇히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하도 신기해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몰이꾼에게 물어보았다.
“목사님, 돼지는 콩을 무지 좋아하거든요.
제가 돼지를 몰고 갈 때는 주머니에서 콩을 한 줌씩 꺼내서 땅바닥에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녀석들이 그냥 졸졸 따라오지요.
콩 주워 먹으려고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땅만 쳐다보고 따라온답니다.”
오스본 목사는 거기서 마귀와 지옥을 생각했다.
마귀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생각(자기 약점, 콩)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길에 중간 중간 뿌려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그것을 주워 먹으려고 마귀를 졸졸 따라간다.
결국 무섭고 캄캄하고 뜨거운 지옥에 철커덕 갇히는 것이다.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는 자인 줄도 모르고,
뭐 미끼 같은 것 좀 던져주면... 졸졸 잘도 따라간다...
▲58세에 거듭난 여의사 이야기 https://rfcdrfcd.tistory.com/15972456
세상 소망을 버리고 제대로된 소망을 붙잡은 여의사, 삶이 달라지다
..................................
주1)
골로새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에바브라가 세웠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의 튀르키예인 소아시아 지역 내륙에 위치한 곳으로써,
서쪽으로 에게해에 맞닿아있던 에베소에서 내륙으로 160km 정도 동남쪽에 있었습니다.
골로새교회 주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 등이 있었는데,
당시 골로새에는 동서를 잇는 큰 도로가 있었기에 꽤 발전했었다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가 발전하면서 상대적으로 쇠락하고 위축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넘게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골로새에 살던 에바브라를 만나게 됩니다.
에바브라는 앞서 빌립보서에서 등장하였던 ‘에바브라디도’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는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골로새에 와서 교회를 개척해서 세우게 됩니다.
이후에 사도바울은 로마에 갇히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에바브라는
소아시아에서 로마까지 불원천리 찾아와 골로새교회의 상황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