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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한 것처럼

LNCK 2023. 11. 21. 16:06

https://blog.naver.com/karamos/80119581294

 

내가 말한 것처럼     요16:1-4          2007.08.05.       ☞요한복음 설교모음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유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고별설교’(farewell discourse)라고 부릅니다.

 

이 중에서 17장은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 드린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가 오늘부터 묵상하게 될 요한복음 16장은

예수님의 유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비장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오늘은 요16:1~4절까지를 읽었습니다.

며칠 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새벽 기도를 마치고 이 강단에서 오늘의 본문을 읽었을 때,

저에게는 아프간 사태로 인해 혼란스러운 제 마음에 주시는 위로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2007년 아프간 순교 직후 설교

마치 뭔가 중요한 말씀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16:1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새번역

 

여기서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은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미리 해 두는 이유는, 앞으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저는 문득,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아프간 순교 포함)을 만난 지금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큰 위로가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 앞 부분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요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당신의 제자로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든든히 연결되어 친밀한 영적 사귐을 나누고 살아가면,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우리 안에 넘쳐 흘러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 소유욕과 지배욕으로 오염된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같은 순수한 사랑, 이타적 사랑, 희생적 사랑, 낮아져서 섬기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과 사귀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바로 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열매를 주렁 주렁 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환영받고,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마땅하고, 또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예를 들자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지강유철이라는 분이 쓴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장기려 선생은 거의 성자처럼 사신 분입니다.     ☞장기려 장로님 1911~1995 

 

그분이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 약 3년 동안 김일성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봉직했었습니다.

그 기간에 그분은 김일성 주석을 세 번 만났는데,

비록 장기려 선생이 공산당이 미워하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주석이 그분을 무척 신뢰했다고 합니다.

 

장기려 선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사로서 사랑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의사로 만들어 주셨다는 믿음에 따라,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월급을 털어 환자들의 병원비를 치러주면서까지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분은 한국 전쟁 당시에 둘째 아들을 데리고 월남해서 평생 수절하며 홀로 살며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훌륭한 삶을 사셨습니다.

 

1987년, 장기려 박사께서 해외 여행을 하려고 여권을 신청했는데,

당시 안기부 정보원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북한의 납치 대상 명단에 선생님이 포함되어 있으니, 해외에 나가 조심하십시오.”

 

나중에 알고 보니, 목 뒤에 큰 혹을 달고 살면서도, 자신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수술을 하지 않던 김일성 주석이 측근들이 듣는 자리에서 그 혹을 만지면서,

“장기려 박사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수 있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런 연유로 장기려 박사가 납치 대상 명단에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믿는 사람으로 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 정도의 인정은 받아야 어디 가서 기독교인이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리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어 그분의 진리와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이렇게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사랑의 열매로써 믿는 사람은 인정받고,

환영받고, 때로는 대접도 받고, 때로는 높이 칭송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도 받지만, 핍박도 겸하여 받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환영받고 대접받고 승진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그 사랑의 열매 때문에 비판받고, 미움받고, 박해 당하고, 손해를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생길 때도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헷갈립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지만, 대답은 별로 없습니다.

 

이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은 조금 흔들리다가 다시 제 자리를 잡지만,

믿음의 뿌리가 얕은 사람들은 조금 흔들리다가 뿌리째 뽑혀 버립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미리 예상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제자들을 준비시키려 하셨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었는데, 그로 인해 칭찬은 커녕 비난과 박해와 죽음이 닥쳐올 때,

그것으로 인해 놀라지 않고, 그 상황을 견뎌내며,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16:1

 

앞서 요15:18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운을 떼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를 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미워하고,

그 하나님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예수님도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하나님도 미워하고, 예수님도 미워하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도 미워하는 이유를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거대한 진리이지만, 실은 아주 사소한 예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뭔가 부정한 것을 탐하고 있다고 합시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싶은 유혹에 마음이 빠져 있거나,

해야만 하는 일을 회피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고 합시다.

 

내 마음의 한 편에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음성이 들립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그것을 무시하고 혹은 억압하고 그냥 저질러 보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혹은 이미 저질러 버렸습니다. 잘못된 줄은 알지만 눈 질끈 감고 즐기고 있다고 합시다.

 

그 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충고합니다.

‘그러지 말라고, 그것은 옳지 않다고,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절친한 친구가 제게 말했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열이면 열, ‘나는 뭐 생각이 없는 줄 알아? 내가 알아서 할테니, 참견하지 마!’라고 윽박지릅니다.

 

왜 그렇게 화를 냅니까? 내 마음 안에서 처음부터 들어 온 하나님의 음성,

지금껏 안 들린다고 억압해 온 그 음성, 안 들리는 것처럼 무시해 왔던 그 음성을

듣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며, 정도 이상으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서 배척하고 거부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친구를 상대하지 않으려 합니다. 가급적 멀리 합니다.

내가 죄를 탐하려는 마음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때로 하나님도 미워하고, 예수님도 미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는 인간 사회를 가리킵니다.

그런 사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자신들의 죄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억압하고 있는 내면의 음성이 믿는 사람들을 통해

다시 들려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지금껏 누려온 죄를 계속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16:2절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받을 박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했습니까?

유대교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거듭났더라면 희망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너무도 많은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권력과 금력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다음, 유대교 지도자들은 잠시 안심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양심을 괴롭힐 사람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수없이 많은 ‘작은 예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과거에는 골치거리가 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가는 곳마다 골치거리가 활동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을 색출하여 추방하거나, 아무 혐의나 뒤집어 씌워 죽음에 넘겨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박해와 수난과 순교의 역사는 오늘까지 2천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요16:2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악행을 은폐하기 위해

그렇게 선전하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 지도자들도 그랬고, 로마인들도 그랬고, 한국 초기 선교 시기에도 그랬고,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을 비난하고 배척하고

박해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선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갈등이 마치 종교 전쟁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세상 모든 불화의 원인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종교를 없애자”라고

부르짖는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종교를 구실로 하는 전쟁이나 갈등을 깊이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진실한 종교인들 사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죄에 물든 더러운 욕심들이 충돌한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선전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구실을 대더라도,

그들은 진실한 믿음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종교를 구실로 하여 더러운 욕망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칼이나 총을 뽑아 든 사람은,

어떤 종교를 믿든, 더 이상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증오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사람은, 어떤 종교를 믿든, 더 이상 신앙인이 아닙니다.

 

만일 진실하게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다른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는 종교라면,

그 종교는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심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기이지만,

이렇게 증오심을 증폭시키는 종교까지 존중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간 순교 관련

 

◑16:3절

 

오늘 본문의 3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6:3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안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말에서 ‘알다’라는 말은 지식으로 아는 것,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참된 하나님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참된 신은, 참된 신적인 계시는, 그리고 참된 신앙은 사랑으로 열매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체험이 없다 보니,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선전하면서 증오를 전염시킵니다.

 

자신의 야심이나 감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선전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들의 뜻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신을 모독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지나친 열심을 가진 광신자들이 빚어낸 어리석은 잘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셨던 것과 매우 가까운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당황스러워합니다. 혼란스러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여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

당연히 칭찬받고 환영받고 존경 받을 줄 알았는데, 전혀 반대의 일이 일어난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당황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죄를 탐하고 죄를 즐기려는 세상의 속성 상, 그것은 당연한 일임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16:4절

 

4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여 두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에게 말한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무엇이 도움이 된다는 뜻일까?” 두 가지 점에서 정리가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미리 그런 말씀을 하셨음을 기억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이것이 며칠 전에 심성민 씨의 살해 소식을 생각하며 탄식하다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에 고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일을 마주하고 보면 잠시나마 혼란스럽습니다.

 

배형규 목사님에 이어, 심성민 형제님이 살해 당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청년이 요즘 보기 드문 진실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만 말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배형규, 심성민 선교사 순교 일화 2007 https://rfcdrfcd.tistory.com/15971883

(환경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하단에 나옴)

 

이럴 때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더냐?”는 말씀을 읽으니,

적잖이 위로가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가 이 대목에서 생각납니다.

그 선교사를 오랫 동안 지켜 본 사람이 물었답니다.

“선교사님은 역경과 환난과 박해가 생기면 더 강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어디서 그런 힘이 생깁니까?”

 

그러자 그 선교사께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거든요. 복음을 전하는 길에 분명히 역경과 환난과 박해가 있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 생기면 저는 신납니다.

제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이 평안하면, 저는 혹시 제가 다른 길을 가고 있지 않는가 조심하게 됩니다.”

 

그 선교사께서 역경과 환난과 박해 앞에서 힘을 얻은 것은

그런 일이 당연히 있으리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미리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억울하게만 보이고 허무하게만 보이던 역경과 고난과 박해와 죽음이

영원한 차원으로 들려 올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바울 사도가 극심한 환난 가운데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을 채운다고 고백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믿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죽음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영광이 되는 말입니까!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다니요!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rfcdrfcd.tistory.com/15981327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다가 받게 되는 고난과 죽음도

역시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믿습니다. 그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적용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져온

박해와 고난과 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고, 그분의 영으로 변화받아,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당하고 죽음을 겪어 왔습니다.

 

그럴 때 당사자들이 기꺼이 그 운명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 고난에 뜻이 있으며,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일을 보고 듣는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도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뒤를 따라 좁고 험한 길,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목숨을 던져 참된 생명을 얻는 영생의 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기독교의 복음을 ‘값 없는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며,

성령의 선물을 주셔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시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살게 하시는 모든 일이 조건 없이,

대가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값 없는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값을 주고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비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값싼 은총’이라는 뜻으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실은 ‘값 비싼 은총’입니다.

그 값 비싼 은총이 그냥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총 앞에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값 없는 은총을 선물로 받을 때는 아무런 조건도,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습니다만,

이 은혜를 받고 나면, 이 은혜는 서서히 우리의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 일부만이 아니라, 우리 돈의 일부만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를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가 그분의 영으로 새로 지어져 살아가게 되기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의 행동과 입술의 말과 마음 속의 생각까지, 전체를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속속들이 하나님의 자녀 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변화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감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손해를 견뎌야 하기도 하며,

때로 고난을 감수해야 하기도 하고, 가끔 죽음을 견뎌야 하기도 합니다.

값 치고는 대단히 비싼 값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선불’이 아니라 ‘후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

머리로 배우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여 알게 되면,

그 모든 값을 기꺼이 치룰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값을 치루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감사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 값을 다 치루고 나서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저는 다만 종입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물러 설 줄 압니다. 눅17:10

 

그러고도 마음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에 감사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값을 후불로 치룬 것처럼 보이지만,

당사자는 그것을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과 영생의 선물에 비하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약소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현실이 제게 제대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역시 여전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질들의 석방을 위해 탄식으로 기도하지만,

동시에 저를 들볶는 ‘대답되지 않는 의문들’로부터 풀려나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the real)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참된 현실’(the really real)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참된 현실 속에서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님의 고난과 죽음은

영원하고 위대한 의미를 부여 받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과 죽음이 그들이 사랑했던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될 것을 믿기 때문이며,

그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웠으니,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 교우들 가운데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저희를 더욱 주님께 깊이 연결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이 저희 안에서

더 풍성히 열매 맺게 하소서.

 

그 열매로 인해

저희가 미움을 받고 배척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기뻐하게 하소서.

 

기뻐 뛰며

좁은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하소서.

 

이 목숨을 사용하여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에

저희를 견고히 세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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